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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 : 2006.4.15일
팀 명 : 큰뫼사랑 종주대
참가대원 : 최성우(대장), 유승철(대원),김승만(대원),신희선(대원)
종주구간 : 제27구간(이화령-하늘재)
종주거리 : 총 16 km
2006.4.15(토)
06: 44분<괴산 휴게소 도착,아침식사>
5시 정각에 분당을 출발, 충주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기로 생각했지만 잠깐 졸은 관계로 지나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괴산 휴게소에 들렀다. 충주 휴게소의 우거지탕과 사발에 밥을 가득 담아주는 아주머니의 넉넉한 마음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는데 오늘은 할 수 없다. 오늘과 내일 동안 이화령에서 부리기재 또는 차갓재 까지 가면 다음에는 단양쪽으로 가는 것이 더 빠른 길 일지도 모르므로 이 중부내륙 고속도로도 오늘 또는 다음번이 마지막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사람 마음이 복잡하면서도 어떤 때는 참으로 단순한 것 같다. 휴게소 아주머니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이렇게 손님 마음을 고정시킬 수 있다는 것이… 이 다음에 내가 무엇인가 자영업을 할 경우에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산 교훈이 되고 있다.
07: 13분<이화령 도착>
휴게소에서 식사 후 양치질 및 기본 신변정리를 마치고 막 출발 하려는데 어떤 남자분이 와서 음료수를 건넨다. 알고 보니 큰재에서 불란치재까지 종주하던 날 의상저수지 쪽에서 길을 잃은 사람을 도와 준 적이 있는데 그분이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와 감사를 표현한다. 그분들은 인천산악회 소속으로 월 2회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팀으로서 오늘 은치재에서 이화령까지 산행예정이다. 같은 목적으로 오가며 만나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이런 정들이 정말 아름답다고 느껴지고 산행 또는 여행을 하면서 얻는 부수입이라 여겨진다. 이광경을 보시던 대장님이 “원래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덕이 있고 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혜가 있다”고 공자님의 말씀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智者樂水]” 을 이른 아침 마음의 양식으로 전해 주신다..
오늘은 아침부터 공자님의 말씀에 대하여 공부를 해 본다.
인자의 지혜는 산을 숭상하는 것처럼 중후하고 쉽게 변하지 않는 데 비해,
지자의 지혜는 강이나 시내처럼 쉽게 변하고 이동한다는 것이다.
이로서 하천이나 호수가 많은 지역에서는 지자들을 배출하는 지리 환경이 되고,
고산이나 평원, 황무지 등이 많은 지역은 인자들을 배출하는 지리 환경이 된다
왜 인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는 물을 좋아할까?
인자는 항상 그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는 산의 모습에서 인의 모습을 읽고
지자는 흐르는 물 처럼 항상 움직임에서 지의 모습을 읽는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 사람은 움직이지만 변화없는 산과 멈춰 있지만 변화를 보여주는 강의 모습에서 삶을 어진 면과 지혜로운 면을 조화롭게 배워야 한다.
대장님의 말씀을 듣고 “나는 지금 덕을 쌓아가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다 보니 차는 어느 덧 연풍IC를 빠져 나와 이화령고개를 달리고 있다. 오른쪽으로 81세 할머니가 홀로 사시는 분지리와 은치재, 희양산,곰틀봉들도 선명하게 보인다. 저속 기어로 자동차의 숨소리가 거세 지더니 이화령 정상 휴게소 넓은 주치장에 도착한다.
08: 10분<조령샘 도착>
차에서 내리니 날씨가 보통이 아니다.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고 온도 또한 영하일것으로 예상된다. 일기예보에는 문경과 충주지방 날씨가 5도 ~17도이고 맑다가 오후 늦게 흐린다도 했다. 바람이 불어서 그런지 5도 보다는 훨씬 추워서 바람막이를 입고 모자를 써야만 했다. 출발 사진속에 연풍면 마을이 한폭의 그림처럼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도로를 가로질러 건넌 후 산불감시초소를 우회하여 본격적으로 21구간 하늘재까지의 오늘 산행을 시작한다. 완만한 산길을 15분정도 가면 너덜지대가 나오고 잠시 후 다시 원만한 등산로가 이어진다. 산능선으로 올라가지 않고 9부 능선으로 이어지는 등산길이 그리 어려게 느껴지지 않았다. 50분쯤 가면 왼쪽은 조렴샘,오른쪽은 문경새재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조령샘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곧 조령샘이 보이고 스텐인레스 물그릇이 준비되어 있다.
