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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광산 김씨의 위상 (1)
文 秀 鎭(문학박사, 한국사)
1. 서 론
광산 김씨는 명문거족으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 수많은 성씨 중에 제일 앞자리에 설 수 있다. 수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연면히 이어오는 선조들에 대한 경모정신은 타 성씨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신라 말기에 입성한 광산 김씨는 고려조에도 정치․외교․문화 각 분야에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사계․신독재 양선생의 문묘배향으로서 최고의 영예와 가문의 영달을 이루었다. 인구수에서도 적지 않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음에 관심을 가지고 고려 이후 시대 순으로 역사상의 위상을 알아보고자 한다. 어느 한 성씨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신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의 문중에 대하여 허물은 덮어두고 장점만을 내세우기 마련이다. 여기서는 역사상에 전하는 것을 되도록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하였다. 조선시대 이후의 자료는 너무 방대하고, 고려 이전의 자료는 너무 빈약한 것이 연구에 어려움을 더한다. 그러므로 족보나 가승의 자료보다 정사에 나온 것을 기초로 서술하고자 한다.
2. 광산 김씨의 기원
가. 한국성씨의 유래
우리 민족은 성씨에 관한 아주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먼저 통성명을 할 때 본관을 묻고, 조상을 알아보려 한다. 우리나라 성씨에 대한 유래는 유구하다. 고조선에도 성이 있었던 것 같이 말하지만 일반화되기는 훨씬 후대이다. 삼국시대 초기에 성에 대해 기록하여 신라는 朴․昔․金씨가 교대로 왕을 했다고 한다. 박혁거세로부터 비롯하여 4대 석탈해를 제외하곤 8대까지 박씨가 왕을 계승했다. 말기에 가서 신덕왕부터 경명왕․경애왕까지 박씨 왕이 나온다. 석씨는 4대 탈해왕이 있고 9대부터 13대 미추왕을 제하곤 16대까지 왕을 한다. 김씨는 13대 미추왕이 나오고 17대 내물왕부터 통일신라까지 말기의 세 왕을 제외하곤 모두 김씨 왕이다.
성씨에 관한 기록은 아리송한 경우가 많다. 박․석․김이 교대로 왕을 했다는 것도 의심스럽다.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신라가 통일하기 전 까지 金石文에 나타난 성씨는 유일하게 김씨뿐이라고 한다. 결국 박․석씨의 왕위 계승은 후대에 미루어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통일신라까지도 성씨는 일반화되지 못하였다. 통일신라 말까지 역사에 나오는 성씨는 김․박․이․최․정․손․배․설․왕․장씨 정도이다. 이때까지도 귀족만이 성을 사용하고 일반백성은 성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나. 광산 김씨의 성립
광산 김씨 시조 흥광(興光)은 신라의 왕자이다. 신라왕자로 정립하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된 것은 광산김씨 황대전고(黃臺典誥) 이(珥 )가 고려 25대 충렬왕34년 6월에 지은 광산현 제영시서의 내용에서 볼 수 있다. 광산현 제영시서 는 광산김씨에서 최고로 오래된 문헌으로 그 내용에 (“此縣來新羅時---王子金興光豫知將有亂離出作庶人來于此地卜西一洞而居---”) 이 고을은 신라때 왕자 김흥광이 장차 난리가 있을 것을 미리 알고 왕궁을 버리고 서인이 되어 이 땅 서일동에 와서 살았고 ...로 되었다. 그러므로 후손 통정대부 김현뢰(金賢賚)가 쓴 평장동 유허서 에도 (“鳴呼平章洞卽我先祖新羅王子公卜居之地”) 아-- 평장동은 우리 선조 신라왕자공께서 터를 잡아 사시던 곳으로---로 시작되어 있고 통정대부 퇴어자 김진상(金.鎭商)이 쓴 왕자공 휘 흥광 유허비 음기에도 光州治地 --平章洞--- 我始祖新羅王子金公之遺墟也로 되어있다. 그리고 신무왕의 3자설과 헌강왕의 3자설도 있으나 확실한 고증이 없으니 광산김씨 최고 오래된 문헌에 준 할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신라왕들이 지방 곳곳에 왕족을 보내어 살게 한 것도 그 한 예가 되겠다. 왕자인 흥광도 서일동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광산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평장사가 있는 전남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평장동) 산 76번지가 이곳이다. 당시 무진주, 즉 광주 또는 광산은 오늘날의 광역시 개념이다.
