서울 강서구 양천로 47길 36 겸재미술관 입구 오른쪽에 겸재 정선의 동상과 공적비가 있다.
이곳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동상은 광주정씨대종회에서 제작 기증한 것이다. 강서문화원은 공덕비를 기증했다.
먼저 겸재 정선 공덕비를 중심으로 그의 삶을 살피려고 한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공덕비(功德碑)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음력 1월 3일~1758.음력 3월 24일) 선생은 샛별처럼 빛나는 위대한 화가이다.
선생은 우리나라 회화의 역사상 신라의 솔거(率居.8세기),고려의 이녕(李寧,12세기),조선시대 초기의 안견(安堅.15세기)과
더불어 4대가로 꼽힌다. 특히 조선시대의 산수화에 있어서는 후기를 대표하면서 초기의 안견과 함께 양대가(兩大家)로
명칭된다.
선생은 산수화는 물론 고서인물(故事人物),영모(翎毛),화훼(花卉),초충(草蟲)도 빼어나게 잘 그렸다. 그러나 선생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산수화이다. 그 중에서도 상상해서 그리는 사의(寫意)산수화보다는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명산승경(名山勝景)을 화폭에 담아 그린 진경(眞景)산수화가 최고로 꼽힌다.
선생의 진경산수화는 종래의 실경(實景)산수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새로이 전래된 남종화법(南宗畵法)을 결합하고 구사하여
창출한 새롭고 독창적인 화풍을 보여준다. 당시에는 그 화풍이 너무도 파격적이어서 선생의 절치한 10년 연하의 이웃 친구인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1686~1761)은 자신의 문집인 <관아재고(觀我齋稿)>에 실은 <구학첩발(丘壑帖跋)>에서
조선산술화가 선생으로부터 '개벽(開闢)'이 시작되었다고 정곡(正鵠)을 찔러 갈파하였다.
'개벽'을 이룬 선생의 진경산수화풍은 선생의 타고난 탁월한 그림 재주와 부단한 절차탁마(切磋琢磨)의 노력이 결합하여
일구어 낸 불후의 업적이라 하겠다. 선생을 평생 지근에서 지켜본 조영석이 자신의 같은 문집에서 선생이 쓰고 버린 몽당붓을
묻으면 무덤을 이룰 지경이라고 한 말 '매필성총(埋筆成塚)'에서 그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선생의 진경산수화는 많은 문인화가들과 화원들에 의해 추종되었고 중국 화단에서도 높이 평가되었다. 선생의 진경산수화가
널리 퍼지면서 선생이 구사한 남종화풍도 함께 파급되어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조선후기와 그 이후의 조선 화단이
일신하게 된 데에는 이처럼 선생의 기여가 절대적이었다고 하겠다.
선생은 문재(文才)를 숨기고 오로지 그림으로만 자신을 드러낸 겸양의 인물이다.
자신의 그림과 당대 최고의 시인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의 시를 서로 맞바꾸어 감상한 '시화환상강(詩畵換相看)'은
문학과 회화의 새로운 경지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가볍게 여길 수가 없다. 당시 화단과 문단의 연결고리로서 선생의 역할도 지대하였다.
선생의 그림은 찾는 이가 워낙 많아서 늘 비단과 종이가 곁에 더미를 이루며 쌓여 있었다. 쇄도하는 그림 주문에 대응하기 위해
부득이 '휘쇄필법(揮灑筆法)'을 구사하기도 하고 제자의 손을 빌리기도 하였다. 워낙 많은 작품을 제작했던 관계로 현재 전해지고
있는 유작도 3백 수십 점을 헤아린다. 옥석이 섞여있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은 격조가 지극히 높은 가작(佳作)들이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걸작인 <금강전도(金剛全圖)>(제217호)와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제21`6호)가
대표작으로 특히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선생이 금강산과 서울 일대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묘파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가장 한국적이고 창의적인 독보적 산수화풍을 일군 조선후기 최고의 거성(巨星)이라 하겠다.
선생은 1676년(숙종 2) 음력 1월 3일 광주(光州) 정씨 14대손이자 부친 시익(時翊)의 장남으로 한성(서울)의 북부 순화방(順化坊)
창의리(彰義里) 유란동(幽蘭洞)(현재의 서울 종로구 89번지 언저리)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안동 김씨 권문(權門)의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의 문하에 입문함으로써 인동김씨 일가,그들의 정파(政派)인 노론계(老論系) 인사들,
그들의 학문인 성리학과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되었다. 부친의 급작스러러운 별세로 14세부터 가난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생계를
걱정하고 꾸려가야만 하는 상황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선생은 이러한 남다른 환경과 상황을 묵묵히 선용하고
극복하면서 타고난 그림 재주를 키워 집안을 일으키고 자신의 입신양명도 달성하였다. 선생의 성공은 타고난 재주와 겸손한
성품, 부단한 노력이 합쳐서 일구어 낸 것이라 하겠다.
선생은 자를 원백(元伯), 호를 겸재(謙齋)와 난곡(蘭谷)이라 하였고 슬하에 만교(萬僑)와 만수(萬遂) 두 아들을 두었다.
화업은 둘째 손자인 황(榥,1735~?)으로 이어졌다. 선생은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41세 때인 1716년 3월에 관상감(觀象監)의
겸교수(兼敎授)를 시작으로 1718년 조지서(造紙署) 별제(瞥提), 1720년 사헌부(司憲府)의 감찰(監察), 1721년 하양현감(河陽縣監)
,1733년 청하현감(淸河縣監) 등 종6품의 직책을 17년간 전전하다가 65세 때인 1740년에 비로소 종5품인 양천현령(陽川縣令)에
부임하였다. 그 후 78~79세 때인 1753~1754년에 종4품직인 헌릉령(獻陵令),사옹원(司饔院)과 사도시(司䆃寺)의 첨정(僉正)을
지냈다. 80세가 된 1755년에 종3품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는 선생의 뛰어난 화재(畵才)와 평생의 업적을
높게 평가한 영조의 파격적인 배려덕택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각별한 예우를 받은 후 선생은 84세의 일기로
1759년(영조 35)음력 3월 24일 필생의 화업을 마감하고 서거하였다.
양주군 해동촌면 게성리(현재의 도봉구 쌍문동)에 안장되었으나 묘소는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2018년 11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