08: 39분<조령산 1026m 도착>
조령샘에서 샘물을 마시고 가지고 온 수통의 물을 전부 교체하였다. 휴게소 물보다는 이곳 샘물이 더 좋을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잠시 휴식 후 다시 능선쪽으로 발길을 재촉하는데 샘 옆에서 자라던 억새숲이 우리를 발길을 잡는다. 각자 고유의 표정으로 멋있게 작업사진을 촬영하는데 김대원은 2번 찍었고 유대원은 옆에 쓰러는 죽은 나무를 세워 들고서 찍었다. 개구장이 성격인 유대원은 항상 산행 도중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우리의 피로를 풀어준다. 조령샘을 떠나 20분쯤 올라가면 조령산 능선에 이르고 곧 공터에 도착하게 된다. 이 공터의 주변은 타이어로 보완되어 있고 멀리 우리가 지나온 구간의 대간능선이 한 눈에 들어와 마음이 찡하게 한다. 황학산,백화산,곰틀봉,희양산,구왕봉,악휘봉,장성봉….
다른 대원들도 감상했으면 하는 마음에 일장 연설을 해보지만 억지로 믿어주는 표정이다.
죄우로 시원하게 트인 능선을 따라 10분 정도 더 올라가면 조령산 정상에 도착하게 된다.
조령산 정상에는 사방의 전망이 확트여 조국의 산하를 마음껏 음미할 수 있고, 서원대학교 산악부에서 한쪽에 세워놓은 “고 지현옥 산악인을 추모하며” 라는 흰색 푯말에 대한 많은 궁금증을 알아본다(인터넷 자료인용)
1999년 4월 29일 안나푸르나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 여성산악인 지현옥씨가 우리 곁을 떠난 지 5주년이 됐다. 지현옥이라는 이름 석자를 떠올리면 지금도 콧날이 시큰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국인 가운데 에베레스트를 처음으로 등정한 산악인은 누구일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고상돈씨를 떠올린다. 그러나 한국 여성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자를 묻는 질문에는 말문이 막히기 마련이다.
영원한 히말라야의 산처녀 지현옥. 그녀는 신들의 거처인 히말라야의 꼭지점을 국내 처음, 그리고 세계에서 열여섯 번째로 등정했던 이 시대의 ‘원더우먼’이었다. 지현옥은 에베레스트 등정을 비롯해 남자들이 주축을 이룬 원정대 대장, 세계 최초로 가셔브럼Ⅱ봉(8035m) 무산소 단독 등반 등 역사가 일천한 한국 여성산악계에 수많은 기록을 남겼던 인물이다.
이제 고인이 된 지 벌써 다섯 성상(星霜)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산악인들 가슴에 깊이 각인됐던 그녀의 강렬했던 모습은 지워지질 않는다. 길지 않은 40평생 중 절반인 20년간을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산을 잡고 몸부림치게 만들었는가. 산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구도자의 모습으로 그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던 산악인 지현옥의 발자취를 이 자리를 빌어 잠시 되새겨 본다.
1961년 충남 논산군 연산면에서 태어난 지현옥은 히말라야를 올랐다고는 믿지 못할 정도의 자그마한 체격과 가냘픈 몸매의 평범한 여성이었다. 청주사범대학(서원대 전신)에 입학하기 전만 하더라도 산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산악부가 독특한 서클”이라는 고등학교 선배의 말에 이끌려 산악부에 가입했다. 암벽등반을 하면서 산에 대한 매력을 느끼게 됐고 대학 3학년 시절 남자 동기생 두 명이 군입대와 고시공부로 산을 멀리 하게 되자 자연스레 산악부장을 맡게 됐다. 이런 그녀에게 해외원정의 기회는 졸업 후 5년이 지난 뒤 찾아왔다.
