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는 어디로 가나
강연 일시 : 2002년 6월 28일(금), 19:00∼20:40
이야기 손님 : 김우창, 최승호 |
- 본 강연 -
유종호(이하 유) : 오늘은 석 달 계획의 '문학이야기'에서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모시기 어려운 두 분을 모셨습니다. '우리 시는
어디로 가나'라는 큰 제목을 달았지만, 시에 대해서 자유롭게 얘기를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왼 편에 계신 분이 김우창 선생이십니다.(함께 박수) 현재 고려대학에서 가르치고 계시고 우리나라 인문학의 거장이라는 호칭을 듣고 계십니다. {궁핍한 시대의 시인}, {지상의
척도} 등 무게 있는 저서를 많이 쓰셨습니다. 그리고 오른 편에 계신
분이 최승호 선생이십니다.(함께 박수) 80년대 초에 {대설주의보}를
낸 것을 필두로 해서 최근에 {그로테스크}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집을
내면서 많은 변모와 실험도 해오면서 독특한 시의 경지를 개척해오고
계십니다. 얘기를 편안히 풀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 시에 대해 매력을
느끼게 되었나, 시에 대한 눈뜸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나 등에 대해서 편안하게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우창(이하 김) : 시를 정말 좋아했더라면 아마 시인이 됐을 겁니다.
그런데 시를 아주 좋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시인 뒤를 따라다니면서 박수도 치고 잘못됐다고 엉터리 비난도 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래서 시에 대한 개안이 있었다고 얘기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유종호 선생을 제가 평소부터 잘 알고 있지만, 유종호 선생은 시에 대한 특별한 개안의 순간을 가지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특별히 시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초등학교 다닐 때 시 비슷한 것을 써서 학교 교지에도 내면서부터였습니다. 시를 쓰는 데서부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후로 시만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고 시
외에 다른 분야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그 중에 철학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시에 대한 관심과 다른 것에 대한 관심을 병존시켜 나가는 게 상당히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문학공부를 할 때, 시는 소설보다 읽는 시간이 덜 걸려서 빨리빨리 읽을 수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얼마 전에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왜
시에 대한 관심을 가졌느냐고 하길래, 시가 간단하고, 읽기 편하고, 골치 아프지 않고, 시간이 많이 안 들어서 그렇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나중에 인터뷰 원고를 봐달라고 해서 봤더니, 체면 손상이 된다고 생각했는지 그 쪽에서 그 부분을 다 빼버렸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사실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며, 특별한 개안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면서 일생 동안 시를 보며 살아왔는데, 제가 이제 곧
정년퇴직을 하게 되는데 이제야 시를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5,60년 정도 시를 보고 나니까 시가 이런 거다, 이런 것이 시의 중요한 부분이다 라는 것에 대한 개안이 이제야 생기는 것 같습니다.
유 : 시만 관심을 가진 게 아니시고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얘기이십니다. 그런데 김우창 선생이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셨는데, 주제가 월레스 스티븐스라고 하는 미국 시인의 난해한 작품 세계를 다룬 것이었습니다. 외국 사람도 어렵다고 하는 시인데 이것을 체계적으로 연구해서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제 시인이신 최승호
선생께서 본격적인 말씀을 해주시지요.
최승호(이하 최) : 저는 시에 대한 인연 같은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사실 시보다는 미술 쪽에 인연이 훨씬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화가이셨고, 저희 집에 하숙을 하는 대학생도 조각을
했고, 중학교 들어갔을 때 미술반 활동을 했는데 미술반 선생님이 아마추어 화가이면서 극작가인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조소하시는 분이 미술 선생님이었고, 대학교에 들어와서도 그림은 못 그리지만, 제가 굉장히 열심히 그려서 교수님들이 물감과 캔버스 같은
것을 다 대주시고 그랬습니다. 제가 워낙 데생 능력이 없어서 그런 부분에 굉장히 절망하고 있었는데, 춘천교육대학에 '홍예'라고 하는 문학 동아리가 있어 거기에서 매년 시화전을 했습니다. 그때 제가 하던
일은 시화전에 컷을 그려주고 글씨도 써 주는 역할이었습니다. 시를
쓰기보다는 시 쓰는 사람들의 뒤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했는데, 대학교 2학년 때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몸도 안 좋고 생활도 안 좋았는데,
그때는 시가 뭔지도 모르고 교과서에 나오는 것 이외에는 시를 본 적이 없었는데,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 같은 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강의 시간에 노트에다가 '바람 뒤에서' 라는 신석정 류의 시를
최초로 한 편 쓴 적이 있습니다. 시가 뭔지도 모른 채 제 안에 어떤 슬픔을 표출시킨 것인데, 그것을 학보사에 있는 사람들이 보고, 네가 평소에 시를 쓰지는 않았지만 졸업 신문에 그걸 내주겠다고 해서 발표를 하게 됐습니다. 그 뒤로, 춘천에 '그리고', '홍예' 등의 문학 동아리가 있었는데 그 쪽 사람들로부터 너도 한 번 시를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 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문학 동아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많은 습작을 하고 있었는데 저는 그런 경력이나 배움이 없어서 75년 겨울에 밀린 공부를 하느라고, 도서관에서 일하는 분들과
점심도 같이 먹으면서 도서관에서 거의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동안에 나온 {현대문학}, {심상}, {현대시학} 등을 읽으면서 조금씩 시
쪽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년 뒤에 처음으로 {현대시학}에 투고를 했는데, 그게 추천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굉장히 오래 시를 습작하고 역량이 있는 신인 같다 라는 평을 받아서 제가 굉장히 당황을 했습니다. 그리고 77년에 {현대시학}으로 등단을 마쳤습니다. 정선의 시골에 있을 때였는데, 제가 너무 등단을 빨리 마쳐서 등단은 했지만 그 동안에 쓴 시를 버리고 5년 정도 다시 습작을 했습니다.
그게 {대설주의보}라는 시집에 실린 시입니다. 인연은 공교롭습니다만, 제가 '오늘의 작가상'에 투고를 했는데,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유종호 선생님과 김우창 선생님께서 심사를 하셨고 이 두 분은 저에게 자신감을 갖고 시를 쓰게 하신 분들입니다. 시에 대한 개안이라기보다는 인연인데,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묘한 생각이 듭니다.
