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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할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연세가 많기는 하나 증조부는 당신의 증조부와 당신의 증손 사이에 접속사처럼 살아 있다. 할머니는 내게 물으셨다. 아기가 증조부 말씀을 기억하면서 오래 살아 제 증손에게 이 이야기를 전한다면, 증손자 돌날 아기 안고 덕담하던 증조부의 증조부는, 이런 덕담 속에서나마 도대체 몇 년을 더 사는 셈이 되느냐? 선후(先後)를 요량하며, 중간에서 잘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열다섯 살 처녀 때 임금님께 샘물 한 바가지 올리고 들은 치하 말씀 한마디가 그만 너무 황송하여 80 평생을 그 임금님 생각하며 홀로 그 샘을 지키다 세상 떠난 '새미 할매'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우리 할머니 말씀을 생각했다. 1960년대 후반, 나는 그 '새미 할매'와 한 울타리 안에서 두 해를 살았다. '새미 할매'에게, 냉수라면 나도 여러 그릇 떠다 바친 사람이다. 그러니까 고종인지 순종인지는 모르겠으되, 좌우지간 나는, '새미 할매'로부터 샘물 한 바가지 얻어자신 임금님과 나는 무관한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 샘물 한 바가지 떠올린 '새미 할매'와는 무관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 할머니 말씀 되새기면서 나는 조선의 끄트머리 임금님들은 물론, 선대의 여러 임금님들과도 무관한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새미 할매'는 왕조 시대와 현대를 잇는 접속사같은 분이었던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과 무엇의 접속사로 살고 있는가? 그런 눈으로, 선후를 요량하면서 살고 싶었다.(주. 역시 같은 책인
『내 시대의 초상』에,「샘이 너무 깊은 물 」이라는 제목으로 '새미 할매'에 대한 글이 있음)
정초에 고향을 다녀왔다. 이장이 전화를 걸어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마을 회관이 지어져 드디어 개관하게 되었는데, 내려와서 술이라도 한잔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뭘 준비해 가면 좋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군(郡)이 예산을 배정해 준 덕분에 회관이 지어지기는 했는데, 안에 살림살이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서 필요한 것을 딱딱 부러지게 적시(摘示)할 형편이 아니라고 했다. 아무련 그럴테지, 싶었다.
내 고향 마을은 윌 집안의 선산(先山) 자락에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선산 관리해주는 고종형이 고향 마을에 살고 계시기는 하다. 그러나 고종형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 형제들은 고향 마을 사람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짓을 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쓴다. 조금 심하게 심중 소회를 피력하자면,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 조상 모신 선산은 볼모와 같다. 조상 산소를 볼모로 잡힌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약하다. 이장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 개개인에게 매우 약하다. 그래서 봉투 좀 두껍게 만들어 가슴에 품고 내려갔다.
마을에 젊은이가 없으니 마을 회관은, 실제로는 노인 회관이었다. 고향 마을의 가옥 구조는 현대식이 아니다. 거의 대부분이 조선 시대 아니면 일제 시대에 지어진 것들이다. 하지만 마을 회관은 현대식이다. 마을 회관에 모인 사람들은, 구식 가옥과는 구조가 다른 현대식 회관에서 새로운 시대를 그렇게라도 경험하고 떠날 사람들 같아 보였다. 난생처음으로, 내부 구조가 TV에 나오는 현대식 가옥과 꽤 비슷한 마을 회관은, 반세기 가까이 초가나 기와집 앞에서 내가 보아온 그들의 모습과, 미안하지만, 잘 안 어울렸다. 개관식(開館式) 따위의 행사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인 만큼 언급할 것도 없다.
두 가지 일 때문에, 마을 회관에서 마을 어른들과 보낸 몇 시간이 좀 껄그러웠다. 그중 하나는, 내 친구 어머니의 눈물과 추억이다. 마을 회관에서 만난, 내 친구의 여든 넘긴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펑펑 울었다. 그 눈물에서 한 세상을 본 것 같았다. 한 세상을 흐르는, 아무래도 내가 다 건너지 못할 강을 본 것 같았다.
내가 고향을 떠나 대도시 대구로 간 것은 내 나이 열한 살 때의 일이다. 45년 전의 일이다. 조금 과장하면 반세기 전의 일이다. 그 시절, 고향 마을에 참 친하게 지내던 동갑내기 친구가 있었다. 언필칭 불알친구였다. 국민학교도 3년쯤 같이 다녔다. 마을에서 학교까지의 거리가 5킬로미터쯤 되었다. 산 넘고 물 건너며 함께 많이 놀아서 추억이 풍부하다. 대구로 나앉은 뒤에 나는 친구가 그리워 몇 차례 편지를 써 보냈던 것 같다. 유행가 가사 같은 신파조 사연이었을 것이다. 친구로부터 답장을 받은 기억은 없다. 그 친구, 3학년이 될 때까지 한글을 떼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고향 떠난 이듬해, 친구는 저수지에서 멱 감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애가 좀 까불었다. 남 앉는 짓을 잘했다. 까부느라고, 지금의 스카프처럼 생긴 나일론 보자기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물에 들어가서는, 그 보자기로 제 얼굴을 꽁꽁 동인 채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되풀이했단다. 달걀 귀신 같은, 허연 알대가리가 물속에서 불쑥 솟아올랐으니 여자 아이들이 기겁을 했을 터이다. 내 친구는 그게 재미있었던지 몇 차례 그 짓을 더 하다가 나일론 보자기가 얼굴에 철썩 붙어버리는 바람에 질식해서 죽은 것 같다고 했다. 질기디질긴 나일론 보자기, 그 시절에는 귀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나일론 보자기는, 물에 젖으면 통기(通氣)조차 시키지 않는다. 여식 아이들(계집아이들) 앞에서 잘난 척 까불다가 죽었다는 소리를 뒤에 들었다.
친구 죽은 뒤부터, 고향에 다니러 가도 나는 친구 집을 피해 다녔다. 친구 어머니가 나만 만나면 내 손을 잡고 방성대곡을 내어놓았기 때문이다. 친구 아버지도 껄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친구 아버지는 방성대곡하는 대신 마른기침을 밭게 토해내고는 했다. 저들이 내게서 아들 모습을 읽어내는구나 싶었다. 그런 일은 오래 계속되었다. 친구 어머니 만나 손목 잡히는 게 나로서는 참 곤혹스러웠다. 내게 무슨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살아 있다는 것이 그렇게 미안할 수 없었다. 국민학교 졸업한 직후에 고향 마을에 가면, 내 아들도 살아 있다면 졸업했을 텐데, 중학생이 되어 고향 마을에 가면, 내 아들도 살아 있다면 중학생이 되었을 텐데, 이런 푸념을 끝없이 들었다. 그 집 형편이 아들 유학 보낼 여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읍내에는 중학교가 없었는데도 그랬다.
스물 세 살 때 입영 영장을 받고, 선영에 인사드리러 고향 마을에 갔다. 친구 어머니는, 자기 아들도 살아 있었다면 함께 입대하게 되지 않았겠느냐면서 또 내 손을 잡고 울었다. 입대 앞두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 내 앞에서, 친구 어머니는 그게 무슨 영광이라도 되는 양 그랬다. 하기야 그때는 몰랐지만,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있기는 하다. 친구 아버지는 먼발치에서 마른기침만 컹컹 토해내었다. 고향 내려갈 때마다 친구네 집은 살살 피해 다녔다. 하지만 조우(遭遇)는 숙명처럼 되풀이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번번이 친구 어머니에게 손을 잡힌 채, 멀뚱멀뚱 미안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혼한 직후에도 아내와 함께 선산에 고유(告由)갔다가 친구 어머니한테 손을 잡힌 채 미안해해야 했다. 친구 어머니는, 영문을 모르는 내 아내 앞에서, 우리 애도 살아 있었더라면 지금쯤 장가들었겠제 하면서 울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물에 빠져 죽은 친구는, 내가 나타날 때마다 나이를 먹고 있었다. 적어도 그 어머니에게는 그랬다.
내 나이 마흔 지나고부터는 친구 어머니를 잣아서(자발적으로) 찾아다녔다. 매를 먼저 맞아두자는 심사에서 그랬으리라. 친구 아버지는 일찍 세상 떠났다. 친구 어머니는, 지아비의 친구를 만나도, 내게 하던 것과 비슷한 짓을 한다고 했다. 물에 빠져 죽은 친구가 내 앞에서 나이를 먹듯이, 세상 떠난 친구 아버지는 그 아버지 친구들 앞에서 늙어가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그것을 이해했다. 그래서 늘 유쾌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겠나 싶어서, 피하지 않고 잣아서 친구 어머니를 찾아다녔던 것이다. 내 나이 마흔 중반, 식구들 데리고 미국으로 떠나기 앞서 고향에 내려가 친구 어머니를 찾아뵈었을 때도 그랬다. 내 아들 살아 있었더라면 너처럼 군대에도 가고, 월남에도 가고, 미국에도 가고 그랬을 텐데. 증조부가 중간에 접속사처럼 터억 버티고 서서, 당신의 증조부와 아기를 이어주던 그 집 형편과는 어쩌면 이리도 다른가? 친구 어머니는 슬픈 접속사 같지 않은가?
새로 지어졌다는 마을 회관에 TV라도 두어 대 들여놓을 생각으로 고향에 내려간 날 밤 나는 바로 그 마을 회관에서, 여든을 저만치 넘긴 친구 어머니를 만났다. 앞니가 하나도 없는, 친구 어머니는 백발이 거진 다 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내 아들도 살아 있다면 머리가 허얘졌겠제?"
친구 어머니의 말에 고함을 버럭 지르고 나선 이가 있었다. 우리가 면전에서는 '세대(金世大) 아재', 없는 데서는 '새대가리'라고 부르는 숙항(叔行), 곧 할머니 친정 집안으로, 잘 따지면 아재뻘에 아슬아슬하게 걸리는 먼 친척이었다. 양반 자세(藉勢)가 늘 여간 아니었다. 할머니 돌아가신 지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틈만 나면 우리 집안보다는 저희 집안이 윗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들었다. 말투에 버르장머리가 없었다. 나보다 겨우 네 살밖에 더 안 먹은 세대 아재는, 여든이 다 된, 내 친구 어머니를 풀머거리 먹은 개 후리듯이,
"이 할마시 망발하는 거 봐라. 잘하면 열두 살 때 죽은 아들 가지고 손부(孫婦)까지 볼따."