1988년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6194m)를 등정했다. 여섯 명의 여성 클라이머로 구성된 매킨리 원정대에서 지현옥은 심한 고소증세를 느끼면서도 이를 극복하고 대원 중 가장 먼저 정상을 밟았다. 1993년 교보생명 사보 3월호에 실렸던 지현옥의 수기에는 당시의 고통스러웠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60㎏의 짐을 나르면서 들개처럼 헐떡거렸고 목에서는 피가 넘어왔다. 계속되는 구토는 막창의 그 무엇인가까지도 끌어 올리듯 지독하게 이어졌다. 희박한 산소로 인한 고소증세는 두개골이 빠개지는 듯한 고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이것이 등반이란 말인가? 이것이 인간이 할 짓인가?’하는 갈등 때문에 여기서 포기하고 그토록 우습게 여기던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투처럼 치러진 첫 원정에서 나는 내 자신에 보란 듯이 승리했다.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보았지만 그것은 산 정상에 올랐다기 보다는 내 자신의 가슴속에 존재하는 산에 올랐고 하얀 산은 그 전투의 장을 마련해 주었을 뿐이다. 이후 89년과 90년에는 안나푸르나(8091m)와 캉첸중가(8586m)를 등반했다. 그리고 91년 서원대 산악부를 이끌고 중국곤륜산맥의 무즈타그아타(7546m)로 원정을 떠나 7000m 대에서 비박을 하고 후배대원 1명과 함께 등정하는 쾌거를 이뤘다. 여기서 지현옥은 고산 등반가로서의 자질과 대장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게 되면서 이러한 경험은 2년 뒤 ‘93한국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로 이어지게 된다. 에베레스트 원정대원에 선발돼 현지 정찰 겸 적응훈련을 위해 92년 히말라야의 로부제(6183m)와 임자체(6119m)를 올랐다. 그리고 이듬해 32살의 나이에 13명의 대원을 이끌고 에베레스트 원정에 나서 5월 10일 오전 10시45분(한국 시간 오후 2시) 최오순(당시 26세),김순주(당시25세)와 함께 정상을 밟았다. 그렇게 황금 같은 젊은 시절을 산에서 보내고 꿈에도 그리던 에베레스트를 등정했건만 이러한 영광은 그녀에게 한순간의 꿈처럼 다가왔다 사라졌다.자부심을 안고 귀국한 지현옥의 앞에는 영광과 찬사가 아니라 갖가지 험담과 시기·질투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모든 것이 잘못 알려진 것으로 판명됐지만 당시 지현옥에게는 치욕이자 좌절이었고 그녀는 “오랜 번민 끝에 등정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며 “가을에는 캉첸중가에 도전하겠다”고 밝혔었다.
프랑스 산악인 가스통 레뷔파는 “산은 하나의 다른 세계다. 그것은 지구의 일부라기보다는 동떨어져 독립된 신비의 왕국이다. 이 왕국에 들어서기 위한 유일한 무기는 의지와 애정뿐이다”라고 말했다. 삶의 의지와 히말라야에 대한 애정으로 철저히 무장한 그녀는 여성들만의 K2원정대를 꾸리는 것을 인생의 마지막 목표로 잡았던 것이다.
미국의 여성 산악인인 난다데비 언솔드는 “산은 우리를 태어나게 하고 다시 우리를 거두어들인다. 어차피 우리의 삶이란 신이 허락한 짧은 숨결이다”라고 말했다. 지현옥도 안나푸르나 원정에서 “1982년 한국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등반에 나섰고 하고픈 등반활동을 끊임없이 해왔으며 대자연 속에서 격렬하게 몸부림치다 대자연의 품에 안겼던 J모 선배가 몹시도 그리웠다”고 말했다.
등반기술을 가르칠 때는 사정없이 매서워 시어머니라고 불리지만 평소에는 후배들에게 자상한 선배로 인기만점의 지현옥. 매사에 치밀하고 완벽함을 추구하지만 안경 너머로 보이는 짙은 눈썹과 서글서글한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그리운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인간이 이상이라고 여기는-이루려고 해도 이루지 못하는 그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그녀의 열정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의 시로 고인의 마지막 길을 대신한다.
저기 모든 경계가 끝나고
길들이 사라지는 곳
침묵이 시작되는 그 곳으로
나는 천천히 다가간다.
그리고 밤을 밝힌다.
별들로, 이야기로,
멀리서 나를 기다리는
물결의 숨소리로,
새벽이 시작되는 그 곳
고 지현옥 약력
◎ 1961년 충남 논산 출생 ◎ 충북 서원대학교 졸업 ◎ 체육훈장 기린장(1993) ◎ ‘올해의 산악인 상’ 수상(1999) ◎ 매킨리 등정 (1988) ◎ 안나푸르나 등반 (1989) ◎ 캉첸중가 등반 (1990) ◎ 무즈타그아타 등정 (1991) ◎ 로부제, 임자체 등정 (이상 1992) ◎ 에베레스트 등정 (1993) ◎ 가셔브룸1봉 등정 (1997) ◎ 가셔브룸2봉 등정 (1998) ◎ 안나푸르나 등정 (1999) 후 하산길에 실종.
