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고 따뜻한 햇살같은 뼈를 발라내는 섬세한 칼끝같은
지난해 이맘 때 소설가 정지아씨의 두번째 소설집『봄빛』(창비, 2008) 출간 기념회에 우연히 참석하게 되었다.
‘우연히’란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갔다가 이끌려 합석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사정이 그런 만큼 나는 창 밖에 내리는 비나 내다보며 엉뚱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구례 산수화는 이미 졌을 테고 철쭉이 곧 지리산 세석평전을 뒤덮겠군.’ 정지아씨의 고향이 구례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아마 그런 연상을 했을 것이다.
‘운명’이란 소설을 먼저 읽는다. 촘촘히 날이 선 그 짱짱한 문체는 역시나 여전하다. 녹슨 보습으로 뜨거운 자갈밭을 갈고 있는 작가의 형상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번 소설집에는 곳곳에 ‘봄빛’이 가득하다. 그 빛은 ‘백살을 바라보는 어머니와 이미 환갑을 넘긴 아들’이 사는 지리산 오두막을 비추고, ‘치매 남편을 둔 노파의 독백과 한숨’ 속으로 스며들어 마침내 그들의 운명을 감싸안는 역할을 담당한다.
물론 봄빛이 부드럽고 따뜻한 것만은 아니다. 섬세한 칼끝처럼 상처를 들추고 끝내는 뼈를 발라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제 후면경 속에서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낯설되 분명 감동적인 장면이다. 그의 소설은 편편이 ‘두부를 넣고 끓인 토속 된장찌개’처럼 곡진하고 칼칼하다. 속내가 아파본 사람은 안다. 그 된장찌개가 울혈진 속을 조금이나마 풀어준다는 것을.
문학의 위기를 말할 때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내뱉는 수사학적 구호가 있다. ‘진정성’과 ‘순정성’. 『봄빛』은 두 발을 여기에 단단히 딛고 있는 소설집이다. 책장을 덮고 나는 소설의 영원한 명제를 다시금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윤대녕=1962년 충남 예산 출생.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소설집『은어낚시통신』『남쪽 계단을 보라』『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누가 걸어간다』『제비를 기르다』, 장편소설『옛날 영화를 보러갔다』『달의 지평선』『미란』『눈의 여행자』『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등을 펴냈다.
중앙일보 / 2009.04.06 |
첫댓글 군 휴가 중에 읽었던 '빨치산의 딸'로 기억되는 작가인데. 얼마전 산문집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에도 '봄빛'에 대한 글이 함께 담겨 있더군요. '봄빛'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이제는 내용을 조금 들여다보다가 '아! 읽은거네'라고 할 정도의 기억력의 나이에 들어서 있어서... 독서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