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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24 위험한 감 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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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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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위험하기에 위험한 감 따기라 하느냐 하면.
감나무 높이가 전봇대 큰 것 높이 정도이고, 실재로 올라가는 정도는 전봇대 중간 정도 올라간다. 올라가는 정도가 15~20M이다. 이 정도 이상에 달려 있는 감은 감 쪽지로 딴다. 이것은 우리집 감나무 경우이고 실재로 청도군에 이보다 더 큰 감나무가 있고 감을 수확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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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감을 따면서도 왜 이지랄 하는지 모르겠다.
누굴 위해서, 무슨 목적으로, 떨어져 죽을 것도 생각도 하면서 감을 따는지.
나로서는 아무 생각 없이 감을 땄고, 올해도 나 혼자 마지막으로 감을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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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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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누라는 큰나무 감 따지마라 따지마라 신신당부를 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감을 따러 혼자 밭에 갔다. 혼자 감 따러 가는 것은 위험하다. 매년 청도에는 감 따다가 낙상사고가 발생한다. 이것은 모든 청도 사람들이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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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따러 가지마라 가지마라 했는데 남은 감 찌꺼러기를 따러 간다면서 갔다.
감나무 아래서 감을 쳐다보니 감을 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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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도 따지 않았고, 재작년에도 감을 안 땄고, 몇 년 째 안 땄는지 모르겠다.
감나무 아래서 감을 쳐다보니 가을 하늘의 예술품이다. 몇 년째 감을 안 땄으니까 감 따보자 하는 생각이 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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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위험을 감수하고 사다리를 놓고 기어 올라갔다.
나무위에 올라서니 50여년간 나의 손 때 묻은 자취가 나타난다. 그런데 달라진 것은 감나무 위에서 균형 감각이 다르더라. 몸이 흔들거려 누구 말이 생각이 나서 밧줄을 몸에 매어 감따기 작업을 하는데 이 밧줄아 다리에 자꾸 감긴다. 그래서 다시 어께 죽지로 밧줄을 칭칭 감고 감을 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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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 햇살이 눈에 부친다. 감이 서쪽 일몰 편에 있으니 감 쪽지로 따려니 가을 석양의 햇살이 눈에 부쳐 아주 힘들게 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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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감 따면서 생각해보니
내가 미쳤나, 왜 이지랄 하노, 뭣 때문에 이지랄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마누라를 위해서, 아들딸을 위해서, 내 자신을 위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감 따는 목적이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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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흔들려 아래로 내려다 보니,
어떻게 떨어질까, 아래에 얼켜 있는 여러 가지에 이리 저리 부딪히면서 떨어지겠지. 그러면 누가 119에 신고 해줄까. 신고 해줄 사람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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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작년에 실재로 내가 감 밭에서 병원으로 실여 갔다.
나무에 떨어졌는지, 사다리 타다가 떨어졌는지 이유도 모르겠고, 입원실에 들어가니 정신이 들더라, 작년에 감 돈 홀랑 병원에 다 주었다. 대구 동산병원에 2주 입원했으니 남을 것이 있나. 나는 실비보험이고, 농민이라면 누구나 다 가입하는 경운기 보험도 들지 않았다. 오직 강제로 가입시키는 국민건강의료보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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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추석 후 한 달 보름동안 매일 감을 따다.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감을 따니 온 몸이 아프고 아침에 일어나면 일어나지를 못하고, 아야 아야 끙끙대면서 기합으로 일어난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누라도 똑같다. 마누라는 감 농사를 더 확대하지 말라고 한다. 죽겠다는 것이다.
지금의 감농사는 우리에게 한계치다. 한계를 극복한다는 것은 새로운 농법이 나와야하고, 새로운 농업경영 없이는 극복은 어렵다. 올해 죽도록 감 포장한 것이 겨우 5kg 2,000 여 박스다. 이것도 우리에겐 죽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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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는 감 포장하면서 다리가 아프다고 앉아서 질질 끌고 작업을 한다. 이것도 매일 밤 8시~ 9시까지고 작업을 하고, 아침엔 7시경에 밥을 먹고, 전날 작업을 다 하지 못한 것을 이튿날 9~10시 까지 감 포장을 끝내고 바로 감 따러 간다. 이것이 매일 반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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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누라와 유일한 외식은 작업 후 식당에 밥 먹으로 가는 것이다.
