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천절날 태어났다는 이유로 이름이 개천(開天)이 된 건축가가 있다. 너무 큰 의미를 가진 이름탓이었을지, ‘무엇이 하늘을 여는 것인가.’라는 하늘에 대한 관심은 늘 하늘을 바라보게 했다. 그리고 하늘에 떠있는 구름을 쳐다보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구름은 신비롭고 환상적이었으며, 변화무쌍하고 자유자재해보였다. 차츰 커가면서 그 구름이 주는 조형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구를 품기 시작했다. 그 꿈은 차츰 건축가의 꿈으로 커져갔다.
그런데 ‘무엇이 건축인가.’ 막상 건축가가 되기로 작정을 했지만 이것은 또 다른 그의 화두가 되었다. 스물네 살이 되던 해부터 미국 로스엔젤레스, 알래스카,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설계사무소와 건설 현장, 학교 등지를 10년 가까이 떠돌며 건축구도생활을 하였다.
젊은 시절에는 중동 건설현장에서 설계를 맡기도 했다. 알래스카 감옥 을 3년 동안 작업할 때는 감방 신세가 따로 없었다고 한다. 동양철학은 그의 작업의 바탕이다. 최근 찾아낸 최고의 미는 ‘명묵(明默)의 건축`. `밝은 침묵`, 없음과 있음이 공존하는 침묵이야말로 `지고의 미`라 고 그는 여긴다.
.........................
평창동 '중암'은 다른 건축가가 설계하기도 하고, 고치려고 공사하다가 6~8달 지연되었다. 늦가을에 현장에 가니 바람 많고 큰 바위가 있었다. 안팔리는 땅, 편치않은 땅이었다. 건축주가 원하는 호텔 같은 분위기가 땅과 맞지 않았으나, 풍광이 좋아 땅의 단점을 건축이 보완하는 방향으로 설계하였다. 집이 우주의 중심으로 느껴지게. 어디에 있든 중심처럼.
건축주는 담장을 집과 같은 돌로 붙이자는 것만 어렵게 수용했고 다른 것은 잘 받아들였다. 심지어 “건축이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하는지 아는가, 남편이 건강해졌다, 사람을 건강하게 하고 정신을 자유롭게 하는 집이다. ”라고 주변에 이야기한다. 그런 면에서는 깐깐한 건축주가 더 낫다. 납득이 가게 설득하면 받아들이기 때문에. 시각적으로는 특별할 게 없는 집이다. 새로운 형태는 아니지만, 우연히 방송국 사람들과 인연이 되어 파리의 연인의 회장집, 봄날의 원장 집으로 나왔다.
집이 살아있기를 원한다. 건축이 사람을 가르친다. 절이 법문을 하기를 원한다.(정토사의 경우) 집이 곧 자연이다. 구부릴 수 없는 직선. 성과 속이 동시에 공존. 들어오는 순간 집이 보이지 않는다.(계단) 건축이 공간이 아니기를 원한다. 건축주, 땅의 입장을 생각한다.
땅을 1m 낮추어 돌을 더 드러냈다. 건축이 자연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 자연에 입문세계를 보태야 한다. 소나무를 바라보는 풍경이 좋아서 바닥과 식탁 유리에 나무그림자가 비치도록 했다. 장소마다 자연이 다르게 느껴지게 했다. 철학, 종교, 예술이 함께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성을 이야기할 때 무엇이 다른가보다 무엇이 같은가를 같이 알야야 한다고 생각한다.
............................................
