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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관전리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양창호
고 향 |
내가 태어나 자랐던 고향인 순창군 동계면(東溪面) 관전리(官田里)는 옛날에는 발산리(鉢山里)로 불렀다. 양산(楊山)이 동네의 뒤를 병풍처럼 둘러 있고 앞은 동계면에서 제일 넓은 들이 있는 배산면야(背山面野)의 전형적(典型的)인 양택지(陽宅地)이다. 동네의 어귀에는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청령(靑嶺)이라 부른다. 이 청령은 우리 동네의 놀이터이자 피서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느 때에 누가 이름을 붙였는지 몰라도 골짝골짝 이름이 있는데 청령으로 들어오기 전에 구름다리가 있었고, 청령의 뒤 끝부분인 동네의 우측 끝을 고지터라 부른다. 고지터에서 오동쪽으로 조금 가면 금광이라는 곳이다. 동네의 뒤쪽 중간으로부터 동쪽으로는 닭밭. 매봉골, 큰골, 오목실 등이 있으며, 거기에서 조금 돌아가면 자라산밑에 목아정 동네가 있다. 동네의 좌측 앞에는 초동, 고르메라는 곳이 있다. 큰골 밑에는 울바위가 있고, 이 바위 밑에는 도내기 샘이라는 것이 있다. 또한 뒷방죽, 뒷샘, 앞샘이 있어서 생활 용수의 공급원이 되고 있으며, 특히 뒷방죽은 생수가 시원하여 여름철에 동네 사람의 목욕탕으로 이용된 곳이다. 또한 동네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앞 도랑은 많은 세탁물과 김칫거리를 씻는 곳이며, 자라, 뱀장어에서부터 미꾸라지, 새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천어(川魚)가 서식하고 있어 우리동네의 어원(魚源)이며 농용수로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동네앞에는 조그마한 동산이 있는데 이 산을 동매산이라 한다. 동매산에서 관전리쪽 산밑은 삼굿, 동매산에서 마상동쪽 아래는 설포기라 한다. 나의 종조(從祖)이신 청사(靑蓑) 양병화(楊秉華)는 "고향을 왕래할 때에는 거마(車馬=요즘의 자가용)를 타고 다니지 말고, 고향 사람을 상대로 하여 상행위(商行爲)를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고향에서는 더욱 겸손하고 고향 사람에게는 조금이라도 피해가 되는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 듯하였다.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는 구절(句節)을 인용(引用)치 않더라도 우리의 조상들이 묻히신 고향을 잠시도 잊을 수가 있겠는가마는 생활을 하다 보면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실상이다. 제갈량(諸葛亮)도 국가가 평정된 뒤에 고향으로 가서 누에를 치고 농사를 지었으며, 퇴계도 말년은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열중하셨다. 우리 고향의 귀래정(歸來亭)도 신말주(申末舟)의 귀래(歸來)유적(遺蹟)이다. 또한 학교를 설립하여 후학교육에 공적이 많은 고려 충렬왕 때의 설인검(薛仁儉)이나 성리학의 대가로 유명한 노사(蘆沙)등도 국가적인 인물이었는데 항상 고향을 잊지 않고 지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팔덕(八德)에 있는 삼인대(三印臺)도 삼현(三賢)의 유덕(遺德)을 교훈으로 받들고 있는 곳이다. 근자(近者)에도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는 청절(淸節)한 법조인(法曹人)으로서 혼란기에 기강을 확립하지 않았던가. 지금도 꿈을 꾸면 옛날 고향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고 있다. 그래서 고향이 없는 실향인은 얼마나 한이 될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기도 한다. 재경 순창 향우회지 1992. 8. 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