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이라는 천자국은 중국처럼 우리나라에도 존재했고 아무리 대한제국 시대가 짧았어도 세계 만방 국가들로부터 인정받았으며 모든 근대 국가적인 기틀을 잡은 대한제국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는 증거 중에 하나가 대한제국 애국가입니다. 대한민국의 전신인 대한제국은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대한뎨국 애국가(大韓帝國愛國歌)
문임(文任; 홍문관 예문관의 제학)작사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1852.4.5-1916.8.6) 작곡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사* 셩슈무강(聖壽無疆)하*사* 해*옥듀(海屋籌)를 산(山)갓치 싸*으시고 위권(威權)이 환영(環瀛)에 뜰치사* 오쳔만셰에 복녹(福祿)이 일신케 하*소셔 상뎨는 우리 황뎨를 도으소셔
* ; 아래아 싸; ㅂ+ㅅ+. 뜰; ㅅ+들
독일어 가사 Gott beschutze unsern Kaiser, Dass sich seine Jahre mehren Zahllos wie der Sand am Strande, Der sich hoch zur Dune haufet, Dass sein Ruhm sich leuchtend breite Weithin uber alle Welten, Und das Gluck des Herrscherhauses Tausendmal zehentausend Jahre Neu mit jedem Tag erbluhe Gott beschutze unsern Kaiser.
※ 각주 상뎨 : 하늘을 다스리는 신, 하느님. God 셩슈무강: 聖壽: 황제의 나이, 수명.황제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말. Long life of His Majesty. 해옥듀 : 장수를 송축할 때 쓰는 말. 신선이 산다는 해옥은 선학(仙鶴)이 매년 한 개씩 물고 온 대오리로 지었다는 전설이 있음. 위권 : 위엄과 권세, 위광과 권력. Dignity and authority. 환영 : 천하 또는 세계 복록 : 타고난 복과 녹 즉 삶에서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 일신 : 날로 새로워 짐.
하느님 우리 황제를 보호하소서. 사구(沙丘)에 높이 쌓인 해안의 모래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만세소서. 멀리 온 세계에 명예가 빛나며 뻗치소서. 그리고 황실의 행복이 천세 만세토록 매일 새로이 꽃피소서. 하느님 우리 황제를 보호하소서.
● 광무 5년(1901년) 1월 27일 광무황제폐하의 황명으로 제정을 명함. 2월 19일 고빙(雇聘)한 독일 해군 군악대장 프란츠 에케르트 도착함. 9월 7일 경운궁 중화전에서 고종태황제폐하 만수성절진연 (萬壽聖節進宴)에 초연함
● 광무 6년(1902년) 7월 1일에 공식 제정하고 관보에 8월 15일 게재함.
● 광무 8년(1904년) 5월 13일 황성신문 기사에 「학부(學部)에서 각 학교 애국가를 정리하기 위하여 각 학교에 신칙(申飭)하되 군악대에서 조음한 국가를 효방(效倣)하여 학도를 교수(敎授)하라 함
● 1949년 1월 경복궁 동쪽 궁장옆 길 따라 흐르던 중학천변에 살던 에케르트의 사위 마르뗄씨집에서 남궁요열선생님이 최초로 발견.
1949년 2월 20일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힌 에케르트 묘에서 군목 정달빈대위, 군악대장 남궁요열소위, 해군군악대, 마르뗄부부와 외손자들 세창양행 대리인 쉬르바움이 참석 대한제국 애국가를 광복후 최초로 연주.
1968년 8월 7일 동아일보에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재원(金載元)박사에 의해서 고종30년(1893년) 2월 시카고 만국박람회 출품사무대원으로 참석했던 정경원(鄭敬源)의 후손 정우택(鄭禹澤)씨의 의뢰로 확인되어 신문에 공개되어 널리 알려지게 됨. 정부기록보존소 대전에 영상자료가 보존되어 있음.
1970년 음악 평론가 이상만(李相萬)씨가 1986년 1월 11일 The Korea Times사가 일본에서 입수 알파벳으로 독일어식 음역본을 보도함. 1987년 당시 단국대학교 김원모(金源模)교수가 뉴욕 시립도서관에서 광무5년(1901년) 주한 미국 전권공사가 되었다가 광무9년(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귀국한 앨런(Horace Newton Allen 안련 安連 1859. 4. 23 ∼ 1932. 12. 2)문서 중에서 대한제국애국가 소책자를 마이크로 필름으로 찍어 소장하고 있음.
대한뎨국 애국가(大韓帝國愛國歌) 소고
1.서 론
이 지구상에 있는 나라는 모두다 애국가를 갖고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도 이미 한 세기 전에 벌써 애국가를 갖고 있었으나 어떻게된 연유에서인지 너나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와 같은 사실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살아왔었다. 물론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기울어 모두들 생존을 위해서 떠나야 했고 또한 고단한 삶으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잊고 살지 안았나 생각이 든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후대의 선각자들이 그 것을 찾아 연구를 하여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여 후생(後生)으로서 알게되니 반갑고 참으로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1.1. 연구 배경과 목적
여러 문헌에서 대한제국 애국가를 다루고 있으나 단편적이거나 음악사의 한 장으로서 다루고 있어 전반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으며 문헌자료도 쉽게 접할 수가 없는 현실이다. 또한 그 동안 미약하게 나마 한 대한제국 애국가연주 활동에 대해서는 언급도 없는 실정이다. 근대 국민국가로 국가와 국민의 통합을 꾀하고자 한 대한제국 애국가의 존재를 널리 알려 대한제국이 그렇게 간단한 나라가 아니었음을 알리고 항일 무장투쟁에 빛나고 최초로 애국가를 연주한 시위연대 군악대를 복원하여 일반인들에게 획기적으로 인식을 확산시켜 황실복원의 위업을 달성하는 걸음을 앞당기는데 그 목적이 있다.
1.2. 연구 방법과 범위
기존의 연구 문헌들을 비교 발굴 조사하여 어떻게 작곡이 이루어지고 면면히 이어져 왔으며 어떤 활동들이 있었는지 정확하고 자세하게 논하고자 한다.
