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양면은 본래 용궁군 남상면(南上面)의 용호, 하풍, 구룡, 사막, 성당, 상리, 하리, 심천, 오지, 삼강의 10개 이동과 용궁군 남하면(南下面)의 우망(憂忘), 별곡(別谷), 효동(孝洞), 구산(邱山), 청감(靑甘), 운교(雲橋), 신흥(新興), 임천(林川), 양정(養井), 흔전(欣田)의 10개 이동이었고, 또 본래 예천군에 속했던 다인현(多仁縣) 4개면이 1906년 1월 19일 비안군(比安郡)으로 이관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다시 다인현 중 현서면만 예천군으로 환원되고, 현서면의 직신, 신풍, 덕동, 동림, 공처, 공암, 사동, 사서, 사신기, 삼청, 습의, 갈전, 효제, 도안, 삼괴, 소역, 당촌, 풍덕, 고천, 산성의 21개 이동 등 3개면이 1914년 4월 1일 부,군,현 폐합 때, 용궁군에서 편입된 20개 마을은 8개 리로, 비안군에서 이관된 21개 마을은 7개 동으로 조정하고 비안군(比安郡)에 속했던 마을은 동(洞)으로 용궁군(龍宮郡)에 속했던 고장은 리(里)로 하여 15개 이동으로 개편 확정하면서 풍양면이라 명명하였다.
1971년 12월 31일 예천군 행정운영동리설치조례 제280조에 의거 30개 행정동리로 분리하여 운영하다가 1988년 5월 11일 예천군 조례 제1068호에 의거 「동」을 모두 「리」로 통일 했다. 면소재지는 일제 초기에 우망리에 있었으나 1931년 11월 24일 낙상2리(공암동)로 옮겼으며 풍양(豊壤)이란 이름은 고적인 풍양 부곡과 풍양지 및 풍양산에서 연유된 듯 하다.
예천군의 최남서단에 위치하는 이 면은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이 면 경계의 2/3를 감고 돌면서 북동쪽으로는 지보면, 북쪽으로는 용궁면, 서북쪽은 문경시 영순면과 상주시 함창읍, 서쪽으로는 상주시 사벌면과 경계하는 한편 면 경계의 1/3은 높은 능선으로서 남쪽의 상주시 중동면, 동쪽으로 의성군 다인면을 접한다.
총 면적은 62.41㎢이며, 낙동강 물을 이용하는 삼강리에 풍양양수장과 청곡과 효제의 작은 전천후 양수장의 혜택으로 총 경지면적 2,528ha 중 1,700여 ha가 수리안전답으로 되어 있다. 풍양면의 경도 위도상의 위치는 국립지리원에서 1987년 9월에 인쇄된 5만 분지의 1지도에 의하면, 최남단은 풍양산성 1036번지 남쪽 개천과의 접지, 동경128˚18´49˝ 북위 36˚33´48˝, 최북단은 삼강리 낙동강 중, 동경 128˚17´45˝ 북위 36˚33´48˝, 최동단은 청곡, 청감 낙동강 중, 동경 128˚21´56˝ 북위 36˚31´41˝, 최서단은 효갈, 갈전 낙동강 중, 동경 128˚15´48˝ 북위 36˚28´29˝이다.
관광자원으로는 삼강유원지, 공처농요,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 있으며, 특산물은 배, 양파, 단무지, 가지, 무, 참우 등이 있다.
도량(度量)이 크고 포용력(包容力) 있는 명재상(名宰相) 정광필(鄭光弼)
ㅇ 위 치 : 예천군 풍양면 청곡1리 삼수정 밑(낙동강변)
ㅇ 내 용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 : 1462~1538)은 옛 용궁 포내(現 풍양면 청곡1리)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사훈(士勛), 본관은 동래(東萊)요 이조판서(吏曹判書) 난종(蘭宗)의 아들로 호는 수부(守夫-최근 기록 守天은 잘못된 기록이라고 함)이다. 진사(進士)에 오르고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으며, 1513년(중종 8)에 정승(政丞), 1516년(중종11)에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1538년(중종 33)에 죽으니 나이 77세 기사(耆社)에 들고 묘정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諡號)는 문익(文翼)이다.
