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인터뷰
문학․출판사(史)에 빛난 시단의 사랑방지기
―강나루에서 만난 시인 이상개
손화영
시인이자 출판사 대표로서 부산 문단의 저변 확대를 위해 힘써 온 이상개 시인을 탐방의 두 번째 인물로 정했다.
1960년대 문단활동을 시작해서 이제는 부산 시단의 굵직한 역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시와 자유 그리고 잉여촌의 동인이며 부산의 제1세대 출판사라고 할 수 있는 ‘빛남’의 대표 이상개 시인은 문학과 출판을 함께 이야기해야 했다. 과거 부산에서 발간되는 작품집들의 상당부분이 빛남을 통했고, 아울러 굴곡진 부산 시단의 흐름을 한 눈으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소박하고 정갈한 소금 같은 시인, 맛과 멋의 밀도 있는 조화를 진정한 시의 본질로 삶에 치열하게 맞서며 펼치는 시인의 내면세계는 고뇌와 격정에서 관조와 달관의 세계로 몰입하는 시집 그대로였다. 그런 기질이 있었기에 문학에 있어서는 견고함과 착실함을 그리고 ‘빛남’으로 오랜 세월 탄탄하게 하나의 궤적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번 작가탐방에는 황선열 편집주간, 손화영 시인이 함께 했다. 시인을 만나기로 한 곳은 중앙동 빛남출판사가 있었던 그 언저리 백산기념관 뒷골목의 강나루였다. 부산의 문인들에게 중앙동은 ‘이상개 시인의 빛남출판사’로 오랫동안 통했고 출판사는 바로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었다. 지금은 동광동에 터를 잡은 강나루가 ‘빛남’ 이후 뒤를 이어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장소의 여건상 인터뷰는 푸른별 사무실에서 진행이 되었고 시인은 조용히 말을 아끼며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을 해주었다.
인터뷰는 70년대부터 90년대의 부산시단을 회고하는 것으로 동인 활동, ‘빛남’을 위시한 시인이나 시집 등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형식으로 엮어나갔다.
편집부 이번에 창릉문학상(2010)을 수상한 시집 詩, 난중일기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특히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는데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요.
이상개
사실 장군의 위대한 업적이나 평가는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 부분은 제가 다루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장군의 인간적인 면이나 보통사람의 입장에서 다루어 보고 싶었습니다. 이를테면, 일기 내용과는 상관없이 일기 속에서 나오는 한 마디의 말, 하나의 행동에서 시로 재구성을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훨씬 저에게 편안함을 안겨주었던 것 같습니다.
10년이란 기간은 정해 놓고 쓴 게 아닙니다. 처음 시작할 땐 2~3년 안에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게으름도 있었고 또 병행해서 「일본 X파일」이란 시도 쓰고 있었기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편집부 시선집이 「소금을 뿌리며」입니다. 이번 시집에서 ‘소금은 흔하지만 금보다도 귀한 것/…중략…/오늘은 소금을 굽자’(소금을 구우며 중에서)에 보듯이 오랜만에 ‘소금’이 등장하는데요. 시인에게 ‘소금’은 어떤 의미인지요.
이상개 예로부터 소금을 뿌리면 액막이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소금은 옛날부터 신성시 되어왔습니다. 잡귀가 들지 못하도록 또는 부정 타지 않도록 소금을 뿌리는 것은 지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 소금은 인간이나 동물에게 꼭 필요한 영양소입니다. 물론 과다 섭취하면 부작용이 옵니다. 또 음식을 만들 때 간을 맞추기도 하고 소독하는 데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고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만큼 흔한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너무 흔하고 가까이 있다 보니 소금의 고마움을 모릅니다. 너무 흔하지만 귀한 것, 그것이 소금입니다. 사실 보석보다 귀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저는 소금이 신성하다, 깨끗하다, 순수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인간의 순수한 감정이나 양심을 대변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인간 생활 측면이나 정신 생활 측면에서 꼭 필요한 영양소로 우리 인간의 육체를 기르고 정신을 정화시켜주는 것은 바로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이 제 내면 깊숙이 박혀 있다고 봅니다.
편집부 첫 시집 영원한 평행(1970) 이후 15년 만에 만남을 위하여가 출간되었습니다. 첫 시집 이후 상당히 긴 시간의 공백이 있는데, 공백의 이유가 있었다면 무엇이며 공백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이상개 1970년 첫 시집 발표 후 두 번째 시집까지의 시간이 조금 길었는데, 그 때에 저는 직장이 부산에 있다가 서울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 동안 준비를 해서 내려고 했으나 직장이 왔다갔다 할 때였고, 직업 때문에 여기저기 떠돌아 불안정한 생활을 한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작품활동에만 매달릴 수도 없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책을 내기가 어려웠습니다.
사실 두 번째 시집은 서울에서 내려고 했었습니다. 마침 국제신문 서울지사장으로 와 계신 이형기 선생의 서문까지 받았는데 못 내고 있다가 다시 부산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결국 부산에서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서문을 써주신 해가 1977년이었는데 막상 시집은 1985년에야 간행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각 시집인 두 번째 시집은 애착이 많이 갑니다. 이 기간을 나로서는 공백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양이 아니라 질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저로서는 최선을 다한 셈입니다. 모자라는 것은 역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편집부 처음 시를 쓰게 된 계기가 있으셨는지요. 또한 영향을 받은 시인이나 작품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이상개 고등학교 때 우연한 기회에 학생들의 응모시를 발표한 것을 보았는데 어쩌면 나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시를 쓰기 시작한 동기가 되었는데 지금은 영 손을 놓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시를 쓰기 전엔 소설이 쓰고 싶어 소설책을 많이 보았고 오히려 시는 교과서 외의 것은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저의 첫 작품은 교지에 실린 단편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영향을 받은 시인으로는 그 당시 청록파 시인인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시인들이었고 그 외는 한용운, 김소월, 김춘수 등의 시인들이었습니다. 나중에 당시를 번역한 이원섭 시인의 당시신역(唐詩新譯)이란 책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책이 저를 이끌어 주기도 했고 무엇보다 저를 혁신시켜 주었습니다.
편집부 지금까지의 발표 시집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집이나 작품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이상개
두 번째 시집인 「만남을 위하여」는 그때 서문을 썼던 이형기 선생께서 특별히 「신인간론」을 추켜세워 주셨습니다. 특히 「만남을 위하여」란 시는 제가 절망적일 때 저를 바로잡고 힘을 돋우기 위해 쓴 시로 저는 이 시를 기둥으로 세우곤 주문같이 외우면서 살았습니다. 이 시가 저를 위로하고 힘을 주었고 저를 지켜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외우는 시도 이것이 유일한 것 같습니다.
추천작품 중의 하나인 「주형제작」은 광물이나 기계도 얼마든지 시로 쓸 수 있음을 보여준 본보기가 아닌가 합니다. 「선반공 김씨」, 「김씨의 허리띠」, 「철사를 위하여」, 「대장장이 김씨」, 「용접불꽃을 보며」 등이 있습니다. 또 다른 면의 시는 참여시와 서정시 정도인데 서정시로서는 「함양에서」, 「꽃」, 「햇볕에 타는 시」, 「태산목」 등이 있겠습니다.
일곱 번째 시집인 「파도꽃잎」은 공을 들인 탓인지 애착이 가는 시집입니다. 이 시집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선정한 ‘2006 우수문학도서’에 끼이게 되었습니다.
편집부 부산의 시문학사를 말할 때 시와 자유에 대한 얘기를 빼놓을 수는 없는데요. 시인이 활동하고 있는 동인지 시와 자유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이상개 시와 자유 동인지는 1982년에 창립이 됐다. 시와 자유가 처음 창립총회를 연 것은 1982년 8월 24일 광복동 보리수다방에서였습니다. 이때 창립회원은 김석규, 김영준, 박응석, 박태문, 이해웅, 임수생 등 여섯 명이었습니다.
저도 이때 같이 동인활동을 하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참여할 입장이 못 됐습니다. 그 당시 저는 1964년부터 잉여촌이라는 시동인을 결성하여 활동을 하고 있었고 동인으로 두 곳에 가입한다는 것은 양심상 허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다 한 곳이라도 제대로 하면 몰라도 두 곳을 해나간다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잉여촌이 휴간되면서 1988년 시와 자유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1982년 12월에 창간호가 나왔는데 이형기 시인이 추가로 합류했다가 2집부터 빠졌습니다. 1983년 김창근이 입회했고 84년에는 김철, 85년 박상배, 88년 이상개가 입회했습니다. 이때부터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 수혜를 받아 비교적 수월하게 동인지를 냈습니다.
1991년 10집 발간 기념으로 도서출판 빛남에서 동인 대표시 10편씩 모아 「걸어오는 산」을 간행하였습니다. 1992년에는 동인 박태문이 세상을 떠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993년에는 박태문 추도의 밤 행사를 영광도서에서 가졌습니다. 동인지 20집은 대표작과 신작을 묶어냈습니다. 2011년 30집 특대호로 대표작과 신작을 10편씩과 산문을 묶어 펴냈습니다.
현재까지 장수한 동인지로 남아있으며 각종 문화상 수상자와 각종 단체장을 가장 많이 배출한 까닭에 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만한 관록이나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봅니다.
펀집부 앞서 했던 질문에 덧붙여서 여쭙고자 합니다. 이번에 시와 자유 제30집으로 특대호가 나왔는데 어떤 계기로 발간하게 되었으며 이번 호가 그전까지 나왔던 호와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
이상개 시와 자유 30집은 동인활동 30주년을 계기로 2011년 30집 특대호로 대표작 10편이나 신작 10편씩과 산문을 묶어 펴낸 것입니다. 김석규, 김창근, 임수생 시인의 경우엔 신작만 실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엔 기계나 공구, 광물 계통에 관한 시를 모아보았습니다.
