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소멸에 대한 저항과 초월의 춤사위
- 홍희표 시집 『하이터치 그리움』
안영희
누구도 모르는 이 없고, 어디서든 집중조명의 대상이며 모든 문학상을 거머쥐는 시인들을 평소 나는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뽑아올린 신문의 큰 제목 같은 인물들이 반드시 그에 걸맞는 내용을 가진 사람들이 아님에 눈뜨면서, 나는 늘 발견자이리라 싶었다. 무릇 예술이 발견의 기쁨, 혹은 새로운 충격에서 비롯되듯이.
무심히 들어간 영화관에서 ‘끝’ 글자 커다랗게 찍혀도 쉽게 일어서지 못했던 영화처럼, 누가 짚어주는 대상 아닌 내 스스로의 발견만을 믿기로 다짐 해놓고도, 저 게으르고 무책임한 거개의 조명탄 쥔 자들처럼 나 또한 명승고적에 줄서듯, 얼마나 시적 탐험에 소홀하고 애드벌룬으로 뜬 유명시인들만 편식하고 있었나를 자성케 하는, 만남에 부딪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은 내 시안(詩眼)이 현혹스런 바다의 표면에서, 정작 심해어들이 유유히 헤엄치는 눈 시린 바다의 속세상을 놀라움으로 맞닥뜨린 순간이기도 하다.
몇 해 전 한 문학단체에 섞여 여행을 떠났다. 파리며 리스본등을 거쳐 세비아로 들어가던 날 아침, 나는 버스의 답답한 뒷자리를 차고 전망이 트인 앞쪽 빈칸을 찾아 두리번대다가, 고개도 안 돌려보는 한 사람의 곁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길 위의 모든 아침을 열심히 메모하는 내게, 이튿날 시집 한권을 건네 준 말이 없기가 흡사 검은 바위덩이 같은 홍희표 시인도 그런 경우 중의 하나라 말할 수 있겠다.
홍희표 시인은 약관 21세에 <현대문학>지로 등단했다. 시력 약 45년. 첫 시집 『어군의 지름길』을 시작으로 <문지>며 <창비> <시학>등에서 시집을 내며 그가 맹렬히 시세계를 펼친 80년대까지 나는 등단도 안했으며, 시력 20여년 동안에도 홍희표 시인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었으니까. 아무리 16권씩이나 되는 시집을 줄기차게 내온 시인이었을지라도.
내가 다섯 권의 시집을 상재했음에도 아무에게도 뵈지 않는 시단의 소외자이듯이, 누구보다 시대와 삶을 고통스레 응시하고, 치열하게 쓰는 일에 몰두했어도, 비빔밥의 재료로 알맞지 않은 개성과 성품으로 해 어느 새 문학동네로부터 젖혀진 홍희표 시인.
이른 30대의 나이에 교수가 된 고향 대전에서 그대로 변함없이 30년째 살고 있노라고, 짧게 자기소개를 하면서도 말을 약간 더듬거렸다.
박용래, 한성기, 임강빈 등의 쟁쟁한 충청도 선배시인들과 나란히 한, 고향 한밭 토박이의 정서를 고스란히 지켜내는 보기 드문 향토적 순도는, 운율과 사투리 를 적절히 살려서 쓰는 시는 물론, 더듬는 말투, 다듬지 않은 통나무 같은 목소리, 시인 자신에게서조차 어렵지 않게 읽혀진다.