가슴이 찡하고 고개가 숙여진다…
09: 32분<889봉 도착>
조령산을 떠나자 마자 급경사 내리막길이 시작되고 15분쯤 내려가면 상암사터로 가는 갈림길이 나오고 이곳에 신구 이정표들이 공존하고 하고 있다. 신선암까지는 60분, 상암사터 15분,주흘관(제1관문)까지는 4.5Km 80분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등산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암벽들의 오르막 내리막으로 이루어져 있어 유격훈련 받을 때 정신없던 상황과 비슷한 느낌이다. 순간순간 등산로 구별이 안되는 곳은 멀리 달려있는 리본과 밧줄 존재 여부를 보고 옳은 길이라고 생각 할 수 밖에 없다. 멀리서 볼 때는 바위 능선처럼 보이지만 발을 들여 놓으니 모두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리는 절벽의 연속이다. 여러 개의 봉우리을 넘나들다 보면 889봉에 이르게 되는데 올라온 기쁨보다는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선암에 기가 죽는다. 889봉 정상에 올라서니 우측에 문경읍 상초리 마을과 아마도 왕건 촬영장소인 것 같은 고궁들이 보이고 좌측은 연풍면 신풍리 마을이 선명하게 보인다
09: 51분<신선암 937m 도착>
앞 봉우리 신선암 정상에 뭔가 움직이는 것이 있어 카메라로 확대시켜 보고 빨간색 등산복을 입은 사람임을 알았을 때 “설마 저 봉우리를 올라갈까? 우회하겠지” 하는 생각이 한방에 날라갔다. 1시 방향에는 923봉의 흰색 암벽과 바위조각 떨어져 나간 흔적들이 보인다. 산행을 하면서 여러 번 느낀것이지만 보이는 것과 생각한 것 그리고 실제로 격어보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금방 도착할것처럼 보이는 곳도 몇시간이 걸리고, 길이 좋을것으로 보였던 곳도 가보면 절벽임을 볼 때 길이 없을 것처럼 보이는 앞에 보이는 저 신선암도 가보면 분명히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산은 가만히 있는데 나 혼자 보는 장소,위치에 따라서 마음대로 판단하는 것 같다. 덕이 덜 쌓인 모양이다. 계속 밧줄을 타고 바위틈을 지나 여러 번의 위험한 구간을 지나면 신선암에 도착하게 되는데 "신선암봉"이라는 간이 표시가 있다. 뒤돌아 본 조령산은 아주 가깝게 그리고 이르는 길이 평지인것처럼 보인다.
신선암에는 조령3관문 120분, 신풍리(절골)70분, 조령산 80분이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10: 39분<923봉 도착>
신선암을 떠나자마자 바로 암벽을 내려 가는데 “곡예사의 첫사랑”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줄을 타면 행복했지, 춤을 추면 신이 났지….” 조심조심 줄을 타고 내려가는데 어린아이들과 같이 온 일행이 전진을 못하고 있어 이 구간을 어떻게 통과할까 걱정을 하면서 앞질렀다. 아까 889봉에서 볼 때 빨간 등산복을 입었던 사람이라고 추측되는데 이렇게 험한 구간에 4~5살 정도의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가 걱정된다. 내 몸 혼자도 어렵고 다리가 짧아서 매달리는데…..일부 여성 등산객들은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 무서워 멀리 우회하고 있고 그곳에 더 큰 어려움이 없길 바래 본다. 다시 몇 개의 작은 암봉들을 넘었는지 모르는데 신선암을 떠난지 40분 정도 가면 923봉 표지가 나온다.
923봉에 오르면 멀리 월악산 영봉과 조령3관문에서 하늘재까지의 능선이 가까히 보인다. 또 우측 아래로 조령2관문과 주흘산이 멀리 희미하게 보인다.
11: 33분<757봉 도착>
923봉을 떠나 여러 개의 암봉을 통과하면 직진은 막혀 있고 왼쪽으로 향하는 이정표가 나타나며 이를 따라 가다보면 점점 고도를 낮추면서 바위보다는 흙길이 점점 많아진다. 힘든 구간이 다 지나갔기를 바라는 마음에 긴장이 풀리면서 서서히 배가 고파오는 것이 느껴져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 33분이고 우리는 757봉 위에 와 있다.