우리나라 김씨 성은 크게 신라 왕족인 경주 김씨와 가야왕족인 김해를 본관으로 하는 김씨로 나눌 수 있다. 김해 김씨는 거의 단본으로 내려온 데 비하여 경주 김씨, 신라 왕족은 수많은 분파를 형성하였다. 김해 김씨와 일부 김씨를 제외하곤 모두 경주 김씨에서 분파되었다.
다. 고려건국과 사성(賜姓)
고려 태조 왕건은 민족통합합의 차원에서 호족융합정책을 취했다. 신라 때까지만 해도 귀족에게나 한정되었던 성(姓)을 지방 유력 호족에게, 또는 공신들에게 주었다. 심지어 개국공신인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도 성이 없었다. 고려 태조의 사성정책은 대단한 효과를 보았고, 많은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게 되어 우리나라 성씨의 대부분이 고려 초에 시조를 가지게 되었다. 공신들에게는 왕씨 성을 하사하기까지도 하였다. 예를 들어 강릉 김씨 김순식에게 왕씨 성을 주어 왕순식이라 하고, 박유에게 왕씨 성을 주고, 발해의 귀순왕족 대광현에게도 왕씨 성을 하사한다. 광산 김씨는 고려 건국 이전에 성을 가지게 된 문중이다.
3. 고려왕조와 광산 김씨 인물
가. 고려 귀족사회와 광산 김씨 인물
나주 지역은 후삼국시대 초기에는 궁예의 태봉 세력권에 있었고 왕건이 고려를 세운 뒤에도 광주․나주지역은 고려의 세력권에 있었다고 본다. 궁예가 나주를 확보할 때에도 왕건의 힘이 크게 작용하고 그 선대에 해상세력과 연결된 것이 아닌가 한다. 왕건의 제2왕후도 나주 오씨였다.
광산 김씨는 일찍부터 견훤의 후백제보다는 왕건과 접근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4세 김준(金峻)은 좌복야(2품)로 혜종~광종 때까지 활약한 것으로 보이고 5세 김책(金策)은 광종 15년(964) 한림학사 조익(趙翌)이 지공거로 시행한 과거에 급제하였다. 광종 9년에 처음 실시한 과거는 당시로서 대단히 중요한 혁명적인 정책이었다. 이 때의 과거는 정기적으로 치르지 못하였다. 광종 9, 11, 12, 15, 17, 23, 24, 25년에 실시하였으니 5세 김책(金策)은 고려에서 네 번째 치른 과거에 장원했던 것이다. 김책은 평장사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6세 김정준(金廷俊)도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김양감(金良鑑: 7世)은 문종조에 급제하여 상서우승․좌간의대부․어사대사를 거쳐 태복경(정3품)에 이르렀으며, 문종 27년(1073) 송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왔다. 일부 사서에 광양 김씨로 나온 것은 잘못이다. 1074년에 태복경으로 중서사인 노단(盧旦)과 함께 송나라에 사은사로 가서 종전의 등주를 거치는 항로를 요나라의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명주(明州: 절강성)로 변경하는 데 합의하고 귀국하였다. 이듬해 산기상시가 되고, 동지중추원사․호부상서․참지정사․판상서병부사․권판중추원사를 거쳐 1082년 좌복야에 올랐다. 선종이 즉위하자 중서시랑평장사로서 문하시랑평장사 이정공(李靖恭) 등과 함께 시정의 득실을 진술하고 이어 판상서호부사를 거쳐 수태위에 올랐다. 1090년 문하시랑으로서 지공거가 되어 우간의 손관(孫冠)과 함께 진사 이경필 등을 뽑았다. 이자겸과 인척이면서도 정의를 지켜 끝까지 그에게 아부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약온(金若溫 1059~1140: 8世)은양감의 아들로서 예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상의
봉어(尙衣奉御 정6품)를 거쳐 광주통판(廣州通判)이 되었다가 중서사인이 되었다. 1122년에는 지추밀원사겸 태자빈객이 되었으며, 인종이 즉위한 뒤 참지정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서시랑평장사, 다음해 검교사도수사공상주국, 1140년에 문하시중으로 치사하고 죽으니 나이 82세였다. 시호는 사정(思靖)이라 하였다. 성품이 공검(恭儉)하고 염정(廉靜)하여 일찍이 부귀하면서도 남에게 교만하지 않고 이자겸과 인척이라도 선비들이 다투어 붙는데 서로 어울리지 않으니 세상이 그 정의로움에 놀랍게 여겼다. 이자겸은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광산 김씨 김정준의 외손자이다. 『고려사』에 그의 열전이 당대 최고의 권신이었던 김부식의 앞에 있다. 이 당시 이름난 문벌로 유홍(柳洪)의 문화 유씨, 김부식의 경주 김씨, 김인존의 강릉 김씨, 김은부의 안산 김씨, 이자겸의 인주 이씨, 윤관의 파평 윤씨와 어깨를 나라니 하는 광산 김씨였다.
