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종교와 인간」
-종교. 우리는 종교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막시스트의 말처럼 민중의 아편인가? 아니면
포이에르 바하의 말처럼 인간의 이상을 극단으로 형상화한 인간의 또 다른 얼굴인가? 그것
도 아니면,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신과의 단독적 관계를 말하는가? 그것도 아니면,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는 순간 맞닥뜨리게 되는 돌파구인가? 아니면, 단지 상상력의 산물로
서 죽음의 두려움에서 도피하고자하는 인간의 얄팍한 술수인가? 아니면, 화이트헤드의 말처
럼 고독한 자리에서 직면하는 초월적 존재와의 만남인가? 아니면, 아니면, 아니면.....
왜이리 종교에 대한 말들이 넘쳐나고 이견과 차이가 우리를 갈등으로 몰아넣는가? 왜 종교
라는 '화두'는 끈질기게 우리의 질척한 삶의 모퉁이에 들러붙어 있을까? 우린 분노와 조소
의 자리에서 종교를 보기도 하고 급박한 실존의 위협 속에서 진지하게 외치는 언어로 종교
를 보기도 한다. 종교가 참이든, 거짓이든 인간과 종교를 떼어놓고 인간과 종교를 파악할
수 없다. 양자는 서로의 본질을 가늠케 해준다.
나는 종교를 신념으로 이해한다. 종교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신념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우린 종교가 참이라고 말하든 거짓이라고 말하든 그 말들을 존중해주어
야 한다. 종교는 자연과학처럼 측량 가능한 사물을 말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즉,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이다. 그런데, 그건 그렇다 치고, 종교인이든 비 종교인이든 종
교가 문화의 속성을 지녔다는 데 동감하리라 생각한다. 종교는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
다. 당장. 내가 만나는 잘난 친구 놈도 종교를 가지고 있고 내가 그토록 온갖 화려한 수식어
로 사랑을 고백하는 그녀도 종교인이다. 게다가, 이놈의 경건한 나라는 항상 경건한 종교인
들에 의해 지도되어왔다. 이승만, 김영삼은 장로였고 전두환은 불교도였다. 지금 현 대통령
역시 가톨릭교도다.
우린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간에 종교와 관계하고 있고 종교인들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종교에 영향을 받고 있다. 뭐, 종교에 영향받기보다는 종교를 이용한다는 말이 더 어울릴
사람도 있지만 하여튼 종교는 이렇게 거대한 얼개로 우릴 잡아매고 있다.
「정치권력의 노리개, 종교?」
나는 9.11사태를 지켜보면서 정치와 종교의 관계를 돌아보게 되었다. 9.11사건은 분명 정치
적 요구, 정치적 의미로 봐야 한다. 그럼에도 빈 라덴은 '聖戰'을 외치고 부시도 '선과 악의
싸움'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국 기독교일각에서는 이슬람교와 기독교간의 혈투를 언급하며
우상숭배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핏발서가며 궁시렁 댔다. 이들은 주장의 근거를 성서(여
호수아)중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서 우상을 섬기던 민족을 몰살시킨 사건에 두었다. 축
자영감설에 길들여진 한국교인들은 그간 숨겨두었던 공격적 성향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난 솔직히 종교가 '생명에 대한 존경심'을 공통분모로 하기에 한국기독교가 미국의 보복공격
을 자제하도록 요청할 줄 알았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나의 그러한 기대가 얼마나 이상적
인지를 여실히 증명해주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던 이타주의자 예수. 예수를 잡으러 온 로마
군사를 향해 칼질하던 베드로한테 칼로 일어서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하던 비폭력주의자
예수. 그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이 신약의 예수는 숨긴 채, 이교도들을 죽이는 구약. 전쟁
의 신으로 회귀하는 그들의 탄력적인 사고. 나는 닫힌 생각을 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그런 유연한 사고력을 선보일지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과거, 십자군 전쟁은 그 당시 종교인들에게 성스러운 전쟁이었다. 聖地를 탈환하기 위해
서 기독교인들은 목숨을 걸고 이슬람교도들과 전쟁을 치뤘다. 아마도 대다수의 순박한 종
교인들은 대단히 중대한 사명감에 불탔으리라 본다. 하지만, 결국 역사가 증언하는 것은 십
자군전쟁은 종교를 가장한 정치적 야욕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특정 역사 속에 신을 가두어
두고 마치 성지에는 신이 많이 있다는 듯이 생각하는 그들의 서투른 종교관념도 우습지만,
종교가 정치에 이용당할 수 있고 우직한 신앙이 약삭빠른 인간의 이욕에 도매급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주의해서 봐야 할이다.