"어매뻘 되는 사람한테 망발이 뭐고? 망발이? 니 나이 거꾸로 처먹나?"
내 친구 어머니는, 세대 아재에게 악의가 있어서 그런 소리 한 것으로 여긴 것 같지는 않다. 세대 아재가 그 말을 다른 말로 잇지만 않았더라도 친구 어머니는,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좀 심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고 말았을 터이다.
"망발 아이면요? 그런 소리, 하는 사람이야 먹은 마음 없이 하지만, 듣는 저 사람은 얼마나
곤혹스럽겠니껴?"
내 친구 어머니가 숙어들었다. 그런데 세대 아재가 나를 역성들고 나오는 게 좀 이상했다.
그는, 적어도 면전에서는, 한 번도 내 편이 되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설마 빈손으로 마을 회관 개관식에 온 것은 아니겠지, 이런 생각을 하고 역성을 들었던 것일까? 마음이 영 개운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쯤 하고 넘어갔으면 좋았을 것을, 세대 아재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다 분질러 끄면서 비어지는 소리를 덧붙였다.
"가슴에 묻을 줄 모르고 땅에만 묻으니, 열두 살 때 죽은 아들 가지고 손부까지 보는 것이
지."
"뭐라고? 그래, 나는 열두 살 때 죽은 아들 가지고 손주며느리까지 볼란다. 저 사람 며느리
보면, 나도 손주며느리 보는 기다. 그런데 그 잘난 니는, 사십 살, 수염 가로 뻐드러진 아
들 무릎 밑에 거느리고도 며느리 와 못 보노? 죽은 것도 아이고, 병신 된 것도 아인, 멀쩡
한 아들 가지고도 며느리 와 못 보노? 외 못 보고 늙히노?"
"말씀 함부로 하는 거 아일시더. 보면 어얄리나껴?"
"그만들 하세요."
나 때문에 생긴 말다툼이어서 내가 껴들었다. 내 친구 어머니는 잠깐 돌아앉아 있더니 마을 회관의 거실 바닥을 치면서 울었다. 필시 세상 떠나신 영감님, 아니면 열두 살 때 물에 빠져 죽은 아들을 생각하고 그러는 것이거니 했다. 내가 껴든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세대 아재의 아들은 당시 마흔 살이 넘었다. 많이 배운 것도 아니고,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큰 도시에 살면서 부대껴본 것도 아니고, 그저 시골에 파묻혀 그 땅달막한 몸 놀리면서 부모 봉양 잘하고 농사 잘 짓고, 봉제사(奉祭祀) 잘하던 청년이었다. 그 집 농사 규모가 만만하지 않은데도 도농(都農)을 막론하고 색시 차례가 오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바로 그 농사 규모 만만하지 않은 것 때문에 처녀가 얼씸도 않는다고 했다. 그 말에 일리가 있다. 사람이라도 넉넉하면 사람 사서 농사지으면 되는데, 그 사람이라는 게 없었다. 도시에서 사람 사들여와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다. 도시에서 사람 사들여와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다. 농사라는 게 투자를 늘려도 좋을 고부가 가치 산업이 그때 이미 아니었기 때문이다. 몸으로만 때워야 하니, 농지 많으면 많을수록 고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대 아재의 아들이 장가들지 못한 채 마흔을 넘긴 진자 이유를 나는 안다. 아재는 틀림없이 자기네 가문에 견주어 기울지 않는, 이 시대에는 희귀 동물인, 반가 규수(班家閨秀)를 며느리로 맞고 싶었을 것이다. 가문 따지고, 인물 다지고, 가진 거 따지고, 그러다 자식의 혼기를 놓쳤을 게 분명하다. 아버지가 색시 자리를 번번이 퇴짜 놓자 그 집 아들은 자살을 기도함으로써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은 적도 있다. 집 나갔다가 돌아온 횟수는 부지기수다. 불쌍한 건 안쪽이다. 세대 아재의 부인, 그러니까 '아지매'가 나한테 푸념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어지간하면, 고마 해뿌지. 좁쌀 영감이 수판(手板)을 저래 놔 쌓으니.... 나는 고마 자포자
기다. 죽 쑤어서 개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 며느리, 못 본다, 못 본다, 저 영감
안 죽고는 못 본다."
따라서 아들 늙히면서도 며느리 못 본다는 소리야말로 아재 앞에서 해서는 안 되는 소리였다. 그것은 세대 아재의 콤플렉스였다. 아킬레스 힘줄이었다. 건드려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세대 아재 앞에서, 불구대천의 원수 될 각오 하지 않으려면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면 안 되었다. 그래서 큰 싸움 나겠구나 싶어 내가 서둘러 봉합한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자네...."
세대 아재가 내 쪽으로 돌아앉으면서 앉음새를 고치고 말을 걸었다. 또 한번 이상하다 싶었다. 아나, 며느리 여 있다..... 이 정도 표현이면 싸움 정도가 아니라 건곤일척(乾坤一擲) 거리였다. 입씨름 좋아하는 세대 아재가 거기에서 입씨름을 끝내었을까 싶었다. 퉁명한 어조, 그는 늘 내게 퉁명한 어조로만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자네..... 묵은 빚 좀 갚아라."
이때까지만 해도 표정이, 퉁명스러운 어조에 어울리게 무뚝뚝했다.
"내가 아재한테 묵은 빚이 있다?"
"암, 있고말고. 자네 장형(長兄) 혼례 때 우리 아버지가 홀기(笏記)를 불렀니라."
"'홀기'가 뭐요?"
"거 안 있나? 홀기..... 구식 혼례 전안지례(奠雁之禮) 때 신랑 신부한테 불러주는 거."
"'홀기'라는 것은 부르는 게 아니고, 혼례청에서 쪽지 들고 읽는 거 아니오?"
"공부했다는 사람이 말이야. 공자님 앞에서 자네 시방 책방을 차릴라 카나?"
세대 아재 말투가 이랬다. 한마디 하고 그만두면 좋은데, 몇 마디 덧붙임으로써 듣는 이의 심사를 긁어놓고는 했다. 그래서 어릴 때는 어딜 가나 많이 맞고 다녔다. 특히 내 장형한테 많이 맞았다. 아재비가 조카에게 맞고 산 셈이다.
"공자님 앞에서 책방 차리는데 아재가 뭐 보태준 거 있소? 그래, 차렸소. 영어 책방.... 아재
도 한번 차려보시지. 안 변하는구나. 정말 하나도 안 변하는구나."
".... 마음 상하게 했다면 미안하고..... 우리가 어제아레 만난 사람도 아이고, 그래서 부탁인
데, 내 아들 혼례식 치를 때 되면, 자네 옛정을 생각해서 홀기 한번 불러도. 선대(先代)의
묵은 빚 갚는 셈 치고...... "
"선대는 아니지요. 세상 떠났다고는 하나 내 형님은 선대에 속하는 것이 아니지요."
"우야든동 한번 불러도고."
"홀기 부른다.... 그거 결혼식 사회(司會) 같은 거 아니오? 아재는 내가 늘 애 같아 보이는
모양인데, 내 나이가 몇인데 사회를 봐요. 사회를? 허연 대가리 주억거리면서 사회를 보라
는 말이오?"
"그거는 자네가 모르고 하는 말이라. 본래 홀기는 한문에 밝고, 예절 중히 여기며, 인품이
고매한 어른만이 부를 수 있는 것이네. 내가 이러면 또 집안 자랑한다고 하겠지만, 우리
아버지만하신 분, 근동(近東)에 있었던가?자네 장형 혼례 때 우리 아버지께서 읍내 자네
형수 친정까지 나가셔서 홀기 부른 까닭도 거기에 있는 기라.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
이라. 그러니 못 한다는 소리하면 자네 사람 아닐세."
"아니, 홀기 부르는데, 한문에 왜 밝아야 해요?"
"그러믄, 한문으로 불러야 하거든, 한문으로...."
"아니, 날더러, 한문으로 홀기를 부르라는 것이오?"
"아무렴. 홀기는 한문으로 불러야 맛이 나제."
"누가 알아듣는다고?"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도."
"알아듣는 사람 없는 홀기를 왜 내게 부르라는 거요? 아재는 내가 부르면 알아듣소?"
"내 공부가 거기까지는 못 갔다."
"그런데?"
"조상님들이야 알아 들으시겠제. 주자(朱子)님 『가례(家禮)』에 따르면......"
"아재. 거 말 안 되는 말 마오. 나는 한문에 밝지도 못하거니와 예절도 중히 안 여겨. 한문
으로 홀기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재의 그 머리가 어쩐지 새 머리같이 여겨지오."
세대 아재의 별명이 '새대가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마을 회관안에 하나도 없었다. 모두들 까르르 웃었다. 오야, 잘한데이, 오야, 내 아들 동무 잘한데이...... 내 친구 어머니도 손뼉을 치면서 웃었다. 내가 원수 갚음을 대신해 준 셈이었다. 세대 아재가 벌떡 일어났다.
"이 사람이 말이면 다 하나. 오줌 누고 와서 보자."
세대 아재가 마을 회관 회의실에 면해 있는, 마을에서 유일한 양식 변기가 놓인 화장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친구 어머니가 내게 속삭였다.
"홀기 불러주겠다 캐라. 저 새대가리가 며느리 보는 일은 없을 기다. 아들이라는 거, 생긴
풍신을 봐라. 땅밥도 못 떼더니 사십 살을 넘기니까 벌써 오그라든다. 아나, 며느리 여 있
다. 해주겠다 캐라. 불러주겠다 캐라. 그러니까 니는 해주겠다는 말 한마디로 장형 빚은
갚는 셈 아이가."
"자네, 조금 전에 나한테 뭐라 캤노? 자네가 아재비한테 그 칼 수가 있나? 자네 할매를 봐
서라도 그 칼 수가 있나? 자네 장형 '히데오(秀雄)'하고는 동기 동창인 나한테 이럴 수가
있나? 자네, 조금 전에 나한테 뭐라 캤노?"
화장실 다녀 온 세대 아재가, 이 빠져 있던 자리를 메우면서 따지고 들었다. 따지고 드는 말투인데도 그다지 퉁명스럽지 않았다. 새대가리라고 했소. 이랬으면 한판 붙었을 터이다.