늘 대표시라고 하며 싣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방향을 바꿔 보았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이 제겐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질문명, 기계에 대한 반대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물질문명을 옹호하는 쪽입니다. 기계가 가지고 있는 정직성, 인간은 상황에 따라 거짓말도 하고 변하기도 하지만 기계는 정직하게 대하면 정직한 그대로더라는 것입니다. 도덕관념은 없을지 몰라도 인간이 대해주는 만큼 기계는 거짓을 모르고 배신할 줄 모릅니다. 이런 순수함을 저는 서정성과 연결 짓고 싶었습니다. 결국 시의 본질은 서정시입니다.
새가 자유로운 것처럼 동인들도 모두 제 각각으로 개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시나 새나 같은 것이 아닐까요. 대개 자유의사에 맡기고 간섭하는 일도 없습니다. 이제는 해체하자는 이도 있으나 지속하자는 이도 있습니다. 일단 30집을 발간했으니 차후도 별 변동이 없을 것입니다.
편집부 부산의 문학출판사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빛남출판사의 대표로서 부산출판의 대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동안 시집 외 다수의 출판물을 발간하셨는데 빛남출판사의 역사를 짚어서 말씀해 주신다면요.
이상개 출판사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랜 관록을 지닌 제일문화사, 연문출판사, 아성출판사, 태화출판사 등이 있었습니다. 빛남은 1988년 7월 16일자로 사업자 등록을 했습니다. 부산 중구 중앙동2가 49번지-31. 제가 빛남이란 출판사를 등록할 시기 이전엔 출판사 등록이 좀 까다로웠습니다. 인쇄부속품을 만들던 저는 그 업을 처남에게 물려주고 따로 출판사를 차리기로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군사정권시절이라 출판사 등록은 아예 낼 엄두도 못냈습니다. 1987년 6․29 선언이 있고부터 조금씩 완화되었습니다. 이 때 등록을 한 것입니다.
처음엔 인쇄시설까지 갖췄으나 인쇄기술자가 애를 먹이는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렸습니다. 초창기엔 출판사가 희소가치 때문인지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그래선지 빛남에서는 여러 분야의 책을 발간했습니다. 특히 문학은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다양하게 출판했습니다. 그 중에 시집이 제일 많았던 것 같습니다.
빛남시선은 1988년 임수생의 절실함은 무엇인가를 시작으로 99번까지 발간하였습니다. 사실 시선 외 발간한 시집이 오히려 더 많았습니다. 그 이후 거의 20년간 외길을 달려 왔으나 손을 놓고 말았습니다. 여건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 사이 400종 정도 발간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일근 시인이 사무실을 같이 쓰면서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 당시 시와 자유 동인들을 비롯해서 남녀노소 시인들이 들락거리면서 한때는 활기차게 움직였습니다. 젊은 시인들 중에 정일근, 강영환, 김형술, 배재경, 최영철 시인 등이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기획출판도 하면서 지방에까지 판로를 개척하려고 했으나 의욕과 달리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또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이 많이 찾아와 격려와 조언에다 일감까지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빛남’은 문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해나갔습니다. 책의 종수처럼 문학뿐만 아니라 자연 인문과학 등 출판할 수 있는 것은 다 손을 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남는 것은 씁쓸한 회상만 남겼습니다. 역시 시집이 가장 많았고 소설 수필 아동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만들어냈습니다.
대부분 자비출판이 주로였던 출판 현황이었습니다. 1993년은 출판의 해였습니다. 그래서 ‘봉생문화상’(출판부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단기간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했다는 뜻에서 힘을 실어준 것 같았습니다.
여기서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지평의 문학≫(나중에 ≪문학지평≫으로 바뀜)을 계간으로 발행하였습니다. 통권 14권으로 기억합니다. 해양문학가인 김성식 시인과 천금성 작가를 집중 조명했던 것이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따로 신인을 뽑지 않고 작품이 좋으면 싣는 방식을 택하되 편집위원들이 엄격하게 심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신인은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너무 심하게 했던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기업주의 광고가 끊기면서 잡지 발간도 힘들어졌습니다. 게다가 고료를 지급했으니 오래 갈 리 만무했습니다.
군사정권이 사라지자 출판사 규제는 풀렸을 뿐만 아니라 신고만하면 즉각 접수됐고 빨리 처리되었습니다. 출판사도 많이 생겼고 젊고 새로운 기술이 출판 환경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컴퓨터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저는 이쯤에서 손을 놓기로 작정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데, ‘그래라’였습니다. 제가 보관했던 출판물들을 아예 이참에 요산문학관에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저로서는 보관할 장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자료로 남기기 위해서 보내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참 잘했다고 여깁니다.
기억에 남는 책들도 있습니다. 김인배, 김문배 형제가 쓴 일본서기 고대어는 한국어, 정진채가 쓴 아동독서지도법은 독자들이 꾸준히 찾는 책이었습니다. 시집도 꽤 많이 발행했으나 박태문 시전집과 한찬식 시전집 발간은 기억에 오래 남을 것입니다.
편집부 시인이 회고하는 부산 시단은 어떠했는지요. 등단 무렵부터 현재까지 부산 시단의 흐름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동인 활동 또한 활발했을 텐데요. 또한 향후 부산 시단의 흐름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이상개 제가 부산에 살기 시작한 것은 1976년 겨울부터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 1963년 가을부터 1년간 부산에서 공부하느라 1년을 보내 적이 있습니다. 이때는 제가 군대에서 막 제대를 했을 때입니다. 그 당시 군대에 가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참에 내성적인 성격을 뜯어고치자고 마음먹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했습니다.
제대 후 기술연수원에서 1년간 공부를 했는데 취직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저는 너무 건강을 과신했습니다. 밤낮도 모를 정도로 혹사를 했는데 자취를 하던 때라 먹는 것도 신통할 리 없었습니다. 64년 여름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으면서 몸이 영 시원찮아 병원에 갔더니 영양실조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니 20대에 영양실조라니요! 당장 보따리를 싸들고 귀향하고 말았습니다.
그즈음 1964년 오하룡, 조남훈, 이상개, 유 근 등이 주축이 되어 잉여촌 시동인지를 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처음 군대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끈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때 시문학이라는 시전문지에 투고를 해서 2회의 추천을 받았습니다. 다시 조리를 한 후 나는 진해에 있는 해군군무원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황선하 시인과 당시 육군대학에 근무하고 있던 이수익을 만났습니다. 진해의 방창갑, 채정권, 박재동, 배기현 등과 같이 진해문협을 결성하였습니다.
잉여촌 시동인지는 1964년 서울 흥농종묘주식회사 출판부에 근무하던 오하룡에 의해서 빛을 봤습니다. 창간호는 등사판으로 찍었고 2집부터는 활판으로 나왔습니다. 동인들의 참여가 나중에 전국적으로 번져 서울, 부산, 마산, 진해, 울산, 제주, 경주 등으로 확대되었습니다. 1972년 10집 발간을 계기로 틀이 잡혀졌습니다.
활동이 뜸해질 무렵 1991년 동인지에서 뽑아 「잉여촌선집」(1964~1985)을 엮고는 휴면기에 들어갔습니다. 환갑을 전후하여 다시 기지개를 켜고 2004년 복간호 발간을 계기로 매년 동인지를 발간하고 있습니다. 현재 동인들은 경주의 김성춘, 제주의 김용길, 울산의 박종해, 조남훈 장승재, 창원에 오하룡, 배기현 부산에 윤상운, 이상개, 서울에 유자효가 있습니다. 이미 자신들의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부산의 시인들과 교류하게 된 것은 내가 처녀시집을 낸 후 출판기념회를 가지면서였습니다.
1970년 첫 시집 영원한 평행이 나왔습니다. 이 시집도 그 당시 부산여대에 근무하던 친구 손팔주 교수가 다 맡아 만들었고 출판기념회 주선도 그가 도맡아 해주었습니다. 서면 로터리 부근 어느 다방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는데 그때부터 부산의 문인들과 친교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때 당시 부산에 거주하고 있던 문인들은 아마 100명 내외였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 이름은 알고 지내는 정도였습니다.
1972년 부산으로 이주해 온 김인환 시인이 시인들이란 제호로 시전문격월간지를 냈습니다. 부산에서 발간한 전문시지로 지면을 전국에 할애했습니다. 그러나 1974년 1월호(통권 7호)를 내고 문을 닫았습니다. 김규태, 박재호, 허만하 시인이 편집위원을 맡아 상당히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다들 안타까워했습니다.
1976년 창간된 목마 동인은 강남주, 이아석, 이승하, 이문걸, 임명수 등의 동인들이 결성했고 20년 동안 발행되었습니다. 여름시인학교를 처음으로 운영했으며 시낭송회를 개최하여 시 독자 저변확대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동인들이 자주 바뀌어 처음과는 성격이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70년대에도 부산의 시인들은 꾸준히 불어났습니다. 그만큼 활동이 타지역에 비해 왕성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김창근, 박지열, 이달희, 배달순, 박윤기, 이문걸, 신 진, 원광, 강남주, 이상호, 김수경 등으로 알고 있습니다.
90년대 동인지는 더 많이 불어났습니다.