일마치고 식당에 밥먹으로 가는 것이 우리에겐 외식이다. 살다보니 우리에겐 외식 같은 외식이 없었다. 작업을 늦께 마치고 집에 가서 밥 먹으려니 마누라가 밥상 차리기도 힘들고, 애라 한 그릇 싸먹자 하는 것이 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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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장에서 차로 2~3분 거리인데 어떤 날은 7,000원짜리 전골 싸먹고, 어떤 날은 한정식 8,000원짜리 싸먹은데 이건 매일이 아니다. 싸먹는 밥도 싫증이 나더라. 또 자주 식당에 추한 꼴로 가는 것도 보기가 좋지 않고. 그러나 감 따는 기간 동안에 여러 번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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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대비로 좋은 감 2상자가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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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청도군내 키가 큰 감나무 대부분 잘랐다. 이것이 감 가격 상승작용을 했다.
청도군에서 매년 감 따다가 다치는 군민이 발생하니 감나무 수고를 낮춘다는 명분으로 청도군내 키가 큰 감나무는 대부분 잘라서 수고를 낮추었다. 어떤 감나무는 너무 망쳐 놓은 것도 있다. 군(郡)에서 나온 벌목공들이 감나무 전정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그들 손 높이에 적당하면 무조건 잘라 버렸다. 무식하게 잘라 버린 감나무는 올해 감 가격을 올려놓았다. 올해 100여년 만에 최고 더운 날씨 탓과 10여 만에 찾아온 낙엽병과 군(郡) 전체에 탄저병 확산으로 감 생산량을 30%정도 줄었다. 생산량 감축에는 감나무 수고를 낮추었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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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수년 동안 청도감 생산 과잉으로 판로가 막히고 가격이 똥 값이였다. 10kg 감 한 상자에 공판장에서 2,000원 3,000원 경락 되었는데 운송비 1,000원, 박스비 1,250원, 남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청도 군민들은 감을 따지 않고 버렸다. 어느 지역 골짜기엔 골짜기 전체가 붉은 감으로 덮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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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뿐만 아니라 농산물 가격 폭락 방지로는 생산량을 줄여야 되는데 이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채소류 종류는 생산량 감축이 쉽지만 과수류는 그렇지 않다. 수십 년 동안 키운 나무를 쉽게 자를 수가 없다. 더군다나 감나무 수명이 심은 농민보다 더 오래가니 어려운 점이 많다. 그리고 키가 큰 감나무를 자르기는 고령화된 청도 노인들로는 자를 힘도 없다. 매년 감 따다 떨어진 환자는 수없이 나오니 청도군수가 크게 용기를 내어 감나무 수고를 낮추기로 하고 무상으로 농가 감나무를 잘라 주었다. 이때 확 더 잘라버려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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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우리 밭에 키가 큰 감나무는 자르지 않을 것이다.
청도군 전체가 감나무 수고를 나추는데 왜 우리 밭 큰 감나무는 수고를 나추지 않고 자기 맘대로 크도록 방치하는가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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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감나무는 선친께서 밭 가장자리에 여러 감나무를 심었는데 유일하게 살았는 감나무이고, 나이가 약 80살 먹었고. 큰 누나 나이 정도로 먹었다. 정확한 심은 해는 모르겠고 들은 애기가 큰누나 출생 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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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우리 동네에서는 가장 큰 나무이고,
인근에서도 이런 나무가 별로 없다. 최근에 수고를 낮춘다는 명분으로 잘라 버렸으니까, 우리 골짜기 전체에서도 드문 나무가 되었다. 인근 동네 청도읍 안인리에 수령을 알 수 없는 아마 200년은 될 큰 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가 자연사인지 독살인지 죽었다고 했다. 감나무 주인 말에 의하면 누군가 주위에서 죽였다고 주장을 하더라. 이 감나무 주인은 초등학교 동기다. 며칠 전에 감나무 안부를 물으니 이렇게 말하더라. 참으로 아까운 나무이다. 이 나무 전성기엔 감 한동(100접)을 땄다고 한다. 청도군에서는 보호수로 지정하고 가꾸어야 할 나무였는데 너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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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에 대해서 잠시 언급하면
청도감을 반시라 하는데 청도에는 토종감으로 반시와 납딱 반시가 있는데, 여기에 이름도 여러 가지다 지역에 따라 명명하는 발음이 조금씩 다르다. 지금 보편화 되었는 것이 청도반시라 말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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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반시라는 감의 품종은 학술적으로 확실하게 명명되었는지 모르지만, 감 품종 편에 보면 청도반시라는 기술되어 있는 대학교재를 본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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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감으로 청도반시 외에 청도에서 흔이 말하는 납딱 반수(반시)가 있는데 이 품종에 대해서는 아직 대학교제에 미등록 된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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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반시와 미등록 청도 납딱반시는 많은 차이가 있다.