지금, 종교의 근저에는 정치논리가 숨겨져 있다. 정치적인 종교인, 종교적 정치인들은 종
교의 교리를 자신의 존재근거로 삼고 단합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종
교간의 대화가 더더욱 필요하다. 종교간의 간격이 좁혀지고 종교간에 따스한 시선이 교차될
때, 종교가 폭력과 정치에 이용당하는 일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1952년 빌링겐 대
화에서 기독교는 종교간의 대화가 시대의 요청임을 천명했지만, 별 소득이 안 보인다. 특히
한국교계는 현대신학과 거리가 먼 근본주의의 또 다른 이름 배타적 복음주의에 몰두하고 있
으며 세계화라는 사건을 직시하지 못하고 배타적인 자기 옹호로 그치고 있다.
현재, 진보적 신학자와 종교학자들은 종교간의 평등적 대화를 위한 노력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종교다원주의가 그 이름이다. 이들은 종교간의 대화를 위해 기독교 내의 신학적 도그
마(교리)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나는 종교다원주의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기독교
신학자들의 이론을 언급하고 과연 종교간의 대화를 위해서 기독교가 취해야할 태도가 무엇
인지 말해보겠다.
1)배타주의
- 배타주의는 말 그대로 나를 뺀 나머지는 옳지 않기에 거부한다는 것이다. 한국 개신교가
이러한 입장이다. 기독교의 기본도그마(교리)는 삼위일체, 神人예수, 동정녀 탄생, 대속(대
신 속죄해줌), 예수의 죽음, 부활이다. 배타주의자들은 이런 기본도그마를 인정할 때에
야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다음과 같은 성서구절을 근거로 제시한다. "이 예수는
집 짓는 사람들 곧 여러분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예수를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4:11-12),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복음 14:6),"그들이 말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사도행전16;31)
이미 이런 배타주의를 넘어선 가톨릭에서도 제 17차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1442)에
서 다음과 같이 선포했었다. "거룩한 교회는 다음과 같이 믿고 고백하며 선언한다. 가톨
릭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은, 이교도들 뿐 아니라 유대인, 이단자, 열교자(개신교)들 모두
는, 그들이 생명이 끝나기 전에 가톨릭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에 참
여하지 못하고 '악마와 그 심부름꾼들을 위해 마련된' 지옥 불로 갈 것이다."(가톨릭 교
의 집성문 中)
가톨릭은 1965년 10월28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런 생각을 수정했다. 그런데, 가톨릭
교권에 대한 저항을 뿌리로 삼고 있는 개신교가 더더욱 교권화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한국의 교계는 배타주의를 고수하면서 마치, 한국교계만이 유일한 진리의 수호자인양
자처하고 있다. 이들의 공격성은 가톨릭을 미신으로 단죄하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구
호를 남발한다.
성공회대 명예교수 정양모씨는 한국교회의 이러한 공격성이 사회를 혼란으로 빠트리지 않
는 이유를 종교분포의 황금비율로 보고 있다. 현재, 한국은 불교도 1200만, 개신교 900만, 가
톨릭 400만이다. 배타주의의 문제점은 1. 종교적 우월감이 물질적 폭력으로 변할 수 있고, 2.
교회와 성서를 하느님과 동격으로 본다는 점에 있다. 3.그리고 현재 가장 중요한 타종교와의
말걸기에 대단히 부정적이라는 점이다. 교회는 어떤 의미로 변화 발전하는 생명체이다. 이
것은 도래할 하느님나라의 상징이다. 따라서 교회는 왜곡되어질 수도 있고 퇴행할 수도 있
다. 또한 인간의 생각, 인간의 언어는 한계를 내포한다. 그렇기에 성서는 하느님 말씀인 동
시에 하느님 말씀이 아니다. 성서조차도 하느님을 가르키기 위한 신앙의 도약대라는 것이다.