유 : 전통 사회에서 우리 시가 가지고 있던 독특한 위치가 있었고, 서양 사회에서도 시가 그때그때 중요하면서도 다양한 역할을 해왔는데,
현대에 와서 시의 위상이나 기능 같은 것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
조금은 막연한 얘기이지만 적절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김 : 정말 시가 어떻게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기가 어려운 시대인 것
같습니다. 옛날에도 물론 알기가 어려웠지만, 시라는 게 우리가 다 같이 느끼면서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공감을 하고 공감함으로써 마음이 개운해지는 기능을 옛날부터 해왔던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것에 동참하는 것, 동참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시인들이 해온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간단히 얘기하면, 우리로 하여금 많은 사람들이 그런 느낌을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느낌을 유발시켜주는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시인들이 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우리가 느끼고 싶은 감정이라는 게 시로써 표현되기보다는 다른 여러
가지 것들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시가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느냐 라는 느낌들을 갖게 됩니다. 요즘 월드컵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흥분하는 것을 봤지만, 시가 느끼게 하는 느낌이라는 것은 보통 느낌보다는 조금 강렬한 느낌, 우리가 갖고 싶어하는 느낌과 관계가 있을 텐데,
월드컵에서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느낌처럼 강한 느낌을 시가 요즘은
유발하기가 아주 어렵게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열광시키는 능력의 면에서도 그렇고, 그것을 조금 고상하게 얘기해서 애국심을 유발시킨다든지, 자기를 잊어버리고 더 넓고 포괄적인 여러 사람과의 일체감을 느끼게 한다든지, 옛날에는 그것을 시인들이 했던 것
같은데, 서사시라는 게 특히 그런 것입니다만, 그런데 요즘처럼 축구가 있고, TV가 있고, 비디오가 있고, 게임이 있는 등 여러 가지 사이버 스페이스가 있는데 시가 정말 할 수 있느냐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요즘은 정말 시가 존재하기가 어려운 세상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 말이지만 조금 되풀이해서 얘기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것보다는 조금 더 강하게 우리를 고양시켜 주는 느낌을 시를 읽으면서 받았는데 그런 느낌이 시로써 오늘날 달성될 수
있느냐 라고 했을 때, 시가 약한 매체의 위치로 전락했기 때문에 같은
기능을 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상성을 넘어가는 보다 넓은 느낌의 세계를 시가 열어주기 어렵게 되었다는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사람이 같이 높게 느낄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느낌의 세계라는 게 사람에게는 있고, 또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은
시가 아직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가 한쪽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보통은 느끼지 못하는 넓고 깊은 느낌을 가지게 하면서, 또 그것을 천천히 속도를 느리게 하면서 인식하고 감식하게 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간단히 얘기하면 흥분만 시키는 게 아니라 흥분을 우리의 의식 속에서 다시 새로 천천히 감상하게 하는 점이 시가 가지는 또 다른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모든 예술 작품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서로 반대되는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예술 작품은 우리를 보통 느낌보다는 조금 더 흥분시키는 작용을 하고, 또 하나는 흥분을 조금 더 조용한 상태에서 감식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예술 작품의 많은 것은 속도가 빠른 부분도 있고 속도가 느린 부분도 있기 마련입니다. 음악도 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가 하는 일의 많은 부분은 느리게
해야, 아 이게 이거구나 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하는 제의나 다른 의식이 다 그렇습니다만, 결혼식 같은 것도 뚝딱뚝딱 해도 되지만 천천히 하려고 합니다. 다도라는 것도 차를 쭉쭉 따라서 훌렁훌렁 마시면 되지, 그걸 복잡하게 수속을 해서 차를 만드는 한 단계 한 단계를 천천히 의식적으로
머리와 마음 속에 담으면서, 마시는 것도 한번에 후루룩 마시는 게 아니라 서서히 맛을 감상하면서 마시는 게 다도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결혼식에서도, 장례식에서도, 예배 절차에서도, 절에서 불공드리는 데에서도 천천히 하는 게 중요합니다. 보통 급하게 할
것을 될수록 느리게 하는 것이 종교적 제의에도 들어 있고 예술에도
들어 있습니다. 슬픈 음악을 듣는 경우에도 마구 통곡을 하는 게 슬픔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지만, 통곡을 절제하면서 흐느끼다가도 또 가만히 있고 하는 식으로 완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게 실제로 슬픈 고전 음악들입니다. 한국의 수제천 같은 음악은 서양 음악에 비해서도
리듬이 아주 느립니다. 한국 춤도 공식적으로 추는 것은 아주 느립니다. 동작도 하나하나 마음에 새기면서 알게 하고, 슬픔이나 기쁨도 새기면서 알게 하는 면들이 있습니다. 아까 사람의 감정을 흥분시킨다고 했지만, 시에도 흥분시키면서도 동시에 느리게 해서 마음에 새길
수 있게, 이게 뭐다 라는 것을, 논리적으로나 분석적으로는 알지 못하더라도 조금 깨우침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좋은 차를 천천히 마셔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처럼 그런 역할이 시의 언어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것은 라디오나 축구에 의해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이고, 요즘 점점 바빠지고 모든 사람이
정신없이 사는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고 조용한 순간을 가지면서 내가
사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이렇게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꽃을 보는 것이 무엇인가, 하늘이 맑은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천천히 생각하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게 시의 기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요즘과 같은 때에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는 아직은 그런 단계에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기 계신 최승호 선생의 시 같으면, 굉장히 깊이 있는 시이기
때문에 천천히 생각하고, 새기면서, 느끼면서 읽어야 되는 시이지만,
요즘 많은 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학교에서 서양 시들을 가르치지만 서양 시들의 역사를 대체적으로 얘기하면, 여러 사람이 함께 자기를 잊어버리고 고양된 느낌을 갖게 하는 것, 이것이 옛날의 서사시
등이 하던 기능인데 19,20세기로 오면서 많은 시들이 사적인, 자기 개인적인 체험을 얘기하는 시들로 역점이 옮겨갔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미국 시도, 영국 시도,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 시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지금 굉장히 흥분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사람이 흥분만 하고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일상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흥분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의 의미를 생각하고 일상성을 되돌아보게 하기 위해서 조용하게 생각하고 느끼는 순간들이 필요하게 됐는데, 이러한 것들이 앞으로 시가 해야 될 기능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것에서는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 : 삶의 의식화에 대해서, 의식이라는 것을 머리의 의식이 아니라 의례화라는 관점에서 말씀을 해주셨는데, 최승호 선생도 시의 기능이나
역할에 대해서, 혹은 적당한 화제를 잡아서 편하게 말씀을 해주시지요.