"부르는 놈도 모르고, 듣는 놈도 모르는 그 한문 홀기라는 걸 왜 내게 맡기느냐고 했소. 도
대체 한글 창제된 지가 몇 년이나 되었는데 한문 홀기를 부르자는 거요? 도대체 해방된
지가 몇 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내 장형이 '히데오'요?"
"이 사람, 그래도 그기 아이라. 점잖은 자리에서 읽은 전례문(典禮文)이라 카는 거는......"
"왜? 또 그 주자의 『가례』를 들먹거리시려고? 『국조오례의』울거잡수시려고? 하여튼 나
는 못 하오. 대신 한 가지 약속은 하겠소. 며느리 볼 때 청첩장 띄우시오. 내가 외국 안
나가고 국내에 있다면, 부조 봉투 뚜껍하게 만들어 품에 넣고 오리다. 그거 하나는 약속할
수 있소."
"이 사람이, 내가 자에를 대접하고 자네 집안을 대접하느라고 부탁하는데......"
"대접? 대접이라. 아직도 집안 자랑이오? 아직도 그거 맡기면 대접이 되는 거요?"
"우리 집안이 자네 집안보다 약간 윗길인 것은 사실 아이라?"
"사실 좋아하시네. 우리 할머니 돌아가신 지가 50년, 반백 년이오. 한심하기는. 아재는, 내
가 어떤 사람인지 알 리 없겠지만, 만에 하나, 조금이라도 나라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있다면 그게 대접이 아니라는 것을 알 거요. 욕이 나오지만 참겠소. 두 번 다시 입
밖에 꺼내지 마시오."
"마이 컸다, 오야, 마이 컸다. 아재비한테 '하오'를 하는 걸 보이, 마이 컸데이."
"마이 컸지, 암, 많이 컸고마고."
내가 이렇게까지 화를 낸 데는 두 가지 까닭이 있다. 홀기 못 부르겠다고 뻗댄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런데 뻗댄 것까지는 좋았는데, 며느리 볼 때 부조 봉투 들고 내려오겠다고 약속한 것은 실책이었다. 세대 아재처럼 새대가리 같은 인간을 혼주(婚主)로 하는 결혼식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해버린 것이 그렇게 싫을 수 없었다. 지금은 세상 떠나 우리 선산에 묻힌 장형의 혼례 때, 세대 아재의 아버지 비안 어른이 홀기를 불렀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장형을 선산에 붇을 때 세대 아재가 마을 사람들을 동원, 산역(山役)을 지휘했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이런 인연이 있어서 혼례 때는 내려가겠다고 해버린 셈인데, 나는 싫었다. 인간이 싫었다. 그래서 원수 되는 것까지는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낯 붉히는 정도로 하고 헤어지면 설사 며느리 보는 한이 있어도 나에게는 연락하지 않을 터였기 때문이다. 그게 첫 번째 까닭이었다. 두 번째 까닭은 이렇다. 내게는 아주 중요하다.
나를 '도반(道伴)'이라고 부르는 친구 스님들이 여럿 있다. 그 중의 한 스님이, 내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멀리 대구까지 내려가 밤새 상청(喪廳) 지키면서, 어머니가 평소 즐겨 읽던 불경을 읊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예식을 '시달림'이라 한다고 했다. 참으로 고마웠다. 나는 종교를 보험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에의 귀의는 일종의 내세 확보(來世確保)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독경 소리 듣고 있으려니 그렇게 마음이 푸근할 수 없었다.
발인 전야에, 당시 살아 있던 나의 장형이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독경하시는 것 듣고 있자니 어머니 음송하실 때 더러 듣던 구절이 섞여 있군요. 그
런데 대체 무슨 경을 외셨소?"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읽고 외웠습니다."
스님의 대답에 나의 장형이 또 물었다.
"어떤 깊은 뜻이 담겨 있소?"
"전들 다 알겠습니까?"
"하기야, 어머니 역시 뜻 모르는 채 외기만 하셨지요. 사경(寫經)을 오래 하셨지만 그 뜻
다 아시게 되었던 것은 아마도 아닐 겝니다."
"형님, 들으실 만합디까?"
"듣기에 참 좋았소."
"돌아가신 어머니도 좋아하시겠지요?"
"나는 그러리라고 믿어요."
"그러면 되었습니다. 뜻이야 어찌 되었건, 독경하는 저 좋았고, 들으신 형님 좋으셨고, 흠향
하시는 어머니 좋으셨을 터이니, 그것으로 다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도 하오."
읊는 중 좋고, 듣는 상주 좋다면, 굳이 그 뜻을 알아서 무엇하겠습니까...... 형님들은 어머니 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스님의 이 말 한마디 되뇌면서 내게 스님 안부를 묻고는 했다.
3년 전 재종형이 세상을 버렸다는 내용의 부고를 받았다. 우리에게는 친형제와 하나도 다를 것 없던 재종형이 쉰여덟에 돌아가신 것이다. 대구로 내려갔다. 발인 전날 밤에, 장례 절차를 지휘하던 나의 형이 책 한 권을 내게 내밀었다. 굵은 글씨로 축문(祝文)을 차례로 찍은 책이었다. 형은 나에게, 새벽에 발인할 것인즉, '견전축(遣奠祝)'이라고도 불리는 발인축을 독축(讀祝)하라고 했다.
우리 집안의 경우 축문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축문 이름의 한문은 병기하지 않겠다. 한문에 밝지 못한 사람들 귀에 이것이 얼마나 해괴한 외국어로 들릴지 상상해 보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소통의 언어가 아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귀신을 향한 일방통행의 언어다. 축문에는, 발인 전날 밤 제사 때 읽는 '조전축', 밖으로 들어내려고 관에다 손을 댈 때 읽는 '계빈축', 관을 들어낼 때 읽는 '천구청사축', 운구 도중 고인의 근무지에 잠깐 들러 제를 지낼 때 읽는 '노제축', 장지에 이르러 산신제를 지낼 때 읽는 '산신축', 당숙 부모의 산소 옆에 재종형이 분묘를 쓰면서 올리는 '동강선영축', 매장을 끝내고 성분하기 직전에 올리는 '제주축'등, 종류가 아주 많다.
나는 형으로부터 축문집을 받아들고 '견전축문'부터 펼쳐보았다.
영이기가
靈 旣駕
왕즉유택
往卽幽宅
재진견례
載陳遣禮
영결종천
永訣終天
이것밖에 없었다. 한자 위에다 한글 음역이 찍혀 있을 뿐이었다. 이걸 읽어서 어쩌자는 거요, 나는 형에게 대들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 목숨 끊어진 말을 일삼아 새겨서 살려보면 이런 뜻을 지닌, 피가 통하는 문장이 될 것이다.
이제 상여로 모실 터인즉
곧 무덤으로 가시게 됩니다.
보내어 올리는 예를 베푸오니
이로써 영원한 이별을 삼고자 합니다.
나는 형에게, 한문으로 되어 있는 축문의 뜻을 다 아시느냐고 물어보았다. 형은 다는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나는 상주인 젊은 삼종질에게 견전축문의 의미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상주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나는 형에게, 돌아가신 재종형이 그 뜻을 다 알고 있을 것으로 믿느냐고 물어보았다. 형은, 모를 것이라고 대답했다. 나도 그러리라고 믿었다. 재종형은 한문을 깊이 공부한 분도 아니다. 형은 나에게, 그러면 자네는 뜻을 아느냐 하고 물었다. 나는, 약간 과장해서, 안다고 대답했다.
나는 형에게, '견전축문'을 한글로 풀어서 읽겠다고 했다. 읽는 나도 그 뜻을 새기면서 읽을 수 있도록, 상주도 그 뜻을 알아먹고 마음껏 슬퍼할 수 있도록, 상주들 마른 눈물을 다시 샘솟게 할 수 있도록 한글로 풀어서 읽겠노라고 했다. 상주는 상청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야 제격이다. 상청이 너무 조용하면,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는, 지독하게 참람한 말을 듣는다. 우리 고향 어름의 유머다. 나는 살아 있는 말, 살아 있는 자와 세상 떠난 자 사이의 뜻이 서로 통하는 한글로 견전축문을 독축함으로써, 망인의 죽음을 벌써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멀뚱멀뚱 먼산바라기 하는 상주로 하여금 마음껏 울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형은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형이 한글로 풀어쓴 견전축문의 독축을 반대하는 논거는,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내 친구 스님이 한문 불경을 음송한 사례였다. 형은, 뜻이야 어찌 되었든 망인(亡人)이 좋아할 터임에 분명하고, 상주에게도 좋을 터이고, 듣는 사람들에게도 좋을 터이고, 또 예부터 그래왔으니까 그냥 한문으로 독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뻗대기로 했다.
"예부터 그래왔으니까 지금 그러자는 의견에 저는 찬동 못 합니다. 백년 전까지만 해도 우
리는 우리말, 글말로는 한문을 썼습니다. 백년 전 사람들은, 한문으로 독축을 해도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먹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다르지요. 아무도 알아먹지 못합니
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못 합니다."
나는 한글 독립 선언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분연히 맞섰다. 형은 내가 만일에 축문을 한글로 독축하면 우리 마을의 타성(他姓)바지들이 우리 집안을 우습게 볼 것이라면서 머뭇거렸다. 그때 내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사람이 바로 '새대가리' 세대 아재였다. 재종형의 선산도 고향 마을에서 매우 가까웠다. 새대가리가 틀림없이 달려와 사사건건 시비를 걸 터였다. 아이고 지겨워라. 관혼상제례를 어떻게 치르는지 가만히 비교 분석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성씨(姓氏)의 비교 우위를 증명해내는 일, 이거야말로 새대가지의 취미 생활이었다.
"'새대가리'가 김씨 대표 선수로 출전해서 딴지 걸까 봐서요?"
"아이고, 생각만 해도 싫다, 싫어."
형은 반드시 한문으로 읽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아는 한, 재종형의 장지 가까이 있는 우리 고향 마을 사람 중에 그 한문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끝내 한문 축문의 독축을 사보타주했다. 결국 견전축문은 나를 대신해서 운구 버스 운전 기사가 독축했다. 운전 기사는 손바닥 뒤집듯이 뚝딱 해치웠다. 축문의 의미가 전달되지 않으니 독축은 낭독이 되어버렸다. 팁 2만 원이 나갔다고 했다.