교회와 성서를 신으로 섬기는 기독교는 하느님의 무한성을 협소화 시키고 기독교도그마와
성서를 신격화하여 또 다른 우상숭배에 빠진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2)포괄주의
1965년 10월. 28일 바티칸공의회는<<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을 반포한다. 이는 오늘
날 가톨릭의 공식입장이다. "가톨릭 교회는 비그리스도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 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 양식 뿐 만 아니라 그들의 규율
과 교리도 거짓 없는 존경심으로 살펴본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에서 주장하고 가르치
는 것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
지 않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그분 안에서 사람들이 종교생활의 풍
족함을 발견하고,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당신과 화해 시키셨음을 교회는
선포하고 있으며 또 반드시 선포해야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타종교 신봉자들과 더불어
지혜와 사랑으로 서로 대화하고 서로 협조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생활을 증거 하
는 한편,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정신적, 윤리적 선과 사회적, 문화적 가치를 긍정하고 지
키며 발전시키기를 모든 자녀들에게 권하는 바이다." 이 조항은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
의 영향에 힘입은 바 크다. 그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비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을 찾으려는 진지한 노력'을 하며 자기 양심에 따라 성실
히 살면 그는 무의식적으로 예수를 신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구원받는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가톨릭의 공식입장이다.
하지만, 포괄주의자들은 기독교의 기본적 도그마, 삼위일체, 신인예수, 예수의 유일성과 보
편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타종교를 포섭하려는 노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정양모 교수는 한가지 예로써 이들의 한계점을 지적한다. 하루는 정양모 교수가
서강대학교에서 강의를 마치고 진월스님이 마주 오는 것을 봤다고 한다. 그래서 "여! 익명
의 그리스도인을 뵈니 매우 반갑네요."하고 농을 걸었다. 그러자 진월스님은 "신부님 같은
익명의 불자를 뵈니 참 기쁘네요. 손오공이 날뛰어 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다는
고사도 못 들으셨습니까? "하고 대꾸하더라는 거다. 정양모 교수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고 말하니 기분이 언짢냐고 물으니 그 스님은 몹시 언짢다고 했다고 한다. 기독교인이 포
괄주의를 주장하면서 타종교를 정리했다해도 그 자부심이 종교간의 대화에 유익하지는 않
다. 물론, 이러한 행보는 진일보한 생각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화는 서로가 평등
한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우월을 상정한 대화는 항시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 포괄주의
자는 칼 라너, 한스 큉, 잔 캅, 제프레, 민경석, 서공석, 최인식등이 있다.
3)신중심의 다원주의
- 영국 성공회 신학자 존 힉(1922-)은 종교간의 대화를 위해서 기독교교리의 코페르니쿠스
적 전환을 꿈꾼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중심의 구원관에서 신중심의 구원관으로 변해야한다
는 생각이다. 그 동안 기독교가 배타적일 수밖에 없던 이유는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
다는 교리 때문이었다. 결국, 타종교에 대한 말걸기가 성공하려면 이러한 교리에서 탈피해
야한다는 생각이다. 각 종교는 유일한 실재(신)를 특수한 문화, 특수한 역사 속에서 이해해
왔다. 각 문화권의 사람들은 유일한 실재를 다른 언어로 표현하고 나름의 영성훈련을 해오
고 있지만 유일한 실재와 관계한다는 점에서는 같다는 것이다. 예수는 신과 인간의 중간자
혹은 중보자이며 예수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주된 교리이다. 그런데 다원주의자
들은 참된 구원자는 신이며 중보자는 예수만이 아니라 부처, 노자, 공자 여럿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각 문화에 등장하는 중보자 보다는 중보자가 보여주려 했던 구원자, 즉, 하느님이 중
요하다고 말한다.
신중심의 다원주의자들은 포괄주의자가 기독교교리의 보편성, 유일성을 유지하려는 입장
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기독교교리의 보수작업에 들어간다. 이들은 신인예수, 동정녀 탄생,
부활은 신화적 발상으로 본다. 존 힉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강생교리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육화는 신화적 개념, 비유적인 말, 심상의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가 우리의 삶과 초월적 신사이의 접촉점이 된다는 방편적인 말이다. 예수의 현존
속에서 신의 현존을 체험하게 됨을 우리는 안다....예수는 신의 아들이다. 신의 육화이
다. 로고스가 육신을 입었다고 말할 때, 우리는 실재를 신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다."(<<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86쪽)
파니카는 예수그리스도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메시야, 구원
자,라는 의미를 지닌다. 파니카는 그리스도는 각 문명권에 계속적으로 침투한다고 주장한
다. 유대지방에서는 예수라는 개체가 그리스도의 역할을 했으며 타 문명권에서도 그리스도
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예수그리스도 외에 부처그리스
도, 장자그리스도가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그의 탁월성은 기존 종교다원주의가 기독교의 도
그마를 해소하려는 생각을 가지는 것에 반해 기독교의 독특성과 타종교의 독특성을 동시에
인정하려는 노력을 한다는 점이다.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두 가지를 획득하려는 모색이라
할 수 있다.