김의원(金義元: 8世)은 문안공 김양감의 아들로 아버지의 음덕으로 장사랑, 군기주부동정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종 4년 병마판관이 되어 여진족을 정벌하여 공을 세우고, 예종 8년에는 형부시랑으로 요나라에 가서 사례하고 돌아왔다. 인종 4년 동지추밀원사(종2품)로 발탁되었으나 이자겸의 실각으로 인척이라 하여 양주로 좌천되었다. 인종 10년 공부상서 수대도호부사․호부상서 겸 삼사사를 제수하고 금자광록대부(정2품)에 특진되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이자겸이 전횡을 부릴 때에도 그와 동조하지 않고 문중을 지켜냈다.
나. 광산 김씨 기반을 이룬 인물
무신집권기에는 특출한 인물이 없었다. 무신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문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태현(金台鉉 1261~1330: 15世)은 김수(金須)의 아들로 문정공파의 파조이다. 김수는 삼별초를 토벌할 때 고여림(高汝霖)을 따라 출정하여 전사하였다. 태현은 10세에 고아가 되어 모친의 품에서 잘 교육받았다. 충렬왕 1년(1275) 15세에 국자감시에 장원하고, 16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사부(詞賦)의 걸출한 문장에 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몽고의 간섭시기에도 문장과 외교에 그를 빼고는 일이 되지 않았다.
충렬왕 28년(1302)에 밀직부사가 되어 성절사로 원나라에 갔는데 원의 황제 성종이 감숙에 친정 중이라 황제가 “천하의 진공사(進貢使)는 모두 경사에 머물게 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태현은 중서성에 말하기를 “고려가 대국을 섬긴 이래로 세시조하(歲時朝賀)에 일찍이 빠짐이 없었는데 경사(京師)에 머물게 하는 것은 제명(帝命)이오, 행재에 도달케 하는 것은 우리 임금의 명이라 내가 차라리 황제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감히 우리 임금의 명을 폐할 수는 없다.”하여 감숙에 까지 가서 성종을 알현하니 황제가 충간(衷懇)을 가상히 여겨 크게 상을 주고 어찬(御饌)을 하사하고 총애하였다. 연경까지 귀환하는데 1년 이상이 걸렸다.
동지사사문한승지지공거(同知司事文翰承旨知貢擧)가 되어 급제자를 거느리고 왕을 배알하였다. 왕이 향연을 베풀 때에 원의 사신 이학사가 자리에 있다가 왕에게 말하기를 “천하에 이런 일이 없는데 오직 귀방(貴邦)이 고풍을 떨어뜨리지 아니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장참정으로 더불어 봉사하였을 때 마침 이를 보았고, 이제 또 보게되었으니 감히 배하하지 아니하리오.” 하였다.