집안의 형님들은 나의 사보타주를 섭섭하게 여기는 눈치를 보였다. 하지만 내가 그날 처음으로 형님들을 섭섭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아들과 딸이 차례로 태어났을 때 나는 형님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아이들 이름을, 한자로는 표기할 수 없도록 한글 이름으로 지었다. 우리 집안의 22대 손(孫)인 내 아들의 한글 이름은, 우리 족보에 처음으로 등장한 한글이기도 하다. 한글이 창제되고 나서 실로 533년이 흐른, 1979년의 일이다. 장형이 돌림자에 맞추어 지어놓은 내 아들의 한자 이름은 엉뚱하게도 '자(字)'라는 별명(別名)으로 족보에 올라 있다. 내 아들은 우리 집안에서는 드물게도 첫돌 갓 지나 '자'를 얻은 20세기 끝자락의 아이이기도 하다.
나는 한글로 아들딸 이름 지은 폭거를 한글 이름의, 우리 글 이름의 독립 선언이라 부르는데, 독립을 선언한 지 20 수년이 지난 시점에 내가 어떻게 한문으로 된 축문을, 뜻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읽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림도 없는 일이다. 말을 부리는 삶에 관한 한 나는 내 실존적 습관에 어긋나는 짓은 결단코 하지 못한다. 신문 하단에 실리는 부고, 쓰는 놈도 그 뜻을 모르고 읽는 놈도 그 뜻을 모르기 십상인 '자이부고(玆以訃告)'는 나를 슬프게 한다. '슬픈 소식을 전합니다', 이러면 왜 안 되는데?
국민학교 시절, 나는 공부를 참 쉽게 했다. 내 또래 아이들은 '한류'와 '난류'를, 전자는 차가운 바닷물의 흐름, 후자는 따뜻한 바닷물의 흐름, 이런 식으로 따로 외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게 '한류(寒流)'는 '찰 한(寒)'과 '흐를 류(流)'일 뿐이었다. 한자의 뜻을 풀면 되는 만큼 낱말을 따로 욀 필요가 없었다. 국어 공부는, 어린아이 팔 비틀기였다. 1950년대라는 시대가 문자 환경의 점이적인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만큼 '한자'의 덕을 입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문을 사랑하고 전통 문화에 묻어 있는 한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무턱대고 사랑하지는 않는다. 내가 사랑하던 한문이나 한자가 우리의 대를 이을 다음 세대 젊은이들에게는 벌서 하나의 억압이 되어 있다. 나는, 우리말이 되었든 남의 말이 되었든, 어떤 형식으로든 언어로써 사람을 억압하고 싶지 않았다.
고향의 마을 회관 들여다보고 서울로 돌아왔다. 고향 일은 깡그리 잊었다. 내가 세대 아재를 한 번이라도 떠올렸으면 개아들이다. '고향'이라는 말을 들어보기는 했다. 세대 아재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내 고향의 따뜻한 풍경의 일원으로 합류하지 못한다.
고향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끊임없이 오가는 나의 경우만 그런가. 타향에서 '고향'을 떠올리면, 과거의 시간 쪽으로 닫혀 있던 내 머리 속의 뒷문이 확 열인다. 과거의 시간은 내 뒤에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내 앞에 있는 것은 현재의 시간이고 현재의 사건인 것 같다. 현재를 살고 있을 동안, 그 뒷문이 저절로 열리는 일은 매우 드물다. 뒷문이 열리는 일은 '고향'이라는 말이, 과거의 기억을 촉발하는 경우에만 일어난다.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시시각각으로 현재화(現在化)하는 미래의 시간이다. 미래는 현재가 되었다가 재빨리 과거화한다. 따라서 나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현재라는 이름의 접속사로 존재한다. 그런데 이것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내가 고향 마을에 발을 딛는 순간이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마을에는 조상의 무덤이 있다. 우리가 살던 옛집이 있다. 과거에 윌와 상종하던 사람들이 조금도 달라진 것 같지 않은 모습으로 살고 있다. 나의 과거는 물론, 지금은 세상 떠난 내 부모의 과거까지 잘 아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고향에 마을에 발을 딛는 순간, 시간의 전후는 헝클어져버린다. 혼자 고향을 방문할 경우엔 더욱 그렇다. 혼자 방문할 경우, 나느 접속사 노릇을 그만두고 그만 과거에 편입되어버린다. 그런 고향에서, 서울로 돌아가서 다음날 할 일을 정밀하게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헝클어진 시간을 수습하고 시계를 제대로 돌리는 일은 고향 마을의 동구 밖을 벗어나야 가능하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인지, 내게만 일어나는 일인지, 고향 이야기를 쓸 때마다 나는 궁굼해한다. 보라, 나는 고향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거기 눌러 살라고 명한다면 나는 거절할 것이다. 고향이라는 게 나라는 인간의 뿌리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고향이라는 것은, 내가 떠나야 할, 버려야 할 그 무엇이기도 했다.
3월 중순, 찌르릉, 나른한 오후 시간대의 전화에 내가 걸려들었다. 누군가가 무식하게 전화통에다 대고 빽빽 소리를 질렀다. 세대아재였다. 세대 아재의 전화 받아보기는 유사 이래 처음이었다. 때문에 본인 확인이 오래 걸렸다.
"자네, 내가 며느리 보면 내려오겠다 캤제?"
"사람 나섰어요?"
"암만, 나섰고말고."
"정초에 안 나섰던 사람이 3월에 다 나서고...... 영감, 어지간히 바쁘셨던 게다."
"안 될라 카이 안 되드만, 될라 카이 퍼떡 되어뿌데."
"아직도 예식장은 안중에 없으시고?"
"암만, 나는 성에 안 차. 내 했던 대로 시켜줘야지. 원삼 족두리없고 사모관대 없는 혼인,
나는 성에 안 차."
"약속했으니 가야지. 그런데 신부 댁이 어디래요?"
"우리집."
"이 영감이 수양딸로 며느리 삼나...... 전안례를 올리자면 신부 댁에서 올려야지 신랑 댁에
서 올리는 법이 어디 있소? 따진다며? 다 예법에 맞게 따져가면서 한다며?"
"그렇게 되었네."
날짜와 시간을 메모하고 보니 난감했다. 도무지 즐거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 쇠똥 피하려다 개똥에 코 박은 형국이었다. 못 간다고 할 걸, 그 날짜 어름의 스케쥴을 전광석화같이 발명할 걸 싶었다. 하지만 조상 산소가 거 마을에 있는데, 새대가리 비위 거슬러서 좋을 것 없지 싶은 생각에, 영감, 영감, 해쌓으면서 친한 척 했던 것 같다.
고향 갈 때마다 마음발에 묻어드는 느낌이 있다. 고향의 시간은 고여 있다는 느낌이다.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면 더디 흐른다는 느낌이다. 그것을 견디는 데 나 같은 사람은 허약하다. 그런 사람이라서 그랬을까. 나는 떠났다. 내 고종형 같은 분이나 고종형과는 동갑인 새대가리 같은 인간이 고향을 지켜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내 고종형은 자신이, 시간이 고여 있는 곳, 고여 잇는 곳이 아니라면 더디 흐르는 곳에 처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세상이, 자기가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뭘 물으면, '내가 뭐 아나'로 일관한다. 그러나 새대가리는 다르다. 우리 형제들이 새대가리를 싫어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어릴 적부터 은근히해온 양반 자세(藉勢)였다.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본데없다'는 것이다. '본데'는 '양반으로서의 견문(見聞)'이라는 뜻으로 쓰였던 것 같다. 그는 내 장형, 고종형과 동갑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이 동갑내기 세 사람의 논쟁을 끝도 없이 보아왔다. 나중에 『걸리버 여행기』에서, '계란은 과연 어느 쪽을 깨뜨려서 먹어야 옳은가'라는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이는 소인국(小人國) 사람들 이야기를 읽었을 때 나는 세 동갑내기들의 격론을 떠올렸다. 기억하시는지? 소인국의 한 무리는 계란의 뭉툭한 쪽 껍데기를 깨뜨려서 먹어야 제대로 먹는 것이라 주장하고, 다른 한 무리는 갸름한 쪽 껍데기를 깨뜨려서 먹어야 이치에 맞는다고 주장한다. 주장만 하는 것이 아니다.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상대편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요구한다. 결론이 카랑카랑하게 나지 않고, 상대가 설득당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두 진영의 대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소리친다.
"그렇다면 전쟁이다!"
실제로 이 두 소인족은 이 일로 전쟁을 치되 대가리가 터지게 친다.
나는 지금도 된장에다 풋고추 찍어 먹을 때는 오른손으로는 고추 끝을 잡고 밑동을 된장에다 푹 찍어서 먹는다. 말하자면 굵은 쪽을 먼저 먹는 것이다. 굵은 쪽에서 먹어들어가다가 손가락 사이에 남는 고추 끝은 버린다. 고추 끝은 매운 맛이 없고 비린 맛만 있어서 입맛을 버리기 십상이기도 하려니와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걸 가르쳐준 사람이 새대가리 아제다. 새대가리 아재는, 양반은 고추를 먹어도 꼭 밑동, 즉 굵은 쪽부터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거가 있는 소린지 없는 소린지 나는 아직도 확인해보지 못했다.
내 고향 마을 사람들에게는 '난 데〔他地〕'사람들을 평가하는, 말하자면 본데있는 집안 사람인지 막가는 집안 사람인지를 평가하는 기준이 있다. 어느 집안 출신인가, 옛 말귀는 알아먹는가, 반가(班家)의 배타적인 풍속 세례에 어느 정도 접근해 있는가, 이런 것들인데, 내 고향 사람들이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처음 만나는 사람의 성씨와 관향, 즉 본관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이걸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것은, 상대에 견주어진 자신의 위치 정하기, 즉 정위(定位)부터 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람에게 공대해야 할 것인가, 하대해야 할 것인가? 하지만 이런 잣대로써 하는 평가 자체는 악의에 차 있다. 좋은 점을 톺아내어 보아주는 예는 희귀하다. 악의에 찬 평가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주로 '난 데'에서 우리 고장으로 장가들어오는 타성바지 새신랑들이었다. 그들에 대한 처가 마을 사람들의 신래침학(新來侵虐)은 글자 그대로 가학적이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기준이라는 것도 해괴하기 그지없다. 우리 고장 사람들은, 새신랑이 처가에서 첫 밥상을 받았을 때 숟가락을 들고 밥상 위의 장물(간장)부터 맛보아야 양반으로 쳤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랬다. 곽씨 부인이라는 이인(異人)이 칠첩반상기로 차린 밥상에서는, 간장 종지의 뚜껑부터 열지 않으면 다른 그릇의 뚜껑은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다. 나는 곽씨 부인 이야기를 새대가리 세대 아재로부터 들었다.