신서정그룹(1990) 갈매기(1992) 서정시 문학(1992) 샘과 가람(1993) 시와 숲(1994) 평행시(1994) 행간(1994) 시전달(1994) 등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1974년 창간된 부산지역 시문학의 대표적인 앤솔로지는 남부의 시였습니다.
부산시인협회의 사화집으로 부산시인들의 작품이 한자리에 발표되는 장으로 역할을 충실히 했습니다. 2003년 여름호부터 제호가 부산시인으로 바뀌어 나오고 있습니다. 매월 나오던 소식지와 남부의 시를 합쳤기 때문입니다. 창간호에 실린 시인은 강남주, 구연식, 김규태, 김상훈, 김성식, 김영준, 김 철, 박윤기, 박응석, 박태문, 배달순, 손경하, 신명석, 양왕용, 원 광, 유병근, 이상개, 이수익, 이승하, 임명수, 임수생, 정대현, 정영태, 정화식, 조 순, 하연승, 하 일, 한찬식, 허만하, 황양미 등 32명이었습니다.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분들도 있고 타 지역으로 가신 분들도 있습니다. 지금 시인들의 숫자는 400명이 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5․7문학회가 있었습니다. 1985년 5월 7일 요산 외 39명의 재부문인들이 만든 단체입니다. 부산작가회의의 전신이 된다. 회보를 발간하고 기관지도 발간했습니다.
≪부산문학≫ ≪문학도시≫ ≪열린시≫ ≪시와 사상≫ ≪신생을 위시하여 ≪시의 나라≫ ≪문예시대≫ ≪시와 수필≫ 등의 잡지가 나오고 있으며 신인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각 협회별로 나오는 기관지에서도 신인들이 등단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이후 80년대 초 50명이었던 시인이 94년에는 170명 이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증가만큼 작품의 수준 또한 성숙했느냐 하는 문제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잡지들이 생기면서 문인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나 어느 정도의 조절도 여과도 없이 쏟아지는 문인으로 해서 문단의 질서에 변동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현상 나쁜 현상도 나타났습니다. 최근에 부산시단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는데 원로가 주축이 되어 전통을 고수하는 남부의 시 시와자유 등과 김준오를 흐름으로 신진시인들이 중심이 된 실험시 위주의 ≪시와사상≫ 그리고 시의 운동 차원에서 새로운 흐름을 말하는 ≪신생≫ 등 입니다. 그래도 원로의 입장에서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시와사상≫ ≪신생≫ 쪽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때는 참여문학의 활동이 왕성할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다시 순수문학으로 회귀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서정시가 기본으로 실험시의 확대, 발전이 되어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편집부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작 경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이상개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우리 문단엔 많은 시인들이 배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시인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영역을 확대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시인이 시를 쓰려는 것보다 시인이 되고자하는 즉 시인의 타이틀을 획득하기 위한 불순한 동기에다 자기 과시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 시인들은 오래 가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한때 시를 쓰는 자세에 있어서 ‘詩心은 天心이다’는 말도 했었습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영악해져 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저는 느꼈습니다. 천심 같은 마음을 지니고 시를 써야 한다고. 예부터 정치인이나 관리, 출세하는 이들이 시부(詩賦)를 모르고는 발붙이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시인으로 거듭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절대로 문인은 시류를 타는 짓은 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말은 어느 개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시문학의 장래를 위해서도 각성해야 할 일입니다. 선배 없는 시인은 있을 수 없고 후배 없는 시인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서로 이끌고 밀면서 아끼고 사랑하는 끈끈한 유대관계가 필요합니다.
편집부 이후에 계획 중인 시가 있으신지요. 앞으로 쓰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
이상개 「일본 X파일」이나 「詩, 난중일기」 등의 테마시를 이제는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창작시와는 거리가 먼 것 같고….
「지금 이 시간」이란 타이틀로 써오고 있는 시가 있습니다. 이것은 시간에 관한 시를 쓴 게 아니라 그 시절 그 때를 각인해 둔 것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시대의 증언이라 할까요. 또 하나는 시간에 관한 시들만 모아서 「지금 이 시간」의 시편들과 함께 묶어볼까 하고 생각 중입니다.
이젠 얽매이고 싶진 않습니다. 훌훌 털고 싶습니다. 그렇게 시를 쓰며 ‘맛과 멋’을 즐길까 합니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인터뷰가 끝나고 우리가 향한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입안이 깔깔하거나/속이 텁텁한 술 마신 다음날이면/중앙동 2가와 인접한/백산기념관 뒤에 있는/중앙대구탕 집으로 간다./이 집의 별미 멸치쌈밥을 먹으려 간다./몸집이 퉁퉁하고 후덕하게 생긴 아줌마가/솜씨 있게 끓여내는 멸치된장찌개와 쌈/그것이 단연 으뜸가는 처방이라고/… (「멸치쌈밥집」 중에서)
‘멸치쌈밥’ 집에 걸려 있는 시는 우리를 그렇게 초대하고 있었다. 정갈하고 소박한 것이 시인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백산기념관 뒷골목은 부산의 중심에 위치해 있지만 그 장소가 갖고 있는 정서는 아무래도 영락없는 항도의 변두리다. 그곳에서 멸치쌈밥과 멸치된장찌개의 맛을 칭송하는 시인의 추천사는 끝이 없었다. 일품인 그 맛에 우리는 끝없이 ‘즐거워예’를 외쳐야 했다.
여흥으로 향한 곳은 강나루터다. 이곳은 들락거리는 문인들, 눌러 살다시피 한 문인들로, 평소에는 뵙기 힘든 원로문인들까지 웬만큼 힘들이지 않고도 볼 수 있는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술시가 무르익어 갈수록 술은 술로 인사를 청했고 불콰해진 이야기는 점점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시인은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작품론
한 도덕적 순결주의자의 시 세계
황선열
1. 관념과 관계의 시적 의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시는 운율의 모방이다’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론의 관점은 호라티우스나 플라톤의 시학에서도 여전히 강조되어 왔다. 서구의 시학은 사물과의 관계보다는 사물의 속성을 분석하는 관점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동양시학의 고전인 시경에서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본성(本性)의 관점을 중시하고 있다. 시경의 육의(六義)는 자아와 사물의 관계를 중시하는 동기감응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 동양시학은 자연의 무늬에서 문장의 의미를 찾고, 그 자연의 위치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상생의 원리를 지향했다. 이는 우리의 고전시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있다. 고려시대 문학의 관점을 논하는 평문에서 기골(氣骨)의 시와 의기(意氣)의 시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사물과 자아의 관계에 있어서 시적 화자가 어떤 관점을 취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처럼 동양시학의 요체는 사물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본성을 발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유협은 ‘시란 영혼과 이성의 조화이며 또한 다스림과 가르침의 조합’(神理共契, 政序相參)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 사물과 사물의 관계, 주객의 가치 체제에 대한 물아일체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동양시학은 자연의 위치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며, 그것은 사물이 놓여진 자리에 대한 사유라 할 수 있다. 사물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위상(位相)이 있으며, 그 사물의 위상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개의 시는 시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관념의 속성에서 사물과의 관계를 탐색하는 동양시학의 관점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관념이 사물에 대한 속성을 탐색하는 작업이라면, 관계의 미학은 사물을 내면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물에 대한 감각을 포착하는 것이 관념이라고 한다면, 사물과 관계를 통해서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관계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이상개의 시는 이러한 관념의 미학에서 관계의 미학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서양시학에서 동양시학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는 끝없는 변화의 도정에 있으면서도 그 변화에 대해서는 민감하지 않다. 주어진 상황을 조용히 관조하면서 세상을 자기 내면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2. 사물과 관념의 포착
이상개의 첫 시집 영원한 평행(아성출판사, 1970)은 대상에 대한 이미지의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이미지는 사물에 대한 사고의 총화에서 일어나는 사유의 덩어리라 할 수 있다. 사물은 이성의 영역에 포착되고 그 사물은 사유의 체계 속에서 시적 의미로 표현된다. 그의 첫 시집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유체계는 기계주의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이는 하나의 사물에 포착된 이미지를 하나의 이미지로 끌고 간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그 이미지에 대응하는 구도를 지닌 이미지를 나란히 두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는 사물에 대한 직선적인 사고이고, 사물에 대한 일정한 관념을 중시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기계주의 사고란, 하나가 일어나면 반드시 그 하나에 상응하는 하나의 결과가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과의 법칙이 정직하면서도 뚜렷하다는 것이다.