충렬왕 32년 지도첨의사사로 다시 원나라로 가서 왕과 아들 충선왕을 이간시키는 일당의 흉계를 밝히고 돌아왔다. 충선왕이 복위한 뒤에는 이심(二心)을 품었던 자를 모두 축출할 때 홀로 지밀직사사에 복직하고 자의찬성사(恣議贊成事를)를 삼았다. 충선왕과 충숙왕 사이에도 갈등이 있어 어려움이 있을 때에도 태현은 초심을 잃지 않았다. 충숙왕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판삼사사와 중찬 등을 거치고 마지막에는 최고 벼슬인 삼중대광 대제학 겸 전리사사(정1품)로 치사하고 나이 70에 죽으니,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고려사』에 “성품이 廉直하고, 언동이 예를 따랐으며 낮에 눕지 아니하고 더워도 웃옷을 벗지 아니하여 사람 대접하기를 화로써 하고, 어머니 섬기기를 효도로 하여 자손 가르치기를 법이 있게 하고, 함부로 사람을 사귀지 아니하였다. 또한 구원(仇怨)을 삼음이 없었고 3조를 역사하매 진퇴를 의로써 하였으며, 번극(煩劇)함을 처리하되 재결(裁決)이 정민함에 사람들이 그 밝음에 탄복하였고, 역대의 전고를 말하기를 어제 일과 같이 하고 매양 나라에 큰 의혹이 있으면 반드시 나아가 물어서 결단하였다. 일찍이 손수 동인의 시문을 모아 동국문감이라 이름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아들 넷, 光軾․光轍․光載․光輅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광철․광재․광로는 계실 왕씨의 소생으로 고려에서는 아들 셋이 과거에 급제하면 어머니가 왕으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므로 왕씨는 해마다 국름(國廩) 20석을 받았다.
김광재(?~1263: 16世)는 부 김태현과 함께 『고려사』열전에 기록되었다. 충선왕 5년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충혜왕․충목왕․충정왕을 섬기면서 원나라에도 호종하고, 첨의평리․삼사우사․전리판서(典吏判書)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공민왕 때에 12년이나 두문불출하고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심에 여묘에서 상제를 마쳤으며 매양 제사할 적에 반드시 체읍(涕泣)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왕이 듣고 이를 가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유시하기를 “경으로 더불어 이야기하고자 하니 가히 만나볼 수 있겠느냐” 하였다. 그 때에 병중에 있으면서도 부액(扶腋)하여 입견하니 왕이 말하기를 “연령과 안색은 심히 쇠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런 병이 있는 것은 어인 일인고” 하고 오래 탄석(歎惜)하였다. 유사에게 명하여 거소에 정표하기를 영창방효자리(靈昌坊孝子里)라 하고 그 마을의 약간호에 부역과 조세를 면제하여 이를 봉사케 하였다. 광재가 효제(孝悌)를 돈후(敦厚)히 행하고 집에 있어도 생산을 다스리지 아니하였으니 좌우에 금(琴)과 책을 두고 즐거워하였다. 시호가 문간(文簡)으로 그 후손은 문간공파로 성장하였다.
김주정(金周鼎?~1290: 14世)은 문숙공파의 파조이다. 원종 5년 장원급제하여 해양부녹사, 이부시랑을 거쳐 충렬왕 1년에 대부경좌사의대부에 임명되어, 이듬해에 안렴사 및 수령들의 근무태도와 공물․부역이 고르지 않은 것과 향리가 세력을 믿고 부역을 피하는 등의 폐단을 없애기 위한 대책을 올려 채택되었으나, 좌우의 저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충렬왕 4년(1278) 왕이 원에 갈 때 우부승지로서 수행하여 왕에게 “다루가치와 왕경유수군․합포진수군 및 황주․봉주․염주․백주 둔전군의 뒷받침이 번거러워 백성들의 고통이 심한 것과, 또한 김방경이 무고를 입어 유배된 사실 등을 황제에게 아뢰소서.” 하여 왕이 입조하여 황제에게 건의하여 황제가 다 허락하게 되었다. 그 공으로 귀국하여 좌부승지로 임명되었다. 또 그 해에 재추회의에서 따로 필도치(必闍赤 몽고어로 書記)를 두어 중요한 국사를 담당하게 하도록 건의하였으며, 또 내료(內僚)의 계사(啓事 궁중의 관리가 임금에게 정사를 알리는 일)를 금지하고 신문색(申聞色)이 대신하도록 주장하여 필도치와 신문색을 두었다. 필도치와 신문색은 궁중에서 기무를 참결하고 별청재추(別廳宰樞)라 하여 비난받았다.
충렬왕 7년에 원이 2차 일본원정 때 여원연합군 부원수로 출정하여 태풍으로 실패하였으나 기지로써 많은 사람을 살려냈다. 충렬왕비 제국공주의 미움을 사서 파직된 때도 있었다. 후에 동수국사판삼사사(종1품)를 지냈으니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김심(金深 생몰년 미상: 15世)은 문숙공 주정의 아들로 충렬왕 때에 원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돌아와서 낭장(정6품)부터 시작하여 밀직부사만호를 역임하였다. 홍자번과 함께 충렬왕․충선왕 부자를 이간하는 오기(吳祁)․석천보(石天輔) 등을 잡아 원나라에 보냈다.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충선왕을 모시고 나온 공으로 도첨의참리판삼사사(都僉議參理判三司事)가 되었으며, 동녀 18명을 데리고 원나라에 다녀왔다.