2. 본 론
제 1장
1.1 개 요
애국가는 말 그대로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를 뜻한다. 애국가라는 이름으로 노랫말과 곡조가 붙여져 나타난 것은 조선 말 개화기 이후부터이다. 1896년 '독립신문' 창간을 계기로 여러 가지의 애국가 가사가 신문에 게재되기 시작했는데 이 노래들을 어떤 곡조로 불렀는가는 명확하지 않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국가인 대한제국 애국가는 대한제국에서 고빙(雇聘)을 하여 광무5년(1901년) 2월 19일에 들어온 독일 출신의 해군 군악대장인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 4. 5 ∼ 1916. 8. 6)에 의해서 작곡되어 9월 7일 중화전에서 고종태황제폐하 만수성절 진연 (萬壽聖節進宴)에 초연을 하였고 광무6년(1902년) 황궁의 신년하례에서 연주가 되었으며 3월17일에는 황태자전하의 보령 29세 천추경절로 오후 9시 외부 리셉션에 각부 대신들과 주한 외교사절들이 참석한 가운데 연주되었고 7월 1일 공식 제정되고 정부에서 발간한 악보를 세계각국에 배포를 하였으며 8월 15일에 관보에 발표한다.
1.2. 군악대설치
건양 원년(1896년) 러시아의 초청으로 니콜라이 2세 황제 대관식에 대조선은 4월 1일 궁내부 특진관이며 특명전권공사 민영환, 학부협판(協辨) 윤치호, 2등참서관 김득련, 3등참서관 김도일을 파견하여 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 대불(大佛)호텔에 투숙 1박한 후 4월2일 인천을 출발 요코하마 태평양을 건너 캐나다 밴쿠버항에 입항 대륙을 철도로 횡단하여 뉴욕에서 대서양을 건너 영국 불란서 독일을 거처 러시아에 도착하여 5월 26일 러시아 니콜라이 2세(Nikolai II, Aleksandrovich 1868.5.18-1918.7.17)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고 한러 밀약의 사행임무를 수행하고 10월 21일 귀국 복명하였다.
복명문답 고종 : 대관식에 제 날짜에 참가하였으며 잘 갔다 왔는가? 영환 : 폐하가 보살펴 준 덕분에 무사히 갔다 왔습니다. 고종 : 군사제도상 배치한 제반 절차가 과연 어떠하던가? 영환 : 군사제도는 일체 서양나라들과 같은데 전국이 군무에 진력하여 강한 나라로 되었습니다. 또한 각종 남녀학교가 있어 인재를 교육하여 길러내고 있었습니다. 풍속이 다른 서양법을 취할 수는 없겠지만 군무와 학교 그리고 정치 전범에 관해서는 모방하여 시행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민영환 특명전권공사의 은밀한 교섭으로 그의 사행기록인 해천추범(海天秋帆)에도 교관의 고빙에 대한 한마디 언급도 없이 복명문답에서 “군무와 학교 그리고 정치의 전범에 관해서는 모방하여 시행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至於軍務政治典範 不得不 而行之矣).”라고 언급하면서 한러밀약에 따라 직설적인 표현을 회피하고 암시적으로 언급하면서 러시아 군사교관을 고빙해서 군사교육을 실시하고 정치제도의 도입을 강력히 시사해주고 있다. 러시아 군사교관 고빙과 관련된 우리나라의 기록은 속음청사(續陰晴史)에 “부아(赴俄)대사 민영환이 육로로 귀국 러시아인 2명을 대동하고 어제 입성했다(帶俄二名 昨日入城)”라고 짤막한 기사만 있고 앨런의 기록에 의하여 “러시아의 프챠타(Putiata)대령이 사관3명(아파나셰프중위 식스텔소위와 군의(軍醫) 체르뷘스끼) 하사관 10명을 동반하고 한국군대를 조련시키기 위하여 도착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곧바로 그 해 말부터 건양 2년(1897년) 2월 8일까지 친위대에서 뽑은 821명을 교육시켜 건양2년(1897년) 3월 29일 시위대(侍衛隊)로 복치(復置)하였다. 다시 민영환은 건양 2년(1897년) 1월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의 주구(駐歐) 6개국 전권공사로 각 나라에 가서 편리한대로 주재하면서 일을 보게 임명을 하고 이어 2월에는 부영특명대사에 임명되어 3월 24일 출발하여 오류동(梧柳洞)에서 점심을 들고 인천에 도착 대불(大佛)호텔(Daibutsu Hotel)에서 숙박한 후 3월 28일 러시아 기선 울라지미르(Vladimir)호로 출항 중국 개항장 지부(芝 Chefoo)로 향발했다. 상해 나가사키 홍콩 싱가포르 인도양 항행 수에즈운하 오데사(Odessa) 러시아 우크라이나 공화국 기차로 페테르부르크 영국 런던에 도착 6월 21일 버킹엄궁을 예방 빅토리아여왕(Victoria, Qeen 1837 ∼1901. 1) 즉위 60년 축하식(Queen's Diamond Jubilee)에 부영대사(赴英大使)로 참석하였다. 그후 광무 3년(1899년) 6월 8일 독일 하인리히(Prinz Heinrich) 친왕의 공식방한에 고종황제가 베푼 축하연에 독일 군악대를 대동하여 황제폐하 앞에서 연주를 시켜 양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 중의 하나로 이러한 과정 등에서 많은 의전행사의 경험으로 대한제국도 그와 같은 의전용 군악대의 필요성을 깨닫고 궁내부 고문관 미국인 리젠더(C. W. Legendre 1895. 6. 7∼1899)와 탁지부 고문관 겸 총세무사(總稅務士)로 있던 영국인 맥래비 브라운(Mcleavy J Brown 백탁안 柏卓安 1892. 11 ∼ 1897. 10. 1차, 1898. 3 ∼ 1905. 11 2차) 때에 견적 및 구체적인 계획을 작성하여 광무 4년(1900년)에 12월 군악대 창설 칙령을 공포하게 되었다.