우리 고장 사람들은 밥을 먹다가 혹 다급한 마음에 밥그릇을 한 손으로 들고 먹는 새신랑이 있으면 아주 돌상놈으로 치고는 했다. 한 손으로는 밥그릇을 들어 입 앞에다 대고 젓가락으로 퍼넣듯이 우겨넣은 새신랑이 있었다면 두고두고 돌상놈의 표본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세대 아재가 그냥 두지 않고 씹어댈 것이기 때문이다.
세대 아재에게 들려주고 싶다. 일본인들은 늘 한 손으로 밥그릇을 들고 먹는다. 일본인들은 숟가락은커녕 젓가락으로 거머들이듯이 밥을 먹는다. 일본인들 밥상에는 아예 숟가락이라는 게 오르지 않는다. 된장국은 그릇째 들고 후루룩후루룩 마신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밥그릇을 바닥에다 놓고 먹는 것은 집짐승들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밥그릇을 들고, 허넣듯이 먹는다. 내 고향 사람들 눈으로 판단한다면, 이렇게 먹는 것은 다 돌상놈들인데, 이 돌상놈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니 세대 아재를 비롯한 소위 양반들 체면이 얼마나 참담하게 구겨졌을 것인가.
입대 직전, 세대 아재 술잔에 술을 따르다 호이 난 적이 있다. 술은, 오른손에 쥔 술병을 왼편으로 기울이면서 따르는 것이 보통이다. 그날은 나와 그의 위치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오른손에 쥔 술병을 뒤로 기울이면서, 말하자면 오른쪽으로 기울이면서 술을 따랐다. 세대가리가 기겁하는 시늉을 하면서 소리쳤다.
"내가 서자(庶子)라? 내가, 첩의 자식이라?"
나는 적자(嫡子)에게 술 따르는 법, 서자에게 술 따르는 법이 다로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정말 그런 법이 있는지, 세대 아재 말마따나 그걸 오른쪽 왼쪽으로 구분하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윷가락 잘못 던졌다가 혼이 난 경우도 있다. 오른손에 쥔 윷가락을 왼쪽으로 던져야 한단다. 잘 모르고, 오른손에 쥔 윷가락을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던졌다가 세대 아재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것은 외손(外孫)들이 외가에 갔을 때 쓰는 척사법(擲柶法)이다. 여기는 니 외가가 아닌
만큼 왼쪽으로 비스듬히 던져야 법답다. 니 나이가 도대체 및이고?"
그런 법이 정말 있었던가? 그거, 세대 아재가 잘난 척하느라고 지어낸 말인 것 같다.
어느 한식 때의 일이다. 내 나이 마흔 중반이었을 것이다. 우리 선산에는 모두 여섯 기의 산소가 있다. 혼자 성묘 갈 경우, 여섯 기에 성묘하면 제주(祭酒) 여섯 잔은 음복(飮福)하게 된다. 제주 여섯 잔을 마셔놓았으니 온몸이 나른해질 수밖에. 한식이어서 봄바람은 또 어쩌면 그리도 비단결같이 보드랍던지. 어머니 산소에 기대어 유행가 「봄날은 간다」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잘한다, 잘해. 니 나이 및이고? 제 어미 산소에 기대어 유행가나 부르고......"
새대가리 같은 세대 아재 눈에는 내 눈의 눈물도 보이지 않았던 모양인가? 나는 욕이 하고 싶어서 욕을 했다.
"아재, 이거는 너 어매 산소 아니고 우리 어매 산소요."
우리 어릴 때 음식물에 체하면 바늘로 손가락 끝을 땄다. 이걸 '체증따기'라고 불렀던 것 같다. 입학하기 전에 토란대로 끓인 국을 잘못 먹고(과식이었던가) 숨넘어갈 정도로 체한 적이 있다. 나는 할머니 등에 업힌 채 세대 아재의 아버지, 그러니까 내게는 할머니 쪽에서 보면 매우 가까운, 할아버지 방으로 옮겨졌다. 할아버지가 내 몸을 주무르고 팔을 주물러 피를 손 끝에 모이게 하고 손끝을 땄는데 신통하게 트림이 나면서 체증이 내려갔다. 나는 이것밖에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뒷날 세대 아재가 이런 말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가 체증을 땄으니 이제 우리집도 양반 소리 듣기는 글러뿌렜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까닭을 알겠다. 조선조에 의사는 중인(中人)이어서 양반 대접을 못 받았다. 세대 아재는 산골짝 마을에서 땅이나 뒤져먹던 주제에 중인 알기를 조선조와 다름없이 우습게 알았던 모양이다. 그 양반이 그래서 나를 우습게 알았음에 분명하다. 저것이 미국에서 공부한다지만 잘해봐야 지가 역관(驛館)밖에 더 되겠나, 싶었을지도 모른다. 조선 시대에는 역관도 중인이었다.
세대가리 세대 아재는 국민학교 다니기를 전후해서 『천자문』『명심보감』『동몽선습』 그리고 『소학』을 뗀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세 동갑내기와 함께, 한문에 밝은 분을 스승으로 모셨다. 나도 뒤에 그분한테 배웠다. 『논어』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자주 나왔지만 나는 그가 그 책을 어느 정도 깊이까지 읽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런 책 읽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내 고종현이나 세대 아재나 그 뒤로 교육을 더 받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두 사람의 태도는 영판 다르다. 내 고종형은, 사람이 해야 할 공부가 이 세상에 참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때 읽은 책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하지만 세대 아재는 그것만 품고 사는 사람, 따라서 걸핏하면 그것으로 타인을 불쾌하게 만들고 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경우를 만날 때마다 요긴하겠다 싶으면 자기기 읽은 책을 조자룡 헌 칼 쓰듯 했다. 견강부회한다는 의미에서 장님 문풍지 바르듯이 했다.
쥐뿔도 모르면서 나서기를 좋아하는 새대가리...... 세대 아재에게 참 잘 어울리는 말이다. 세대 아재를 생각하면, 조그만 뿔이 두 개 앙증맞게 돋아올라 있는 쥐색 새대가리가 떠오르고는 한다. 그가 만일 제 몸 감추기에 좋은 휘장 하나 둘러쓴 채로 홀연홀몰하면서, 아니면 그 휘장 안팎으로 홀연홀몰하면서 남을 억압하는 인간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그를 별로 싫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도 모르는, 매우 어려운 전례어(典例語)를 생활화함으로써 타인으로 하여금 그 진정한 의미를 알고 쓰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토록 그를 싫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변하면, 우리의 공생 윤리 또한 변해야 한다는 사실 인식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제가 배운 공생 윤리에 대한 병적인 집착만 놓아Tdjehy 나는 그를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1세기 들어서도 나는 두 차례 세대 아재로부터 혼이 난 사람이다. 10여 년 가까운 미국살이를 청산하고 서울에 다시 정착한 직후였으니, 2년 전이다. 고향 마을로 가는데, 전부터 자주 다니던 길을 두고 산을 넘어보기로 했다. 국민학교 다닐 때 걸어다니던 길로 한번 가보려고 했다. 길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민둥산이 울울창창한 숲이었다. 길을 잃고, 방향만 대충 잡아 고향 마을 쪽으로 숲을 뚫고 걸었다. 몇 시간 걸려 숲을 뚫고 나오니 개울 가까운 곳에 고욤나무와 대추나무와 뽕나무가 보였다. 가죽나무도 있고 감나무도 있는 것으로보아 그곳 또한 마을 자리였던 것 같았다. 방향 가늠이 안 되어 그곳이 옛날 우리가 살 때는 초라하나마 이웃 마을이 번듯하게 있던 자리인 것을 알지 못했다.
논에는, 마침 둑을 손질하러 나온 사람이 있었다. 쉰 살 이쪽저쪽이 되어 보였다. 당연히 낯익어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고향 마을 사람들도 지난 반 세기 동안 많이 바뀌었다.
"실례지만.... 여기가 어딥니까?"
"어데 가시니껴?"
농부가 반문했다.
"골안〔谷內〕갑니다."
"차림새를 보니 여 사람이 아인갑네...... "
"여기가 도대체......"
"여기 어디냐니....내가, 저승이 아닌 이승이라고 해야 하니껴. 이북이 아닌 이남이라고해야
하니껴? 어데 가니껴?"
"골안이라니까요."
"그런데...... 골안에는 와요?"
"골안 정승호 댁에 갑니다."
"정승호와는 어예 되니껴?"
"내종(內從)입니다."
"가만있자, 내종이라 카마...... "
시골 사람들 잘 이런다.
"아니, 가르쳐줄 겁니까, 말 겁니까!"
그게 짜증스러워 그랬는데 목소리가 좀 컸던 모양이었다. 농부가 약간 기가 질렸는지 몸을 가만히 비키는데, 자세히 보니 뒤에 한 사람 더 있었다. 세대 아재의 자그만 몸이 그 사람에 가려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 '새대가리', 발끈 성을 내면서 욕부터 내어놓았다. '자네'는 어디로 가고 '니'가 먼저 튀어 나왔다.
"니, 이놈아, 미국 놈 똥구영 빨다 온 놈이, 뭘 잘했다고 빽빽 소리를 지르노. 대처(大處)
물 좀 먹으면 나락 보고도 쌀나무라 칸다카드이...... 고향에 와서 고향을 물어? 골안 뒤꼭
지에서 골안을 찾아? 저희 선산 뒤꼭지에서 열명길을 물어? 야, 이놈아. 네 죽어서 파묻힐
데가 저 언덕이다."
얼떨결에 말따귀를 맞고 보니 나도 화가 났다. 돌아서면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 시바...... 아무도 안 보는 줄 알았더니, 내가 미국 놈 똥구영 빠는 걸 본 놈이 있었구
나."
"뭐라 캤노? 니 시방 나보고 '놈'이라 캤나?"
"거, 시발 놈....귀 되게 밝네."