그가 벼슬에 오르자 처음 성균관 학유(學諭), 의정부 사록(司錄), 봉상시(奉常寺) 직장(直長)을 지냈는데, 낮은 벼슬에도 불구하고 직책(職責)에 최선을 다하니 당시 <성종실록(成宗實錄)> 총재관(總裁官)이며 그 후 좌의정(左議政)이 된 이극균(李克均)이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도청(都廳)을 삼아 편집하는 일을 맡겼다. 관원(館員)이 여름 고과(考課)에서 모두 강등(降等)되었으나 그는 이극균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상관하여 재상(宰相)들의 기대를 받았다. 그후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던 연산군(燕山君) 때 소(訴)를 올려, “사냥이 너무 심하다”고 간(諫)하다가 아산(牙山)으로 귀양(歸養)갔다. 귀양간 자들은 죄인이어서 관문(官門)을 비로 쓸었으나 싫어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았다. 1506년 가을 중형(重刑)에 처하러 이송 관원을 따라 태연하게 길을 오르니 현감(縣監)이 들 밖까지 영결(永訣)하므로 백성들은 눈물로 전송했다. 홀연 중종(中宗) 반정(反正)소식이 전해지자 좌중은 모두 즐거워하였으나 그는 태연하게 말하기를, “이것은 종사(宗社)를 위한 대계(大計)로다.”하고 이내 육류(肉類)를 물리치면서 “전 임금(故主)의 생사를 아직 확실히 몰라서 그러는 것이라.” 하니 듣는 사람 모두 탄복하였다.
1533년(중종 28) 김안로(金安老)가 정권(政權)을 잡자 그를 죽이려고, 그가 희릉(禧陵) 총호사(摠護使)가 되었을 적에 선후(先后)를 불길한 땅에 장사하였다고 죄를 만들어 중형에 처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이미 파직(罷職)당하여 회덕현(懷德縣) 시골에 돌아가 있었는데 불의에 금오랑(金吾郞)이 달려드는지라 집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 우는데 그는 손(客)을 대하여 장기를 두면서 치우지 않았다. 금오랑(金吾郞)이, “극형(極刑)에서 감형(減刑)되어 김해(金海)로 귀양을 보낸다.”하니 머리를 조아리며 “임금님의 은혜가 하해(河海) 같습니다.” 하였다. 그 날 밤에는 코고는 소리가 우뢰같았고 이튿날 짐을 꾸려 귀양길에 오르는데 조금도 불안한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귀양길을 가던 중 여관에서 시(詩) 한 수(首)를 지으니,
「훼방이 산같이 쌓였으나 마침내 용서함을 받았네. 이생에 임금 은혜(恩惠)에 보답할 길 없구나 열 번 높은 고개를 넘는데 두 줄기 눈물이오, 세 번 장강(長江)을 건너면서 홀로 혼이 끊어지네. 아득히 높은 산엔 구름이 먹을 뿜고, 망망한 들판에는 비가 항아리를 쏟는 듯 하네. 저물게 바닷가 동쪽 성 밖에 다다르니 초가집이 쓸쓸한데, 대나무로 문을 삼았고녀」 하였다. 자제(子弟)들은 그에게 어떤 화(禍)가 닥칠지 몰라 모두 김해(金海)까지 따라갔었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죄를 받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서 그를 불렀다. 종들이 조보(朝報)를 가지고 급히 달려가서 밤중에 적소(謫所)에 당도했는데 그는, “그러냐?” 할 뿐 코를 골면서 달게 자고 이튿날에야 그 글을 본 뒤에 한양(漢陽)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모두 손을 이마에 얹고 반기며 기대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작고(作故)하였다.
