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소식을 듣자마자 착잡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버스를 타고 전주에 다녀 왔습니다,
다녀 오는 내내 마음이 무겁습니다,
용산 철거민, 박종태 열사, 강희남 목사님까지... 얼마나 더 많은 죽음을 보아야 이싸움이 끝날련지~~`
더이상 슬퍼할 자리도 남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만 맨날 죽고 깨지고 당해야 하는가?
이사무치도록 억울한 분노를 어떻게 되갚아야 하는지~~`
10일 서울 향림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루고
선생님에 뜻과 정신을 기리기 위한 투쟁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마지막 가시는길 진심어린 마음과 행동으로 함께 해봤으면 합니다.
"제 2의 6월 민중항쟁으로 살인마 리명박을 내치자"라는 유서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 고 강희남 목사는 평생을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해왔다.
강희남 목사는 1920년 1월 13일 전북 김제 농가에서 강학용 공과 류성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 후 독학해 47년 한국 신학대에 입학한 뒤 익산과 군산에서 교사로 부임했다. 55년 군산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목회에 전념했다.
1951년 9월 군산동부교회 부흥회에 참석한 강희남 목사가 김재준목사, 조용술 목사 등과 함께.ⓒ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강 목사는 77년 5월 전북 김제군 기독교장로회 난산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설교 내용을 문제삼아 구속돼 박정희 정권하에서 첫 옥고를 치뤘다. 당시 강 목사의 구속영장에는 ‘박정희가 장기집권과 인권탄압을 위해 유신헌법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1980년 대전에서 출옥한 후 강 목사는 문익환 목사와 함께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을 창립하고 의장에 취임한다.
1987년 전북대 강연에서 베트남의 호치민을 고무·찬양했다는 이유로 투옥됐고, 옥중에서 전두환 정권의 호헌조치에 반대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강 목사는 1990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의장이 되면서 통일운동의 선봉에 선다. 1994년에는 '김일성 주석 조문 방북시도 사건'으로 세 번째로 투옥됐다. 강희남 목사는 범민련 초대의장으로 활동하면서 통일운동을 남북해외 3자연대운동의 원칙으로 정립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2000년 범민련 의장을 사임하면서 강 목사는 우리민족련방제통일추진회의와 양키추방 공대위를 결성하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이라크 파병반대 도보행진 중 연설을 하는 강희남 목사ⓒ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2005년에는 팔순이 넘는 나이에 목포에서 서울까지 이라크 파병 저지 운동 도보행진을 벌인다. 06년에는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철폐 운동으로 7개월 동안 천막농성 투쟁을 벌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청와대 앞 단식투쟁을 이어갔다.
지난해 강 목사는 광우병 쇠고기로 촉발된 ‘촛불집회’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 강 목사는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0대 어린 학생들의 촛불시위 참여는 역사가 죽지 않고 숨쉬고 있다는 증거”라면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촛불문화제에 함께하는 학생들을 단속 대상으로 보는 이명박 정부의 사고 방식은 여전히 70, 80년대 독재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고 정부를 비판했다.
강 목사는 또한 ‘새번역 환단고기’와 ‘정리된 우리 민족상고사’ 등 ‘자주적인 민족사’를 내용으로한 집필활동에도 매진해왔다. 1996년 출간된 ‘민중주의’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해 역사의 주체로서 ‘민중’의 힘을 자각하자는 내용으로 강 목사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올해 1월 강 목사는 박재승 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소설가 황석영 등 사회원로 106명과 함께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어느 특정 정파의 대통령이 아니다”라며 “정부가 선택을 달리한다면 국민도 선택을 달리할 것”이라고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강 목사는 이명박 정부 이후 남북관계와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며 지난해 10월과 올해 5월 두차례나 단식농성을 벌여 주변 지인들이 건강을 우려해 말리는 상황이었다.
지난해 10월 단식 농성 중 <민중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강 목사는 “이명박이란 자가 하나부터 열까지 완전히 양키에게 민족을 팔아먹고 있다”라며 “내가 죽으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이니까 죽음 밖에 길이 없는 거야”라고 죽음을 예고하기도 했다.
당시 인터뷰에 동행한 황선 전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남북관계가 전쟁으로 갈 위기까지 처해지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담담히 견뎌내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개개인의 활동으로 현재 일어나고 있는 난국을 타개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면서 “범국민적 항쟁을 통해 민족과 민중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절박한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제가 감옥에 있을 때 보내주신 편지글에서 이 순간 패배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사회를 떠나서는 개인이 살 수 없다며 '역사적 개인'을 자각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면서 강 목사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강 목사는 자결하기 하루 전인 지난 5일 ‘6월 항쟁계승, 민주회복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 결성식에 참가했다. 결성식 당일 강 목사 옆자리에 앉았던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는 “결성식날 얼굴도 뵙고해서 끝나고 식사 한끼라도 대접하고 싶었는데...”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오종렬 대표는 “그 분은 민중이 주체가 돼야 민족을 살릴 수 있고, 민족이 살아야 민중이 산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오 대표는 강희남 목사를 ‘결벽주의자’로 표현할 만큼 자기 자신에게 철저했던 사람으로 기억하면서 “그러면서도 강 목사는 ‘너무 기준이 예리하다던지, 사람들에게 품을 주는 것이 부족한게 아니냐’고 자기 결함을 말씀하셨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