1) 감 맛이 크게 차이가 난다.
납닥반시가 일반 반시보다 당도가 높고, 수분량이 많다. 사람들이 감을 먹어 보면 반시보다 훨씬 더 맛이 좋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도 납닥반시는 청도에서도 천대를 밭고 상인들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언젠가 그 진가를 알아 줄 날이 올 것으로 필자는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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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도반시와 납딱 감나무의 차이점
얼른 보면 보통사람들은 외형상 구별을 잘못한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감나무 잎이 구별되고, 감 모양이 확실하게 차이가 나고, 감 껍질이 차이가 나고, 과일 색깔이 차이가 나고, 감 과육 수분이 반시보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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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생육 상태를 보면 반시보다 월등히 잘 큰다.
수세가 너무 강하여 낙과가 심하다. 필자는 수년 동안 온갖 실험을 해봐도 낙과 원인을 밝혀지 못하겠더라. 2017년에는 한상박피를 나무가 죽을 정도로 해 보았다. 아무 소용이 없더라. 똑같은 밭에 모든 조건이 같은데 반시는 낙과가 거의 없는데 유독 납닥반시만 낙과가 심했다. 이것은 청도군 지역에서 일반적인 현상이더라. .
과거에 감나무 감이 낙과가 심했는데 당시 농대교수라는 작자는 이것을 생리적인 현상이라고 단순 표기하더라. 필자도 당시에 그렇게 알았다 농대교수가 그렇게 말하니 액면 그대로 인식할 수밖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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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한 교수라면 낙과현상을 분석했을 것인데 어디서 주어 들었는지 대학교재에 이렇게 기술하니 전국 농대 학생들 뿐만 아니라, 이마에 농자를 붙이고 먹고사는 작자들 모두가 낙과의 원인규명은 고사하고 단순하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게 대한민국 농학계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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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감전문농약사라는 간판을 달고 30여년 동안 농약사를 해보니 감생리적인 낙과 현상은 생리적이라기 보다는 병충해에 영향이 매우 커더라. 감나무에 병균의 침입으로 수세가 약해지니까 낙과가 초복 중복에 극심하게 발생하는데 말복(8월10일경)이 지나면 청도 반시는 낙과 거의 없다. 청도감 낙과는 생리적인 현상이라 하기 보다는 병균의 침입으로 수세가 약하여 낙과 된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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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납닥반시의 경우는 위의 논리도 적용되지만 여기에 첨가로 수세가 워낙 강하니 영양분이 열매로 가지 않고 잎줄기로 가서 낙과가 되지 않나 생각은 해본다. 이것도 왠지 나를 명쾌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좀 찝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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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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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후 한달 보름동안 매일 감을 따고, 포장해서 농협공판장에 보내고, 위험을 무릅쓰고 감을 따는 것은 무슨 목적에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꺼리가 앞에 있으니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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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을 따면서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어떠한 맘으로 감을 딸가 생각해본다. 내 생각으로 감을 따서 팔아 그 돈을 아들도 주고 딸도 주고, 살아가면서 생활비에 보태고 통장에 저축도 하고 그 사용도가 다양할 것이다. 대부분 농민들은 일하는 목적이 있고 사용처도 가지고 있더라. 그러나 나라는 인간은 참으로 이상 한 것이 이러한 목적의식이 전혀 없다. 내가 높은 감나무에 올라가 위험을 감수하며 감을 따서 농협공판장에 팔아 가사에 보태자는 이런 사고 자체가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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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우리 딸이 감을 따주러 왔다. 시키지도 않는데 알아서 말없이 일을 잘하더라. 이것해라 저것해라 시키지 않는데도 일을 잘해서 “아이고, 감을 따서 향이 혼수감을 사야 안 되겠나 ”하니, 딸아이 하는 말이 당연시 하더라. 감 따는 것도 올해는 신경을 많이 쓰더라. 나는 일을 잘하니까 그냥 해본 소리인데 지는 당연시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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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큰 감나무를 자르지 않는 것도 일반 청도 농민들과 사고가 다르다.