1519년(중종 14)에 영의정(領議政)이 되었을 때이다. 임금이 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 인하여 사정전(思政殿)에서 신하(臣下)들에게, “천재의 원인이 될 만한 정치의 잘못이 있는가?”를 물었다. 좌우가 서로 재앙을 없앨 계책(計策)을 아뢰는데 신진사류(新進士類)의 한 사람인 한충(韓忠)이 나와 아뢰기를, “전하께서 비록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 잘하기에 힘쓰시나 비루한 자가 감히 정승(政丞)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재변(災變)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며, 좋은 정치(政治)는 가히 바랄 수가 없습니다.”하였다. 대신(大臣)들이 빈청으로 물러나오자 우상(右相) 신용개(申用漑)가 성난 낯빛으로 말하기를, “신진(新進) 선비가 대신을 면대해서 배척하니 이 습관을 기를 수 없다.”고 하였으나, 그는 손을 저어 말리면서, “그들이 우리가 노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인데, 만일 조금이라도 우리를 꺼리고 있다면 반드시 즐겨 이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요. 나에게 진실(眞實)로 해로울 것이 없고 또 나이 젊은 사람의 바른 말하는 풍도를 꺾어 억제하는 것은 좋지 않다.”하니 우상(右相)도 그 말에 탄복하고 듣는 자들도 대인(大人)의 도량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릇이 크고 국량이 있으며 사람 응접하기를 잘하고 말과 안색이 너그러우나 경우를 구별하기가 엄격(嚴格)하여 성희안(成希顔)이 탄복(歎服)하여 말하기를, “정광필은 가위 소리 없는 데서 듣고, 형상이 없는 것도 본다.”라고 하였다.(왕조실록, 연려실기술, 예천군지, 내고장 뿌리찾기)
금관조복(金冠朝服)이 뒤덮인 삼수정(三樹亭)의 느티나무
ㅇ 위 치 : 풍양면 청곡1리 ㅇ 내 용 : 낙동강변 나지막한 언덕 위에 느티나무 한 그루와 노송(老松) 세 그루가 어울려 서 있다. 이 나무는 14세기 말 삼수공(三樹公) 정귀령(鄭龜齡)이 용궁현 구담리에서 이 곳 포내(현 풍양면 별실)로 이사하면서 정자를 지어 삼수정(三樹亭)이라 이름하면서 세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 80세 생신 때 이 정자에서 잔치를 베풀며 자손들이 한자리에 모여 관복을 벗어 이 세 나무에 걸어 놓으니 울긋불긋 오색꽃이 핀 듯하여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고 한다. 그 후 200년을 무성하게 자라더니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 이후 차츰 잎이 시들고 밑둥치조차 없어지고 다만 한 그루가 곁가지를 소생(蘇生)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이(奇異)한 것은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소나무 세 그루가 자생(自生)하여 수 백년의 연륜과 푸르름을 자랑하며 고고(孤孤)하게 서 있다. 이 느티나무가 일제시대에는 도(道)지정목 제164호로 보호를 받았다. 또한 삼괴(三槐)라 하여 삼정승(三政丞)을 상징하며, 조선 500여년 동안 정귀령이 정승(政丞) 후손(後孫)을 가장 많이 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사후(死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고. 지보면 마산리 완담향사(浣潭鄕社)에 모셔졌다.
도 망 절 (逃亡寺)
ㅇ 위 치 : 예천군 풍양면 청곡1리(도망질)
ㅇ 내 용
옛날에 도망사라고 하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청곡리 253번지에 동화사라고 하는 큰 절터가 있는데, 이 곳을 도망사라 하는 이도 있다. 절터 주위에는 기와 파편, 절샘, 절구, 주춧돌 등 절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절에 산적(山賊)들이 매일 몰려와 승려들을 괴롭히므로 이를 견디다 못해 승려들이 도망갔다고 전해지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절에 빈대가 하도 많아서 승려가 피(避)해 있다가 몇 년만에 돌아와 보니 대웅전 (大雄殿) 복판에 전에 없던 기둥이 있어 만져보니 빈대 기둥이어서 기겁을 하고 승려가 모시던 부처만 가지고 낙동강 쪽으로 달아나다가 부처에도 빈대가 많이 붙어 있으므로 바위 밑에 모셔 놓고 도망쳤다 하여 절 이름을 「도망절」이라고 불렀다한다.
지금은 바위 밑에 모셔 놓은 부처는 없어지고, “부처바위”라고 하는 바위만 남아 있다.
청감천(靑甘泉, 泉甘)
ㅇ 위 치 : 풍양면 청곡2리 청감(양지마)
ㅇ 내 용
청곡2리 청감(양지마)마을에 옛날 늦은 봄 선비 일곱 명이 나환자(癩患者)가 치료되었다는 약수(藥水)를 먹고 용궁(龍宮)으로 가는 도중 산등성이에 잠시 쉬어가는데 목이 마르고 갈증(渴症)이 나서 인가(人家)는 멀고 걱정을 하던 중, 난데없이 동자가 나타나므로 물 먹을 곳을 물으니 동자가 물이 있는 샘을 가르쳐 주었다.
선비들은 동자가 가르쳐 준 샘에 가서 물을 먹어보니 단 맛이 잡히고 맛이 좋아 정신없이 마셨다. 물을 먹는 동안 정신을 차려 보니 안내한 동자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물맛이 하도 좋아 선비들은 샘이 있는 이 곳을 천감(泉甘)이라 했는데, 이 곳에 마을이 생기면서 천감에서 청감(靑柑)으로 바뀌고 다시 청감(靑甘)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샘이 있는 이 곳을 「청감천」이라 부르고 있으며, 지금은 그 바위 밑에 흔적만 조금 남아 있다.