평창동 산기슭 높은 곳에 위치한 중암은 건축주가 두 번이나 건축가에게 신축 설계를 의뢰했다가 결국은 원래 있던 주택을 고쳐 쓰려고 공사중이었다. 가서 보니 구조적으로 훼손이 많이 되어 신축하는 것이 오히려 안전하고 경제적일 것이라고 말하였다. 대지의 한가운데 있는 넓은 바위 위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사면이 급경사의 낭떠러지로 둘러싸여 험한 느낌을 주고 있었고 높은 지대로 인해 바람이 유난히 세게 불었다. 중앙에는 풍수적으로 손을 대면 화를 입을 수 있다는 거북바위가 자유로운 형식의 건축을 설계하고자 하는 건축가에게 손대기 힘들 것이라는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는 듯 버티고 있었다. 바위 위에서 천연으로 자라고 있는 연약한 몇그루의 소나무들을 바라보니 이 땅이 왜 오랫동안 팔리지 않고 있ㅇ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주택 부지와는 다른 어려운 입지조건에 난감하기도 했지만 거북바위와 소나무들을 함께 건축적 장치로 사용하면 오히려 자연과 자유로운 연계성을 이룬 건물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 땅의 장점은 사방으로 넓게 혹은 가까이 펼쳐진 주변의 산세이다. 좌우의 산 사이로 보이는 먼 하늘과 여의도까지 바라보이는 원경, 설계에 따라 천지를 품고 우주의 중심에 있는 자연의 중암(中庵) 같은 곳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간을 만드는 일반적인 설계가 아니라 우주의 묵묵함과 밝음 그대로 말이 없는 건축이라야 이 땅과 주변의 조건을 효과적으로 충족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북서쪽의 진입부분은 급경사의 낭떠러지였다. 여기 옹벽을 쌓아 건물을 최대한 도로방향으로 위치시켰다. 그렇게 해야 건물 주변 사방으로 각각의 특색 있는 정원을 가질 수 있으면서 대지의 중앙에 있는 거북바위를 자연스럽게 동쪽에 위치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건물 주변으로 각각의 다른 정원이 자리잡았다. 남쪽의 전정과 동쪽의 내정, 그리고 북쪽의 후정과 서쪽의 진입로 방향의 화계정원과 길이 생기며 대지는 각각 다른 표정을 가진 여러 개의 정원을 갖추면서 복합적이고 단순한 전체가 되었다.
도로변 서쪽의 높은 곳에 위치한 건물로 인해 도로 진입로에서부터 거대한 옹벽으로 인해 큰 저택처럼 보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대지 안으로 들어오면 집이 보이지 않는다. 이 집에 들어온 사람은 집과 대지의 규모를 실제보다 두배 정도의 크기로 느끼나 사실 집 자체는 큰 집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큰 매스를 단순화하여 공중에 높이 떠 있는 듯하여 진입로에서는 시각적 건축이 아닌 체험적 이미지로 전환하게 하였다. 중암은 형태보다는 각각의 외부 정원을 어떻게 상호소통할 것인가 사라진 경계가 아니라 어떻게 경계를 통합하고 무화(無化)시켜 내-외부에서 삶을 북돋을 수 있을 것인가가 관심이었으며 그러한 건축이 이땅과 더욱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이유들로 높고 가파른 대지를 1m 가량 파서 전체를 낮게 하였다. 전체 대지가 암반인 관계로 힘든 결정이었지만 그로 인하여 거북바위는 더욱 크게 드러나고 진입로의 경사도를 편안하게 만들고 주변의 자연을 안정적으로 보이게 하였다. 이 땅을 사려다 사지 않았던 분이 준공 후 이집에 와서 에전에는 이렇게 편안하고 넓지도 않았으며 전망이 이렇게 좋을 줄 몰랐는데 어떻게 변한 것인가 라며 아쉬워한 경우를 보았다. 건축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동시에 건축으로 인하여 자연은 인간에게 풍요로워진 것이다.
건물을 사각형으로 배치하여 최소한의 건축으로 최대한의 대지를 확보하였다. 주동선에서 건물은 항상 측면으로 비켜나 있어 자연스레 건물의 정면을 쳐다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오히려 자연이 드러나며 건물은 자연에 묻혀 드러난다. 건축의 형태를 드러내는 시각적 이미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형태를 드러내지 않을 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듯 존재하며 비워있듯 느껴지는 사각으로 실재는 하나 형태를 가지지 않으려 한 것이다. 건물의 내부에서도 구획하는 확정적 공간의 경계는 없고 멀리 있는 자연까지도 포섭한 무한으로 변화하는 경계의 우주로 느껴지도록 계획하였다.
이집에서 가장 좋은 전망이 될 것이라 생각한 바위 위의 소나무를 보면서 멀리 북악 스카이웨이의 팔각정을 바라보는 경치가 첫째라는 생각으로 거실을 배치했다. 식당의 경우 산이 휘어감고 도는 위치에 배치하여 마치 산중의 숲속에서 식사를 하는 것과 같이 느껴지게 했다. 자녀방의 경우도 침대에 누우면 수평으로 긴 뒷면의 창과 측면 창에 가득한 소나무로 인해 마치 나무숲에 누운 것처럼 느끼게 하는 등 모든 장소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마치 자연을 포용한 무한공간의 가운데 있는 듯 체감되는 평면을 설계하였다. 딱히 복도가 없으나 모든 장소는 길인 동시에 실이 된다. 실이 하나의 주된 기능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적이고 상대적으로 설정하여 공간의 기능이 사람을 제한하기 보다는 사람이 공간 속에서 자유로워지게 하였다. 그것은 변화이기 보다는 기의 흐름에 대한 관심으로 집 전체에 기를 생생하게 소통하게 하여 몸을 자유롭고 건강하게 하고자 한 배려였다.