4)구원중심의 종교다원주의
존 힉이 말하는 신 중심 종교다원주의에서 '신'은 서구적 의미의 인격적 유일신을 말한다.
그런데, 불교라든지, 동양종교는 비인격적 신을 상정하기에 신중심의 종교다원주의도 한계를
지닌다. 이런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존 힉이 후기에 보여주었듯이 인격적 신 개념을 넘어
서는 실재중심으로 이동한다. 구원중심의 신학자로 폴 니터, 변선환 교수, 다석 유영모선생,
홍정수, 김승철등이 있다. 변선환과 홍정수 등은 진보적 학풍을 대변하는 감리교교단에서
종교다원주의를 제창하다가 3盜(김홍도, 김국도, 김선도)목사들에 의해 파직 당하고 출교당
했다. 이에 열받은 변선환교수는 얼마 안있어 졸도로 죽고, 홍정수 교수는 미국에서 목회한
다는 소문이 있다. 진보적이라고 자랑하는 감리교마저 이 정도면 나머지 교단은 더할 것이
다. 구원중심의 종교다원주의자는 다석 유영모선생, 폴 니터등이 대표적이다.
결론:
1.『느슨한 구원관, 우린 그것을 원할 뿐이다?!』
:종교를 말할 때, 교주, 교리, 내세에 대한 신앙, 탁월한 도덕적 가르침을 조건으로 열거한다.
물론, 대형종교에서 이러한 조건들을 보게된다. 그러나, 이것이 종교를 전체적으로 의미한
다고는 볼 수 없다. 종교는 어떤 면에서 거룩한 신비라 할 수 있다. 신과 인간의 내면적 결
단, 은폐된 관계인 것이다. 따라서 종교를 외적인 비교로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
런데, 우리 한번 짚고 넘어가 보자. 종교는 오래된 전통 속에서 교리라는 이론적 틀을 만들
었다. 그런 후 종교인들은 교리라는 이론적 잣대로 신자와 비신자를 나누고 유신론자와 무
신론자를 나눈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적 틀이 과연 정당한가는 고려해볼 문제다. 종교는
삶 속에서의 실존적 결단이며, 삶의 현장에서 무한성과 부대끼게 되는 '사건'이다. 종교의 핵
심은 삶이요. 행동이요. 실천이라는 점에 신학자 대다수는 동의하리라고 본다. 결국, 우리의
이론은 신과의 합일 속에서 녹아버리며(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신과의 실존적 대결 속에서
소멸해버린다. 신앙은 그 성격상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의 독단적 교
리(삼위일체, 부활, 대속)을 믿지 않았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며 그리스도적 삶을 산,
유영모, 함석헌, 안병무(민중신학자)들은 과연 비그리스도인인가? 지난 주에 판넨베르크 교
수가 한국에 와서 강의를 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에 대한 이론과 그리도적
삶과는 일치한다고 피력했다. 하지만, 우린 그리스도에 대한 이론을 아는 자들이 곧 그리스
도적 삶을 사는 자들이 아님을 경험한다. 바울은 우리의 아는 지식이 부분에 그친다고 말
했다. 그리고 하느님나라가 온다면 온전한 지식을 배울 것이라고 고백한다. 교리는 우리를
신으로 이끄는 도구이다. 그것이 곧 신일 수는 없다. 기독교 교리와 일정부분 거리가 있지
만 예수를 主요 스승이라고 고백하며 그리스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과연 비그리스도인이라
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 종교다원주의는 신자와 비신자를 특정교리로 선긋기 할 수 있다는 데에 회의한다. 이
런 이분법적 선긋기는 계산 가능한 인과법칙으로 환원하는 자연과학과 너무나도 닮아있다.