군악대 1개대 직원별표 관등 직명 인원 1등군악장 대장 1인 2등군악장(정교상당) 부장 1인 부참교 1등군악수 3인 상등병 2등군악수 6인 병졸 악수 27인 병졸 악공 12인 참교 서기 1인 계 51인
광무4년 12월 19일 어압 어쇄 봉 칙 의정부 참정 조 병 식
1.3 음악교사의 고빙
이 시기쯤 우리나라의 경우 신호나팔로서 서양 음악 제도를 들여온 최초의 사람은 이은돌(李殷乭 ? ∼ 1885)이었다. 조선의 근대식 군대에 나팔수를 편성시킨 최초의 선각자인 이은돌은 1881년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조직되면서 일본 육군중위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가 교관을 맡게 되자 우리 조선인으로서 나팔수 한 명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 해 11월 일본 교도단 기본 군악대에 유학 길을 올라 프랑스 지도자 다그롱 (Gusave Charles Dagron)에게 코넷(Cornet)과 신호나팔 악대교육 군사교육을 피나는 훈련과 노력으로 7개월 과정을 5개월만에 마쳐 주위를 놀라게 해 고종19년(1882년) 6월 17일자 동경일일신문에 이은돌에 관한 기사가 나기도 한 그는 10월 22일 귀국하자마자 군악대를 조직하는 등 신식군대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이은돌은 고종21년(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가담으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고종22년(1885년) 6월 1일 귀국 후 돌연한 사망으로 지도자가 전무한 상태로 시위연대 시위기병대 군악대 친위연대의 곡호대(曲號隊) 그리고 각 지방 진위대(鎭衛隊)의 곡호대가 있었다.
광무 3년(1899년) 6월 8일 독일 하인리히(Prinz Heinrich) 친왕의 방한에 대동한 독일군악대가 고종황제가 베푼 축하연에서의 연주와 덕어학교의 창설로 독일군제에 관심을 끌어 고종황제와 하인리히간에 독일 음악교사의 초청문제가 구체화되어 외부대신 박제순은 독일측에 추천을 의뢰하여 주한 독일총영사 바이페르트 (H·Weipert 와이벽 瓦以壁)가 중재를 하여 에케르트를 고빙케 되었다. 에케르트는 일찍이 일본 해군군악대·육군군악대·궁내성 아악과 교사 등을 역임하고 일본국가'기미가요'제정에 심의의원으로 참여했고 편곡을 했다. 그는 1852년 4월 5일 독일 프로이센국 슐레지엔(Schlesien)지방 판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음악의 재능이 뛰어나 브레슬라우(Breslau)음악학교와 드레스덴(Dresden) 음악학교에서 오보에(oboe)와 음악이론을 전공 졸업을 하고 프러시아 육군 군악대에 들어가 병역을 마치고 빌헬름스하펜(Wilhelmshaven)에서 해군 군악대장(소위)으로 임명되어 근무하였으며 이때 주일 독일 명예영사 베어의 주선으로 독일 해군성의 허가를 얻어 1879년 3월 그의 나이 27세 때 일본으로 초빙되어 1870년 9월 영국인 John William Fawton에 의해 창설된 일본해군 군악대 교사로 부임하여 20년간 임무를 마치고 독일로 돌아간 것은 1899년 4월 19일 그의 나이 47세 때였다. 그가 1899년 3월 동경에서 그의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여 1900년 베를린 육군군악대장에 취임하였는데 이때 독일 황제 빌헬름 2세(Wilhelm Ⅱ)는 에케르트에게 명예 프로이센 왕실악장이란 칭호를 주었다. 독일에서 채 1년도 쉬지 않고 있는데 대한제국으로부터 군악대 창설과 그 지도를 위한 초청을 받고 3년 기한의 고빙(雇聘) 계약을 수락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광무 4년(1900년) 12월 8일자 황성신문은 아래와 같이 보도하고 있었다. “향일(向日) 조정에서 덕국(德國 독일) 악사(樂師) 에케르트를 고빙하였는데 기한은 3년이오, 월봉은 3백원(元)이니 동씨(同氏)가 악기를 휴대하고 덕국으로부터 일전(日前) 발정(發程)하여 도한(到韓)한 후 재경(在京) 각대의 군악을 교수(敎授)할 터이다. 사(査)컨대 씨(氏)가 일본에 체류한지 20년이나 기(其)해육군의 군악을 교수하였는데 해국(該國) 삼등훈장을 수사(受賜)하고 방금 해고(解雇) 귀국중이라.”고 하였고 광무5년 (1901년) 2월 19일 서울에 도착하여 2월 28일자에는 “원수부에서 고빙한 군악대 교사가 작일(昨日) 한성에 들어왔는데 덕국 공사 와이벽(瓦爾壁)씨가 대동하고 폐현(陛見)하기를 청하였더라.”또 3월 14일자에 “군악대 교사를 고빙 하였음은 전보에 기(記)하였거니와 육군 부장 이윤용(李允用)씨가 해(該)대장이 되어 현금(現今) 대규(隊規)를 조직하더라.”고 하였다. 고빙 계약은 광무6년(1902년) 4월5일에 대한국 군부 외부 위정립합동서(爲訂立合同書)라는 이름의 계약서에 군부 관방장(官房長) 한진창(韓鎭昌)과 외부 교섭국장 이응익 에케르트 사이에 전체 9개 조항에 독일어와 한문으로 작성하여 체결되었다.