성 지 도 사
ㅇ 위 치 : 예천군 풍양면 공덕2리(공처마을)
ㅇ 내 용
1) 공처마을에는 조선조 광해군(光海君) 때 홍(洪)성지라는 유명한 도사가 살았다.
성지도사가 어릴 때 공처(公處)에서 등너머(산림일 것이라고 한다) 글방에 공부하러 다녔었는데, 갈 때마다 아름다운 아가씨가 나타나서 구슬을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가 다시 낭자 입에 넣곤 하였다. 얼굴이 수척해지고 성적이 떨어지므로 훈장(訓長)이 그 이유를 물었다. 성지는 이 상황을 자세히 말씀을 드렸더니, 훈장이 다음에 또 그러한 일이 생기면 그 구슬을 삼키고 자빠지라고 일렀다.
그 다음날 성지는 글방에 공부하러 가는데 그 아가씨가 다시 나타나서 같은 행동을 하므로 훈장이 시킨 데로 구슬을 삼키고 달아나다가 그만 엎어졌었다.
이 아가씨는 여우로 변신해 죽었고, 이 짓은 여우가 성지의 피를 빨아 정기(精氣)를 모으기 위해서 하였다 한다. 만일 당시 성지가 자빠졌으면 하늘의 이치(理致)를 터득하여 천문(天文)에 밝았을 터인데, 땅을 보고 엎어졌으므로 지리(地理)에 능(能)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성지도사는 명풍(名風)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2) 공처마을이 생긴 뒤 마을 내에 재난(災難)이 잇달아 일어나자 동신제(洞神祭)를 지내왔으나 마을 주민들은 불안하여 이 마을을 계속 떠났다. 그리고 제사(祭祀)가 중단되니 다시 재해가 일어나므로 동네 장정 열 사람이 마을 앞에 있는 돌비석을 옮겨와 세우고 제사를 지내니 잠잠해졌다.
그 후 비석이 서 있는 이 곳에 밭을 일구기 위해 비석을 넘어뜨려 구렁텅이에 처박았는데, 돌비석을 넘어뜨린 그 사람은 인적(人的), 물적(物的) 등 많은 피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마을에는 다시 재앙(災殃)이 찾아오고 흰 강아지 모양의 물체가 마을을 돌아다녀 공포(恐怖)에 떤 주민들이 다시 그 비(碑)를 세우고 정성(精誠)을 드려 제사를 지내니 아무런 재해가 오지 않았다.
1960년대 새마을운동 이후부터는 관심이 없어져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있으나 지금도 그 비(碑)는 마을 앞에 그대로 서 있고 이 주위를 “돌비거리”라 부르고 있다.
이 곳 공처마을에는 농민의 애환(哀歡)과 향토색이 짙은 “공처농요”(公處農謠)가 전래되어 오고 있다. 낙동강 연안의 노동요로 두레농사를 할 때 부르던 노래로 한때는 영농방법(營農方法)이 기계화로 변함에 따라 중단되었으나 1980년대 들어 양삼억, 이용식 두 노인의 기억에 의하여 재생되어 지금까지 전수되고 있다.
모심기소리부터 논매기, 걸채, 타작소리 및 칭칭이 소리까지 폭 넓게 5구절로 짜여져 있으며, 순수성과 소박성이 곁들여진 모음이 최대 개구음에서 최소 개구음으로 순차적으로 반복되는 것이 특징이다. 1992년도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최우수(最優秀) 대통령상(大統領賞)을 수상한 경상북도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 제10호이다.
부 처 댕 이
ㅇ 위 치 : 예천군 풍양면 공덕3리(봉림)
ㅇ 내 용
봉림서 남서 간으로 약 500m 지역 산기슭에 고려시대에 있었다는 돌 미륵집 초가(草家)가 있었는데, 1945년 경 공처의 권씨라는 젊은 청년이 땔나무를 하러 가서 나무할 것은 없고 해서 그만 이 집의 지붕과 이엉과 석가래를 여러 차례 뜯어 가져감으로 그 후 집이 없어졌고, 돌 미륵집을 뜯은 젊은 청년은 가운(家運)이 기울어 강원도로 떠났다고 한다.