최 : 제가 20대 때 읽은 시 중에 프랑스 시인인 레이몽 끄노의 시가 있는데, 잊혀지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마음 안에서 울림을 갖는 구절이 '시는 하찮은 것이다' 라고 시작되는 시입니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시를 쓸수록 시라고 하는 것이 하찮은 것이구나, 그리고 그
하찮다는 것을 긍정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찮음이란 것에도 다양성이 있다면 하찮음의 다양성으로 우리를 획일화시키는 힘에 대해서 저항해야 되지 않나, 그것이 시인의 역할이고 시의 한 기능이지 않나 싶습니다. 정리되지는 않은 생각이지만 시가 하찮은 것이라면 시인은 하찮은 것을 만들어내는 하찮은 사람이 될지 모르겠는데,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시인을 우리가
다르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언어의 창조자라고 말할 수 있는데, 시인이 언어를 창조하는 데에 있어서 첫 번째 창조주인 조물주에 대해서는 늘 열등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언어로 만드는 작품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참 조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그렇게 섬세하지도 않고, 신이 만든 작품에 비교할 때 장엄하지도 않고, 큰 놀라움을
주지도 않고, 느낌 자체도 조물주가 만들어놓은 세계에 비하면 굉장히 적을 수도 있지만, 시인이 서열을 떠나서 두 번째 창조자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또 하나 제 생각에는 독자도 창조자라고 생각을
하는데, 시인이 어떤 표현을 창조한다면 의미가 창조되는 것은 독자들에 의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시의 기능이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시인은 독자가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하지 않나 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음악이나 미술과는 굉장히 다른 것 같습니다. 우선 단순하게 얘기하면, 미술의 경우에는 간단히 감상을 할 때 눈을 통해서 우리 내면 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고, 음악의 경우에는 귀를 통해서 우리 내면에 울림이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면,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시라고 하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한 것 같습니다. 눈과 귀도 필요하고, 우리 안에서 언어를 가지고 읽은 사람이 새롭게 의미를 창조해야 되는, 그래서 제 생각에는 독자를
의미의 창조자, 세 번째 창조자로 보고, 그 사이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
하찮은 존재가 시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하찮고 소중한 것들이
이 세계에 있는 것처럼, 그런 존재로서 자기 신뢰의 필요성이 시인에게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유 : 처음에는 시란 하찮은 것이다 라는 외국 시인의 말로 시작을 했지만, 가만히 듣고 보면 결론은 정반대의 결론이 아닌가 싶습니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보통 시인을 예언자라고 얘기를 했고, 사실 예언자적
요소가 있는 것도 사실일 겁니다. 그런데 아까 김우창 선생께서 요즘의 우리 시가 고양된 상태를 조성하고 거기에 독자가 동조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어졌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최근에 우리 시의 주목할만한 동향이 있다면, 어떻게 정의하실 수 있는지 말씀을 해주시지요.
김 : 유종호 선생께서 더 잘 아실 것 같은데, 솔직히 말씀 드려서 시를
젊을 때는 좋아했지만 늙어갈수록 시가 점점 재미없어지고, 시뿐만
아니라 소설도 재미없어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은 대개
젊으신 분들 같은데, 그렇기 때문에 요즘 경향에 대해서 늙은 사람에게 물어보면 상당히 곤란하고 젊은 분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조사하는 게 좋을 겁니다. 또 실제로 늙으면 시를 안 읽게 되는데, 직업상 별수 없이 읽기는 하지만 점점 안 읽게 되고, 사실을 적어 놓은 것이 더
호소력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젊어서는 항상 꿈을 적어놓은 것이 마음에 들고, 늙어서는 사실을 적어놓은 것이 마음에 들고, 소설보다는 역사책이 더 재미있고, 시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제가 받은 인상에 의하면 요즘 시는 옛날 시와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시조 같은 것과도 물론 다르고, 요즘 잡지에 나오는 시를
보면 김소월이나 서정주, 박목월 시와도 정말 달라서, 옛날에 김소월이나 조지훈, 박목월의 시를 읽던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시 아닌 것이
너무나 많이 쓰여지고 있는 경향이다 라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특징을 들어서 얘기를 하면, 리듬도 있는지 없는지 불분명한 것 같고, 말도 선택해서 기억할만한 것을 쓴 것인지도 불분명하고, 뭐든지 흐리멍텅해지고 산만해지고, 시의 경계가 불분명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자꾸 제가 개인적인 관계를 얘기해서 죄송합니다만, 유종호 선생께서 하신 발언 가운데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많은데 그
중의 하나가 시라는 것은 외울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외울 수 있을 정도의 시가 되려면 리듬이 좋아야 됩니다. 리듬이 없으면 안 외워집니다. 우리 기억의 기묘한 현상 중의 하나인데, 김소월의 시도 몇 편씩 외우고 시조도 많이 외우는 사람들은 있지만, 이광수부터 요즘에
이문열까지 소설을 외우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소설 언어가 더
나쁘다거나 주의를 기울이고 보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실제로
리듬이 없으면 머리 속에 남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머리 속에 남는다는 것은 리듬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음악 연주하는 사람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음악 연주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의
상당한 스트레스의 원인이라고도 하지만 베토벤의 콘체르토 5번이라고 하면 피아노 치는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악보를 안 보고 다 그대로 칩니다. 손가락 끝으로 치는 것이지 머리로 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이 음악적인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가능하지, 아마 베토벤의 피아노 콘체르토에 들어있는 소리의 수만큼의 말이 아무 리듬이나 멜로디가 없는 채로 있었다면 외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리듬이란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요즘 시에 리듬이 사라지고, 또
행도 일정하지 않고, 산문에 가깝게 늘어지게 되고, 또 시의 연 구분도
없어진 시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형식적인 붕괴가 일어난 겁니다.
외우기 어려운 시가 요즘 많이 쓰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뭐라고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옛날 시조처럼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라는 식으로 쓴다든지,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식으로 요즘 시를 쓸 수 있느냐 하면 요즘에는
못 쓴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시대에 따라서 말의 리듬이 다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시조 식으로 말을 시작하면, 무슨 소리인지
듣기 전부터 케케묵은 소리나 감정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말의
형식 속에 감정이 붙어 있는 겁니다. 말의 형식은 완전히 비어있고 내용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시조 식으로 얘기하면 옛날 식 감정이 되니까 요즘 감정을 표현할 수가 없는 겁니다. 제가 불평처럼 모든 형식이 깨진 시들이 쓰여지고 있다고 얘기를 했지만 실제로는 불가피한
겁니다. 시인들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시를 쓰지 못하는 것은 시인들이 재주가 없어서가 아니라 시대가 그렇게 변하였기 때문에 못하는
겁니다. 제가 과장해서 더러 얘기하지만, 요즘 우리의 언어, 생활 내용이 변하는 것이 단군이래 최고의 변화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역사에 큰 변화가 몇 번 있었겠지만, 한문을 채택했다든지 불교를
들여왔다든지 하는 것이 언어의 굉장한 변화를 가져왔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라는 것이 50, 100년 전 삶과는 달라서 언어가 같을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 말을 옛날 식으로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우리의 생활영역이
바뀌고, 느낌이 바뀌고, 사는 방법이 바뀌었는데 말이 똑같을 수가 있습니까. 말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말이 안 달라지면 답답해서 살
수가 없을 겁니다. 우리 느낌을 표현하려면 말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리듬도 달라지고 형식도 달라졌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시가 완전히 무형식의 형태로 가서 시로서 성립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시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요즘에 무형식의 시가 많은 것은
과도적인 현상이고 앞으로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떤 종류의 형식의 시가 나올 것인가를 생각할 수가 있는데,
그 문제는 시인들이 발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인들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인, 본능적인 언어에 대한 느낌으로부터 우리 삶의 리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발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런 내용을 글로도 한번 쓴 적이 있는데, 록 음악이나 포크 음악에서 새로운
음악가가 등장할 때 새로운 리듬을 가지고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합니다. 성공한 대중 음악은 사람들이 듣기에 약간 호소력이 다른 리듬을 갖고 나오는데, 이 리듬은 음악가들이 발명하는 것이면서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사는데 다 리듬이 있는 겁니다. 제가 평소에는 말을 빠르게 하는데 오늘은 상당히 느리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처음에 유종호 선생님께서 말을 느리게 시작하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서로 맞춰서 사람들의 말의 리듬이 저절로 바뀌어진다는 것을 관찰한 인류학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도 그렇고,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그때그때 장소의 리듬이 있다, 사람 숫자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합니다.