제 2장
2.1 에케르트의 군악대 조직
에케르트는 시위연대 군악대 교사라는 직위를 갖고 모두 27명의 대원으로 4개월만에 완전한 군악대를 만들어 9월 7일(음력 7월 25일) 아침 고종황제폐하 만수성절진연(萬壽聖節進宴)에 초연을 하였다. 에케르트 장녀 아말리 마르뗄(Amalie Martel)도 Franz Eckert , mein Vater der Composist der Japanischen National Hymn Kimigayo에서 “나의 아버지는 1901년 초두 본국을 출발하여 2월 19일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파고다 공원에서 음악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생도들 가운데서 선발하여 음악단을 조직하고 이태왕 탄신식장에서 처음으로 연주에 성공하였는데 그 때 아버지의 작곡인 한국 국가, 기타를 연주하였다.... (중략)... 이 악단이 그 후 6개월만에 겨우 성립되었다.” 이에 관해서 1939년 12월 15일 조선일보에서 에케르트의 사위며 법어(法語)학교 교사인 에밀 마르뗄(Emile Martel 마태을 馬太乙 1874. 12. 4-1949. 9. 19)도 확인을 하였다.
9월 9일자 황성신문에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금번 만수성절 진연에 각국 공영사 및 신사가 진참(進參)하였는데 신(新)히 교성(敎成)한 악대가 주악(奏樂)하였고....” 유일한 영문잡지였던 The Korea Review 1901년 9월 호 News Calendar 에서 “7일 아침 황궁에서 황제폐하에게 경하를 들인 외국인들이 진연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것은 프란츠 에케르트 박사의 지도 아래 있는 새 군악대의 첫 출연이었다. 27명의 대원들로 구성된 악대는 단지 4개월의 연습으로 서양 악기들을 한국인으로서 깜짝 놀랄 만한 음악이 연주될 수 있었던 것은 연주 모습이 아주 조화롭고 잘 다루었기 때문이었다. (중략) 단정한 제복 빛이 나는 악기들 정확한 박자 부드러운 리듬과 하모니 이런 모든 것이 어울려 청중들에게 예기치 않게 아주 놀라게 하였다. 거듭되는 박수는 음악이 준 기쁨의 증거였다. 이 정도면 서울은 극동에서 다른 악대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악대를 곧 갖게 될 것이다....”
※ 1차는 광무 5년(1901년) 3월 나팔수 중에서 50명을 선발하여 4월부터 교육하였고 2차는 광무 8년(1904년) 봄에 일반인 중에서 50명을 모집하여 2개 소대를 만들었음.
한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96 악고(樂考)7. 악기2에는 다음과 같이 우리말로 된 악기 이름들이 보인다. 대적(大笛 플루트) 소적(小笛 피콜로) 호적(胡笛 오보에) 최고음생(最高音笙 Eb 클라리넷) 고음생(高音笙 Bb 클라리넷) 심음생(深音笙 알토 클라리넷) 최고음나팔(最高音喇叭 피콜로 트럼펫) 고음나팔(高音喇叭 Bb 트럼펫) 보속음나팔(保續音喇叭 호른) 최강음나팔(最强音喇叭 프루겔 혼) 강음나팔(强音喇叭 테너 색소른) 조심음나팔(助深音喇叭 테너 트롬본) 반심음나팔(半深音喇叭 알토 트롬본) 심음나팔(深音喇叭 베이스 트롬본) 최심음나팔(最深音喇叭 튜바) 삼각경(三角磬 트라이 앵글) 철금(鐵琴 글로캔시필) 소고(小鼓 작은 북) 대고(大鼓 큰 북) 영고(鈴鼓 탬버린) 전조편( 調片 케스터네츠) 정음기(正音器 음차) 제금(提琴 심벌즈) 악보대(樂譜臺 보면대)
이 당시 사용하던 악보는 전하여지지 않으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나타난 당시 연주곡목은 다음과 같다. ① 각국 애국가 대한제국, 일본, 영, 미, 불, 독, 노, 오, 비, 이, 영국국민가, 덕국국민가, 미국국민가. ② 행진곡 대한국민행진곡, 일본국평상행진곡, 덕국평상행진곡, 입혼시행진곡, 즉위행진곡, 도전행진곡, 조례(弔禮)행진곡, 창가행진곡, 미국도무행진곡, 기병행진곡 오국(奧國)평상행진곡. ③ 가 곡 일본평상가5, 청국평상가곡, 덕국찬미가곡, 성회가곡2, 혼례가곡, 이별가곡, 평상가곡5, 완서곡(綬徐曲)3, 공사곡, 장서곡(長序曲), 잡가, 불국평상가곡, 이태리희루( )가곡, 사반아평상가곡2. ④ 무 곡 영국회전무도곡2, 2절무도곡, 대무곡, 이절여흥무곡,, 덕국회전무곡, 전약(轉躍)무곡 소서전약(小徐轉躍)무곡,반전무곡,완무곡,창흥무곡,이태리국완무곡,불국비전무곡. ⑤ 기 타 대한제국례호(禮號), 일본국장관례호, 군악참외국지제. 군악은 외국제도를 참용하여 모두 방언으로 번역하고 풀이했으므로 그 가곡을 지금 다 싣지 않는다 했다.
군악대는 지금의 정부종합청사 자리인 궁내부 시위대 건물의 일부를 사용하며 소정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탑동공원(塔洞公園) 서편쪽 부지 일부에 세워진 군악대 건물로 광무 6년(1902년) 6월 12일 이사를 하였다. 그 후 광무 11년(1907년) 7월 31일 조칙으로 군대가 해산되면서 군악대도 해산되고 들어 있던 한식 와가(瓦家) 및 숙소 등은 폐옥처럼 방치되었다가 1921년 9월 9일 총독부로부터 공원부지 531평(1,755㎡)과 건물을 무료로 빌려 이범승에 의해 초기 우리나라 근대공공도서관인 경성도서관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재정곤란으로 경성부에 양도되어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으로 되고 해방후 시립종로도서관으로 되었다가 1967년 구건물은 철거되고 파고다 아케이드가 들어섰던 자리였다. 에케르트는 여기서 전 대원들에게 오전 3시간은 주로 음악이론에 관한 학과 교육을 하고 오후 3시간은 실기 등 쉴 새 없는 철저한 교육을 실시했다 한다. 군악대는 당초 목적처럼 군의 사기 앙양을 위하는데 그치지 않고 황실과 정부의 각종행사에도 연주를 하였다. 광무7년(1903년) 1월 3일 고종황제로부터 '대한제국 국가의 작곡과 음악교육을 위한 공로'로 3등태극훈장을 받고 이후 2종의 훈장을 받았다.