아재에게 '놈'자를 두 번이나, 그것도 한 번은 더할 나위 없이 걸쭉하게 써보았으니 벌충은 대강 된 것 같아서 더 이상 안 싸우고 내가 피했다. 그 사람 나한테 욕 참 많이 얻어먹었다.
그로부터 서너 달 되었나, 외국에서 공부하던 아들이 서울로 들어왔다. 서울 드나들려니 병역 의무 미필자의 병무(兵務) 서류 챙기는 일이 귀찮고 불쾌해서, 아예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나가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더니 보따리를 싸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선산 성묘부터 시키고 싶어 데리고 고향으로 갔다. 나는 아들에게, 선산 성묘부터 챙기는 게 자식에 대한 아비의 억압 같지 않으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새대가리를 욕하고 미워하다가 새대가리를 닮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두려웠던 게 분명하다. 욕하다가 닮는다니까. 아들은, 꼭 선산 성묘하러 간다기보다는 오래 보지 못한 시골 여행하는 가벼운 기분으로 가는 것이니 부담스럽지 않다고 했다. 고마웠다. 나도 더러는 그랬다.
성묘하고 내려와 고종형 댁에서 하루 묵기로 하고 술 곁들여 저녁을 먹고 있는데 세대 아재가 왔다. 나 만나러 온 것이 아니고, 동갑내기인 내 고종형과 술이라도 한잔할 겸 마실 나왔던 모양이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세대 아재가 대뜸 내 아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니는 앉음새가 그기 뭐고?"
"네?"
아들이 반문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라다시피 한 아들은 우리 말을 잘해도 경상도 사투리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어른이 무슨 말을 하면 황급히 앉음새를 고쳐야 하는데도, 아들에게는 그 습관이 몸에 붙어 있지 않았다. 나는 그것 안 가르친 것을 별로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 아들은 벽에다 등을 대고, 다리를 뻗은 채 새대가리 세대 아재에게 반문했던 셈이 된다.
"니는 앉음새가 그기 뭐고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가랭이 쭉 벌리고 앉아서...... 어른이 말 묻는데, 얼른 두 다리 못 거둬들이나?"
"왜 그러세요."
"참 말셀세, 말세. 손(孫) 보기가 무섭다, 무섭다."
"아버지, 할아버지 뭐라고 하는 거예요?"
아들이 내게 도움을 청했다. 아들 앞에서 세대가리와 또 한판 하게 생긴 셈이었다. 새대가리가 또 한차례, 내 입에서 나간 욕을 얻어먹게 생긴 셈이었다.
"아재, 요새 애들은 책상다리 못 해요. 아재가 양해하세요."
"뭐라?"
새대가리의 양미간이 좁으장해졌다. 석 달 전 '놈'자 소리 들었을 때의 사무치던 원한을 그 자리에서 풀어볼 모양이었다. 나도 숨을 고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는 아아들한테 앉음새도 안 가르치나? 어른 앞에서는 꿇어 앉아야 한다는 거 안 가르
치나? 편하게 앉거라는 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책상다리 앉음새로 앉아야 한다는 거 안 가
르치나?"
"아저씨, 그걸 왜 가르치는데?"
이 말 한마디는 새대가리 요격(邀擊) 준비 완료 신호였다. 내 고향에서 '아재'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은 싸우자는 소리다. '아지매'를 '아주머리'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불러버리면 존칭이 아닌, 가치 중립적인 호칭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아저씨, 그걸 왜 가르치는데? 이놈아가 이거, 니 토막쌀 머었나, 아재비 앞에서 말은 왜
툭툭 분지르노?"
"아재가 도대체 아재 같아야지. 자식 앞에 앉혀놓고 아비한테 이게 무슨 짓이오?"
"니한테 그럴 자격 있나?"
"무슨 자격?"
"아부지 노릇 할 자격."
"이런 젠장, 그래도 아재한테 절은 시키지 않았소? 나도 하고 내 아들도 하고 안 그랬소?
가만, 가만, 아재한테 절 받은 자격 있는지 그것부터 따져볼 걸 그랬네."
"옛말 그르지 않고말고. 그래,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했다. 자식 귀에 들어가게 하기 민망
하다니까 한문 신세 지자. '불신이어든 단간첨두수하라 점덤적적 불차이니라'."
"아재, 그 말뜻 알고나 써요? 믿어지지 않거든 처마에 물 떨어지는 걸 봐라, 앞 물방울 떨
어진 자리에 뒤 물방울 떨어진다. 이러면 왜 안 되는데? 네미, 뜻도 모르면서 문자는?"
"우리 뿌리가 거 있다."
"너무 깊이 박혔어."
나는 아들딸에게 무릎 꿇는 걸 가르치지 않았다. 책상다리 앉음새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거니와, 가르쳐도 내 아들이 도저히 배울 수 없고 배울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새대가리는 신장 165센티미터에 체중은 50킬로그램쯤 나가는 사람이다. 새대가리는 몸의 형편이 그런데다 훈련까지 잘되어 있어서 하루 종일 책상다리 앉음새로 앉아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시골집에서는 그렇게 앉을 수밖에 없다. 의자가 아예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아들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 학부를 졸업할 때까지 미국에서 자라고 살았다. 미국에는 책상다리 앉음새로 앉을 데가 없다. 꿇어앉을 데도 없다. 새대가리는 나에게, 한국으로 들어와서 살 경우에 대비해 그런 앉음새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성을 낸 모양이지만 그 또한 모르는 소리다. 내 아들은 신장 186센티미터에 체중은 90킬로그램이 넘는다. 내 아들뿐만 아니다. 요즘 애들이 얼마나 큰가. 요즘 청년들 중에, 쪼그리고 앉았다가 그 자세로 그대로 일어설 수 있는 청년은 절반도 안 된다고 한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쪼그리고 앉았다가 그 자세로 그대로 일어서본 경험이 거의 없다. 지금은 키 177센티미터인 내가 키다리 소리를 듣던 시대가 아니다. 나도 지금은 책상다리 앉음새로 몇 시간씩 버틸 수 있다. 하지만 담배 끊고 체중이 불어 74킬로그램을 상회할 당시는 나 역시 책상다리 앉음새가 부담스러웠다. 조금만 앉아 있어도 다리가 저리고, 몸을 단단히 곧추세우지 않으면 몸이 뒤로 무너지고 하는 바람에 애를 먹은 적이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참았다. 야, 새대가리야, 그걸 왜 가르쳐?
나는 세대 아재와 같은 세대에 속한다. 그래서 그가 오류를 지적하면 대개의 경우, 옛것을 고집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고치는 시늉을 한다. 같은 윤리와 도덕을 호흡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아들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윤리를 살아가야 한다. 나는 내 아들 세대에게 우리 세대의 예법을 넘겨주는 것을 거절한다. 새 세상에 알맞은 공생 윤리를 마련해주든지, 저희들이 마련하도록 격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세대 아재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첫째는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대가리가 새대가리라서 자꾸 잊어버릴 것이기 때문이고, 둘재는 그런 친절을 베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조리 있는 설명을 통해 설득당한 상대가 설득한 자에게 호감을 갖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남는 것은 미움뿐이다.
나는 욕을 잘하는 사람이라서 그 장기를 살려 새대가리가 얼얼해지도록 욕만 실컷 해주었다. 내 고향 사람들은 욕을 잘하지 못한다. 음담패설도 잘 못한다. 고향에서 멀지 않은 안동 사람인 내 선배 김원길 시인에 따르면 안동 사람이 욕 잘 못하고 음담패설 잘 못하는 것은, 유교적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인의예지(仁義禮智)'에서 tdj나는 언행을 기피하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상처나 입히는 '인의예지', 그거 나에게는 쥐뿔이다. 나는 욕할 때는 안면 몰수하고 한다. 시발 놈, 눈깔을 확 뽑아 문지방에다 놓고 문을 쾅 처닫아버릴라...... 이죽거리기를 좋아하는 세대 아재도 이런 고폭탄(高爆彈) 한 방이면 조용히 그냥 간다. 명색이 아재비라서 새대가리에게 이런 욕을 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내 입에는 이와 유사한 욕이 어려 발 장전되어 있다. 발사하면 어러 놈 조용히 간다.
지금도 내 고향 사람들은 옛말을 잘 쓴다. 자랑으로 여기고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전자 쪽으로 혐의가 많이 기운다. 말이라는 것이 섬겨야 할 가장 높은 덕목은 무엇일까? 아마 소통일 것이다. 그런데 내 고장에는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기보다는 과시를 목적으로 하는 듯한 말들이 무성하다. 물론 내 고향 사람들 사이에서는 소통에 아무 문제가 없다.
신혼 시절 아내와 함께 고향에 갔을 때, 당시 마흔이 채 못 된 내 고종형이 아내를 불렀다.
"종수씨, 이리 좀 와 보시이소."
종수(從嫂)는, 외종제(外從弟) 곧 외사촌 동생의 아내라는 뜻인데 내 아내는, 이름이 '종수'라는 사람을 부르는 줄 알고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관향을 어디로 쓰시니껴?"
서울에서와는 달리 내 고향에서는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관향(貫鄕)'은 '본관(本貫)'을 뜻한다. 이상하게도 이 질문을 자주 받는다. 서울 사람들에게는 남의 관향이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 하지만 내 고향 사람들에게는 이게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다. 가령 버들 류자(柳字)를 성씨로 쓰는 하회 유씨(河回柳氏) 유 아무개가 이런 질문을 받을 경우, '하회 유가(河回柳哥)'입니다 하고 대답해야지, '하회 유씨'입니다 하거나 '버들 유가'입니다 했다가는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된다. 대답 제대로 못 하는 난 데 사람 만나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내 고향 마을의 세대 아재 같은 이다.
"시하니껴?"
보라. 한자를 병기하지 않으니 외국어 같다. '시하(侍下)'란 부모나 조부모를 모시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니까 이 물음은, 조부모ㆍ부모가 살아 있느냐는 뜻이다. 조부모 ㆍ부모 다 생존할 경우는, 층층시하(層層侍下)입니다 하고 대답해야 한다. 아버지만 생존해 있을 경우는 엄시하(嚴侍下), 어머니만 생존해 있을 경우는 자시하(慈侍下)입니다 하고 대답해야 사람 대접을 제대로 받는다. 끝도 없다. 나는, 우리 고향 사람들이 왜 아직도 남의 할아버지를 '왕존장(王尊丈)', 남의 아버지를 '시상(侍上)', 남의 숙부를 '완장(阮丈)'이라 부르기를 고집하는지 많이 궁금해한다.