또 한 시대의 공통된 리듬이 있다, 그 리듬을 퍼내는 사람, 샘물에서
물 길어오듯 퍼내는 사람이 성공한 음악가다 라는 얘기를 한 사람이
있습니다. 검증할 수 없기 때문에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럴싸한 얘기
같습니다. 말하는 데에도, 우리의 언어에도, 생활에도 리듬이 있기 때문에 리듬 형식을 새 시인이 끊임없이 탐구함으로써 우리에게 보이는
새로운 형식이 성립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은 우리
한국 사회의 역사에 있어서, 탐색하고 변화하는, 너무나 많은 것이 빨리 변화하는 시대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 리듬이 중요하냐 하면, 외는
데에도 중요하지만 리듬이 개인적으로 깊이 느끼는 것이면서 동시에
깊이 느끼는 것을 여러 사람과 공유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언어 표현에서 리듬과 형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형식을 다 버리고 제가 문법이 틀리게 얘기할 수도 있지만 문법에 맞춰서 얘기함으로써 제 말이 여러분과 같이 나눌 수 있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제가 함부로 얘기하면 금방 경계를 할 겁니다. 하지만 시를 외워서 얘기하면, 저 사람 시를 얘기한다고 해서 경계를 덜 하게 됩니다. 공적인
성격을 가진 언어가 되기 때문입니다. 리듬이라는 것이 개인적으로
깊이 느끼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여러 사람이 같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작용을 합니다. 이것은 무용 같은 것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무용하는 사람들이 일정한 형식으로 움직이니까, 보기에
난잡해 보이는 것도 저건 무용이니까 괜찮다 라고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형식 없이 남녀가 이상하게 움직이면 보기 싫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반면에 정형적인 리듬 속에서 춤이 무대에서 벌어지면 아름다움으로 승화가 되어서 우리가 다 같이 속으로 느끼면서도
부끄러움 없이 서로 의견을 나누고 같이 느낌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시에도 난잡한 얘기가 많지만, 일정한 품격을
갖고 있는 것이 시인데 그 품격은 형식을 가진 언어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언어를 갖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고, 우리가 우리의 느낌을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누면서 동시에 느낌을 천박하지 않게
일정한 품격 속에 유지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품격 있는 관계로 정형화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의 형식(리듬)이 중요하고 형식화된 언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유 : 깊이 있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간단히 요약을 해보면, 현재 우리
시의 중요한 특색의 하나가 일종의 형식의 붕괴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과 리듬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즘의 시가 리듬이
많이 사라지고 있는데, 그것은 시인들의 개인적인 결함이나 무능이
아니라 사회 자체의 성격과 관계가 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시와
리듬에 관해서는 김우창 선생께서 {세계의 문학}이라는 잡지에 독립된 글을 하나 발표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찾아보시면 될 겁니다. 이제 최승호 선생께서 시인으로서 요즘의
시를 어떻게 보시는지, 최승호 선생 자신은 해당이 안 되겠지만, 일반적인 얘기를 좀 해주시지요.
최 : 크게 나누어서 보면 두 부류의 시인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전통적인 시관을 갖고 시를 쓰는, 서정도 중요시하고, 리듬(운)도 중요시하는 시인들이 나무처럼 존재한다고 한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것을 탐색하는 새 같은 시인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최근에 제가 느끼는 것은 전통적인, 뿌리가 있는 우람한 나무 같은 전통적인 시관을 갖고 시를 쓰는 사람도 많습니다만,
나무에서 멀리 떠나서 새처럼 새로운 영역을 탐색하는 시인들이 많아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경향의 특질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몇 가지를 말씀드려 본다면, 언어 자체에 대한 관심, 시의 언어라고 하는 것이 지시적인 기능을 갖기 이전에,
마치 화가가 쓰는 물감처럼 작곡가가 사용하는 음표처럼 시의 언어를
시의 질료로 여기고 시를 쓰려는 시인들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 그런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 시를 보면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경향이 굉장히 많아졌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그 원인에 대해서는 분석을 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현실에 대한 생생하고 철저한 인식보다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내면으로 들어가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는 진술에 있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 만한 희망적인 진술보다는 자기 파괴적이고 허무적인 진술들이 너무 많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느낀 것은 그런 것인데, 전체적으로 제가 느낀 것은 시단이라고 하는 것이 큰 흐름을 짚을 수 없이 무수히 조각난 파편의 파도가 꿈틀거리는, 일렁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고 저 자신 또한 그런 파편의 파도 한 조각에 붙어서 불확실성 속에서
점점 표류해 가는 흐름 속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유 : 가령 우리가 1920년대의 시인들이라고 하면 김소월, 한용운 등을
대번 연상하게 됩니다. 또 1930년대라고 하면 정지용이나 김기림 등을 연상하게 되고, 1940년대에 미당이나 윤동주 등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은 1920년대에 소월과 만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많은 시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시간의 풍화작용을 견뎌내고 가장 우뚝하게 솟아 있는 분들이 만해나 소월일 겁니다. 또 30년대나 40년대도 정지용이나 윤동주 같은 분들이 있지만, 현대는 아직
시간의 판단을 받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많은 작품을 발표하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과거의 시인들보다 지금 활동하고 있는 많은
시인들의 경우에는 판별이 나지 않아서 장단점을 따지기가 어렵고 일반적인 경향을 얘기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최승호 선생께서
몇 마디로 분류하신 것은, 아주 사태가 복잡한데 그 중의 몇 가지를 지금 말씀해주신 겁니다. 이제 김우창 선생께서 어떤 시인들을 주목하고 계신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주시지요.
김 : 제가 시집을 좀 들고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젊은 시인들의 시를 안 읽고 있기 때문에 뭐라고 얘기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었으면 좋겠지만 추상적이고
일반론적인 얘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잘못 재단해서 이 시인 좋고 저 시인 나쁘다고 얘기하면 큰코다칠 수 있으니까 조심해야
될 것도 같고, 요즘처럼 세상이 시끄럽고 말을 참는 경우가 드문 때에는 함부로 얘기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시가 많은
부분에서 광고문에 굉장히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광고문의 특징은 기발한 소리를 해야 되고 눈에 확 띄어서 생전 못 들어본 소리이다 라는 느낌을 주어야 그 물건을 사게 되니까 이상한 얘기를 하게 됩니다. 우리 시들도 이런 것에 많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런 시들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그런 것과는 달리, 아까 최승호 선생이 말한 것처럼 전통적으로 시를 쓰고 있는 사람의 시가 저는
아직까지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잡지도 편집하면서 장님 문고리
잡기 식으로 비평을 하고 있지만, 제가 기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최승호 선생처럼 뛰어난 시인이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 '오늘의 작가상'이라는 것을 주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전통적인 스타일로 인생을 생각하고 자연을 관조하는 시인들이 좋은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사실 그것도 지겨워질 때가 있습니다. 아까 광고문처럼
기발한 것을 가지고 쓰는 사람을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지만, 다른
한편으로 도통한 것처럼 쓰는 사람, 거룩한 소리만 자꾸 하는 사람의
시들도 지겨운 생각이 많이 듭니다. 미국의 시인인 에즈라 파운드가
늘 강조한 것이 시는 무엇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사실 중국에서 매일매일 새롭게 해야 한다는 일일신(日日新)에서 나온 말입니다. 거룩한 것이라도 새로운 소리로 들릴 수 있게 해야지, 같은 소리를 자꾸 되풀이해서 들으면 싫증이 납니다. 좋은 소리도 세 번만 들으면 듣기 싫은 법입니다. 거룩한 것이 중요한 것이지만 거룩하고 도통한 소리도 자꾸 같은 형식으로 하게 되면 진력이 나게 됩니다.