12: 00분<821봉 도착>
지금부터는 완만하고 일반적인 등산로가 이어지며 조령3관문에 이르기 전에 점심을 먹기로 하고 자리를 찾으면서 서서히 이동한다. 조령3관문에 가면 식사하기에 좋은 자리가 많이 있겠지만 우리는 안다. 낮은 곳에서 음식을 먹고 바로 올라가기 시작하는 등산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따라서 높은 곳에서 식사를 하고 내려가면서 몸을 푼 다음 올라가야 쉽다는 것을….
자리를 보면서 가다 보니 어느덧 821봉을 지나고 조령3관문 1km 20분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더 내려가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최고는 아니지만 차선의 장소에서 자리를 잡았는데 이곳이 삼국시대 또는 6.25사변 때에 격전을 벌어졌을 만한 지형적 요건을 갖추고 있고 돌로 낮게 성이 쌓여 있다. 혹시 많은 영혼들이 떠 있는것은 아닌지....
12:18분<점심식사>
땅에 파란 자리를 깔고 준비한 족발과 떡,술, 딸기를 꺼내 놓으니 한이 많아 남아 천당에 가지 못한 영혼을 달래는 의미로도 쓰일 수 있는 상이 되어 버렸다. 모처럼 산에서 먹는 족발의 맛은 정말 환상적이었고 오늘 최고 12시간의 산행을 고려한 특식으로서 만족스러웠다. 살코기를 다 먹고 남은 뼈까지 하나씩 입에 물고 보니 옛날 시골집 마당에서 주인이 먹는 고기를 보며 입맛 다시는 개에서 주던 뼈가 생각났다. 뼈를 주면 개는 그것을 물고 남에게 빼앗길까봐 깨갱하며 마루 밑으로 들어가고 잠시 후 뼈 부수어 먹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유대원의 뼈 물고 찍은 사진은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12: 59분<조령3관문 도착>
모처럼 산행중 푸짐한 점심을 먹고나니 오전내내 암벽 및 밧줄과 사투를 벌이느라 소모된 체력이 충전되어 힘이 솟는다. 조령3관문에 도착하니 모처럼 봄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많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식사를 하는 그룹도 있고, 산에 올라갈 준비하는 그룹, 산에서 내려와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룹 등 여러 그룹중에 우리도 섞여 있다. 오늘 일정의 1/2을 완수한 우리 대원들은 더 가야 할 길이 멀어 마음이 바쁘기에 이정표와 조령3관문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서둘러 마역봉을 향한다.
원래 이곳은 문경새재로서, 산들이 높고 험준하여 새들도 날아 넘기 힘든 곳이라 하여, 또는 억새가 많은 곳이라 해서, 또는 새로 닦은 길이라 새(新)재라고 불렀다 한다. 조선때부터 영남에서 한양을 오가는 큰 대로(영남대로)였던 새재 길 중턱에는 경상감사가 교체될 때마다 서로 만나 업무와 직인을 인계인수한 장소로 사용하던 교구장터가 있다. 1592년 임진왜란때에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부산포에 상륙하여 한양을 향해 가장 빠른 길로 새재길을 택해 밀양,청도,대구,상주를 지나 이 재를 넘었다 한다. 당시 조정에서는 신립장군으로 하여금 왜군을 막도록 하였으나, 새재협곡에서 왜적을 막자는 부하들의 간청을 뿌리치고 충주 탄금대에서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 적은 수효가 많은 수효를 대적하지 못한다)으로 패했다. 이를 경험삼아 조정에서는 1594년 새재중간 협곡에 제2관문을 설관하고 왜군의 재침략에 대비하였고 병자호란(1636년) 이후 1708년 숙종 때는 제1,3관문을 설관하고 석성을 둘러 쌓았다. 또한 새재는 영남의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과거를 보러 한양에 오르던 과거길로도 이길을 많이 이용했다고 전해오는 유서 깊은 고개이며 신작로가 이화령으로 개통됨에 따라 사적지로 남게 되었다.