큰 물이 지면 낙동강(洛東江)의 잉어가 이 곳까지만 올라오고 더 올라가지는 않았는데, 임장군 묘(林將軍墓)와 미륵(彌勒)의 영향이라고 믿었다. 또한 어느 날 소 도둑이 그 앞을 지나가다가 발이 떨어지지 않아 주위를 살피니 미륵이 있는지라 그 미륵의 머리를 떼어내니 걸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개간(開墾)으로 머리는 없어졌고 좌대(座臺)와 모체(母體)가 따로 흩어져 있다.
처녀(處女) 총각(總角)바위
ㅇ 위 치 : 예천군 풍양면 청운3리
ㅇ 내 용
마을 앞 2단계 양수장(揚水場)이 있는 곳에서 10미터쯤 북쪽으로 두 아름드리 정도의 약간 크고 작은 바위 2개가 있었는데, 이 바위는 한 마을에 사는 처녀(處女)와 총각(總角)이 죽도록 사랑하였으나 부모(父母)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결혼(結婚)을 못하자 죽어 바위로 변한 것이라 한다.
최근 도로 확장 공사 때 묻히게 되자 마을 사람이 횡사(橫死)를 당하는 등 재앙(災殃)이 잇따라 일어나므로 그 바위를 다시 찾아내어 지성(至誠)을 드리곤 했다. 그러다가 1994년 도로확장포장 공사로 완전히 묻혀 이제는 찾을 길이 없다. 이 바위 부근을 장사축와형국(長蛇逐蛙形局)의 지세(地勢)라는 전설도 내려오고 있다.
용 두 정(龍頭亭)
ㅇ 위 치 : 예천군 풍양면 와룡2리
ㅇ 내 용
1500년대 초(初) 경주(慶州) 손씨(孫氏) 달관공(達觀公)이 서동에 정착한 후 물 좋고 산 좋은 와룡산(臥龍山)의 용머리에 해당하는 부위에 정자(亭子)를 짖기 위하여 삽을 꼽자 붉은 피가 흘러나오므로 10보쯤 뒤에 되는 곳에 지금의 “용두정”(龍頭亭)을 세웠다고 한다.
와룡산(臥龍山) 아래에 있는 식수정(食水井)에 물을 길러간 처녀(處女)를 지나가던 중이 업어갔다 하여 그 샘을 “중샘”이라 하고 그 앞들을 “업은골 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쇠 구 덩 산
ㅇ 위 치 : 예천군 풍양면 효갈2리
ㅇ 내 용
효갈리 뒷산에는 칼산(칼형국으로 생긴 산)이라는 산이 있다.
이 산 중허리에 쇠를 다루던 곳이 있다 하여 “쇠구덩산”이라 하였으며, 지금도 이 곳에는 붉은 쇠흙이 나온다.
또한 이 마을을 개척(開拓)한 임효자(林孝子)는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앓아 누운 부친을 위하여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지성으로 병을 낮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으며,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부친(父親)이 수박을 먹고 쉽다 하여 수박을 구하고자 이 마을 뒷산 산등성이를 올라가 제사(祭祀)를 드리자 수박 한 덩이가 생겼다 하여 이 곳을 “수박등”이라 부르고 있다.
삼강(三江)의 회화나무
ㅇ 위 치 :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ㅇ 내 용
삼강리 낙동강 변(洛東江邊)에 수령이 600년 넘은 회화나무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쯤 강 건너 상주군의 한 목수(木手)가 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면 사고(事故)도 나지 않고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하여 이 나무를 베려고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왔다. 마을에서는 이 나무가 마을을 지키는 영험스러운 나무라고 하여 베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이 목수는 말을 듣지 않았다.
톱과 연장을 가지고 와서 나무 밑에 놓고 그늘도 좋아 잠시 쉴겸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백발(白髮)을 날리는 노인이 ?づ립ご醮? “나는 나무의 신(神)으로 만약 이 나무를 해치면 네가 먼저 죽으리라.” 하니 꿈에서 깨어나자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이 곳 삼강(三江)은 낙동강(洛東江), 내성천(乃城川), 금천(錦川)이 합쳐지는 지점으로 물이 맑고 넓은 백사장(白沙場)이 어우러진 곳으로 예전에는 나루터가 있어 영남(嶺南) 남쪽에서 서울로 가는 물류(物流)를 대부분 이 곳까지 운반하여 많은 사람들이 내왕(來往)하여 주막 등 상거래가 성행하였다.
또한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의 유업을 기리고 후학(後學)을 양성하기 위하여 삼강강당(三江講堂)이 있는 등 역사적 정취가 살아 숨쉬는 자연 그대로의 경관(景觀)이 뛰어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