지금 축구를 저도 재미있게 보지만, 축구가 얼마나 위대하냐고 신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데 그게 그 소리입니다.(함께 웃음) 다
좋다는 소리인데, 변주를 해서 하기는 하지만 비슷한 소리이기 때문에 저는 싫습니다. 또 어느 시내 잡지에서 축구를 예찬하는 시인들의
특집을 냈다고 하는데, 나쁘진 않지만 그 소리가 그 소리일 겁니다.(함께 웃음) 거룩한 것이 중요하고 전통적인 서정을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소리가 그 소리 같으면 안 되고 도통한 것처럼 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괴로운 인생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괴로움 속에서 발견되는 기쁨을 노래하고, 높고 거룩한 것이 있지만, 아까 최승호 선생이
말씀한 것처럼 우리가 하찮은 일상 속에 있기 때문에 하찮은 것 가운데에서 높고 거룩한 것을 발견해야 우리의 삶을 신나고 재미있고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 도통한 소리만 쓰면 재미가 없는데, 요즘에는 도통한 시인도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민주화된 이후에, 옛날에 정치적인 얘기를 하면 그 소리가 그 소리라도
실제로 우리가 해야 될 일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정치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나고 나니까 무슨
나무 좋고, 꽃 좋고, 산 좋고, 고향 좋고 하는 식의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조금 새롭게 표현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사실을 존중하고 하찮은 것을 존중하는 가운데 시적인 것을 발견하는 시를 높게 생각합니다. 또 그런가 하면, 전통적인 서정 얘기를 안 하지만, 황지우 시는 우리 사는 삶의 실감있는 재현을 통해서 그 안에도 시적인 순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상당히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또 오늘 아침에 밥 먹다가 잡지에 실려 있는 김기택 씨의 시를 봤는데, 분수에 대해서 쓴 시입니다. 분수라는 게 물이 솟구쳐서 올라가는데, 물이라는 아무 형태도 없는 물건이 자기 스스로 아름다운 형태를 갖출 수 있는 것처럼 솟구쳐 올라가다가 결국은 무너져서 원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서술한 시입니다. 아주 객관적인 관찰이지만 우리가 다
우리 사는 데에서 느끼고 있는 겁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라는 게
하찮고 매일매일 소모적으로 사는 것 같지만, 내 의지로 어떤 아름다운 모양을 갖췄으면 하는 생각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도 아름다운 모양, 형체를 이루고 있으면, 기분 좋게 마음에
'오늘 밑천 뽑았다' 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주 객관적이고
일상적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면서도 우리가 다 같이 느낄 수 있는, 눈물 흘리고 박수치는 것은 아니지만 절제되어 있는 관찰로 기록한 시도 좋은 시라고 생각을 합니다. 김기택 시인의 시에서 저는 그런
것을 많이 발견하고 좋은 시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 이름이 비슷하지만 김용택 시인도 전라도에 살면서 고향 얘기를 하는데, 이게 얼마나 좋으냐, 너희들은 몰랐지 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자기 사는 느낌을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기분 좋은 시라고 생각을 합니다. 요즘은 조금 너무 도통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저에게는 거리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함께 웃음) 나희덕 씨는 최승호 선생보다 더 젊지만 진솔하게 정직하게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기
때문에, 최근에 제가 본 시인들 중에서 좋은 시인이다 라는 느낌을 가집니다. 시인이 늘 새롭게 얘기를 해야 되기 때문에 잘못하면 기발한
것이 되기 십상입니다. 기발한 것은 피하는 것이 좋고, 새로운 것을 얘기한다는 것은 새로운 언어와 이미지로 얘기하는 것이지만 그 이미지나 언어가 기발하다, 컴퓨터로 맞춰놓은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데에 있어서 내가 오늘 보는데 10년 전에 본 것이 그게 그거였구나 하는 느낌을 주게끔 새로 조합을 해야지 컴퓨터로 조합한 것 같으면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라는 것은 비유나 이미지를 많이 사용하는데 비유나 이미지가 우리의 실감으로부터 나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지용의 시에 좋은 게 많고 산뜻한 이미지가
많은데, 새삼스레 눈이 와서 묏부리에 시원스럽고 빛나게 이마 받히기를 하다, 문 열고 보니까 산에 눈이 왔는데 그것으로 이마를 받혔다는 것은 기발한 얘기입니다. 새삼스럽게 눈 덮였다는 사실은 우리가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실감나게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런 이미지는, 사실 정지용 선생이 한시를 많이 읽었는데 중국 사람의 한시에 울타리 밑에서 나무를 캐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보니까 남산이 환히 보인다/떠오른다 라는 것과 연결해서 지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컴퓨터로 조합한 것처럼 갑작스럽게 기발하게 일시적으로 눈에 확 띄기는 하지만 깊이 아무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은 곤란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험적인 시가 많이 쓰이는데, 실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새로운 언어, 이미지, 리듬을 찾아야 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나 시인이라면 그렇게 해야 되지만, 특히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볼썽사나운 실험이 나오는 것도 불가피하다, 그것을 나쁘다고 매도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욕을 안 먹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고 기발하고 이상한 시를 쓰는 사람이 사실은 필요하다는 것을 실제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하는 얘기입니다.
유 : 지금 얘기하는 내용이 인터넷 게시판에 오릅니다. 그러니까 조심하셔야 됩니다.(함께 웃음) 지금 주목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거명하신
시인들이 최승호 선생을 비롯해서 황지우, 김기택, 김용택, 나희덕 시인 등이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기발한 것은 좋지 않다고 하셨는데, 30년대에 김기림의 시를 보면 기발한 게 참 많습니다. 하지만 지금 읽어보면 촌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효용성이 없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하신 시가 정지용의 [춘설]이라는 시입니다. '문 열자 선뜻! / 먼 산 이마에 차라 // 우수절 들어 /
바로 초하루 아침, //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라는 구절의 예를 들면서, 기발하지만 동시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우리에게 촌스럽게 느껴지는 기발함이 아니라 문학이
당연히 가지고 있는 참신함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최승호 선생께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혹은 주목하는 시인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시지요.