13: 59분<마역봉 도착>
조령3관문에서 낮은 성벽을 따라 북쪽으로 군막터를 지나고 너덜지대를 통과하면 본격적인 오르막 경사지점에 이른다. 아무리 점심 후 내리막길을 왔다고 하지만 마역봉으로 올라가는 시작부터 몸이 무겁게 느껴지고 앞으로 5시간 정도를 더 가야 할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선다. 올라가는 도중에 내려오는 등산객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우리처럼 백두대간 종주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하늘재에서 얼마나 걸렸나 알아보려는 속셈으로 “어디서 오시는거예요?” 하고 물으면 모두 다 신선봉에서 온다고 한다. 오전에 지나온 신선암을 이곳 사람들은 신선봉이라 부르는구나 하고 억지로 이해하려 했지만 도저히 등산코스가 마음속에 그려지질 않는다. 지도를 꺼내보니 마역봉 왼쪽으로 신선봉(957 m)이 자리잡고 있었다. 어떤 등산객은 신선봉에서 오는 길인데 신선봉에 신선이 장기를 두고 있다고 농담을 건다. 기회는 찬스라는 생각이 들어 얼른 누가 이겼느냐고 물었더니 의외의 질문에 당황하더니 끝까지 못봤다고 한다. 그분도 대단한 순발력의 소유자인 것 같다. 30분 정도 가면 공터가 나오고 다시 30분을 가면 마역봉 정상에 도착하게 되는데 마지막 30분이 암벽으로 이루어진 힘든구간이다. 원래 지도에는 마폐봉으로 되어 있는데 현지에는 마역봉이라고 검정색 표석이 정상에 설치되어 있다. 마역봉 정상에서 북쪽으로 월악산, 서쪽으로 신선봉과 남쪽으로는 우리가 걸어온 조령산,신선암등이 보이고 동쪽으로 이어진 백두대간길과 부봉이 선명하게 보인다.
14: 19분<북문 도착>
마역봉을 바라본 백두대간 능선은 부봉까지는 내리막 능선으로서 어렵지 않게 보이고 부봉 급경사를 올라가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쉽게 하늘재에 도착할 것으로 생각이 들어 마음이 가벼웠으며 또한 마역봉을 내려가는 등산로가 오늘 걸은 길 중에서 가장 쉬운 낙옆쌓인 흙길이었다. 바위만 밟다가 흙을 밟으니 이렇게 편하고 행복할 수가 없다. 정말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동쪽으로 능선을 따라 15분 내려오면 자연석으로 만든 산성을 따라 나란히 걷게 되고 곧 북문에 도착하게 되는데 지도에는 북암문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동화원 1.3km,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지금재 1.7km라는 이정표가 있다.
15: 37분<동문 도착>
북문을 지나면서 오늘 7시간 산행을 한 터라 서서히 피로가 밀려오고 남은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시간은 빨리 지나가는데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앞에서 기다리는 부봉이 점점 높게 느껴진다. 물을 마시며 잠시 쉬는데 지금처럼 앉아서 쉬는 것은 오늘 처음이다. 1708년 숙종때 쌓은 석성을 따라 1시간 15분 산행하면 동문에 도착하는데 이곳 역시 지도에는 동암문이라 표시되어 있다. 이곳도 성벽을 쌓은 자연석이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쉽게 알 수 있고 서쪽으로 조령 3관문과 마역봉이 나무 사이로 보이다.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평천재까지 지름길로 갈 수 있으나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제 길, 옳바른 길을 가야 한다.
15: 58분<부봉 도착:916m>
동문 이정표에는 부봉 1.3km 30분이라고 적혀 있고 지도에는 15분이라 표시되어 있다. 동문을 지나면서 백두대간은 부봉(916m)을 향하여 솟구치고 있고 양 옆에 검게 탄 나무들이 오늘의 내기를 유도한다. 나는 화재 원인이 낙뢰나 나무끼리 마찰에 의한 자연발화중의 하나라고 주장하나 유대원은 낙뢰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꼭 낙뢰가 화재원인이라야 내가 이기고 그 외의 원인이면 유대원이 승리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세상에 산에서 불날 원인이 꼭 낙뢰뿐만 일리는 없지 않은가? 대부분이 낙뢰일 수 는 있지만…유대원하고 얘기할때는 서면으로 확실히 해 두어야 하며 그래서 내기는 성사되지 않았다(농담이 99%이니 독자의 오해 절대 사절). 동문에서 20분 후 부봉과 959봉과의 갈림길에 도착하는데 부봉까지는 0.5km 20분, 주흘산은 3.5km 2시간이라 표시된 이정표가 갈림길에 서 있다. 시간이 없어 부봉 정상은 밟지 못하고 왼쪽으로 주흘산 방향의 백두대간 주 코스 내리막 길을 택한다.