70년대의 시대적 상황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보다도 기계에 대한 작가의 체험이 이러한 사유체계를 형성하게 된 동인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살을 딱고 뼈를 깎는 보람은
따분한 침묵을 용해한 체험 뿐
山을 밀고 生成의 숲을 도망쳐 나와
현대의 문지방을 핥는
거세된 계절들
材質은 탄력 있는 자세로 여유 있어도
심장을 도리고
衣裳을 찢어 내면
기초 곡선과 포물선 정점에서부터
변신하는 이데아의 골격이 된다
裸身의 검은 피부가
거칠게도 용광로의 용해열을 꼽아 보다가
하나의 추상으로 자리잡고
어느 후예의 자손은
미묘한 흥분의 틈새에다
독한 소주를 붓고
차라리 천개의 의지로 된 우상 앞에는
퇴색한 삶이 햇살 퉁기리라
孤立의 성벽 헐린
未來를 보는 구도
너부죽이 열을 삼키는 分娩 앞에
숨결과 指紋이 찍긴 화석을 남긴다
―「鑄型製作」 전문
이 시는 1965년 ≪시문학≫에 발표된 등단작이다. 그는 “인간을 못 믿고 인간이 못되고 악랄한 짓을 하는 동안은, 인간이 인간임을 포기한 상황에서 본다면 차라리 기계가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기계를 믿는 까닭은 기계는 인간이 일한만큼 정직하게 보답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은 기계적인 사고를 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주의 사고가 주는 인과의 법칙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는 것만큼 받을 수 있는 정직함이야말로 인간과 대비되는 기계의 속성이다. 이러한 사고는 그가 사물을 관념의 속성으로 보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인용한 시는 주형을 제작하는 과정을 이미지로 포착하여 표현한 시이다. 이미지가 강조되어 있기 때문에 시적 의미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살을 딱고, 뼈를 깎’는 노동은 따분한 침묵만 용해되어 있을 뿐이고, 용광로 앞에서 일한 결과는 제작된 조형물에 숨결과 지문만을 남겨놓을 뿐이다. 주형(鑄型)은 쇳물을 녹여서 형을 뜨는 것이다. 그것은 같은 모양을 반복해서 만들어내기 위한 준비과정이다. 그것을 만들면서 그는 “천개의 의지로 된 우상 앞에는/퇴색한 햇살을 퉁”길 것이라고 맹세한다. 노동의 시간에 남겨진 흔적은 결국 하나의 화석으로 남아 있다. 인간의 존재는 이러한 기계의 속성과 다르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 시는 기계의 속성을 통해서 삶의 속성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주형이 갖추어지면 똑같은 모형을 만들어내는 기계의 속성은 인간이 쉽게 변질되는 속성과 대비되고 있다. 그는 변하지 않는 주형처럼 인간의 마음도 변치 않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직함 때문에 그의 시를 두고 ‘염결성(廉潔性)의 시학’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는 것이 樂일 수도 있지만
사는 것이 樂일 수는 없는
허기진 세월을
땡볕에 못이겨선가
한 아름의 思想들이
꽃잎을 떨군다.
우러러
사무친 恨을
풀길 없는 이 하늘
차갑고 더러운
背信의 강물 위로
노을이 번지는데
아, 살아서 눈 먼 사람들이
죽음인들 바로 보일까
통곡의 벽까지 달려가
피우름을 쏟아 붓고도
번갯불이 갈래갈래 끝에선
번쩍이는 핏방울들,
모든 흔적까지도 삼키고도
오히려 태연할 수 있는 목숨들을 위하여
살아나는 意志의 무덤가에서
죽음을 일깨우는 바람이 인다.
우리에겐
永遠한 平行으로 다스리는 刑罰이란
세월을 누빌 사랑의 물살이 친다.
―「永遠한 平行」 전문
‘영원한 평행’을 달리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 살아서 눈먼 사람들이 맞이하는 죽음이라는 것, 이것이 사람에게 주어진 삶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즐거울 수도 있고 즐거울 수도 없는 삶의 흔적들은 그에게는 삶에 대한 일종의 관념의 세계이다. 세상의 흔적들마저도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죽은 사람들이든, 땡볕에서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든, 그 삶의 모습들은 영원한 평행으로 다스리는 형벌 속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는 현실에 부닥치는 안목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관념의 사유 체계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기계적 삶과 같이 정직하지 않다면, 그것은 어떤 삶이든 영원한 평행의 관념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삶을 보는 관점이 관념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시적 표현방법도 그 의식의 층위를 드러내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삶의 편린이나 사유 체계 속에서 포착된 이미지를 통해서 그가 지향하는 관념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가 출발하는 공간이 이러한 관념의 세계에 놓여 있었다는 것은 사물과의 관계와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기계적 경직성을 맹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직성은 세상을 보는 순정함이라 할 수 있으며, 서정성을 획득하는 근원이라 할 수 있다.
3. 사물의 내면 응시하기
이상개 시의 행보가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지만, 앞에서 언급한 시들은 기계적 사고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관념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면, 그의 시는 서구시학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물은 어떤 속성을 지니게 되고, 그 속성의 근원을 탐색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이러한 관념의 세계만 지향한 것이 아니다. 외려 그의 시는 관념의 미학에서 관계의 미학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물의 내면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에 대한 관념의 사유체계 속에서 벗어나 사물의 관계를 응시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의 열림이라고 할 수 있다. 대상을 바라보고 그 대상과 자신과의 관계 맺기는 사물을 발견하는 새로운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이 관념의 늪 속에서 놓여 있으면 정직하고 순수한 상태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 그 내면의 본질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사물이 존재하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결국 사물과 사물에 대한 관계의 발견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아와 대상의 관계로부터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물의 내면을 응시하는 시적 태도는 관계의 미학을 통해서 사물의 본질을 찾고 동시에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비웃지 못하는 그 말
최후의 등불로 눈먼 길을 밝혀주는 그 말
가르쳐서는 오히려 깨닫지 못하는 그 말
내가 나를 더욱 외롭게 살찌게 하는 그 말
네 목숨 불질러도 살아있는 목숨의 그 말
너와 나 아니면 썩을 뿐인 빛의 그 말
골백번보다는 단 한번으로 넉넉할 그 말
끝내는 주어야하지만 곱게 간직하고픈 그 말
죽음으로도 바꿀 수 없는 따뜻한 그 말
그 말, 그 말, 아 사랑한다는 그 말
―「그 말」 전문
사랑하는 대상과 자신의 관계,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줄 수 있는 대상과 교감하기 위해서 시적 화자는 말을 아끼고 또 아낀다. 결국 사랑하는 대상에게 하고 싶었던 그 말은 ‘사랑한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끝없이 하고 싶은 말이지만, 절제하는 것, 그 말은 관계와의 정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말이다. 그렇게 확인된 존재는 어떤 상황에서도 만나야 한다. 관계의 정립은 그의 내면까지도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그 대상과 이 세상에서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상호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대상과 만난다는 것은 관계에 대한 깨달음을 전제로 한다. 관념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자아의 내면적 울림이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사물과의 관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부드러운 관계를 말하는 것이지,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진 경직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사물을 보는 관점이 바뀌게 되는 계기도 이러한 관계의 인식에서 시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사물을 기계주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계성이 경직함으로 나아가지 않은 까닭은 세상은 강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쇠붙이가 곧고 단단한 줄만 아는
그 똑똑하고 잘난 놈들 만나기만 하면
분통이 터져 끊어진다. 끊어진
마디마디는 총알이 되고 싶다
가로 세로 걸치면 고기 굽는 석쇠가 되고
또는 짐승이나 죄수를 가두는 철망도 되지만
통로를 차단하는 철조망도 되는 철사를
쓸모가 없어졌다고 함부로 푸대접 말라.
단단히 묶어 주는 힘을 선사도 하고
꽉 막힌 구멍을 시원하게 뚫기도 하지만
고무풍선을 찔러도 터지지 않을 만큼
명주실만큼 유연성을 갖고 있는 철사
―「철사를 위하여」 부분
이 시에서 시적 화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철사는 부드러움과 강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철사는 그의 성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 시는 철사라는 사물의 속성을 통해서 그 사물이 지닌 내면의 울림을 읽어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물이 맺고 있는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그 내면의 울림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철사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면 단단함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유연함만으로 세상을 보는 것도 아니다. 단단함과 유연함이 공존하는 것이 세상의 원리이고, 사물의 속성이다. 철사의 내면을 응시하는 눈은 내면의 울림까지 간파하게 되는 것이다. 사물의 진정한 의미는 자아와 철사와의 관계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물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주변의 일에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시집 탱글탱글(푸른별, 2009)에 실린 시편들은 이러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자잘한 주변 일상을 통해서 사물을 관찰하고 그 의미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시적 화자 앞에 펼쳐진 사물에 대해서 깊이 사유하면서 사물과의 관계를 인식하게 되고, 이것은 사물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발견하는 방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주변의 사물을 통해서 사물과의 관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더 나아가 평범한 일상에서 삶의 진실을 발견하고 있다. 이것은 노안(老眼)의 눈에 비친 삶의 원숙함으로도 읽히기도 한다.