최 : 저는 우리 시단에서 미당 선생 같은 분에 비해서 주목을 덜 받은
시인이 김현승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김현승에 관한 글들이 몇 편 있기는 하지만, 고독을 통한 자기 무화의 길을 가면서 김현승 시인만큼
깊이 간 사람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면 많은 조명을 받아야 할 시인이고, 이런 시대일수록 고독이라는 것도 굉장히 필요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김현승 시인을 좋아하고 있고 또 한 분은, 제가
마음이 답답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마음 안에 공터를 크게 만들어주는 시인들을 좋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시인 중의 한 분이 정현종 시인인데, 정현종 시인의 궤적이 있습니다만 마음의 공터가 얼마만큼 확장이 되어서 어떻게 얼마만한 호연지기에 이르려는가 하는 관심을 크게 갖고 있습니다.
유 : 정현종 선생의 시에 대해서는 김우창 선생이 처음으로 아주 본격적인 평가를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연만한 분이기 때문에 주목할만한
시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위치가 확립된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 : 요즘 젊은 시인들을 얘기하는 줄 알았는데, 제가 주목하는 시인이니까 시야를 넓혀서 얘기를 했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유 : 김현승 선생의 시에 대해서 저는 최승호 선생과 의견이 조금 다릅니다. 좋은 시인이라고 생각하고 몇 편의 좋은 작품이 있기는 하지만,
견고한 고독이라든가 추운 날 밖에 나가보니까 생생하게 무언가가 가까이 보인다든가 하는 식으로 실감나는 작품이 있지만, 조금은 너무
무덤덤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시가 조금 충격을 줘야 되는데,
너무 무덤덤해서 김현승 시인의 시는 읽으면 늘 그냥 괜찮다고 느끼면서도 참 좋다 라는 느낌은 안 들었습니다. 그래도 역시 시인의 관점이 옳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타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말씀해 주시지요.
김 : 어떤 사회나 그 사회의 다음 세대 사람들이 읽어야 할 문학이 있어야 되는데, 오늘의 시대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다음 세대 사람들이
마음의 양식으로 삼아야 할 문학 작품을 생산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문명된 사회, 사람 사는 사회가 안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시인이나 다른 문학하는 사람들이 점점 설 자리가 없어지고 좁아지는 이런 세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좀더 신경을 써서 자리를 만들어주고 존경을 해줘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뛰어난 재능 있는 사람을 안 알아주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몇 달 전에 예술 교육을 어떻게 창조성을 계발하는 쪽으로 할 것인가 하는 심포지엄에 나갔습니다. 거기에 가서 듣기 싫은 소리를 많이 하고 나왔는데 뭐였냐 하면, 어떻게 창조성을 기르게끔 예술 교육을 하느냐 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창조적이라는 얘기인데 세상에
창조적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이다, 창조적인 사람은 굉장히
드문 것이다, 창조적인 사람이 나오면 우리가 존중을 해줘야 되는데
존중을 안 하는 것은 누구나 창조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진짜 창조적인 사람이 나와도 존중을 안 해준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창조성을 강조하는 교육을 하는 게 아니라 창조성을 존중하는 교육을 해야 되겠다 이런 얘기였는데, 언어를 정말 뛰어나게 사용하는
사람이 나온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입니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게 뭐 대단하냐 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말을 뛰어나게 많은 의미를 담아서 표현할 수 있는 재능은 아주 드문 것인데
이러한 재능을 존중해주지 않는 사회라는 것은 문명을 가질 수 없는
사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시인이나 작가들을 존중해주고 그
사람들이 설 자리를 만들어주는 사회가 되어야 되고, 또 시인이나 작가도 오늘 일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생각하면서 먼 관점에서, 오늘의 인기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다음 다음 세대를 위해서 얘기한다는 관점에서 작품을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유 : 재능이라는 것이 허다분하게 널려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생각에는 저도 전적으로 동감을 합니다. 미당이 인간적인 면에서 찬양받지
못할 행보를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미당 수준의 재능이라고 하는
것은 백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이지 아무데나 있는 재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기 드문 재능에 대해서, 이 세상에 흠이
없는 사람이 없는 법인데 그것을 너무 가혹하게 추궁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저도 재능이라고 하는 것이 함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매우
드물다 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제 최승호 선생께서 시인으로서 앞으로 어떤 시를 쓰겠다든가 하는 것에 대해서 자유롭게 말씀을 해주시지요.
최 : 글쎄요, 저는 저 자신에게 해야 되는 얘기가 있는 것 같은데, 전에
김우창 선생이 쓰신 글 중에 [문학과 세계의 시장]이라는 논문의 한
부분을 적어 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좀 슬프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한
얘기인데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문학이 쇠퇴하고 인문 과학이 사라져간다는 것은 사회에서 내면적 존재로서, 또 근원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와 더불어 인간이나 사회에 대한 총체적 사고가 끝났다는 것을
말한다는 점이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느냐 하면, 전업 작가들에 대한 생각을 잠시 했었습니다. 전업 작가들이 시장의 논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너무나 타락하기 쉽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었고, 또 하나는 저 자신에게 하고 싶은 얘기입니다만, 굴원이 시를 쓰던 시대에는 인쇄 기술도 없고 시집도 판매되지 않았고 유통의
절차도 없었을 터이므로 그때는 필사본으로 베껴서 시를 읽고 그랬을
텐데,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런 시대에도 시인이 존재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시대에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 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중국의 방언 거사가 있었는데 재산을 호수에 갖다 버리고 짚신을 엮어서 내다 팔 정도로 가난하게 살면서도 참선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요즘에 베스트셀러가 중시되면서 그런 것에 유혹을 느끼는 시인도 있고, 저 자신도 그런 게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방 거사처럼 결연한 의지가 경제의 논리, 시장의 논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필요하지 않나, 그리고 저 자신이 그런
부분을 명심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질의 응답 -
질문자 1 : 최승호 선생님께 드리는 질문인데, 첫 번째로, 좋아하는 외국 시인과 외국 시집을 알고 싶고, 두 번째는 시 창작에 큰 영향을 끼쳤거나 지표가 된 책이 있다면 말씀해주시구요, 세 번째는 대학 시절에 처음 쓴 시가 내면의 슬픔을 표현했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그러한지 그리고 앞으로 시를 통해서 표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최 : 저에게 영향을 준 시인이나 시집은 굉장히 많습니다. 몇 사람만
얘기를 한다면,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인은 이탈리아의 몬탈레(Eugenio Montale)라고 하는 시인이 있는데 {지중해}라는 시집을 냈습니다. 절망의 시인으로 불리긴 하지만, 그 사람의 시를 보면 바닷가의 게가 어기적거리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그 사람 시를 많이 좋아했고, 그 다음에 네루다(Pablo Neruda)라든지 프랑스 쪽에서는 생 존
페르스(St-John Perse)나 르네 샤르(Rene Char)나 이런 시인들을 좋아했습니다. 프루스트(Marcel Proust)도 좋아하고 아주 다양합니다.