충선왕 1년(1309)에 그의 딸이 원나라 인종의 비가 되자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도원수로 올랐으며, 찬성사(정2품)가 되었다. 다음해 밀직사사가 되고 화평군에 봉해졌는데, 다시 원나라에 들어간 충선왕이 귀국하지 않고 전지(傳旨)로 정치를 하면서 본국의 물자만 소비하는 권한공․최성지․박경량 등의 소행이라 생각하고, 이 세 사람의 죄상을 원나라의 휘정원(徽政院)에 탄원하여 그들을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충선왕이 이 일을 태후에게 고하여 석방해주도록 탄원하고, 권한공 등도 뇌물을 써서 곧 풀려나게 되자, 도리어 이사온 등과 함께 임조[甘肅]에 장류(杖流)되어 5년만에 풀려났다.
충숙왕 1년(1324) 수성수의충량공신화평부원군(輸誠守義忠亮功臣化平府院君)으로 봉해지고, 협보공신의 호를 받았다. 충숙왕 14년(1327)에 왕이 원나라에 머물러 있을 때 왕을 잘 보좌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다. 당시 섭행정동성사 장백상(蔣伯祥)이 재물을 탐내고 권세를 남용하여 백성의 원망이 커지자 원나라에서 객성태사 도치[都赤]를 보내어 장백상을 가둔 뒤 홍수(洪綬)와 함께 성사를 대행하게 하였다. 충혜왕이 즉위하면서 벼슬은 삼중대광 도첨의중찬판전리사사화평부원군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숙이다.
김종연(金宗衍 ?~1390: 18世)은 밀직사 정(精)의 아들이다. 김정이 김흥조(金興祖: 17世 김광재의 아들)가 수원․해주목사를 역임하고 군기감일 때 함께 신돈을 죽이려다 오히려 죽임을 당하고, 종연은 피하여 신돈이 죽은 뒤에 원수가 되어 왜를 쳤다. 1388년(우왕 14) 전라도 부원수로서 광주를 침입한 왜구를 격퇴시킨 것을 비롯하여 전라도도절제사․전라도원수 등으로서 왜구와의 싸움에 나아가 구례 등지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공양왕 때에 윤이․이초의 난에 연루되어 봉주에 숨어 있다가 붙잡혔으나 다음날 다시 도망하여 포위를 뚫고 평양에 이르러 전판사 권충(權忠)의 집에 피신하였다. 이 때 이방춘․김식․윤구택 등과 이성계를 죽일 모의를 꾀하다가 윤구택이 밀고하여 발각되자 도망하여 곡주에 숨었으나 추위와 굶주림으로 지친 끝에 순군진무 임순영(任純永)에게 붙잡혀 심문을 받다가 죽었다. 고려사 열전에는 종연의 기록이 대단히 많은 것은 이성계와 연관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김석견(金石堅 ?~1346: 16世)은 심(深)의 아들로 충숙왕 때 밀직부사가 되고, 충혜왕 때에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을 봉하였으며, 충혜왕 2년(1332) 조적(趙頔)의 난에 왕을 시종하여 공로가 있었으므로 1등공신이 되었다. 1343년 충혜왕이 민환(閔渙)의 말을 듣고 모든 부호들에게 자색이 있는 노비를 취하려할 때, 주리(主吏)가 가비(家婢)를 찾으러 오자 때려서 쫓아내고, 왕을 알현하여 서자 완자첩목아(完者帖木兒)가 원나라에서 벼슬하여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음을 은근히 과시하니 이에 놀란 왕이 말을 하사하고 노비 요구를 철회하였다. 완자첩목아는 원에서 예부상서를 제수하고 뒤에 환국함에 재추 및 종족이 다투어 주연을 베풀고 맞이하였다. 충혜왕이 원에 잡혀가니 완자첩목아가 “왕의 좌우에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왕의 악한 일을 하는 것을 바로잡아 주지 못하는가?”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