산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 새 길 끝이 희미하다
누가 지나온 자취인지
누가 지나간 흔적인지
있는 듯 없는 듯
길은 편안하게 누어있다
어떤 만남의 연줄을 이끌고
하늘로 올라가는 길인지
내려오는 길인지
알 수 없는 길이
―「길에 관한 단상」 전문
이 시는 사소한 일상에서 발견하는 관계에 대한 깨달음을 표현한 시이다. 길과 자신의 관계가 깊은 사유의 체계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는 “시작이 있으니 끝이 있고/끝이 있으니 시작이 있다”(시 「하나」)라는 평범한 관계 속에서도 새로움을 발견한다. 이 발견의 기쁨은 길과 자신과의 관계를 인식하면서부터 비롯한다. 해운대 신도시에 문상을 갔다가 그 많은 아파트 속에서 자신이 거처할 집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든지(시 「내 집이 없다」), 세상에 버려진 하찮은 것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든지(시 「흔한 것이 더 귀하다」)하는 따위는 그가 세상의 사물들이 맺고 있는 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물거리는 햇빛
양지 바른 잔디밭에 고여 끓다가
손 흔들고 뛰어나오면서
눈이 시린 향나무를 걷어찼다
손이 어린 쥐똥나무를 걷어찼다
햇빛은 그만 허리가 뜨금해졌다
햇빛은 그만 오줌을 찔끔거렸다
오줌냄새가 절뚝거렸다
꼬물꼬물 햇빛이 자라고 있었다
햇빛은 겨드랑이를 간질였다
향나무가 엎어지고 쥐똥나무 자빠지고
두 나무의 웃음도 나뒹굴었다
꼬물꼬물 탱글탱글
―「햇빛」 전문
사물의 미세한 떨림의 발견, 내면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것은 그의 시가 지향하는 세계이다. 최근의 시들에서 비교적 많이 발견되는 이러한 사물의 관계성은 그의 시가 동양시학의 관점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햇빛이 나무들을 건드리고, 그 나무들이 햇빛의 장난을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자연과 교감하려는 시인의 섬세한 감성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이 나누는 은밀한 장난을 교감할 수 있다는 것, 그 사물들의 작은 떨림에서 “꼬물꼬물 탱글탱글”한 행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시인이 자연을 응시하는 시적 안목으로 사물과 자아와의 은밀한 소통의 과정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사물에 대한 사유체계가 사물의 내면을 응시하는 태도로 나아가게 하고,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그의 시적 세계가 또 다른 지평으로 향하게 한다. 관계의 미학은 사물과 사물의 관계 속에서 서로 감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시 「햇빛」의 시적 형상화 방법이고, 그의 시가 지향하고 있는 관계의 발견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시는 관념의 사유체계에서 관계의 인식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4. 현실과 관계 맺기
이러한 관계의 발견을 통해서 그는 역사와 현실을 다른 시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시는 역사를 보는 눈과 현실을 보는 눈이 변화하고 있는데, 그것은 일종의 응전과 대응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을 바라보는 태도, 임진왜란 당시 국난의 위기를 구한 이순신을 바라보는 태도, 일본의 속성을 간파하려는 태도는 이러한 응전과 대응의 시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을 곡진하게 전달하고 있는 詩 난중일기는 이러한 관점으로 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집은 난중일기를 통해서 이순신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읽어내려고 한다. 이 연작시는 전쟁의 상황 속에서도 장중하고 근엄한 이순신의 모습을 안정된 율격으로 담아내고 있다. 역사 속의 인물과 그 인물과 교감하려는 시인의 마음이 무엇보다 곡진하게 읽힌다. 연작시 「도공애환」도 역사 속에 죽어간 한 인물의 숭고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詩, 난중일기와 같은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 임진왜란 때 구주(九州)의 가고시마에 끌려간 도공의 후예 심수관과 그의 선조들의 삶에서 조선혼의 진정성을 발견하고 있다. 이들 시들에서 그는 역사 속에서 끝없이 현실과 관계 맺기를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인식은 때론 현실에 대한 인식과 맞물리면서 현실 비판의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인간이 만든 기계의 정직함보다도 못한 인간에 대한 경멸과 반성은 그의 시가 출발하는 지점부터 존재해왔지만, 최근의 시들은 이미지의 관념에서 벗어나 쉬운 시어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한 걸음 다가서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 숙인다는데
쭉정이 벼라
고개 숙일 리 만무하지만
보라
자화자찬하는 자도 문제지만
그걸 신품종이라고
너스레 떨며
부추기고 꼬드기는
그런 놈도 있으니
가관이다 가관
―「벼는 익을수록」 전문
사람의 속성을 벼에 빗대고 있는 시인데, 벼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군상(群像)이 벼보다 못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쭉정이 벼가 문제가 아니라, 그 쭉정이 벼를 두고 자화자찬하거나 신품종이라고 너스레를 떨고 있는 사람이 더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그는 쭉정이가 되었으면서도 반성하기는커녕 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외려 측은함을 느끼고 있다. 그런 인간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가관이다 가관”라는 말로 한탄하고 있다. 진실이 호도되고 있는 세상, 쭉정이가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 대해 그는 일침을 놓고 있다.
귀를 세운 김씨의 김장이 덩달아 펌프질할 때
막간의 휴식을 잡아챈 망치란 놈 발랑 나자빠지며
목소리도 떨군 채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이 든다
시간의 부스러기들이 형광등 가에 모여서 수군거릴 때
공복의 만성위염을 앓는 우리의 기능공인 수리공 김씨
김씨는 다시 한 번 허리띠를 졸라맨다
졸라매지만 허리띠는 안다
김씨가 쓰러지지 않기 위한 제스처임을
―「김씨의 허리띠」 부분
이 시는 소외된 노동자 김씨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한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그는 그들의 삶을 드러내는데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통해서 우리 사회는 새로운 인간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능공인 수리공 김씨의 삶이 너무 팍팍해서 허리띠를 졸라매지만, 그것은 쓰러지지 않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그는 산업현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통해서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하고 있다.
그의 시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 그리고 현실의 문제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것은 오랜 시간 쓴 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소재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소리이긴 하지만, 그의 시가 자연의 섬세한 떨림을 깨달아가듯이,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새로운 시적 의미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게 다가온다.
시집 파도꽃잎(작가마을, 2006) 이후의 시편들은 이러한 사물과 사물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더욱 다양하게 열리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의 시는 관념의 사유체제 속에서 사물을 이해하던 관점에서 벗어나 사물의 내면을 향한 울림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상처가 남긴 흔적, 그것이 나의 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현실에 대한 상처를 치유하면서 새로운 서정시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는 관념의 시에서 리얼리즘 시로 전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염되고 썩은 물이 스크럼을 짜고 흘러간다 흐르는 것은 썩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을 비웃으며 주류를 이룬다
상류 실개천은 간신히 살아 열심히 숨을 쉬며 맑은 정신을 흘러보내지만 주류에 떠밀려 비주류로 전락해 버렸다
아아, 순리를 무시한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주류를 이루며 득실거리는 세상이 된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명심하라
우리는 다만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썩은 물 썩은 인간」 전문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인간이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물이 인간에게 주는 혜택을 무시한 채 살아가는 인간들, 그리고 자연의 순리를 “무시한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그는 혐오감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흐르는 것은 썩지 않아야 하는데도 이 평범한 진리도 지켜지지 않는 오염된 세상이 된 것이다. 이 뿐만 아니다. 인간들의 무지로 예전에는 마실 수 있었던 수돗물이 더 이상 마실 수 없는 ‘수독물’로 바뀌고 말았으며, 사람들은 “바보같이, 수도세를 내면서/생수를 사 마시”고 있는(시 「수독물」) 현실이 되고 만 것이다. 인간이 사는 세상이 이렇게 혼탁하기 때문에 그는 처음부터 기계보다도 못한 것이 인간이라고 일갈하고 있었던 지도 모른다.
인간이 자연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려고 하면서 문제가 생기고, 이 때문에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은 서로 헐뜯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수 십 억대 넘는 돈을 삼켰는데도 그 돈의 행방은 오리무중이고, 백여우 꼬리 같이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남고 마는 세상이 된 것이다.(시 「풀리지 않은 것들」) 인간들이 사는 세상은 비리와 욕망으로 물든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자연의 숭고한 정신에 귀 기울이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 사물과 사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인식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시집 일본 X파일(작가마을, 2009)은 국가와 국가 사이의 문제까지도 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관계의 문제를 등한시하는 일본을 비판하면서 일본의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의 만행까지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히로폰은 마약이다
육체도 정신도 황폐화시키는
언제나 범죄를 꿈꾸는
인류의 영원한 적이다
닛폰은?
―「히로폰」 전문
이 시는 일본의 행태를 ‘히로폰’이라는 말로 응징하고 있다. 일본은 인류의 평화라는 대타의 관점에서 국가를 경영하지 않고, 자국의 이익만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행태는 말 그대로 히로폰과 같은 역할만 할 뿐이다. 육체도 정신도 황폐하게 만드는 나라, 그 일본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증명하는 말은 ‘히로폰’과 유사한 말 ‘닛폰’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이상개의 시는 관념의 의미에서 벗어나면서 새로운 시적 전환을 꾀하게 되었고, 관념의 시에서 구체성의 시로 변화하면서 시적 의미를 심화시키고 있다. 그는 오래된 관념의 사유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적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5. 관계의 발견과 내면의 성찰
이상개의 시는 이미지를 강조하는 시에서 사물의 관계를 중시하는 시로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서양시학에서 동양시학의 원리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관계의 속성을 이미지로 드러내던 시적 방법론이 사물과의 관계를 인식하는 시적 방법론으로 바뀌면서 그의 시는 새로운 의미를 띄게 된 것이다. 그것은 사물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시를 쓰지만
시는 사람을 만든다
사람이 시를 만드는 게 아니고
시가 사람을 만든다
시인은 사람이지만
시는 결코 사람이 아니다
요즈음은 잘못된 시가
잘못된 사람을 만들고 있으니
시를 쓰는 내 자신이
참으로 부끄럽기만 하다
―「시인(詩人)」 전문
시인으로서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반성은 결국 시가 자신의 문제로 돌아온다는 말이기도 하다. 시인은 사물과 감응하고 그 감응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다. 이것은 동양에서 시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일찍이 동양에서는 시란 인간의 감정을 순화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풍속을 교화하는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내면을 다듬는 기능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시가 인격을 도야하기 위한 방편이었듯이, 그는 시를 통해서 내면을 성찰하고 이를 통해서 인격 수양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용한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시를 쓰는 자신이 참으로 부끄럽다고 한다. “시인은 시를 쓰지만, 시는 사람을 만든다”는 이 말은 시가 갖는 교화의 기능을 강조한 말이다. 그런데 잘못된 시가 잘못된 사람을 만들고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 그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부끄러운 것이다. 시대의 소명의식은 시인의 사명이듯이, 시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 시의 목적이듯이, 시인은 시로써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세상을 만들지 못하고 있으니 시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 이러한 자아성찰의 자세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시를 바라보고 있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잊어버리자 모두 놓아 버리자
망가진 몸과 마음은 단정히 추스르고
오로지 깨끗한 마무리로 나를 지우자
―「명(銘)」 전문
이 시를 통해서 그는 자신을 어떻게 담금질해나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처럼 그는 끝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또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바깥 세상을 향한 문제보다는 자신을 향한 반성이 더 집요할 때 세상을 바꾸려는 내적 의지가 생기듯이 그는 자신을 향해서 지켜야할 덕목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제목인 ‘명’은 그릇에 글자를 새기듯이 마음에 새기는 글자를 말한다. 이 시에서 그는 앞으로 그의 시적 세계가 어떤 곳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사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사물의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주는 것이 문장의 시작이듯이, 존재는 늘 정해진 자리에서 가치를 발현하기 마련이다. 그릇에 바른 이름을 새기듯이 자신의 존재에도 바른 이름을 새겨야 한다. 사물의 쓰임이 어떤 것인지를 반드시 살필 필요가 있다. 그 사물의 쓰임에 따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가 시 「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한 존재의미를 밝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의 만물은 쓸모없이 버려진 존재가 없다는 사물의 관계를 명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는 세상 만물의 자리찾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자리는 존재의 의미를 말한다. 모든 사물이 놓여진 자리에 제각각의 몫을 하고 있듯이, 시는 그 존재에 이름을 부여하고 그 자질이 무엇인지를 명명하고 그 덕을 기리는 것이다. 따라서 시는 격물치지의 본질을 찾아가는데 그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에서 그가 밝히고 있는 세상을 향한 존재 가치는 도덕적 순결성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시가 처음부터 강조해온 기계적 속성의 순수성은 여전히 유효하고, 그것은 그의 시적 진실성을 담보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인 것이다. 그는 시를 통해서 자신의 위치에서 세상을 향해 도덕적 순결성으로 살아갈 것을 가슴에 새기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의 시는 완벽한 도덕적 순결성을 지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현대시의 잡다한 행태의 시들과는 그릇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이자 출판사 대표로서 부산 문단의 저변 확대를 위해 힘써 온 이상개 시인을 이번 탐방의 두 번째 인물로 뽑았다.