16: 49분<959봉 도착,주흘산 갈림길>
부봉 갈림길에서 959봉까지는 다시 암벽코스로서 밧줄을 타는 구간이 여러군데 있다. 뒤돌아 본 부봉이 아쉬운 표정을 하고 있지만 나중에 주흘산과 연결된 코스를 한번 산행하리라 약속하고 고개를 돌린다. 왼쪽으로 월악산이 영봉이 가까히 보이고 주흘산이 진행방향 우측으로 우뚝 서 있다. 종양걸린 나무를 지나면 “주흘 2-7”이라 표시된 상세 등반안내도 가 있다. 이곳에 일반 등산객이 많고 부봉 정상에도 많이 있는 걸 보면 제1관문에서 주흘산과 부봉을 거쳐 동화원으로 이어진 코스를 산행하는 것 같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전부 주흘산에서 왔다고 한다. 우리와 무늬는 비슷한데 내용을 완전히 다르다. 백두대간 종주대는 오늘도 우리가 전부인 것 같다. 부봉 갈림길에서 50분 오면 주흘산 방향과 하늘재 방향의 갈림길인 959봉(일명 하늘재 갈림길)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비상식량인 영양갱를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쉬었다 간 흔적인 리본이 무수히 매달려 있다. 탄항산이 코 앞에 보이고 하늘재 3.2km 1시간 30분, 주흘산 2.6km 1시간 30분 이라는 이정표가 남은 거리를 안내한다.
내일 올라야 할 포암산의 흰 암벽도 탄항산 너머에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17: 10분<평천재 도착: 738m>
하늘재 갈림길에서 다시 급경사, 거의 수직 내리막길을 가면 낙옆 평지 능선길이 나오고 서쪽하늘에 하루를 정리하는 태양이 마역봉에 걸쳐 한층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한번 더 계곡 같은 내리막의 끝지점에 가면 바로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이곳이 평천재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가면 아까 지나온 동암문과 직접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문경읍 평천리에 이르게 된다. 엄청 돌아 온 셈이다.
17: 42분<탄항산 도착:857m>
서서히 완만한 오르막을 지나면 능선에 이르게 되고 진행방향 왼쪽으로는 월악산이 손에 잡힐 듯하고 오른쪽으로는 저녁 햇살에 제 색깔을 맘껏 뽐내는 주흘산 계곡의 나무들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며, 쥐어 짜면 녹색과 갈색물이 흘러내릴 것처럼 빛나고 있다. 바위틈에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자라가는 나무와 중간중간 한폭의 그림 같은 소나무를 배경으로 작업사진을 찍다 보면 평천재에서 약 30분 후 탄항산(일명 월항삼봉)에 이르게 된다.
18: 41분<하늘재 도착>
10m 정도 높이의 선바위(지도에는 굴바위)를 지나 본격적으로 고도를 낮추다 보면 포암산 암벽이 저녁햇살을 반사하며 처다보고 있고 포암마을과 동쪽에서 하늘재로 올라오는 포장도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약 11시간이 넘는 산행으로 몸은 천근만근이고 목적지는 보이건만 가는 길이 지루하다. 탄항산에서 1시간 정도 내려가면 하늘재 직전 우측에 헬기장이 나오고 길가에 진달래가 활짝 피어 있다. 땅거미가 빠른 속도로 밀려오는 가운데 11시간 30분의 산행을 마치고 우리는 목적지인 하늘재 산장 앞에 서 있다.
19: 15분<미륵마을 도착>
정상이라 생각하고 올라가면 진짜 정상은 그 뒤에 있듯이 하늘재에 도착 후 다왔다는 기쁨도 잠시, 오늘 우리가 묵을 수안보로 가는 길이 출입통제 구간이므로 이곳까지 자동차가 올라 올 수 없어 다시 미륵마을까지 약 30분을 걸어가야 했다. 지도상에는 분명 도로로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로 문경쪽에서는 하늘재까지 포장도로가 있는데 여기 하늘재에서 수안보쪽으로 넘어가는 길이 통제구간이라니 이해가 안간다. 하늘재를 경계로 한쪽만 길이 열려 있는것은 혹시 경상북도와 충청북도 행정부처간의 의견 불일치 산물은 아닐는지?
"피할 수 없으면 차리리 즐겨라"는 말처럼 즐기기로 마음을 바꾸고 나니 길 옆의 식물 안내판을 읽어보게 되고 움직이는 한발 한발이 공짜로 귀한 산림욕을 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여름이면 시원하게 목욕을 할 수 있는 계곡물이 길 옆으로 흐르고 목욕중에 선녀라도 나타날 것 같은 깊은산 깊은 계곡이다. 하늘재에서 30 여분을 내려오면 중원미륵리사지 (中原彌勒里寺址)에 도착하게 된다.