그리고 영향이라고 하면, 저는 사실 문학 작품보다는 그림 쪽에서 간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특히 초현실주의 화가인 끼리코나 이브 탕기 같은 화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내면의 슬픔처럼 감정을 표출하면서 쓰는 시인은 아니고, 건조하게 계속 써 왔고, 제 궤적을 보면 문명 비판도 하고 욕망이나 죽음이나 허무에 대한 탐색을 했습니다만, 그 주제에 맞는 형식을
늘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늘 버리지 않았던 것은 묘사를
바탕으로 한 형상화이고, 그러다 보면 저의 감정 같은 것은 메마르게
하면서 작업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시라고 하는 것이 공간과 굉장히 밀접하게 연관이 되면서 써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사북에 있을 때는 사북의 시를 썼고, 서울에 있을 때는 서울의 시를
썼고, 가평이나 춘천에 있을 때는 '달맞이꽃에 대한 명상' 같은 시를
썼습니다. 공간의 지배를 너무 많이 받는 시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간절함이라고 하는 것이 공간으로 인해서 생기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고, 앞으로 쓸 시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공간에서 어떤 것을 절실하게 느껴서 그것을 시로 형상화해낼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내면의 슬픔 같은 것을, 김춘수 시인이 쓴 시 중에 '슬픔은 언제
마음 놓고 슬픔이 되나'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만 저 또한 슬픔을 쉽게
내놓지 않으면서 시 작업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외국 시인이나 시집은 다른 기회에 목록이 필요하시다면 적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자 2 : 요즘 문학상을 받는 시는 머리로 써서 관념적인 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시의 근본적인 정체성은 흔들리는 삶을 위로하는, 인간을 위한 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중들은 관념적인
시가 아니라 가슴으로 쉽게 쓴 시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유종호 선생님께 드리는 질문입니다.(함께 웃음)
유 : 시선은 김우창 선생께 보내고, 왜 질문은 저에게 하십니까.(함께
웃음) 그런데 대중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것 같습니다. 가령 월드컵 현상 중의 하나가 붉은 악마인데, 그 사람들이 대중이지만 다 다릅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을 표준에 두고 이야기하느냐, 그러니까 쉬운 시를 좋아하는 대중도 있을 것이고 쉬운 시에 멀미를 느끼는 대중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역시 대중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 같습니다.
질문자 2 : 베스트셀러나 유행시, 신현림 씨의 시처럼 쉽게 가슴으로
쓴 시를 대중들은 많이 좋아합니다. {홀로 서기}처럼 많이 팔린 시는
쉬운 시이고 많이 팔리지 않은 시는 어려운 시 같아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유 : 시에 여러 가지 층위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면 좋은 일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베스트셀러가 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시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일반론의 수준에서 얘기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슴으로 쓴다'고 했는데, 그러면 쉽게
쓰지 않는 시인은 가슴으로 쓰지 않는다는 얘기인데, 그건 그렇지 않을 겁니다. 가슴으로도 쓰고, 머리로도 쓰고, 온몸으로도 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는 구체적인 사례를 놓고 판단을 해야지, 일반론으로 쉬운 시가 좋은 시 아니냐, 또 어려운 시는 좋은 시가 아니다 라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매우 어려운 질문이기 때문에, 어려운 질문에는 현명한 대답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 정도로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자 2 : 현대시가 점점 더 삶과 괴리되어 가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유 : 우리의 현대시가 삶과 점점 괴리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하나의 진술로 성립이 되지만, 우리 시라고 하는 것은 수백 명의 시인이 시를 발표해서 이루어진 것인데 그 중에 어떤 부분을 얘기하는 것인지, 막연한 다수이기 때문에 대답하기가 곤란한 것 같습니다. 가령 최승호 선생의 시가 우리의 삶과 괴리가 되어 있다고 얘기한다면, 그렇지 않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는데, 막연히 말씀하시면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서정윤의 {홀로서기} 같은 시집은 한 번에 읽으면 단박에 이해가
된다, 이런 것이 좋은 게 아니냐는 말씀이신데, 시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고 층위가 다르기 때문에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것은 개인적 취향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다만 대개 쉽다는 것은 금방 진력이 납니다. 신비로운 구석도 있고, 난해한 구석도 있고, 어려운 구석도 있어야 계속 우리에게 매혹의 대상이 되지, 한 번에 다 이해하고 나면 매력이 떨어집니다. 질문자께서 단번에 이해하는 시만 좋아하셨다면, 취향을 조금 변경시켜서 처음에는 낯설게 다가오는 시도 좋아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자꾸 감수성을 확대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질문자 2 : 작년에 무슨 문학상을 받은 김혜순 씨의 '빨간 사과'인가
하는 시가 있는데, 그 시를 한참 읽어봐도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더라구요. 과연 그런 시가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가요.
유 : 모든 시가 다 김혜순 씨의 시처럼 어렵지는 않지 않습니까. 어렵게 생각되면 옆 사람과 상의를 해본다든가, 노력을 해보고, 안되면 그
다음에는 덮어야지요. 그리고 필요한 사람이 있으니까 상도 주고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좋아하고 인정하니까 상을 주는 걸 겁니다.(함께
웃음)
질문자 3 : 최승호 선생께서는 재주가 많으셨던 것 같은데 그림을 그리다가 어떻게 시를 쓰게 됐는지, 그리고 후회는 없으신지요.
최 : 그림은 돈이 많이 듭니다.(함께 웃음) 그리고 그 당시에 설명하기가 좀 힘듭니다만, 제 안에 들끓는 말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밖으로 흘러 넘치게 하는 데에는 오히려 시라고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지금은 그때 쓴 시와는 전혀 다른 시를 쓰고
있습니다만 시에 한 번 빠진 다음에는 별 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질문자 4 : 최승호 선생님께 먼저 질문 드리겠습니다. 초기 시와는 다르게 후기에 와서 상당히 불교의 선적인 세계의 분위기를 많이 느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불교의 선적인 세계로 입문하시게 됐는지 그
계기가 궁금하고, 또 실제로 책을 통해서만 접하신 것인지, 수행도 함께 하시면서 선적인 세계의 시를 쓰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김우창 선생님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작은 질문인데, 논문으로 월레스 스티븐스를 쓰셨다고 하셨는데,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이 꽤 있었는데 왜 유독 그 사람을 택했는지가 궁금하고, 그리고 두 번째는 번역시에 관한 질문인데, 과거에 유명했던 시인들의 번역시들은
많이 나와 있는데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외국 시인들의 시는
거의 번역이 안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상당히 시장이 빈약하다고 느끼고 있는데, 그런 현상이 출판사의 상업적인 효과가 적으리라는 예상 때문에 출판을 안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독자들의 취향이 세계
쪽에는 무지하기 때문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김우창 선생님께서는 영문학을 하셨으니까 번역시에도 많이 관련을 하실 것 같아서
그런 게 참 궁금합니다. 왜 동시대의 다른 나라 시인들은 번역이 전혀
안되고 있는지, 우리나라 시인의 시들만 출판이 되고 있지 전혀 안 되고 있거든요. 그리고 어쩌다가 누가 노벨상을 받았다고 하면 그 시인의 시만 홍수처럼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데, 그런 게 궁금합니다. 그리고 김우창 선생님께서는 상아탑 속에만 계시지 않고 의외의 자리에서
뵙게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통일과 분단의 심포지엄이라든지 그런 곳에 나와서 발언을 하시는 게 저는 상당히 인상이 깊었습니다. 문학자로서 상아탑에만 안주하지 않고 사회를 향해서 창문을
열어 놓고,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발언을 하시는 모습이 상당히 존경스럽고 인상이 깊었습니다.