1960년대 문단활동을 시작해서 이제는 부산 시단의 굵직한 역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시와 자유 그리고 잉여촌의 동인이며 부산의 제2세대 출판사라고 할 수 있는 ‘빛남’의 대표였든 이상개 시인은 문학과 출판을 함께 이야기해야 했다. 과거 부산에서 간행되는 많은 책들이 대부분은 ‘빛남’을 통했고 아울러 굴곡진 부산 시단의 흐름을 한 눈으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소박하고 정갈한 소금같은 시인, 맛과 멋의 밀도 있는 조화를 진정한 시의 본질로 말하는 시인, 부드러운 수식어가 많은 것과 달리 삶에 치열하게 맞서며 펼치는 내면세계는 고뇌와 격정을 퍼붓기도 했는가 하면 지금은 관조와 달관의 세계로 몰입하고 있는시인. 그런 기질이 있었기에 문학에 있어서는 견고함과 착실함을 그리고 ‘빛남’으로 오랜 세월 탄탄하게 하나의 궤적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번 작가탐방에는 황선열 편집주간, 손화영 시인이 함께 했다. 시인을 만나기로 한 곳은 중앙동 ‘빛남’ 출판사가 있었던 그 언저리 백산기념관 뒷골목의 ‘강나루’였다. 부산의 문인들에게 중앙동은 '이상개 시인의 빛남출판사'로 오랫동안 통했고 출판사는 바로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었다. ‘빛남’ 이후 지금은 동광동에 터를 집은 ‘강나루’가 뒤를 이어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장소의 여건상 인터뷰는 ‘푸른별’ 출판사 사무실에서 진행이 되었고 시인은 조용히 말을 아끼며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을 해주었다.
인터뷰는 70년대부터 90년대의 부산시단을 회고하는 것으로 동인 활동, ‘빛남’을 위시한 시인이나 시집 등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식으로 엮어나갔다.
편집부: 이번에 창릉문학상(2010)을 수상한 시집 「詩, 난중일기」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특히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는데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요.
시인: 흔히 소설 무엇무엇이란 책들은 많이 보았다. 시 무엇무엇이란 것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다가 나는 이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읽다가 어느 날 문득 장군이 겪는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을 다루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사실 장군의 위대한 업적이나 평가는 많이 나와 있다. 그런 부분은 내가 다루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군의 인간적인 면이나 보통사람의 입장에서 다루어 보고 싶었다. 이를테면 일기 내용과는 상관없이 일기 속에서 나오는 한 마디의 말, 하나의 행동에서 시로 재구성을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이 훨씬 나에게 편안함을 안겨주었던 것 같다.
10년이란 기간은 정해 놓고 쓴 게 아니다. 처음 시작할 땐 2~3년 안에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게으름도 있었고 또 병행해서 「일본 X파일」이란 시도 쓰고 있었기에 그렇게 되었다.
편집부: 시선집이 「소금을 뿌리며」입니다. 이번 시집「시, 난중일기」에서 ‘소금은 흔하지만 금보다도 귀한 것/…중략…/오늘은 소금을 굽자’(<소금을 구우며>中)에 보듯이 오랜만에 ‘소금’이 등장하는데요. 시인에게‘소금’은 어떤 의미인지요.
시인: 예로부터 소금을 뿌리면 액막이가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소금은 옛날부터 신성시 되어왔다. 잡귀가 들지 못하도록 또는 부정 타지 않도록 소금을 뿌리는 것은 지금도 다를 바가 없다. 또 소금은 인간이나 동물에게 꼭 필요한 영양소이다. 물론 과다 섭취하면 부작용이 온다. 또 음식을 만들 때 간을 맞추기도 하고 소독하는 데 이용하기도 한다.
우리가 모르고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만큼 흔한 것이기도 하다. 사실 사람들은 너무 흔하고 가까이 있다 보니 소금의 고마움을 모른다. 너무 흔하지만 귀한 것 그래서 소금은 귀한 것이다. 사실 보석보다 귀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래서 나는 소금은 신성하다, 깨끗하다, 순수하다는 것과 인간의 순수한 감정이나 양심을 대변하고 있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소금은 꼭 필요한 영양소로 없어서는 안된다. 우리 인간의 육체를 기르고 정신을 정화시켜주는 것은 바로 소금이다.
이런 점들이 내 내면 깊숙이 박혀 있다고 본다.
편집부: 첫 시집 「영원한 평행」(1970) 이후 15년 만에 「만남을 위하여」가 출간되었습니다. 첫 시집 이후 상당히 긴 시간의 공백이 있는데, 공백의 이유가 있었다면 무엇이며 공백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시인: 1970년 첫 시집 발표 후 두 번째 시집까지의 시간이 조금 길었는데, 그 때에 나는 직장이 부산에 있다가 서울에 있을 때였다. 그동안 준비를 해서 내려고 했으나 직장이 왔다 갔다 할 때였고, 직업 때문에 여기저기 떠돌아 불안정한 생활을 한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작품 활동에만 매달릴 수도 없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책을 내기가 어려웠다.
사실 두 번째 시집은 서울에서 내려고 했었다. 마침 국제신문 서울지사장으로 와 계신 이형기 선생의 서문까지 받았는데 못 내고 있다가 다시 부산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결국 부산에서 출판하게 되었다. 그때 서문을 써주신 해가 1977년이었는데 막상 시집은 1985년에야 간행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각 시집인 두 번째 시집은 애착이 많이 간다.
이 기간을 나로서는 공백으로 보지 않는다. 양이 아니라 질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셈이다. 모자라는 것은 역부족이라고 생각한다.
편집부: 처음 시를 쓰게 된 계기가 있으셨는지요. 또한 영향을 받은 시인이나 작품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시인: 고등학교 때 우연한 기회에 학생들의 응모시를 발표한 것을 보았는데 어쩌면 나도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시를 쓰기 시작한 동기가 되었는데 지금은 영 손을 놓지 못하게 됐다.
사실 시를 쓰기 전엔 소설을 쓰고 싶어 소설책을 많이 보았으나 시는 교과서 외의 것은 잘 알지도 못했다.
나의 첫 작품은 교지에 실린 단편으로 기억하고 있다.
내가 영향을 받은 시인으로는 그 당시 청록파 시인인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시인들이었고 그 외는 한용운, 김소월, 김춘수 등의 시인들이었다.
나중에 당시를 번역한 이원섭 시인의 「당시신역(唐詩新譯)」이란 책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책이 나를 이끌어 주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를 혁신시켜 주었다.
사실 한시는 직역을 하면 너무 딱딱하다. 그리고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 책의 번역은 마음에 쏙 들었다. 여기서 두보와 이백을 비롯한 당나라 시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심기일전하여 나는 내 갈 길을 스스로 닦아나가기로 결심했다.
편집부: 지금까지의 발표 시집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집이나 작품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시인: 지금까지 10권의 시집을 냈고 시선집 1권을 냈다. 사실 시선집은 회갑기념으로 후배들이 만들어 준 것이다. 나는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다음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100편 이내로만 골라서 시선집으로 엮고는 나머지는 모두 없애고 싶다. 100편도 욕심이겠지만.
시선집 「소금을 뿌리며」엔 6권의 시집에서 골라낸 것들이고 실리지 않은 시집들로는 창작 시집인 「탱글탱글」, 「파도꽃잎」과 테마시집으로 「詩, 난중일기」, 「일본 X파일」이 있다.
두 번째 시집인 「만남을 위하여」는 그때 서문을 이형기 선생께서 써 주셨는데 특별히 <신인간론>을 추켜세워 주셨다.