감을 따는 노력과 위험성과, 감 수확량과 여러 조건과 경제성을 따진다면 감나무 수고를 낮추는 것이 경제적이다. 그런데도 이 한그루 큰 감나무 만큼은 보존하자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러니 마누라 뿐만 아니라 주위 친구나 이웃 농민들이 잘라라고 강하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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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큰 나무에 올라가 떨어져 사고가 발생하면 마누라는 아들을 시켜 수고를 낮추어버릴 것이다. 내가 감 따다 떨어져 죽었다고 해봐라 동네가 시끄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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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러 번 마누라 한데 어떤 일이 있어도 이 감나무를 자르지 말고 이대로 방치하라, 감을 못 따겠으면 그대로 두라. 감 못 딴다고 나무를 자르지마라고 수차래 말을 했다. 그렇지만 내가 죽고 나면 누군가 손에 잘릴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다. 이 큰 나무는 우리 집 가운과도 연결이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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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전문농약사를 30여년 동안 하면서 감나무에 대해서 나름대로 연구를 한다. 물론 누가 인정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감나무 생육현상, 감 병충해 관계, 시비관계, 감 가격변동, 감 가공, 감 조기수확 등등, 감에 대한 모든 것을 연구하고 그기에 대한 대책도 내어 놓는다. 그렇지만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다. 또 인정 받으로 동서남북 뛰어 다니지 않는다. 누군가 말하더라 나를 “진흙 속에 묻힌 진주”라고. 관심자는 네이버 카페 농약대학을 방문해보시라. 여기에 국내 생산 농작물 병해충 방제가 있다. 자료가 엄청나게 많다. 이건 3년 전 자료다. 앞으로 보충할 내용이 있고, 정리할 자료가 남아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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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감은 인연이 있나.
마누라 소개를 감장사가 했다. 대구에 사는 마누라한테 감장사가 입이 마르도록 찬양 했는 모양이다. 이 집 감이 좋고, 가장 크다고, 총각도 좋고, 40여 년 전 당시에는 감나무에 농약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70년대 중반부터, 이 시기에 내가 고교를 졸업한 했는데, 이 시기부터 감나무에 농약을 살포했으니 감이 좋을 수밖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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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의 현재 삶은 어떠한가.
기껏 외식한다는 것이 집 주변 식당에서 전골이나 한식 싸먹는 것이 전부이고, 작금 시골에는 친구 모두가 한명도 빠짐없이 해외여행을 갔다 왔다. 1년에 여러 번 갔다 오는 친구도 있는데, 우린 단 한 번도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여행을 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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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시내에는 길거리엔 사람은 없고 가로등만 커져있고, 고요한 밤이 엄습해오는 조용한 시간에, 감 작업 선별기는 딸가닥 딸가닥 거리면서 돌아가고, 행인은 찾아 볼 수가 없고, 더 조용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를 한심스럽게 한다. 이 시간대에 시골 동네에서는 감 작업을 하는 농가가 있겠지만 청도시내 사람들은 누가 이지랄 하겠나. 실재로 아무도 없고. 모두가 꿈속으로 들어가는데 나는 뭐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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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살아가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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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 21.
촌사람 kimsunbee 쓰다.
소주 한잔 할 사람 연락처 0i0-3516-2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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