처음 이 집을 설계하기 전 건축주는 자녀의 구성과 결제적인 조건 등을 제시하면서 선호하는 디자인을 설명하기 위해 약 30여장의 사진을 건네주었다. 사진들은 대체적으로 세련된 디자인인 동시에 호감이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개인적으로 건축주의 선호도 만족시켜야한다고 생각하였기에 사진들 중 몇장의 디자인이라도 참고하려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 장의 사진도 사용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러한 디자인을 하였다면 고급호텔과 같은 분위기에 적절히 세련된 디자인의 집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집에 사는 사람을 건강하고 자유롭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준공할 때 건추주는 이런 얘기를 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한 곳이 한 곳도 없다고. 처음 집을 설계 의뢰했을 때 상상했던 집하고는 다른 집이나 오히려 만족스럽다”고 했다. 화려한 것 같지 않으나 화려하고 적조하지 않은 듯 고요하다는 것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이 집은 들어오기만 하면 잠이 온다. 그리고 밖에 나가고 싶지 않게 만들어 친구들과 멀어지겠다”고 웃었다. 이 집에 3년 정도를 살아보니 왠지 모르게 몸이 건강해지는 것 같고 집이 날마다 변화하는 것 같아 한번도 지겹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여러 번 고사하였으나 ‘파리의 연인’의 회장댁과 ‘봄날’의 원장댁으로까지 유명 연속극에 연속해서 나올 정도로 방송사에서 촬영하기를 원하여 촬영비도 많이 받아 집이 돈까지 벌어다준다 하였다. 살아있는 집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돈까지 벌어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리고 해질녘 거실의 높고 긴 창으로 보이는 바위 위의 소나무와 북악산의 팔각정이 보이는 전망이 당신도 좋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나 역시 이 대지에서 가장 좋은 광경으로 설계 당시 생각하여 거실의 배치와 창의 모습을 그렇게 디자인하였는데 건축주 역시 같이 느꼈다니 아마도 좋은 것이란 전문가와 비전문가 모두를 공통적으로 즐겁게 하는 힘이 있어야 하는가 보다.
건축주....
원래 살던 역삼동 주변에 다세대주택들이 계속 들어서 집을 옮길 결심을 했다. 1년 동안 땅을 보러 다녔다. 용인 같은 경기도 쪽까지 나가보다가 세컨 하우스 개념이 아니라 그냥 서울 시민으로 살자고 생각하고 평창동, 성북동을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엔 방배동의 빌라를 하나 보니 3층이 10억인데도 바깥 전망이 좋지 않았다. 4층은 1억을 더 주어야 하고, 그나마 전망 좋은 쪽은 3억을 더 주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다 평창동 땅에 와 보니 전망이 사방으로 탁 트인 것이 전망 값만 12억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바로 이 땅이다 하고 한달을 기다려 땅을 샀다.
처음엔 승효상 씨에게 의뢰했는데, 땅을 건드릴 수 없다고 해서 다른 건축가들 몇 명의 안을 받아보았다. 김개천 씨는 알고 지내던 목수로부터 소개를 받았다. 처음 만나 포트폴리오를 보고 디자인이 전위적이라 나와는 안맞는다고 생각하였지만, 설계해 온 평면을 보니 가장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벽돌로 지은 집, 말하자면 세미 클래식 스타일을 원했는데, 20년 후를 생각하고 모던 스타일로 가자고 김개천 씨가 설득했다. 그래서 처음에 내가 보여준 100여장의 사진들을 거의 활용하지 못했다. 요구했던 부분은 2층과 1층의 패밀리 룸을 오픈하는 것과 창을 많이 내자는 것, 그리고 소리의 서큘레이션(순환)이 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창문마다 뷰가 다르고 정서가 달라서 좋다. 처음 이사를 온 날 아들과 새벽 세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각 방의 뷰를 보며 마음이 뛰어서 좋았기 때문이다.