내가 좋지 않게 보는 것은, 이런 말들이 남에게 상처 줄 목적으로 악용되는 경우다. 내 어린 시절, 악용의 대산이 된 것은 주로 난데〔外地〕에서 우리 고장으로 장가들어오는 타성바지 새신랑들이었다. 이제는 쓰이지도 않는, 외국어나 다름없는 옛말로써 새신랑들에게 언어 폭력을 가하는 이 악습의 최전선에, 차세대 타성바지를 비아냥거리고 제 동아리의 교앙을 우쭐대는 쥐알만한 조무래기들의 선두에는 늘 세대 아재가 서 있었다. 나도 내 처가(妻家)의 한 조무래기로부터 이런 유의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조무래기가 내게 물었다.
"안항이 몇인고?"
형제가 모두 몇이냐는 질문이었다.
"일곱 마립니다."
내가 대답했다.
"무슨 대답이 그러노?"
"'안항(雁行)'이라면 기러기떼 아닙니까?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이, 일곱 마리니까 일곱
마리라고 할밖에 더 있습니까?"
나는 미운 사람이 며느리 보는 자리에 가야 했다. 안 갈 수 없는 까닭은 이미 충분히 설명한 것 같다. 대도시 예식장에 가는 것이 아니라 내 고향 마을에 가야 했다. 나는 성묘나 집안의 궂은 일 아닌 일로 고향에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활시위 당기는 김에 코 닦는다고, 새대가리 혼인 보러 가는 김에 성묘 한번 더 하고 오는 일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싶었다. 이런 식으로 여행해야 할 경우 내가 잘 써먹는 방법이 하나 있다. 꼭 선산 성묘하러 간다기보다는 오래 보지 못한 시골 여행하는 가벼운 기분으로 간다고 한 내 아들은 벌써 내가 잘 써먹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전통 혼례. 이제는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옛날에는 대도시에 '혼구점(婚具店)' 같은 것이 있었다. 사모관대니 원삼 족두리니 하는 것들을 여기에서 사거나 빌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혼구는 예식장만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요즘 사람들은 전통 혼례 하고 싶어도 혼구 구하지 못해 못 할 법도 하다. 나는 마음 내키지 않는 고향 여행을 인류학적 '필드 워크(現場調査)'로 승격시키기로 했다. 시논 엘리아스 부부를 데리고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시논 엘리아스가 마침 아내와 함께 서울의 한 대학교에 교환 교수로 와 있었다.
시논 엘리아스 부부, 이렇게 쓰면 읽는 사람들은 중년의 백인 부부를 연상할 것이다. 아니다. 국적만 미국이어서 미국인일 뿐, 겉모습은 한국인들이다. 이들에 관해서는 설명이 조금 필요하다. 나와는 인연이 깊다. 나는 시논과 그의 부인 한인지를 접속시킨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시논을 처음 만난 것은 15년 전, 처음으로 미국의 한 대학 문화인류학 연구소에 들어간 직후다. 연구소에서는, 내 영어 회화 실력 가지고는 안 되겠다 판단하고 영어 회화 실력을 향상시킬 목적으로 미국인 학생을 개인 교사로 붙여주겠노라고 했다. 이름은 그리스계 미국인 '시논 엘리아스'라고 했다. 처음 만나는 날 나는 매부리코 그리스계 미국인이 나타나겠거니 하고 기다렸는데, 막상 나타난 것을 보니, 몸집이 작고 살갗이 가무잡잡한 것으로 보아 흡사 동남아시아 사람과 비슷한 동양인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그리스계 미국인 가정으로 흘러 들어간 입양아였다. '시논Sinon'은 그리스 이름이 아니라 한국 이름 '신원Sinwon'에서, 그리스 자모에 없는 'W'한 자만을 떼어낸 한국 이름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한국 이름은 '김신원'이엇다. 나는 시논과 1년 동안 매주 한 차례 두세 시간씩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나의 부적절한 표현이나 발음을 교정해 주었고, 나는 그에게 주로 한국 문화와 관련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영어로 들려주면서 영어로 지껄이는 연습을 했다. 나는, 다섯 살 때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되어 한국어를 까맣게 잊어먹은 당시의 대학원생 시논이 고향과 한국어에 대한 기억을 복원할 수 있게 하려고 노력을 적잖이 기울였던 것 같다. 하지만 당사자는 한국 문화나 한국어에 대한 기억의 복원에 별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그와 내가 아주 가까워지게 된 아주 특별한 계기가 있다.
그해 가을, 학교 안 카페에서 만났을 때, 시논 엘리아스가 내 양복에 붙어 있던 노란 회화나무 잎 한 장을 떼어주면서 물었다.
"체릴레인(벚나무 길)의 교환 교수 아파트에 사시는군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조금 놀라워서 내가 반문했다.
"가을이면 노란 회화나무 단풍이 볼 만한 곳이죠. 엘리아스 집안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입니다. 아세요? 그 아파트 20개 동(棟)이, 한국 전쟁 당시에는 한국으로 파견할 장교들의 숙소로 쓰였다는 거?"
"들었어요."
"우리 할아버지 숙소도 거기에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전사했죠. 지금 아파트 각 동에는 사람의 이름을 쓴 청동 플레이트가 붙어 있죠? 어떤 사람들 이름인지 아세요?"
"장교 숙소로 쓰이던 그 아파트의 건립 기금 기부한 사람들 이름이 아닌가요?"
"아니에요. 그 아파트를 숙소로 쓰다가 한국에서 전사한 장교들 이름이랍니다. 실례지만 몇
동 사시죠?"
"12동, '제이슨 엘리아스 관(館)'. 그러고 보니...."
"그래요. 공교롭군요. 할아버지 제이슨 엘리아스에게 헌정된 '메모리얼(기념관)'인 것이죠.
그러니까 선생님은, 할아버지가 40여 년 전에 숙소로 쓰던 아파트에 살고 계시는 셈이에
요."
" ...... "
이런 인연이 있는 만큼 내가 '접속'이라는 말을 여러 번 쓴 것을 양해하시기 바란다.
1년 교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서울에 있던 나의 친구가 전화를 걸어, 누이동생이 내가 머물고 있던 대학으로 가고 싶어하는데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입학을 주선하는 것은 물론, 미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자잘한 일까지 도와주어야 했다. 나, 시논 엘리아스, 내 친구의 누이 한인지, 이렇게 셋이서 만나는 일도 없지 않았다. 한인지가 시논 엘리아스의, 태어난 나라에 대한 막연한 향수를 자극했기가 쉽다. 이렇게 눈이 맞아 탄생한 부부가 바로 시논 엘리아스 부부다. 시논은 한인지와 결혼한 직후, '이제 날개가 생겼으니 뿌리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는 말을 내게 한 적이 있다. 나는 이 부부의 이야기를 2백자 원고지 천 장에 달하는 장문의 보고서로 꾸민 적이 있다. 그 제목이 바로 '뿌리와 날개'였다.
내가, 마음 내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세대 아재가 며느리 보는 것을 축하하러 가야 할 일이 생긴 것은 시논 엘리아스가 서울의 한 대학 교환 교수로 6개월을 보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날개밖에 없는 시논에게 뿌리밖에 없는 세대 아재의 전통 혼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의사 타진하느라고 전화를 걸었을 때 시논은, 한인지와 무려 12년 동안이나 연습한, 썩 괜찮은 한국어로 내게 말했다.
"야후, 그렇지 않아도 인지가, 한국에 왔으니까 한국식으로 결혼식 한번 더 하자고 해요.
사람만 안 바꾼다면 처가에서도 그걸 원하나 봐요. 그래서 전통 혼례를 치러주는 곳에 가
보았는데, 어수선해서 못 쓰겠더라고요. 혼례라기보다는 '공연'에 가까웠죠."
나도 어린 시절에 몇 차례 보았는데, 전통 혼례, 이거 예법 다 따져가면서 하다가는 날샌다. 내 경우 혼례 당일에 내려갔기 때문에 사주단자가 어떻게 오거나 갔는지, 예물이 어떻게 오갔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본 것은 대례(大禮)부터다. 연출은 세대 아재가 맡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남의 일에도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위인이 혼례식 연출을 남에게 맡겼을 리 없다.
원래 초행(醋行)은 신랑을 비롯, 신랑 집의 귀한 손님들이 신부 집으로 오는 절차를 말한다. 그런데 혼례가 치러지는 곳이 신랑 집이다. 세대 아재가 이걸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했다. 마당에는 대례상이 차려져 있었다. 어릴 때 보던 대로 촛대, 소나무 가지, 대나무 가지, 장닭, 쌀, 밤, 묵은 대추 같은 것들이 상 위에 놓여 있었다. 마당 한쪽에는 병풍이 쳐져 있고, 병풍 앞에는 작은 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신랑과 신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홀기 부르기가 시작되어야 신랑 신부가 나타나는 법이니, 보일 리가 없었다. 세대 아재는 도포 같기는커녕 허우대 큰 사람의 것을 빌려 입은 듯한 두루마기 차림으로,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서성거리면서 연신 손목시계를 보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탈탈탈탈, 경운기 소리가 들렸다. 탈탈탈탈...... 분명 경운기 소리였다. 그 소리는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혼례청에 웬 경운기일까 싶었다.
"보래, 이 사람들아, 준비해라. 온다."
세대 아재의 이 한마디에 식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운기 모는 사람과 세대 아재 사이에 시간 약속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경운기가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짐작 할 수 있었다. 마을 뒤의, 야트막한 고개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터였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한복에다 두루마기까지 제대로 차려입고 경운기를 몰고 있는 사람은 나의 고종형이었다. 신랑 역시 한복 제대로 차려입고 경운기 짐받이에 타고 있었다. 하객들은 박수를 쳤지만 나는 박수를 칠 수가 없었다. 우스운 광경이었지만 웃을 수도 없었다. 경운기가 대문 앞에 멎었다. 신랑은 경운기에서 내리지 않았다. 신랑의 표정은 사색(死色)이었다. 3월이라 그리 춥지는 않았으니 신랑의 사색은 날씨 탓이 아니었으리라.