특히 <만남을 위하여>란 시는 내가 절망적일 때 나를 바로잡고 힘을 돋우기 위해 쓴 시로 나는 이 시를 기둥으로 세우곤 주문같이 외우면서 살았다. 이 시가 나를 위로해주었고 힘을 주었고 나를 지켜주었다. 그래서 외우는 시도 이것이 유일한 것 같다.
추천작품 중의 하나인 <주형제작>은 광물이나 기계도 얼마든지 시로 쓸 수 있음을 보여준 본보기가 아닌가 한다. <선반공 김씨>,<김씨의 허리띠>,<철사를 위하여>,<대장장이 김씨>,<용접불꽃을 보며> 등이 있다.
또 다른 면의 시는 참여시와 서정시 정도인데 서정시로서는 <함양에서>,<꽃>,<햇볕에 타는 시>,<태산목> 등이 있겠다.
7시집 「파도꽃잎」은 공을 들인 탓인지 애착이 가는 시집이다. 이 시집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선정한 [2006 우수문학도서]에 끼이게 되었다.
편집부: 부산의 시문학사를 말할 때 시와 자유에 대한 얘기를 빼놓을 수는 없는데요. 시인이 활동하고 있는 동인지 시와 자유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시인: 시와 자유 동인지는 1982년에 창립이 됐다. 시와 자유가 처음 창립총회를 연 것은 1982년 8월 24일 광복동 보리수다방에서였다. 이때 창립회원은 김석규, 김영준, 박응석, 박태문, 이해웅, 임수생 등 6명이었다.
나도 이때 같이 동인활동을 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참여할 입장이 못 됐다. 그 당시 나는 1964년부터 잉여촌이라는 시동인을 결성하여 활동을 하고 있었고 동인으로 두 곳에 가입한다는 것은 양심상 허락지 않았다. 그런데다 한 곳이라도 제대로 하면 몰라도 두 곳을 해나간다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잉여촌이 휴간되면서 1988년 시와 자유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1982년 12월에 창간호가 나왔는데 이형기 시인이 추가로 합류했다가 2집부터 빠졌다. 1983년 김창근이 입회했고 84년에는 김철, 85년 박상배, 88년 이상개가 입회했다. 이때부터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 수혜를 받아 비교적 수월하게 동인지를 냈다.
1991년 10집 발간 기념으로 도서출판 빛남에서 동인 대표시 10편씩 모아 「걸어오는 산」을 간행하였다. 1992년에는 동인 박태문이 세상을 떠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93년에는 박태문 추도의 밤 행사를 영광도서에서 가졌다. 동인지 20집을 대표작과 신작을 묶어냈다.
2011년 30집 특대호로 대표작과 신작을 10편씩과 산문을 묶어 펴냈다.
현재까지 장수한 동인지로 남아있으며 각종 문화상 수상자와 각종 단체장을 가장 많이 배출한 까닭에 말이 많았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만한 관록이나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펀집부: 앞서 했던 질문에 덧붙여서 여쭙고자 합니다. 이번에 시와 자유 제30집으로 특집호가 나왔는데 어떤 계기로 이번에 특집호를 발간하게 되었으며 이번 호가 그전까지 나왔던 호와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
시인: 시와 자유 30집은 동인활동 30주년을 계기로 대표작 10편이나 신작 10편씩을 싣기로 했던 것이다. 김석규, 임수생 시인의 경우엔 신작만 실었다.
나 같은 경우엔 기계나 공구, 광물 계통에 관한 시를 모아보았다.
늘 대표시라고 하며 싣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방향을 바꿔 보았다. 오히려 이런 것이 내겐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물질문명, 기계에 대한 반대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물질문명을 옹호하는 쪽이다. 기계가 가지고 있는 정직성, 인간은 상황에 따라 거짓말도 하고 변하기도 하지만 기계는 정직하게 대하면 정직한 그대로더라는 것이다. 도덕관념은 없을지 몰라도 인간이 대해주는 만큼 기계는 거짓을 모르고 배신할 줄 모른다. 이런 순수함을 나는 서정성과 연결 짓고 싶었다. 결국 시의 본질은 서정시다.
새가 자유로운 것처럼 동인들도 모두 제 각각으로 개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시나 새나 같은 것이 아닌가. 대개 자유의사에 맡기고 간섭하는 일도 없다. 이제는 해체하자는 이도 있으나 지속하자는 이도 있다. 일단 30집을 발간했으니 차후도 별 변동 없을 것이다.
편집부: 한때는 부산의 문학출판사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빛남출판사의 대표로서 부산출판의 대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동안 시집 외 다수의 출판물을 발간하셨는데 빛남출판사의 역사를 짚어서 말씀해 주신다면요.
시인: 출판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 관록을 지닌 제일문화사, 연문출판사, 아성출판사, 태화출판사 등등이 있었다.
1988년 7월 16일자로 사업자 등록을 했다. 부산 중구 중앙동2가 49번지-31.
내가 빛남출판사를 등록할 시기 이전엔 출판사 등록이 좀 까다로웠다.
인쇄부속품을 만들던 나는 그 업을 처남에게 물려주고 따로 출판사를 차리기로 했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군사정권시절이라 출판사 등록은 아예 낼 엄두도 못 냈다. 1987년 6.29 선언이 있고부터 조금씩 완화되었다. 이 때 등록을 한 것이다.
처음엔 인쇄시설까지 갖췄으나 인쇄기술자가 애를 먹이는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렸다.
초창기엔 출판사가 희소가치 때문인지 그런대로 잘 돌아갔다.
그래선지 빛남에서는 여러 분야의 책을 발간했다. 특히 문학은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다양하게 출판했다. 그 중에 시집이 제일 많았던 것 같다.
빛남시선은 1988년 임수생의「절실함은 무엇인가」를 시작으로 99번까지 발간하였다. 사실 시선 외 발간한 시집이 오히려 더 많았다.
그 이후 거의 20년간 외길을 달려 왔으나 손을 놓고 말았다. 여건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 사이 400종 정도 발간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정일근 시인이 사무실을 같이 쓰면서 많이 도와주었다. 그 당시 시와 자유 동인들을 비롯해서 남녀노소 시인들이 들락거리면서 한때는 활기차게 움직였다. 젊은 시인들 중에 정일근, 강영환, 김형술, 배재경, 최영철 시인 등등이 많이 도와주었다. 기획출판도 하면서 지방에까지 판로를 개척하려고 했으나 의욕과 달리 현실은 냉정했다.
또 친구들이나 서 후배들이 많이 찾아와 격려와 조언에다 일감까지 가져다주었다. 그런 와중에 ‘빛남’은 문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해나갔다.
책의 종수처럼 문학뿐만 아니라 자연 인문과학 등 출판할 수 있는 것은 다 손을 댔던 것 같다. 그러나 남는 것은 씁쓸한 회상만 남겼다.
대부분 자비출판이 주로였던 출판 현황이었다.
1993년은 출판의 해였다. 그래서 [봉생문화상](출판부문)을 받기도 했다. 단기간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했다는 뜻에서 힘을 실어준 것 같았다.
여기서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지평의 문학(나중에 문학지평으로 바뀜)을 계간으로 발행하였다. 통권 14권으로 기억한다. 해양문학가인 김성식 시인과 천금성 작가를 집중 조명했던 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따로 신인을 뽑지 않고 작품이 좋으면 싣는 방식을 택하되 편집위원들이 엄격하게 심사를 했다. 그래서 신인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너무 심하게 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기업주의 광고가 끊기면서 잡지 발간도 힘들어졌다. 게다가 고료를 지급했으니 오래 갈 리 만무했다.
군사정권이 사라지자 출판사 규제는 풀렸을 뿐만 아니라 신고만하면 즉각 접수됐고 빨리 처리되었다. 출판사도 많이 생겼고 젊고 새로운 기술이 출판 환경을 바꾸어 놓았다.
컴퓨터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나는 이쯤에서 손을 놓기로 작정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데,‘그래라’였다.
나는 내가 보관했던 출판물들을 아예 이참에 요산문학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나로서는 보관할 장소도 없었다. 그래서 훗날 자료로 남기기 위해서 보내고 말았다. 지금도 참 잘했다고 여긴다.
기억에 남는 책들도 있다. 김인배, 김문배 형제가 쓴 일본서기 고대어는 한국어, 정진채가 쓴 아동독서지도법은 독자들이 꾸준히 찾는 책이었다. 시집도 꽤 많이 발행했으나 박태문 시전집과 한찬식 시전집 발간은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편집부: 시인이 회고하는 부산 시단은 어떠했는지요. 등단 무렵부터 현재까지 부산 시단의 흐름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동인 활동 또한 활발했을 텐데요. 또한 향후 부산 시단의 흐름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시인: 내가 부산에 살기 시작한 것은 1976년 겨울부터다.
그러나 그 이전 1963년 가을부터 1년간 부산에서 공부하느라 1년을 보내 적이 있다. 이때는 내가 군대에서 막 제대를 했을 때다. 그 당시 군대에 가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이참에 내성적인 내 성격을 뜯어고치자고 마음먹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제대 후 기술연수원에서 1년간 공부를 했는데 취직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너무 건강을 과신했다. 밤낮도 모를 정도로 혹사를 했는데 자취를 하던 때라 먹는 것도 신통할 리 없었다. 64년 여름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으면서 몸이 영 시원찮아 병원에 갔더니 영양실조라는 진단을 받았다. (아니 20대에 영양실조라니?) 당장 보따리를 싸들고 귀향하고 말았다.