이어서 초창기 군악대의 대원명단은 정사인 김능창 백우용 이건호 이동희 정상옥 김봉환 강흥준 임삼봉 염학순 정백남 이순근 서병희 유순근 편춘근 박지엽이 알려져 있고 이중 백우용(白禹鏞 1880∼1950)은 광무4년(1900년) 7월 7일 황성신문에 한성 관립덕어(德語)학교 하기시험에서 장석준(張錫駿)과 함께 1반 우등으로 금시계를 받는 우등생으로 재학중에 에케르트의 통역관으로 있었으나 대원들 통솔에 어려움이 있어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광무6년(1902년) 육군보병 참위(參尉 소위)에 임명되었고 8개월 후에는 부위(副尉 중위)로 승진하였고 광무8년(1904년) 5월에 3등 군악장이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군악대장으로서 지휘자가 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2등 군악장, 광무11(1907년) 3월에는 1등 군악장이 되었고 1910년 8월 29일 그 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장예원(掌禮院) 악사장 훈6등에서 훈5등으로 서훈되었으며 그는 에케르트의 수제자로서 클라리넷의 연주자, 작곡, 편곡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1913년 9월부터 탑골공원에서 연주를 매주 토·일요일에 가졌으며 1914년 7월초부터는 매주 목요일을 택하여 오후 8시에서 10시까지 연주회를 가졌으며 1916년 직후까지는 백우용이 모든 행사를 주관하였다. 1918년에 극장 단성사(團成社) 신축기념으로 관현악단인「단성사 악단」이 조직되었는데 지휘를 맡기도 했고 1926년 경성악대가 해산될 때까지 지휘를 맡았다. 1928년에는「이왕직 아악부」(지금의 국립국악원의 전신)촉탁으로 국악 채보를 전담하기도 했다. 그의 작곡인「20세기 청년 여자 창가」는 1922년 경성 광문 서시(書市) 발행으로 42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상준, 김인식의 창가와 대동소이한 것으로서 반주는 없고 멜로디뿐이다. 정사인(鄭士仁, 1881∼1958)은 서울 태생으로 광무4년(1900년) 곡호대(曲湖隊)를 거쳐 광무5년(1901년) 대한제국 군악대에 들어가 플루트 연주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1912년 이왕직 양악대를 사임하고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중학부의 음악교사로 취임했으며, 1915년 개성 송도고보 교사로 취임하여 25년 간 후진을 양성했는데 이때의 송도고보 브라스밴드는 연희전문학교 주최 「전국 학생 음악경연대회」에서 항상 1등을 차지했다.
2.2 애국가 재정을 명하다
대한제국애국가의 제정 배경은 광무 6년(1902년) 1월 27일자 관보에 광무황제폐하의 의정부(議政府) 의정 윤용선(尹容善)에게 국가 제정을 명한 기사에서 “인심을 감발(感發)케 하고 사기를 쉬려함으로서 충성심을 돋구고 애국심을 진작함에 있어 성악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마땅히 국가의 절주(節奏 노래)를 제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문임(文任 홍문관과 예문관의 제학)으로 하여금 찬진(撰進)케 하노라” 이상과 같은 제정 명령이 있은 후 광무 6년(1902년) 7월 1일 민영환(閔泳煥)이 대한제국애국가발문(大韓帝國愛國歌跋文)을 붙였다.
“대저 성악(聲樂)이라는 것은 인심을 감동시키는 것으로서 언어와 문자로는 이에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군악이 있은 지는 오래 되었습니다만 널리 생각하옵건대 우리 황제폐하께서는 대업(大業)을 중회(中恢)하시었고 백방으로 유신(維新)을 이룩하셨으며 특히 군무(軍務)에 힘을 쓰시어 군악에 이르러서도 각국 성악을 참고하여 신보(新譜)를 엮도록 명하시었고 성율(聲律)에 밝은 덕국교사 예계덕(譽啓德)(터攄)으로 하여금 궁징(宮徵)을 심정(審定)토록하여 국지가(國之歌)를 울리게 하니 팔음(八音)이 잘 맞고 팔풍(八風)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모든 우리 군인이 이 노래를 부르면 그 뜻을 알게 될 것이고 그 소리가 장려(壯勵)한즉 분연히 용감하게 나서는 적개심을 생각하게 될 것이며 그 소리가 옹용(雍容)한즉 노력 정진하며 대중들과 화합함을 생각하여 모두가 용약(勇躍) 고무되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충애지심(忠愛之心)이 유연히 생각나게 될 것입니다. 성악지도에는 이와 같음이 있사옵니다. 무릇 신(臣) 영환은 일찍이 부주(附注 악보)를 익히지 못하였고 조수(操綏 악기 연주)에 대하여 배우지 못한 터에 참군(參軍)으로 이 일에 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악보가 이미 이루어져 수자(繡梓 책을 꿰맴)되매 그 일 적어 책머리에 상자(上梓 머리에 붙임) 바입니다. 원수부 회계국총장 육군부장 정1품 훈1등 민영환”
2.3 대한제국애국가 원본 발견
대한제국 애국가의 악보 발견은 1968년 8월 7일 동아일보 기사에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재원(金載元)박사에 의해서 광무7년(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 대표로 참석했던 정경원(鄭敬源)의 후손 정우택씨의 의뢰로 발견되었고 1970년 음악 평론가 이상만(李相萬)씨가 1987년에는 단국대 김원모(金源模)교수가 뉴욕 시립도서관에서 광무5년(1901년) 주한 미국 전권공사가 되었다가 광무9년(1905년) 을사늑약 체결후 귀국한 앨런( Horace Newton Allen 안련 安連 1859. 4. 23 ∼ 1932. 12. 2)문서 중에서 대한제국애국가 소책자를 확인하였는데 대한제국애국가는 표지까지 전부 10면으로 되어 있고 크기는 가로 23㎝ 세로 30.5㎝ 크기에 빨간색 비단 끈으로 묶어 매우 호화롭게 만들어 표지에는「大韓帝國愛國歌」라 쓰고 그 밑에 태극무늬 주위에 네 송이 채색 무궁화가 그려져 있고 그리고 독일어로 Kaiserlich Koreanische Nationalhymne 한국적인 모티브에 의한 대한제국애국가 왕실 프로이센 음악지휘자 에케르트 1902년이라고 되어 있고 2면에는 애국가 제정의 경위를 밝힌 민영환의 서문이 있고 3면에는 궁체로 쓰여진 가사와 그 아래에 독일어로 번역한 가사가 있고 4면부터는 애국가 악보가 실려 있다.