신앙은 인간의 실존자체다. 신앙은 사물이 아니다. 그런데도 배타적 복음주의자들은 이런
선긋기에 대한 이기적 열망에 빠져 있다. 종교다원주의는 느슨한 구원관을 원하는 것이라
고 본다. 신앙의 성격을 생각할 때, 느슨한 구원관은 타당하며 종교간의 대화를 위한 디딤
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2.종교간의 대화. 기독교의 도그마 해체만이 길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세계화라는 강포한 물결에 내몰린 채, 돛 없는 배를 타고 힘겹게 노젓고 있는 것이 우리
네 아닐까한다. 현재 이뤄지고 있는 세계화가 분명 어그러진 세계화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린 제대로 된 세계화를 기대한다. 각 문명간의 의사소통, 각 지역이 가지고 있던 편견의
빗장을 열고 상호 시너지 효과를 내는 세상. 이것이 우리가 그리는 세계화의 초상 중 하나
다. 즉, 세계화를 이루면서 동시에 지역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종교간에도 보편화와 특
수화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당장, 필요한 것은 상호차이를 발견하는 동시에
서로의 공통분모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은 각 종교가 잊어버린 유일한 실재에
대한 부분을 상호 보충해 줄 것이다. 예를 들어 존재만을 강조하고 남성적인 이슬람, 기독
교가 동양종교의 '해탈, 없음, 공허'를 통해 신의 또 다른 측면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딜타이, 판넨베르크등의 신학자가 동의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각 종교의 대화를 위해 기독교의 도그마를 해체하는 것은 기독교의 특수성을 무
시하는 것이며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어설픈 종교혼합을 추구하는 것이다라고 발언하는 사람
들이 있다. 이런 문제제기는 일견 타당하게 보인다. 그러나 나는 두 가지 점에서 이를 반
박한다. 첫째, 종교다원주의자 폴 니터는 종교다원주의가 이론적 유희로 끝날 가능성이 있다
고 보고 해방신학과의 연관하에서의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한다. 김경재 교수가 말하듯이 각
종교인은 궁극적 실재의 이론적 합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 종교인들이 행하는 구체적 사랑
의 실천, 헌신, 약자와의 동일시, 묵상을 통해서 서로의 일치감을 경험한다. 그리고 서로의
구체적 경험 속에서 서로가 잊었던 전통의 재확인 뿐 만 아니라 서로 통하는 진리체험을
통해서 상호 창조적 진리인식에 들어간다. 이렇듯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종교인들의 실천을
통한 연대, 자극, 지평융합을 꿈꾸기에 종교다원주의가 단지 지적 유희로 끝나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둘째, 우리가 기독교의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 , 즉 교리가 기독교의 특수성을 뜻한다고 보
는 것은 의문스럽다. 기독교의 교리는 불트만이 말했듯이 사도들에의해 선포된 그리스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선포하는 그리스도"와 그 메시지(하느님사상, 종말론적 세
계관)를 상실했다. 기독교의 특수성은 충분히 역사성에서 얻어 질 수 있으며 교리의 변화
가 기독교의 특수성을 해체한다는 생각은 지나친 생각인 듯 싶다.
3. 버림으로 얻는다는 역설
- 법구경에 이와 비슷한 얘기가 있다. 한 사람이 절벽에 매달려 있었다. 그의 이마엔 땀이
흐르고 손에 쥔 나무가지도 꺽어지려고 했다. 그는 죽는구나 생각했다. 그때 위에서 나는 소
리가 있었다. "나무가지를 쥔 손을 놔라" 청년은 미친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
어보니 절친한 친구의 소리였다. 그래서 손을 놔봤다. 그는 안전했다. 그가 밟은 땅은 탄력
있어서 그를 살게했다.
청년이 쥔 나무가지는 그의 신념이다. 그가 이것만은 놓을 수 없다는 그의 신념이다. 참자
유는 그것을 놓을 때 얻을 수 있다. 종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각 종교는 그들이
가진 신념이 있다. 이것만은 버릴 수 없다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내려놓을 때, 참
자유, 참신앙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종교가 무한한 것을 인간의 것으로 표현한 이
상 종교는 무한한 존재를 한정한다. 가둬놓는다. 종교는 목표가 아니라 디딤대다. 불교에선
부처를 충실히 섬기다가 나중에 가서는 부처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면 그가 생각하
고 받들던 부처도 결국 그가 생각하는 부처이기 때문이다. 종교인은 종교를 가지기 위해 종
교를 버리고 신을 말하기 위해 신을 말하지 않고 구원을 얻기 위해 구원을 버린다는 역설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분명, 이것이 넌센스 같고 납득이 어려울지라도 종교의 주체성과 개방
성을 확보하기 위해 숙고해볼 만한 화두라 할 수 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