김개천 씨가 좋았던 것은 당시 44세라는 나이, 한참 전성기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고, 그가 말하는 ‘명묵의 공간’, 밝으면서도 품격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 내 성격과도 맞았다. 내가 어렸을 때 시골에 살았는데, 세살쯤이던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식구들이 모두 들에 일하러 나가고 없었다. 무서운 마음에 울고 싶다가 갑자기 아무도 없는 황토 마당에 햇볕이 내리쬐는 모습이 황홀했다. 그런데, 집을 짓고 나서 1년 후 쯤에 김 소장이 조선일보에 실은 글을 보니 김 소장도 명묵의 공간이라 하여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잘 맞아 좋은 집을 짓게 된 것 같다.
이 집을 밖에서 볼때 순백의 아름다움이 좋다. 드라마 찍자는 요청이 많이 들어왔다. 천국의 계단은 밖에서만 찍고 갔고, 파리의 연인과 봄날은 정원에서 찍었다. 한번 촬영을 하면 30여명의 스탭들이 출입하는 터라 집안은 공개하지 못했다. 다만 마당의 거북바위에 모두 올라앉아 쉬곤 했다.
이 동네에 이사오자 마자 반장을 맡게 되었다. 내가 와서 3개월에 한번씩 부부동반 반상회를 하고, 1년에 한번 부부동반 망년회를 열었다. 여기는 눈 쌓인 모습이 가장 좋은데, 신기한 것은 눈 걱정을 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보면 벌써 누가 집 앞의 눈을 다 치워 출근하기에 아무 불편함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 가장 좋은 풍경은 눈 온 풍경이고, 비가 많이 올 때도 좋다. 안개 낀 모습도 좋고, 화창한 날은 그 다음이다. 말하자면 가장 안좋을 때 오신 셈이다.
마당에는 별도로 2000만원을 들여 산책로를 조성했다. 그냥 비탈진 땅이라 놔두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테지만, 산책로를 만들어 뒷마당끼리 연결하니 너무 좋았다. 소쇄원 같은 정원을 참고했다.
의견 충돌이 있었던 부분은 벽지가 가장 컸다. 나는 무늬 있는 화려한 벽지를 하고 싶었는데, 김소장은 돌과 어울리는 깨끗한 한지 벽지를 하고 싶어했다. 내가 강하게 주장하자 한발 물러섰다가 다시 얘기하고 다시 얘기하고 해서 세 번째 말이 나오자 내가 물러섰다. 그렇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집을 짓고 후회한 것은 식당에서 보이는 뒷마당의 소나무 한 그루를 정원사가 트랙터가 들어오려면 옮겨야 한다고 해서 앞쪽으로 옮겼는데, 결국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김소장도 옮기지 말라고 했는데, 굳이 옮겼던 것이 후회된다. 또 부엌의 작은 창에서 바라다보이는 풍경이 아주 좋았는데, 그 역시 문으로 바꾸었더니 전혀 느낌이 달라져서, 그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다른 불만은 전혀 없다.
집을 짓는데 약 1년이 걸렸다. 비가 많이 왔다.
방송국에서 150억짜리 집으로 알고 있길래 아니라고 했더니 그럼 100억짜리 집이냐고 다시 묻는다. 그도 아니라고 했더니 그럼 50억짜리 집이냐고 한다. 그래서 굳이 대답을 안했다. 촬영 당시 에피소드는 그때 박신양 씨를 초대해서 식사를 같이 했는데, 집이 소리의 울림이 좋아서 동생이 노래를 불러, 박신양 씨의 답가를 들었다. “사랑해도 될까요” 바로 그 노래다.
여기 와서 공간에 맞추어 남편도 바뀌었다.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라 무뚝뚝했는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 꽃을 가꾸고 텃밭에 물을 주기도 하고, 소소한 심부름도 해준다. 집이라는게 라이프 스타일을, 인생을 바꾸어준다는 걸 알았다. 역삼동집은 백색에 원목이 섞여 마감된, 한때 꽤 유행했던 스타일이었다. 사실 집을 지은 건 남편이 외국 가 있을 때 저지른 일이었다.
종교적으로 이렇게 많이 누려도 되는가에 대한 생각에 이사오기 전 기부를 하기도 했다. 처음 들어올 때 마당이 평평하지 않고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어 걱정했으나, 하나님이 내게 내리신 은총을 흘러내리게 한다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