중원 미륵리사지는 사적 317호 지정되어 있고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58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지대에 위치한 미륵리사지는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라고도 하며 석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석굴사원터이다. 석굴을 금당으로 한 북향의 특이한 형식을 취한 유일한 유적으로 유명하다. 이 절에 얽힌 전설로는 신라 마의태자가 나라의 망함에 한을 품고 금강산을 가던 길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 덕주사를 창건하여 남향한 암벽에 마애불을 조성하였고, 태자는 이 곳에 석굴을 창건하고 불상을 북쪽으로 두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석굴은 거대한 돌을 쌓아 올린 뒤 나무로 만든 목조건물을 세웠으나 현재 소실되고 없다. 석굴 구조물의 중앙에는 주존불(主尊佛)인 미륵여래(彌勒如來)가 안치되어 있으며, 석굴벽에는 이 본존불을 장엄하기 위하여 조각한 여래좌상·삼불좌상등이 있다.
발굴조사시 「미륵당(彌勒堂)」「명창삼년금당개개와(明昌三年金堂改蓋瓦)」등의 명문와(銘文瓦)가 출토되어 1192년(고려 명종22) 금당(金堂)의 기와를 새로 이였음을 알 수 있으며, 석굴과 목조건물이 소실된 것은 13세기였고 그 후 곧 복원되었다가 조선초기에도 대중수가 있었고 또 다시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던 것을 18세기 때 다시 수리가 있었지 않았나 추정된다. 그 후 폐사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1936년에 있었던 큰 수해(水害)로 크게 피해를 입어 법등(法燈)이 끊긴 것으로 생각된다.이 석굴 앞쪽에는 석등(石燈)을 비롯하여 오층석탑·귀부·당간지주·불상대좌(佛像臺座) 등 석조물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들은 그 수법으로 보아 고려초기인 10세기경의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미륵사지를 지나 5분 정도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상점들이 나타나고 주차장이 나온다
이 때가 19시 15분이니 주변이 어둡고 상가와 가로등 불이 환하게 우리 일행을 비춰주고 있다. 오늘도 대단한 여정이었다. 분당 출발 부터는 14시간, 이화령 출발부터는 정확히 12시간 한발 한발 옮겨 이곳까지 왔다. 얼른 수안보에 가서 맛있는 것 먹고, 목욕도 하고 푹 자야 할 것 같다.
08: 10분<수안보 도착,휴식>
12시간을 걷고 나서 차에 몸을 실으니 이렇게 편하고 행복할 수 가 없다. 행복이란 작은 것이고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힘들게 올라오면 내리막길을 만날 때 행복하고, 너덜지대를 지나오면 평지를 만날 때 행복하며, 비 또는 흐리 후 맑은 시야가 행복하다. 중요한것은 행복을 느끼는 시점이 언제나 어려움이나 힘들고 불편한 상태 후라는 점이다.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할 것은 “행복,기쁨,만족은 절대 그냥 오느것이 아니라는 사실…..따라서 현재의 어려움은 이겨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수안보 상록호텔 지하 사우나에서 12시간의 피로를 풀고 한식으로 저녁과 간단한 약주 후 오늘보다 결코 쉽지 않은 내일 산행을 위하여 일찍 꿈나라로 갔다.
오늘도 고생하셨고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우리 종주대원 파이팅~
중부지방 산이 이렇게 험할 줄은 미쳐 몰랐습니다.
온세통신 종주내역
2004년 종주팀
(이화령-조령3관문) :샤크사업팀(정경연,김남석,배대중,김철희,정화식)
(조령3관문-하늘재) :대외협력팀(김승수,김기운,윤영호,오인호,오창선)
2005년 역종주 : 강남지사(이복우 지사장, 전성모 팀장, 장경식 팀장, 정광진 팀장,
유석희 과장, 서세욱 대리, 이서영 대리, 권헌정 대리, 이원로 대리, 안형규 대리, 허용제 대리, 송주성 대리, 박승순 대리, 송범, 문성철,
첫댓글 조령샘 물맛이 참 좋았습니다. 히말라야의 여인 지현옥 산악대원의 명복을 빕니다. 담에 시간되면 미륵마을 계곡과 자연휴양림에서 가족들과의 오붓한 시간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