표지
2면 大韓帝國愛國歌跋文
元帥部 會計局總長 陸軍副將 正一品 勳一等 閔泳煥
3면 상뎨는 우리 황뎨를 도으사 셩슈무강하사 해 옥듀를 산갓치 싸으시 고 위권이 환영에 뜰치 사 오쳔만셰에 복녹이 일신케 하소셔 상뎨는 우리 황뎨를 도으소셔
Gott beschutze unsern Kaiser, Dass sich seine Jahre mehren Zahlos wie der Sand am Strande, Der sich zur Dune haufet, Dass sein Ruhm sich leuchtend breite Weithin uber alle Welten, Und das Gluck des Herrscherhauses Tausendmal zehentausend Jahre Neu mit jedem Tag erbluhe Gott beschutze unsern Kaiser
대한제국 애국가 총보는 플루트. 클라리넷. 오보에 등 18개 악기 편성에 의한 18단으로서 3/4박자 34소절로 되어 있다. 제1소절에서 16소절까지는 Andante MM♩= 112, 제17소절에서 제25소절까지는 Allegretto MM┣= 64, 제26소절부터는 a tempo, 제30 소절부터 rit, 제34 소절부터는 dim으로 되어 있다.
제 3장
3.1 군악대의 명운
융희 1년(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은 무장해제 되고 9월1일자 포달(布達) 제160호로 군부소관 군악대를 혁파하고 그 대원들로 제실악대(帝室樂隊)를 조직하는 규정이 반포되었다. 군악대 폐지는 9월 4일 칙령 제20호로 군부소관 군악대 이하 관제 및 규정폐지건 반포로 군악대 창설 8년만에 해산되고 제실 양악대로 유지되다가 1910년부터 이왕직(李王職) 양악대(洋樂隊)란 이름으로 대원이32명으로 줄이고 1912년에는 27명으로 줄어들었다. 1915년에는 이왕직의 직제가 고쳐져 6과로 사무가 분장(分掌)되었는데 양악대는 장시사(掌侍司)에 속하였다. 1915년대 이왕직 양악대의 연주곡목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전장 활발, 월후사자(일본악곡), 세미우라미스 서곡, 춘곡조, 극곡(劇曲)조, 바다 밖의 흰 돛대(일본악곡), 서곡 뽀루데지방어리, 스페인 무도곡, 육군암호, 일본국가<기미가요> 등이며 이 곡목들을 수시로 바꾸어 가며 때로는 카알 친왕, 올페의 소녀, 칼맨낭자 원무곡, 탄호이저, 배우 창가행진곡과 같은 경쾌한 행진곡도 상당히 세련되게 연주를 하곤 했었다. 그러나 황실도 일제가 편성해주는 예산이 부족하여 더 이상 유지를 할 수 없어 1915년 12월 12일 해산을 하고 민간자영단체로 20인조 경성악대(京城樂隊)라는 이름으로 재조직되었다. 그러나 엄청난 경비를 단원들의 희생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감당할 수 없어 각 학교 운동회 극장 같은 곳을 전전하며 몇 푼을 얻어 시민을 위한 악대로서 연주활동을 계속했는데 주로 외국의 행진곡 종류를 연주하였다.
본격적인 연주활동도 가졌는데 제1회 경성악대 주최 음악회가 1919년 11월 18일(화) 오후 7시 종로기독교청년회관(YMCA강당)에서 악대의 유지를 위한 모금음악회를 열기도 했는데 이렇게 민간의 유지회가 조직되어 모금운동에 나서 황실에서 3천원, 식산은행, 총독부 등의 후원으로 7, 8천여원을 받는 한편 베이스 가수였던 스미스(Smith)목사, 최동준, 김영환, 총독부인, 황실 사람들이 월 3천원 정도의 후원하여 다시 활기를 얻었으나 처음에는 체면상으로 얼마간 후원을 하다가 끊겨 각 대원들은 다시 운동회나 광고악대로 불려 다녔고 전 대원이 나가면 겨우 1백원 정도 15 ∼6 명이 나가면 50원 정도 받았다고 한다. 경성악대는 1920년 6월부터 매주 목요일 오후에 정기적으로 시민위안 음악회를 탑동공원에서 열었고 중순에는 납량음악회도 열고 9월 9일에는 대음악회를 열었다. 1923년 8월에는 남산 탑동 장충단 세 공원을 돌아가며 음악연주를 갖기도 했는데 해마다 봄·여름·가을의 첫째 둘째 셋째주 목요일 오후 8시∼10시까지 연주회를 개최하는데 매월 첫째 목요일은 남산공원에서 둘째 목요일은 탑동공원 셋째 목요일은 장충단공원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동아일보 1923. 7. 28)
연주장소 및 일정은 다음과 같다. ○ 남산공원 : 8월 2, 12, 23일, 9월 2 ,13, 23일. ○ 탑동공원 : 8월 5, 16, 26일, 9월 6, 16, 27일. ○ 장충단공원 : 8월 9, 19, 30일, 9월 9, 20, 30일. (단 비가 오면 하루씩 연기) 10월 13일에는 YMCA에서 추계음악회를 가졌으며 김영환 윤심덕 윤기성 등이 출연하였다. 1925년 10월 12일에는 YMCA주최 정동합창단 연악회(硏樂會) 홍난파 김원복 안기영 왓츠 훗스 김종완 스투데니 김영환 안대선 출연하는 추계음악회에 연주를 했고 1926년 8월 13일에는 경성부 주최 부민(府民)위안 납량음악회를 가졌고 9월22일 경성일보 내청각(來靑閣)에서 연주회도 가졌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고난사를 그대로 겪으면서 끝내 이 악대를 지키던 소수 대원들은 굶주림과 멸시 속에 1926년까지 명맥을 이어오다가 그 후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하여 각기 학교에 들어가 음악교육을 담당하며 경성악대의 72점의 악기를 기증 받은 휘문고보와 배재고보 경신학교 중동학교 등에 밴드부가 조직되고 일부는 이왕직에 보관하고 있다가 해방이 되자 서울시 경찰악대에 기증하였다.
