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은 언제 승천할 것인가? 펌글 전북관광 리더스 클럽 - 송만호
<용머리고개의 옛모습(사진:전주역사박물관)>
전주의 도로망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사통발달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다. 동쪽으로는 소양을 거쳐 진안으로 뻗은 도로가 산악지대를 기어 올라가고 남쪽으로는 상관을 지나 남원으로 득달같이 달아나는 국도 17호선이 있다. 이 도로는 전주를 관통하여 북쪽으로도 내달리고 있기도 하다. 서쪽으로 난 길은 효자동을 거쳐 김제로 내빼는데 동, 남, 북으로 뚫린 길과는 조금 다른 형세를 띤다. 동, 남, 북으로 난 길이 전주 시내에서 대개 곧장 내빼는데 비해 서쪽으로 난 길은 용머리고개와 진북터널, 어은터널로 나뉘어 있다. 그 가운데 그래도 용머리고개를 넘어가는 길이 역사적으로나 심정적으로 제법 다닐 만한 길이다. 물론 이제는 서쪽으로도 많이 개발되어서 용머리고개가 오히려 동쪽으로 밀려난 형국이긴 하지만 말이다.
승천하지 못한 용의 한풀이인가?
대개 우리 지명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깃들어 있게 마련이다. 서당이 있었다고 해서 서당골, 가마터였음을 알려주는 가맛골 등이 그렇다. 그런 점에서 보면 완산동에서 효자동으로 넘어가는 완산칠봉의 어깻줄기를 용머리고개라 이름 지은 사연이 재미있다.
마한(馬韓)의 기운이 쇠잔할 당시 민가에서 머리는 하나인데 몸뚱이가 둘이 달린 소를 낳은 이변이 생겼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일수이신(一首二身)이 태어나고 홍수가 범람하는 것은 용왕이 크게 일어날 징조라고 하자 인심은 날로 흉흉해졌다.
이때 전주천 물은 좁은목에서 폭포로 떨어진 물이 지금의 다가산 밑에서 급히 소(沼)를 이루어 물이 많았고 물살 또한 급류였다.
일수이신(一首二身)의 송아지가 태어난 것은 일본관헌의 농락이었고, 이 전주천에서 자란 용이 천년을 기다려 승천(昇天)하려고 안간힘을 쓰느라고 전주천 물을 모조리 삼키고 하늘에 오르려고 힘을 한번 쓰다가 힘이 빠져 떨어지고 말았는데 사실은 힘이 빠진 것이 아니라 천년에서 하루가 모자란 것이었다고 한다.
이때 용이 떨어진 곳은 완산칠봉의 계곡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사람이 다니지 않은 원시림이었다.
몸부림치다가 승천하지 못한 한(恨)을 품고 용(龍)의 머리가 지금의 용머리고개에 떨어졌으며, 이 후로는 우거진 송림이 정리 작업을 한 듯 깨끗하게 오솔길을 만들어 줌으로써 오늘날은 경목선(京木線)이 되었고 용머리의 형상이라고 하여 용머리고개라고 했다.
또 다른 설도 있다. 강감찬 장군이 이곳에 있을 때 어느 해 몹시 가물었다. 장군이 걱정을 하다가 하루는 하인을 시켜 지금 막 내를 건너는 초립동이 있을 터이니 그를 곧 데려 오라고 일러 보냈다. 과연 그 사람이 있어 데리고 왔는데 그를 보자 강감찬이 호령하되 "이렇게 가물어도 못 본 체하고 지나가다니 괘씸하노라"하였더니 그 초립동은 실은 용이 둔갑한 것이었다. 용이 죽음을 면하고자 승천하며 비를 내리게 하고 떨어져 죽은 곳이 이 고개라 하여 용머리고개라고 했다.
물론 이 전설 같은 이야기를 실제로 믿어서 지명을 붙인 것은 아닐 것이다. 대개 설화나 전설의 불가능한 상황은 현실생활의 고달픔을 잊어보려는 당시 사람들의 소망이 녹아있다. 소망이라 함은 이루고 싶은 바를 마음에 품은 것이다. 그렇지만 소망이 다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질 수는 없을 터. 가슴에 품은 소망 하나만으로도 그것이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믿음의 근거로 우리 조상들은 무생물에도 이름을 지어 붙였는데, 이름에는 어떤 신령스러운 영혼이 담긴다는 주술적인 믿음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이름 지어진 용머리고개. 미처 승천하지 못하고 한스럽게 스러져간 용의 포한이 아직 풀리지 않았던 것일까? 그 길을 넘어 전주부성으로 내달았던 100여 년 전 전라도 사람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답답하고 울렁증이 인다. 그때 그 길이 승전보를 전하는 개선의 길이었다면 우리의 역사가 제법 곧고 뿌듯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에서다.