그즈음 1964년 오하룡. 조남훈, 이상개, 유 근 등이 주축이 되어 잉여촌 시동인지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처음 군대에서 만났다. 그러나 그 끈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때 나는 시문학이라는 시전문지에 투고를 해서 2회의 추천을 받았다. 다시 조리를 한 후 나는 진해에 있는 해군군무원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황선하 시인과 당시 육군대학에 근무하고 있던 이수익을 만났다. 진해의 방창갑, 채정권, 박재동, 배기현 등과 같이 진해문협을 결성하였다.
잉여촌 시동인지는 1964년 서울 흥농종묘주식회사 출판부에 근무하던 오하룡에 의해서 빛을 봤다. 창간호는 등사판으로 찍었고 2집부터는 활판으로 나왔다. 동인들의 참여가 나중에 전국적으로 번져 서울, 부산, 마산, 진해, 울산, 제주, 경주 등으로 확대되었다. 1972년 10집 발간을 계기로 틀이 잡혀졌다.
활동이 뜸해질 무렵 1991년 동인지에서 뽑아 「잉여촌선집」(1964~1985)을 엮고는 휴면기에 들어갔다. 환갑을 전후하여 다시 기지개를 켜고 2004년 복간호 발간을 계기로 매년 동인지를 발간하고 있다. 현재 동인들은 경주의 김성춘, 제주의 김용길, 울산의 박종해, 조남훈 장승재, 창원에 오하룡, 배기현 부산에 윤상운, 이상개 서울에 유자효가 있다. 이미 자신들의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부산의 시인들과 교류하게 된 것은 내가 처녀시집을 낸 후 출판기념회를 가지면서였다.
1970년 첫 시집 영원한 평행이 나왔다. 이 시집도 그 당시 부산여대에 근무하던 친구 손팔주 교수가 다 맡아 만들었고 출판기념회 주선도 그가 도맡아 해주었다. 서면 로터리 부근 어느 다방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는데 나는 그때부터 부산의 문인들과 친교를 갖게 되었다. 그 때 당시 부산에 거주하고 있던 문인들은 아마 100명 내외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서로 이름은 알고 지내는 정도였다.
1972년 부산으로 이주해 온 김인환 시인이 시인들이란 제호로 시전문격월간지를 냈다. 부산에서 발간한 전문시지로 지면을 전국에 할애했다. 그러나 1974년 1월호(통권 7호)를 내고 문을 닫았다. 김규태, 박재호, 허만하 시인이 편집위원을 맡아 상당히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다들 안타까워했다.
1976년 창간된 목마 동인은 강남주, 이아석, 이승하, 이문걸, 임명수 등의 동인들이 결성했고 20년 동안 발행되었다. 여름시인학교를 처음으로 운영했으며 시낭송회를 개최하여 시 독자 저변확대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동인들이 자주 바뀌어 처음과는 성격이 많이 변한 것 같다.
70년대에도 부산의 시인들은 꾸준히 불어났다. 그만큼 활동이 타지역에 비해 왕성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김창근, 박지열, 이달희, 배달순, 박윤기. 이문걸, 신진, 원광, 강남주, 이상호, 김수경 등등으로 알고 있다.
80년대에는 동인지가 많이 발행되었다. 그리고 무크지 지평과 전망의 발행이 있었다.
절대시 열린시 시와 자유 시와 인간이 주축을 이루었다.
90년대 동인지는 더 많이 불어났다.
신서정그룹(1990) 갈매기(1992) 서정시 문학(1992) 샘과 가람(1993) 시와 숲(1994) 평행시(1994) 행간(1994) 시전달(1994) 등으로 기억하고 있다.
1974년 창간된 부산지역 시문학의 대표적인 앤솔로지는 남부의 시였다.
부산시인협회의 사화집으로 부산시인들의 작품이 한자리에 발표되는 장으로 역할을 충실히 했다. 2003년 여름호부터 제호가 부산시인으로 바뀌어 나오고 있다. 매월 나오던 소식지와 남부의 시를 합쳤기 때문이다. 창간호에 실린 시인은 강남주, 구연식, 김규태, 김상훈, 김성식, 김영준, 김 철, 박윤기, 박응석, 박태문, 배달순, 손경하, 신명석, 양왕용, 원 광, 유병근, 이상개, 이수익, 이승하, 임명수, 임수생, 정대현, 정영태, 정화식, 조 순, 하연승, 하 일, 한찬식, 허만하, 황양미 등 32명이었다.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분들도 있고 타 지역으로 가신 분들도 있다. 지금 시인들의 숫자는 400명이 넘는 걸로 알고 있다.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5ㆍ7문학회가 있었다. 1985년 5월 7일 요산 외 39명의 재부문인들이 만든 단체이다. 부산작가회의의 전신이 된다. 회보를 발간하고 기관지도 발간했다.
부산문학 문학도시 열린시 시와 사상 신생을 위시하여 시의 나라 문예시대 시와 수필 등의 잡지가 나오고 있으며 신인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외에도 각 협회별로 나오는 기관지에서도 신인들이 등단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80년대 초 50명이었던 시인이 94년에는 170명 이상이 되었다.
그러나 시인의 증가만큼 작품의 수준 또한 성숙했느냐 하는 문제를 남기게 되었다.
새로운 잡지들이 생기면서 문인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나 어느 정도의 조절도 여과도 없이 쏟아지는 문인으로 해서 문단의 질서에 변동이 생기기 시작했다. 좋은 현상 나쁜 현상도 나타났다.
최근에 부산시단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는데 원로가 주축이 되어 전통을 고수하는 남부의 시,시와자유 등과 김준오를 흐름으로 신진시인들이 중심이 된 실험시 위주의 시와사상 그리고 시의 운동 차원에서 새로운 흐름을 말하는 신생 등이다.
그래도 원로의 입장에서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시와사상,신생 쪽이 아닌가 싶다.
한때는 참여문학의 활동이 왕성할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다시 순수문학으로 회귀하는 것 같다. 그것은 서정시가 기본으로 실험시의 확대, 발전이 되어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인 것이다.
편집부: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작 경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시인: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우리 문단엔 많은 시인들이 배출되고 있는 실정이다. 시인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영역을 확대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시인이 시를 쓰려는 것보다 시인이 되고자하는 즉 시인의 타이틀을 획득하기 위한 불순한 동기에다 자기 과시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된 시인들은 오래 가지 못하고 사라진다.
한때 시를 쓰는 자세에 있어서 ‘詩心은 天心이다’는 말도 했었다. 요즘은 시를 쓰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쓰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세상이 어지럽고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영악해져 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나는 느꼈다. 천심 같은 마음을 지니고 시를 써야 한다고. 예부터 정치인이나 관리, 출세하는 이들이 시부(詩賦)를 모르고는 발붙이지 못했다.
진정한 시인으로 거듭 태어나야 할 것이다.
또한 절대로 문인은 시류를 타는 짓은 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말은 어느 개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시문학의 장래를 위해서도 각성해야 할 일이다.
선배 없는 시인은 있을 수 없고 후배 없는 시인도 있을 수 없다. 선후배는 이끌고 미는 사이, 아끼고 사랑하는 끈끈한 유대관계가 필요하다.
편집부: 이후에 계획 중인 시가 있으신지요. 앞으로 쓰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
시인: 「일본 X파일」이나 「詩, 난중일기」 등의 테마시를 이제는 쓰지 않으려고 한다. 아무래도 창작시와는 거리가 먼 것 같고….
「지금 이 시간」이란 타이틀로 써오고 있는 시가 있다. 이것은 시간에 관한 시를 쓴 게 아니라 그 시절 그 때를 각인해 둔 것이라 보면 될 것 같다. 말하자면 시대의 증언이라 할까.
또 하나는 시간에 관한 시들만 모아서 「지금 이 시간」의 시편들과 함께 묶어볼까 하고 생각 중이다.
이젠 얽매이고 싶진 않다. 훌훌 털고 싶다. 그러면서 시를 쓰며 ‘맛과 멋’을 즐길까 한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 잡지,동인지- /작품집-「」 /작품-<> 표기
인터뷰가 끝나고 우리가 향한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입안이 깔깔하거나/속이 텁텁한 술 마신 다음날이면/중앙동 2가와 인접한/백산기념관 뒤에 있는/중앙대구탕 집으로 간다./이 집의 별미 멸치쌈밥을 먹으려 간다./몸집이 퉁퉁하고 후덕하게 생긴 아줌마가/솜씨 있게 끓여내는 멸치된장찌개와 쌈/그것이 단연 으뜸가는 처방이라고/…<멸치쌈밥집> 中
‘멸치보쌈’ 집에 걸려 있는 시인은 우리를 그렇게 초대하고 있었다. 정갈하고 소박한 것이 시인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백산기념관 뒷골목은 부산의 중심에 위치해 있지만 그 장소가 갖고 있는 정서는 아무래도 영락없는 항도의 변두리다. 그곳에서 멸치쌈밥과 멸치된장찌개의 맛을 칭송하는 시인의 추천사는 끝이 없었다. 일품인 그 맛에 우리는 끝없이 즐거워예를 외쳐야 했다.
여흥으로 향한 곳은 강나루터다. 이곳은 들락거리는 문인들, 눌러 살다시피 한 문인들로 평소에는 뵙기 힘든 원로문인들까지 웬만큼 힘들이지 않고도 볼 수 있는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술시가 무르익어 갈수록 술은 술로 인사를 청했고 불콰해진 이야기는 점점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시인은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
첫댓글 작가사회의 이상개 시인의 집중조명, 성의가 있어보입니다. 이런 시각의 조명이 계속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