3.2 에케르트의 여정
광무 6년(1902년) 4월초 아들 셋은 독일 기숙사에 남겨두고 세 딸을 데리고 입국한 부인과 처음에 서학현(西學峴) 지금의 태평로 부근 거예원(擧隸院) 건너편에 살다가 후에 회현동에 살았는데 1916년 1월에는 군악대와 제실악대 편성에 공이 큰 이왕직 양악대 음악교사 에케르트는 만기로 해임되어 황실에서 위로금으로 50원 귀국 여비금으로 900원 기념품 비로 500원을 하사하여 그의 다년간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그러나 8월 6일 위암으로 65세의 일기로 타계하니 순종황제는 100원을 하사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합정동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혔다. 한편 부인은 에케르트사후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강화조약이 체결되자 덕어(德語)교사 볼얀(Bolljahn)과 독일로 귀국을 하고 광무9년(1905년) 2월 7일 명동성당에서 법어(法語)교사 에밀 마르텔(Emile Martel)과 결혼한 장녀 아말리 마르뗄(Amalie Martel)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남편이 1943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어 천진에서 해방을 맞을 당시까지 회현동 집에서 피아노 개인지도로 근근히 살았고 1947년 2월에 마르뗄이 돌아와 프랑스 영사관에서 근무하던 중 1949년 9월 19일 서대문 집(전 이기붕씨 가옥)에서 남편은 73세의 일기로 숨을 거둬 역시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혔다. 외손녀 임마쿨라타(Immaculata 본명 Marie Louis Martel)수녀는 경북 경산시 성베네딕또 수녀원 경산분원에 있었으며 장남 Charles Martel은 1982년 1월 파리 교외 Maisons-Alfort에 거주하고 있었다.
3.3 각종 문헌의 애국가 가사
여러 문헌에 조금씩 다른 애국가 가사들을 볼 수가 있는데 일제의 탄압으로 악보가 없어 정확하게 전승이 될 수 없었고 시대적인 상황으로 일부 가사의 변천도 있었다. 1904년 5월 13일자 황성신문 기사에 「학부에서 각 학교 애국가를 정리하기 위하여 각 학교에 신칙(申飭)하되 군악대에서 조음한 국가를 효방(效倣)하여 학도를 교수(敎授)하라 하난대 그 국가는 여좌(如左)하니」
상뎨(上帝)난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소셔 셩슈무강(聖壽無疆)하*샤 해옥듀(海屋籌)를 산(山)갓치 싸*으소셔 위권(威權)이 환영( 瀛)에 떨치샤 오쳔만셰(敖千萬歲)에 복록(福祿)이 무궁(無窮)케 하*소셔 상뎨(上帝)난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소셔
* ; 아래아, 떨; ㅅ+덜 「1904. 5. 13 황성신문」
상뎨여 우리 나라를 도으쇼셔 반만년의 역사 배달민족 영원히 번영하야 해달이 무궁하도록 셩디동방의 원류가 곤곤히 상뎨여 우리 나라를 도으쇼셔 을사늑약(1905년) 정미칠조약(1907년)이후 것 추정.
상제난 우리 大韓을 도으소셔 獨立富强하야 太極旗를 빗나게 하옵시고 權이 환瀛에 떨치여 어천만세( 千万 )에 自由가 永久게 하소셔 상제난 우리 大韓을 도으소셔 1914년 발행 광성중학교 최신창가집
1925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의 학예란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 중략 - 現代에 無窮花 그러나 근화 즉 무궁화를 지금과 가치 무궁화라고 쓰게 되기는 극히 짧은 근대의 일이라 합니다. 아마 지금부터 이십오륙뇬 전 조선에도 개화풍이 불게 되어 양인의 출입이 빈번하게 되자 그 의 선진이라고도 하든 윤치호(尹致昊)씨 등의 발의로 '우리 대한에도 국가(國歌)가 잇서야 된다고' 한편으로 양악대도 세우고 한편으로 국가도 창작할 태여난, 上帝(상제)가 우리 皇上(황상)도으사 海屋籌(해옥주)를 山(산)가치 싸흐소서 權(권)이 ○瀛(환영)에 ○치사 億千萬歲(억천만세)에 永遠無窮(영원무궁)하소서 라는 노래의 부속듸여 생겻다고 하는, '東海(동해)물과 白頭山(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이라는 애국가의 후렴인, '無窮花三千里(무궁화 삼천리) 華麗江山(화려강산)' 이라는 구절이 끼일 때에 비로소 근화 근화, 즉 무궁화를 '無窮花(무궁화)'라고 쓰기 시작한 듯 하담니다. - 중략 -
상뎨여 우리 나라를 도으쇼셔 반만년의 역사 배달민족 영영히 번영하야 해달이 무궁하도록 셩디동방(聖地東方)의 문명의 원류(源流)가 곤곤(滾滾)해 상뎨여 우리 나라를 도으쇼셔 이유선 『한국양악백년사』음악춘추사 1985.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으소서 성수무강하사 애옥주를 산같이 받으시고 위권이 한양에 덜치샤 어천만세에 복록이 일신케 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서 우리 양악100년 이강숙 김춘미 민경환│현암사│2001
상제난 우리 황제를 도으소셔 성수무강하샤 해옥주를 산갓치 싸으소셔 위권이 환영 떨치샤 어천만세에 복록이 무궁케 하쇼셔 상제난 우리 황제를 도으소서 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일조각 2001
※ 각주 상뎨(上帝): 하늘을 다스리는 신, 하느님 God 셩슈무강(聖壽無疆): 聖壽: 황제의 나이, 수명. 황제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말. Long life of His Majesty. 해옥듀(海屋籌): 시위기병대 군악대 애국가 중에서 해우동방(海偶東方)이라는 말로 봐서 나라의 산(算)가지 = 나라의 지혜의 성스러운 표현? 위권(威權): 위엄과 권세, 위광과 권력. Dignity and authority. 환영(環瀛): 사해(四海)와 같은 빙 둘러싼 큰 바다 = 온 세상 복록(福祿): 타고난 복과 녹(삶에서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
대한제국 애국가는 1902년 에케르트작곡 민영환이 책임자로 있는 문임(文任)에서 작사한 것으로 영국 국가 God save the King 처럼 첫 행과 마지막 행의 반복이 같이 나타나고 특히 길이가 7행인 것과 상뎨가 God의 번역으로 보아 영국국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영국국가는 1745년에 최초로 연주된 애국가로부터 시작되었다. 가사는 국가에서 제정된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공식 행사에서는 보통 1절만 부른다.