이때는 4월 27일 전주 서문이 장날이라 무장 영광 등지로부터 사잇길로 사방으로 흩어져 오던 동학군은 장꾼들과 섞이며 이미 약속이 돼 시장 속에 들어와 있었다. 때가 오시쯤 되자 장터 건너편 용머리고개에서 일성 대포소리가 터져 나오며 수천발의 총소리가 일시에 시장통을 뒤엎었다. 별안간 난포소리에 놀란 장꾼들은 정신을 잃어버리고 뒤죽박죽이 되어 헤어져 달아났다. 서문, 남문으로 물이 밀어닥치듯 들어가는 바람에 동학군들 역시 장사꾼들에게 섞여서 문안으로 들어가면서 한편으로는 고함을 치며 총을 쏘며 들어갔다. 서문을 지키던 병졸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엎어지고 넘어지며 도망가고 말았다. 이때 전봉준은 완만히 대군을 이끌고 서문으로 들어와 좌를 선화당에 정하니 어시호 전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 부분은 1940년 오지영(吳知泳)이 출간한 '역사소설 동학사'의 한 대목이다. 이처럼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공격할 때 용머리고개는 그 기점이 되었다. 하지만 용머리고개는 또한 관군들에게도 군사적 요충지로 작용했다. 음력 4월 27일 동학농민군은 용머리고개에서부터 시작해서 전주성을 점령했지만, 곧장 다음날인 4월 28일과 5월 3일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이 용머리고개에 진을 치고 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이미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해 동학농민군을 진압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당시 관군의 대포를 견디지 못한 동학농민군은 5월 8일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고 전주성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그 사이에 청나라(5월 5일)와 일본(5월 6일)이 각각 충남 아산과 인천에 상륙하게 되었다. 즉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함락은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두고 볼 때 어쩌면 설화 속에서 승천하지 못한 용이 두고두고 한풀이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용머리의 비상을 기다리며
세월은 모든 것들을 변하게 한다. 용머리고개도 예외는 아니다. 과거에는 전주시내와 외곽을 잇던 그 고개가 이제는 구도심과 신도심 양쪽 모두에서 변방의 지역으로 변해버렸다. 구도심의 변두리이면서 신도심의 소외지역인 용머리고개.
용머리고개를 오르다보면 우리 삶의 초상을 보는 듯해서 먹먹해지곤 한다. 가파르지 않은 언덕길이지만 왜 용머리고개만 오르면 장딴지에 힘이 들어가면서 팍팍해지는 것일까. 오래 궁리하다가 내린 결론은 딱 세 가지로 정리되었다.
첫 번째는 대장간의 모습 탓이다. 얼핏 들어도 대장간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할 유품인 동시에 전근대적 삶의 터전이다. 그런데 용머리고개에 가면 대장간이 버젓이 문을 열어놓고 있다. 그것도 한 군데가 아니고 줄줄이 붙어 있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세월이 뒷걸음질 치는 느낌이다. 물론 시대에 따라 대장간에서 만들어내는 물목들이 조금씩 변한다. 게다가 풀무질이나 쇠를 다루는 데에도 그 기법이 달라진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대장간에서 만들어낸 물목들이 모두 우리 사람들의 생활에 쓰인다는 것이다. 낫, 괭이, 호미, 물통, 물받이 홈통, 갈고리 등등.
두 번째는 여기저기 솟아나 있는 점집 표시들이다. 장대 끝에 깃발을 달아 올린 집들뿐만 아니라 용머리고개에는 유독 점집들이 많다. 그것도 근대 이전의 삶을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한 풍물이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장대는 인간의 소망을 하늘에 전하고 그 답을 듣는 하나의 통로이다. 그리고 그 점집을 지키는 총각보살, 처녀보살, 애기보살, 지리산보살 등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통역관이다. 그러나 점집이 하늘에 대고 하소연하고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는 곳만은 아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점집은 정신과 병원이나 인생 상담소 같은 곳이다. 억울하고 답답한 속을 툭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이 점집이요, 한바탕 통곡이라도 해대고 나면 후련해지는 곳도 점집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저절로 무릎에 힘이 들어간다.
세 번째는 용머리고개를 막 넘어서면 보이는 골동품 상점들이다. 최근에는 옛 물건들이 인테리어 소품으로 제법 인기가 있어서 거래가 활발하다고 하지만, 골동품 상점에 쌓인 옛 물건들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시간의 되감김을 경험하게 된다. 그곳에서 어쩌다 발견하게 되는 낯익은 모습은 오래 가슴 울렁이게 한다. 맷돌, 절구, 항아리 등을 비롯해서 깨진 전등갓, 구식 교복과 뱃지, 다리미 등이 따스한 손길을 기다리는 정물처럼 다소곳한 골동품 상점. 마치 이십 년 삼십 년 전에 잃어버렸던 내 모습이 골동품 상점에 차곡차곡 모여 있는 느낌이다. 그곳에서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곤 슬그머니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심 유쾌하고 즐거운 경험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용머리고개를 지나가다보면 물정 없이 바쁘게 사는 우리들의 발목을 붙잡고 한 번 들어보라고 가만가만 속삭이는 뭔가가 있다. 그럴 때면 아무리 바쁜 걸음이라도 잠깐 멈춰서 귀를 빌려줄 필요가 있다. 그냥 스쳐가버리면 다시는 듣지 못할 귀한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시인의 귀는 그 소리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은 것 같다.
용머리고개에는 백제 여인들이 전주천 시린 물을 퍼다가
싸움터에서 죽은 지아비의 피 묻은 옷을 두들겨 패던 빨랫돌들이
이끼를 키우며 살고 있다. 백제 유민들의 때 묻은 이부자리를 모아다가
새 솜으로 타주던 솜틀집이 살고 있다 대나무장대에다 찢어진 깃발을 매달아 놓고 견훤성 불귀의 원혼을 불러들이는 패망한 역사의 술사들이 살고 있다
용머리고개에는 관군들의 대포와 머리를 쳐부수던 동학군들의 녹슨 곡괭이와 낫을 달궈 무지개 일렁이는 날을 놓아 비석거리의 반골을 불러 모으는
대장간 풀무장이가 살고 있다
용머리 고개에는 깨어진 용마루 기왓장마다 퉤 퉤 침을 뱉으며
시퍼런 욕을 노비문서처럼 뿌리고 다니는 욕쟁이 할머니가 살고 있다
-「용머리고개에는」, 정군수
사람 사는 모습이 손바닥 뒤집듯 휘딱 뒤집히지는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생활의 한 방편으로 노동의 귀함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내가 흘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