최 :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에 대해서 질문을 하셨는데, 그것은
시를 쓰게 된 시점과 거의 비슷합니다. 의사가 저에게 빨리 치유되게
하기 위해서인지, 당신 아마 6개월 정도 밖에 못 살 것 같다 라는 심한
거짓말을 했습니다. 의지도 강하게 품어야 되고 많이 먹어야 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죽음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커졌습니다. 불교가 특히 생사의 문제,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그런 계기로 제가 불교 안에서도 특히 우상 파괴적인, 종교라고 할 수 없는 면도 있는 선불교에 관심을 갖게 됐고, 수행은 별로 안 합니다. 참선은, 우리나라 불교가 가나선입니다만,
제가 화두를 들고 하다가 머리가 용량이 조금 부족해서 화두로 들어가자 상기가 되어서 터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는 참선을 안
하고 있고, 글쓰기 직전에 한 30분 정도 참선을 하고 집중이 된 상태에서 시를 쓴 적은 있습니다. 최근에는 지하철을 타고, 걸어가고 그럴
때, 선사가 얘기한 의문이 있는 화두를 끌고 돌아다니는 정도이고 별로 수행하는 것은 없습니다.
김 : 질문하신 많은 부분에 우연히 그렇게 됐다 라고 하는 것이 가장
간단한 답변 같습니다. 월레스 스티븐스에 대해서 학위 논문을 쓴 것은 우연적인 요소가 굉장히 많지만, 한 가지는 철학적인 시인이라는
것과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철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거든요. 학교 다닐 때부터 그랬기 때문에, 철학과 시를 합쳐서 논하는 데에는 스티븐스가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논문을 다른 것을 쓰려고 했는데, 재미 삼아 얘기하면, 급히 지도교수를 만나러 가야
됐는데 지도교수님이 안 계셨고 그 옆방에 시를 하시던 교수님이 계셔서 스티븐스를 하게 됐습니다. 굉장히 우연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외국시 번역이 잘 안되는 것은 외적인 이유가 많을 겁니다. 하나는 이름난 사람도 잘 안 팔리는데 이름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글을 번역하는 것은 출판사의 모험이니까 안 내는 것도 있고,
또 외국 문학 학자들이 아직 크게 알려지지 않은 시인을 인지하는 데에 조금 둔하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알려진 시인을 알아보는 것이 쉽지, 아직 거기에서도 분명하게 이름이 안 나있는 시인을 스스로 알아서 이 사람 중요한 시인이다 라고
해서 번역을 하고 출판을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시차가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 시인 같으면,
일급 시인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읽고 배우는 게 있고 우리 관심사에
대해 얘기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 시인으로서 일급
시인이 아닌 경우이면, 그야말로 자기들 사사로운 관심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의미가 있는 시가 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말이 바뀌어 다른 나라 말로 옮겨갈 때에는
이름난 시인, 좀 나이가 든 시인들이 번역되기가 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우리 고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셰익스피어를 공부한다고 하면, 100, 200년 동안에 다른 사람을 읽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셰익스피어만 중요합니다. 하지만 당대의 문학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아까 유종호 선생님께서 1920년대 하면 한용운, 김소월 이런 식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그 사람들이 중요하고 지금도 살아남아 있지만, 그 당시에는 여러 시인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시인들도 1급, 2급 앞으로 장래를 어떻게 생각해야 될지
모를 시인들 등이 많지만 그 사람들을 다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어디엔가에 우리의 문제를 얘기해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시대가
지나게 되면 그 분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들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발언한 것도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걸러지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친구와 만나서 잡담을 많이 하는데, 중요한 얘기가 아니라고 해서 잡담을 안 하면 안됩니다. 잡담하는 게 친구와의 교감에는 중요한
겁니다. 당시에는 중요한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당대의 시인(작가)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고전 작가나 외국 작가와는 다른 종류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 시대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작가, 또 먼 나라로부터 오는 작가는 저절로 고전적이고 나이가 좀 든 작가로서 골라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실에 대해서 느닷없는 얘기를 제가 하는 것은 우리 현실에 맞춰서
사는 게 중요하다, 시를 볼 때도 현실 얘기를 해서 실감나게 얘기를 해줘야 그 시가 좋다는 느낌을 제가 가지는 것과 비슷할 겁니다. 우리가
사는 절실한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느낌이 있고,
사는 게 그렇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절로 문학 외의 자리에 가서 이리저리 튕겨져 나가서 쓸데없는 얘기를 많이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문학도 저절로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과 관계를 지어서 생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왕에 얘기가 됐으니까 한 마디만 더 말씀을
드리면, 아까 어려운 시 얘기가 나왔는데, 우리가 보통 살고 있는 삶이라는 게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몰라도 생각 없이 그날 그날을 살고 있는데, 조금 생각을 하게 해주는 시라야 읽을만하지 생각할 필요 없이 그냥 한 번 읽고 아는 시는 존재할 필요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 없는 우리의 삶에서 한번 멈춰서 생각해 보시오 라는 느낌을
주는 시가 그래도 읽을만한 시이고, 그렇다면 조금 어려울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 안 해본 것을 생각해보려면 조금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가 너무 어려운 것은 말을 잘 못해서 어려운 것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 혼자만 알고 나는 모르는 사실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어려울 수도 있어서, 모든 어려운 시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저는 본질적으로 약간은 어려운 시가 사실은 좋은 시라고 생각합니다. 바쁜 세상에 인생도 짧은데 다 아는 시를 또 읽어서 복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좋은 시라는 것은 쉬운 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것을 쉽게 얘기해주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합니다. 쉬운 것을 쉽게 얘기하는 것은 나도 할 수 있고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그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고, 더러는 술 먹고 노래방에서 노래하듯이 쉬운 것도 필요한
것이겠지만, 실제 심각한 의미에서는 어려운 문제,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쉽고 분명한 언어로 표현해주는 것, 쉽고 어려운 것이 합쳐져
있는 시가 좋은 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질문자 5 : 유종호 선생님께서는 어떤 시인을 주목하고 계시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유 : 아까 화제에 올랐던 시인과 옆에 앉아 계신 시인(최승호)을 주목하고 있습니다.(함께 웃음) 얘기를 하다 보면 대개 비슷합니다. 오늘은
최승호 선생의 어조 때문인지 천천히 생각을 하면서 이야기를 심도
있게 나눈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장시간 동안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함께 박수)
. 끝.
첫댓글 에구^^ 눈 아파 죽는 줄 알았어요 이왕 좋은 글 올리시려면 행간, 띄어쓰기 좀 하시지...
배울점이 많네요 ^^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