두 눈을 감는다고
북두칠성 없어지지 않나니
엊그제 청춘인데 이제 신선영감
그대만 혼자 남고 죄다 하늘 길 가고
동백꽃이 뚝뚝 모가지째 떨구는 것
알뜰살뜰 외로움 때문이라고
산그림자도 부뚜막 메아리 되어
하루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오고
- 「산그림자」전문
어스름 잦아드는 산그림자는 피할 수 없는 운명같이 저무는 우리들의 인생이다. 고향에서 함께 문학 밭을 일구며 어울렸던 도타운 시인의 친구들은, 유난히도 먼저들 이승을 버렸기로, 목을 꺾어 던지는 동백꽃 송이처럼, 외로움은 붉고 처연하다. ‘부뚜막 메아리 되어’ 마을로 내려오는 산그림자는, 그 옛날의 부엌 불기운으로 늘 따스했던 무쇠솥이 걸린 아궁이 언저리를 너무 적절한 ‘부뚜막’이라는 낱말을 들여앉힘으로써 돌아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을 애닲도록 곡진하게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뭇 귀신들의 속삭임도 그 밤바람 소리의 흐느낌도
들쳐 업고 줄달음쳐 간다 동지 섣달 얼음판 위에 서서
그 밤바람 소리에 뼈와 살을 튕기며 말리고 있나니
- 「이순(耳順)의 노래」전문
이순의 시점에 선 홍희표 시인의 16번째 시집 『하이터치 그리움』의 시들의 주조가 되는 것이 소멸에 대한 명상이며 갈등이라 읽혀진다. 시인이 말했듯이 시간의 쇠락과 초월 그것에 대한 저항감이 감지된다. 뭇귀신들의 속삭임도 섞인 듯 동지섣달 음산하고 냉혹한 밤바람 소리에게 도전하듯 탄주 하거라! 이제는 남루 같은 뼈와 살, 그러나 못다 한 격정도 튕기며 탄주 하거라! 무위자연의 악기 되게끔 놓아주리니! 분노하며 갈등하며, 그렇게 한사코 놓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남양 홍洪 희禧 표杓
이름 붙은 버들수레
기러기 강물줄기 따라
흘러 흘러 간다
시간은 문득 멈춰 버리고
작년에 듣던 풀벌레 울음
이 세상 지붕 위에서
낯설기만 하다
눈물 술 대신 한숨약
한움큼 먹고도
비우지도 채우지도 못한 채
버들수레는 계속 삐걱 중
소나기 사이로 뜨는 저 무지개
- 「버들수레」전문
해마다 반복되는 계절이어도 쉬지 않고, 점점 더 빠른 속도로 타들어 가는담배개비 같은 목숨들에겐, 모든 반복되는 세상의 몸짓들이 해마다 다른 모양으로, 다른 의미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일체무상주(一體無常住)하니 매양 흐르는 저 강, 오늘의 강물이 어디 어제의 그 강물이던가.
그러나 사는 일이 나날이 소멸로 치닫는 짓이라 해도, 그 슬픈 소멸열차의 창문으로도, 어느 날은 난데없이 꽂히는 찬란한 무지개가 있어, 삶은 경이로운 것이고, 살고 싶은 것이 아닐는지.
빛바랜 어제의 발자국
죽은 뻐구기시계 되어
옥탑방에서 되살아나고
뻐국 뻑국, 뻑뻑국
이끼 낀 오늘의 새털구름
곰나루 청벽 아래
피라미떼로 흩어진다
요리 욜랑, 저리 욜랑
오, 오 늙은 매화 등걸 새순
갑년甲年꽃 피어나네
-「늙은 매화」전문
몸뚱이 여기저기 뭉친 혹 주머니에 거푸거푸 뒤틀어 주검인 듯 무망해 뵈는 고목 등걸. 그 끝가지에 가까스로 핀 봄을 글썽이는 눈으로 올려다 본 적이 있는가.
산다는 것은 마지막까지 열렬한 현재진행형인 것이라, 어김없이 증명하기까지 절로 핀 것이 아니고, 단 한 잎 내일도 남기지 않은, 저만큼 끝을 보고 있는 자의 혼신 투척 뒤의 기쁨을.
왕가뭄 끝에 장대비 내리고
목에 건 휴대폰은 삘리리- 삘리리
햄버거보다는 보리피리 장맛
(그대, 시간은 찻잔의 출렁임!)
장마가 걱정이라고요?
e메일은 24시간 365일 삘릴리- 삘릴리
포도주보다는 강원도 막걸리
(그대, 공간은 술잔의 설레임!)
특별시 턱밑에 광역시
하이터치의 도심을 달리며 삘릴리- 삘릴리
재봉틀보다는 그대 십자수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하이터치 그리움」전문
위 시는 현대문명에 끼여 쉼 없이 간섭받고 자유를 차압당한, 오늘날의 사람살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홍희표 시인의 시적 자아가 강하게 표출되는 시이기도 하다. 상식적인 제도권 안에 고스란히 담긴 모범시민일지라도, 시인으로써 그의 자아는, 숨구멍이 막힌 듯이 답답해 탈출을 갈망하는 자유주의자인 것.