God save the King
“God save our gracious Queen! Long live our noble Queen! God save the Queen! Send her victorious, Happy and glorious, Long to reign over us, God save the Queen!”
≪참고문헌≫
『우리 양악100년』이강숙 김춘미 민경환 현암사 2001 p35 ~ 53, p94 ~ 102 『음악저널』? 2001. 11. . 대한제국애국가 악보 8월 7일 국제신보에서 김재원박사 발견보도. 「대한제국 애국가와 에케르트(F. Eeckert)」김연갑 2000. 4. 15 한국고전문화진흥회 제3회 월례학술발표회 ·KBS1의 '수요기획'「부르지 못한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원본」 2000. 3. 7. 밤12시 (주)코리아 아트센터 대표 박성미(36)제작. 335- 0238∼9 docukorea@hotmail.com 마포구 동교동 LG팰리스 1202호 『한말 개화기의 음악교육』최영자 음악춘추사, 「서울육백년사」 http://seoul600.visitseoul.net 서울시 『근대음악사1』노동은 『새로운 한국음악사』전인평 현대음악출판사 2000 + p 319 ~ 326 ·KBS "일요스페셜"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이나? 1999. 2 28. ·경향신문「한국음악100년」최초 양악연주 시기. 김종욱 단국대 공연예술연구소 연구원. ·SBS "출발 모닝와이드"의 "VJ김민선의 현장보고, 불황전략 세계에서 배운다"코너. 8.15특집극 에케르트의 자료 수집중. 비디오 저널리스트 김민선(35)프로덕션 1998. 5. 6. 『객석』「개화기 음악의 사회사:1884∼1945」제2회 예술평론상 양악부문 당선작. 『대한제국사 연구』이대 한국문화연구원편 1999. 2. 20. 「대한제국시대의 한독관계」 홍순호 『애국가 작사자 연구』김연갑 집문당 1998. 『최신창가집』국가보훈처 영인출판 1996 『개화기의 한국음악』남궁요열 1987. 『崔永禧교수회갑기념논총』1987 「에케르트(F. Eeckert) 군악대와 대한제국 애국가」김원모 『한국음악사』예술원, 1985. 5 p. 529 『한국양악백년사』이유선 음악춘추사, 1985. 『藜明의 東亞音樂』愛國歌考條 장사훈(張師勛) 寶晉齋, 1974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국사편찬위원회 1955 『朝鮮常識問答續編』崔南善 1947 『獨逸東亞細亞會誌』12월호 1926 Fanz Eckert mein Vater der Composist der Japanischen National Hymn Kimigayo 『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 『신편창가집』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실 1914년 만주 독립군학교 교과서 『大韓帝國愛國歌』 總譜' 독일어 판 1902 미국 뉴욕시립도서관소장 앨런文書中 『皇城新聞』 『大韓每日新聞』 『宮內府庶務雜文書』 隆熙4年以後 『官 報』 『增補文獻備考』兵考
철각생이란 가명 아래 간접적으로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일본인을 배척하여 자주 독립할 것을 촉구하는 글이다.
● 8음(八音)의 재료에 따른 분류
'증보문헌비고'에서는 8음의 주요 재료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 8음이란 금(金), 석(石), 사(絲), 죽(竹), 포(匏), 토(土), 혁(革), 목(木)의 8가지 재료를 일컫는 말이다.
금(金) 쇠붙이로 만든 악기이다. 종류로는 편종(編鐘), 특종(特鐘), 방향(方響), 징(鉦:정), 꽹과리, 나발(喇叭)등이 있다. 석(石) 돌을 깎아 만든 악기이다. 편경(編磬), 특경(特磬) 등이 있다. 사(絲) 공명통(共鳴筒)에 명주실로 꼬아 만든 줄을 얹어 만든 악기이다. 거문고, 가야금, 금(琴), 슬(瑟), 해금(奚琴), 대쟁(大箏), 아쟁(牙箏), 월금(月琴), 당비파(唐琵琶), 향비파(鄕琵琶) 등이 있다. 죽(竹) 대나무로 만든 악기이다. 당피리, 세피리, 대금(大芩), 중금(中芩), 당적(唐笛), 지, 적, 약, 퉁소(洞簫), 단소(短簫), 소(簫) 등이 있다. 포(匏) 원래 바가지를 공명통으로 쓰던 악기이다. 생(笙)류가 있다. 토(土) 흙으로 구워 만든 악기로 훈(塤)과 부(缶)가 있다. 혁(革) 대개 둥그런 나무통에 가죽을 씌워 만든 악기이다. 장고(杖鼓), 갈고( 鼓), 좌고(座鼓), 절고(節鼓), 교방고(敎坊鼓), 진고(晋鼓), 용고(龍鼓) 등이 있다. 목(木) 나무로 만든 악기이다. 박(拍), 축, 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