경운기에서 먼저 내린 고종형이 대례상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두루마리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식순(式順)(을 알리는 문제의 홀기(笏記)를 고종형이 부르기로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궁금해서 고종형에게 물어보았다.
"혼례는 원래 신부 집에서 치르는 거 아닌가요?"
"모르겠다. 말 시키지 마라. 죽을 맛이다."
"형님 맛이 신랑 표정과 똑같네?"
"괜히 세대 비위 긁지 말고,,,,,, 본 것 들은 것,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모두 잊어버려라."
우리가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있던 세대 아재가 고종형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고종형이 자리를 정하고, 큰 소리로 홀기를 부르기 시작했다. 홀기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보겠다. 한문 병기는 해도 그렇고 하지 않아도 그렇고 하니까, 하지 않겠다.
"서하경운기우대문외!"
원래는 '서하경운기'가 아니고, '서하마'다. 신랑은 말에서 내리시오, 이런 뜻이다. 고종형은 '서하마'라고 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형 역시, 세대 아재가 몹시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서하경운기', 즉 신랑은 경운기에서 내리시오라고 했을 것이다. 구식 대례청을 자주 다녀서 '서하마'를 알고 있는, 연세 많은 노인들이 빙그레 웃었다. 다행히도 젊은이들이 별로 없어서 하객들이 배꼽 잡고 뒤집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행전안례!"
나무 기러기 드리는 예를 행하시오, 이런 뜻일 터이다.
"왜 하필이면 기러기지요?"
한인지와 함께 내 겨드랑이에 붙어 있던 시논이 속삭였다.
"난들 다 알겠소? 기러기는 혼자 안 다니고 늘 붙어 다니는 새라서 그럴 거라. 배우자를
잃은 사람을 '짝 잃은 외기러기'라고 부르거든."
"집안자진수우서!"
나무 기러기를 가진 아범은 기러기를 신랑에게 주시오!
신랑 친구가 색칠한 나무 기러기를 신랑에게 건네주었다. 신랑은 나무 기러기를 받아, 기러기 받이로 미리 준비된 상 위에 놓고는 일어서서 네 번 절했다. 신부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나오더니 신랑 앞에 놓인 기러기를 집어, 문이 열려 있는 방 안으로 던졌다. 방바닥에 떨어진 나무 기러기가 똑바로 서면 첫아들을 낳고, 모로 쓰러지면 첫딸을 낳는다던가? 발딱 서기보다는 모로 쓰러지기 쉬울 테니, 첫아들 보기가 첫딸 보기보다는 어려울 터이다. 나는 나무 기러기가 발딱 서는지 모로 쓰러지는지 보지 못했다. 여인의 얼굴 때문이었다. 여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 붙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길고도 지루한 절차가 뒤따랐다. 노인들은 이래야 예법에 맞는다커니, 저러면 안 된다커니 말이 많았다. 남의 잔치에 말이 많기로 유명했던 세대 아재는 촌로들의 간섭을 일사불란하게 방어해 내는 데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신랑이 경운기에서 내리고부터 신부가 나오기까지 근 반시간이 걸리지 않았나 싶다. 여인이 나무 기러기를 던지던 바로 그 방에서 대례복으로 성장(盛裝)한 신부가 나왔다. 원래는 손을 가리는 한삼(汗衫)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오는 법인데, 그날의 신부는 맨얼굴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웠다. 가무잡잡한 피부, 자그마한 체구..... 기러기를 던지던 여인과 닮은꼴이었다. 모녀가 아니고서는 그럴 수 없을 터였다.
"상향위."
'서로 마주 보고 서시오'였다. 고종형이 홀기 부르는 목소리가 우렁찼다. 그가 화를 참고 있다는 증거로 들렸다.
"부선양배(신부가 먼저 두 번 절하시오)."
"서답일배(신랑은 답례로 한 번만 절하시오)."
"부우재배(신부는 다시 두 번 절하시오)."
"서우답일배(신랑은 다시 답례로 한 번만 절하시오)."
어린 시절 구식 혼례를 여러 번 보았지만 신부는 두 번 절하고 신랑은 한 번으로 답했던 것은 내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어린 마음에는 그 절차가 지닌 상징적인 의미가 감지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지런히 사진만 찍고 있던 시논의 아내 한인지가 카메라를 케이스에 집어 넣으면서 내게 씨울거렸다.
"오빠, 아, 안 해요. 우리집에서도 권하고 나도 그러고 싶어서 전통 혼례 한 번 할까 생각
했는데, 오빠, 나 안 해요. 이런 게 어딨어? 세상에, 이런 게 어딨어?"
그리고는 시논을 향해 영어로 덧붙였다.
"봤어? 세상에. 신부는 두 번 절하고 신랑은 한 번으로 답례하는 거 당신 봤어? 안 해. 전
통 혼례, 안 해. 자꾸 하자고 조르지 마. 그러면 당신, 죽여버릴 거야."
혼례 자체에 대한 흥미를 잃었던 것은 아니다. 시골에 의자가 있었을 리 없지만 잔치 마당에는 의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이 좀 든 축은 대례청에 서 있지 못하고 모두 마당 한쪽에 마련된 술상 앞에 앉아 있었다. 술상이 둘이었다. 하나는 노인네들에 가까운 남정네들 차지, 또 하나는 할머니들에 가까운 썩음썩음한 아낙네들 차지였다. 모닥불이 피워져 있기는 하지만 자리가 을씨년스러웠다. 나도 거기에 어울리고 싶었지만 시논 부부가 딸려 있어 그러기가 망설여졌다. 그런데 내 친구 어머니가 그쪽으로 나를 끌었다. 나는, 또 손목 잡힐 각오를 하고, 친구 어머니의 눈물을 볼 각오를 하고 그쪽으로 끌려갔다. 시논 부부는 호기심이 덜 식었던지 대례상 옆을 서성거렸다. 자리에 앉지도 않았는데 친구 어머니가 물었다.
"닌 눈으로 보이 어떻노?"
"뭐가요?"
"새대가리의 며느리, 니 눈으로 보이 어떻노?"
"그만두세요. 이제 그만 하세요."
"그런데 말이라, 니한테 묻어댕기는, 영어로 솰라솰라 하는, 저기 저 새카맣고 쪼맨한 사람
말이다. 혹시 신부 오빠 아이라? 새대가리 며느리, 니가 중신한 거 아이라?"
시논 있는 곳을 돌아다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몸집이 작고 살갗이 가무잡잡해서 내가 '깜상'이라는 별명으로 자주 부르던 시논은 흡사 신부의 오라비 같았다.
잔칫집 분위기라고 해서 노상 흥겨운 것만도 아니다. 신랑 집에서는 새 사람 맞으니 흥겨운 분위기일 수 있어도 신부 집은 딸을 떠나보내는 것이니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은 당연하다. 거런데 혼례가 치르어지는 집은 분명히 신랑 집인데, 잔칫집이라기보다는 초상집 같았다. 열아홉 살에 시집와서 40년 넘게 그 집에 산 세대 아재의 아내는, 그토록 함게 또 오래 살아왔을 터인데도 아낙네들 모여 있는 술상 밥상 쪽으로는 고개 한 번 돌리는 법이 없었다. 술 몇 잔 받아 마시고 보니, 대례 끝난 뒤에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조차 가지 않았다.
혼례가 끝나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 읍내에서 택시가 들어왔다. 신부 모녀, 신랑, 그리고 세대 아재가 택시에 올랐다. 세대 아재의 아내는, 신랑 부자와 신부 모녀가 떠나는 자리에도 나서지 않았다. 신랑 부자와 신부 모녀는 도망치듯 마을을 떠났다.
시논의 자동차에 오르려는데 고종형이 내 등을 툭 치고는 돌아서서 몇 걸음을 옮겼다. 할 말이 있으니까 다라오라는 뜻이었다. 고종형은 대추나무 아래에서 돌아섰다.
"우리사 봐도 누가 이 나라 사람인지 누가 저 나라 사람인지 아나? 그렇지만 자네는 외국
많이 나다니는 사람이라 벌써 다 짐작하고 있을 거라. 세대 저거 왜 저러는지 나는 통 모
르겠다. 뭐 하러 구식 혼례로 사람 끌어 모으고 망신을 사서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2천5
백쯤 든 모양이다. 이쪽 중신애비에게 천, 저쪽 중신애비에게 천...... 사돈 불러들이는 데
비행기 값, 호텔 값 안 들었겠나?"
"세대 아재 머리에 무슨 혼란이 온 것 같은데요? 그런데 문제는 며느리의 국적이 아닙니
다."
"그러면 뭐가 문제고?"
"세대 아재 새대가리가 문제인 것이지요. 눈 좀 일찍 뜨고, 아, 지금 시대는 우리 자라던
시대와는 많이 다르구나. 이런 생각 좀 할 수 있었으면 좀 좋았겠어요? 새대가리가 시속
에 좀 일찍 눈떴더라면 좀 좋을까요? 새대가리 앞으로 어떻게 처신할지 겁이 나네요. 조
상들 앞에 면목없다고 선산 도래솔에 목이라도 매지 않을까 겁이 나네요."
"그러기야 하겠는가만, 얼굴 어떻게 다시 볼지 나도 걱정인걸. 어서 올라가게. 유쾌하지도
않은 길, 먼 길 왔다 가네. 조심하고...."
서양인들은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을 거의 구분해 내지 못한다. 그래서 여행하다 보면, 중국인이세요, 일본인이세요,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인과 일본인을 꽤 잘 구분해낸다. 미국은, 많은 나라 사람들이 어지럽게 섞여 사는 나라다. 내가 머물던 대학의 교환 교수 아파트, '제이슨 엘리아스 관(館)'이 있는 그 아파트 단지만 해도 무려 107개국에서 모여든 학자들이 살고 있었다. 한동안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시논 부부는, 그날의 신부가 어디에서 온 아가씨인지 짐작했을 것이다. 나도 짐작했다. 뿌리 좋아하는 세대 아재가 외국인 며느리를 맞은 것 자체는 비극이 아니다. 외국인 며느리, 외국인 사위 보는 사람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고 있다. 여느 사람들에게, 외국인과의 통혼은 비극이 아니다. 그러나 새대가리 세대 아재에게, 그것은 눈뜨고는 보아낼 수 없는 비극일 것이다. 비극인 동시에 희극이기도 할 것이다.
첫댓글 선생님 좋은글이라 스크랩해 갑니다. -kun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