그러므로 콘크리트처럼 완강한 일상을 뚫고 지표에는 없는 것을 향하여 충천하는 분노로, 꿈의 부력으로 솟구쳐 오를라 치면 때마다 어김없이, 그가 예속된 일상이라는 기득권은 목을 끌어내리며 삘리리- 삘리리… 웃기지 마라 삘릴리- 삘릴리…옷자락을 나꿔채며 하이터치 하려는 그의 몸부림을, 때마다 방자히 부서뜨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2007년 12월 31일
어떤 사나이
구름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가로등 얼어붙고
돼지 뒷다리 같은 골목길
허물어진 벽 뒤의 낙서들
벗겨진 꼬부랑 페인트칠
소소리 바람아, 눈꽃 다칠라!
안녕하니, 너 정말로?
낡은 쓰레기 더미들
도둑고양이들의 손발톱
눈 위에 꼬꾸라진 술주정뱅이
독오른 까마귀와 전갈들
어떤 사나이 하나
구름옥상에서 뛰어내린다
배우 장국영처럼 뛰어내린다
뾰로통해진 너 소소리바람아!
-「안녕하니, 너 정말로」전문
무슨 공장, 사업장 하다못해 아파트 수위까지 사람들의 일을 기계들이 다 차지해 일자리에서 털려난 이 시대의 숱하게 많은 가장들은 어디서 무엇으로 밥벌이를 하나? 막막하고 안타까워서 마음 아파한 기억이 있다.
겨울 혹한에 신문구독자를 낚느라고 입가의 날숨이 그대로 얼음 지도록 진종일 아파트의 길목에 서 있는 사내에게 신문구독신청을 한 적이 있다. 그 신문은 골통 보수적이어서 전혀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가장으로 사는 그 사람의 삶이 너무 처절해 보였기로.
“돼지뒷다리 같은 골목길, 낡은 쓰레기 더미, 도둑고양이, 술주정뱅이…”
전혀 우아할 수 없는 끝 모르게 미끄러내린 삶의 진창들과, 구름옥상에서 뛰어내릴 밖에 없는 절망의 풍경들을 들어 올려주며, 누군가의 무엇이 되어 살지 못하는 그대, 너 정말 안녕하냐? 안녕하냐? 고, 시인은 이 시대 슬픈 가장들을 연민하고 있다. 줄기차게 무겁고 부조리하고, 내몰린 삶의 현장들을 천착해왔던 시인 홍희표의 시 쓰기 이력답게.
귀신들의 뒷소리도 두런두런 더러 들린다는 이순의 억새벌판. 잔손금 같은 추억의 칡넝쿨에 동동 매달려 살고 있다네.
질풍노도의 우리 문청 동무들, 하늘나라에서도 시 쓰기 하시나요 화인 나루터 주막의 할머니, 계룡산 심우정사의 목초스님, 그 한량없는 곡차의 물줄기 보고 싶네요. 무서리 내리고 시나브로 까치밥도 떨어지네요. 마른번개로 다가섰지만 한눈팔아 사라진 가시네, 송추 밤나무 밑에서 구름 보다가 가버린 가시내
구절초 그대! 우리 사랑할 시간이 정말 많지 않다네. 추억의 칡넝쿨 둘러쓰고 홀로 춤추고 있다네. 춤추고 홀로
- 「억새벌판」전문
귀밑머리 서리 친 누군들 회한의 유적이 아니랴. 하물며 가을 물이 든 시인의 가슴 속 정한들은 얼마나 붉게 축적된 단층들로 이루어졌으랴.
피어도 하얀 억새꽃은, 이승의 꽃인가 저승의 꽃인가? 이승 같은 저승, 저승 같은 이승의 공간에서 잃어버린 이름들 하나하나 부르다가, 그들의 뒷자리 죽은 자들이 조명하는 내 짧은 남은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 뼈아프게 자각하는 것이다. 어차피 사라져야할 유한적 존재의 영원은, 짧은 마디 속에 있는 것이매. 이것저것 다 놓고 우리 영원 같이 여한 없이 살자 고, 너울너울 초월로 가는 통과의례처럼 억새춤을 추고 있는 저 시인 홍희표를 아시는지.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이제 안영희 시인님께서 평론도 하시는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