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自畵像)
서 정 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 -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개인적 솔직성을 넘어서서, 뚜렷한 자기 주장과 도덕적인 개인의식을 느끼게 하는 신선한 충격을 주는 표현이며,
망국민으로서의 노예적인 삶을 상징하는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쓸쓸하고 음울한 분위기(가늘고 연약한 모습)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여인이 아이를 가짐을 의미함
…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가난에 찌든 어린 화자의 모습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동학혁명에 가담하여 죽음을 당한 사실이 암시된 표현.
외할아버지는 주어진 조건에 타협하거나 굴종하지 않고 저항하고 투쟁하는 인물임을 알게 해 줌.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없는 방랑, 난폭함, 정처없음, 무절제, 세상 속에서의 시달림,
흙먼지와 추위 같은 것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세인들에게 밑의 ‘천치’와 같은 뜻.
죄인과 천치로 인식될 정도로 온갖 수난과 역경 속에서 부대껴온 고달픈 운명의 표정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위의 ‘눈’과 같은 뜻. 타인이 나에 대해 규정한 것으로 문면에 드러나지만, 천한 출생 성분에 대한 못난이 의식, 무지함에서 오는 열등의식이 담긴 표현으로 보임.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굴욕적인 삶에 맞서려는 의지. 삶의 시련과 고통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더욱 굳세게 일어나도록 하는 힘이 됨.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괴로운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의 열매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시련을 극복하는 삶에 요구되는 노력과 고통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고통스런 삶과 강렬한 생명에의 욕구를 지닌 자아의 모습
※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자신의 고통스런 삶에 대한 쓰디쓴 회고를 하면서도, 버릴 수 없는 생명적 욕구에의
강렬함을 확인. 봉건적이고 부정적인 사회 현실 속에 매몰되지 않고 개처럼 헐떡거리며 살 것을 강요하는 현실에 대해 자기
자신을 대결시키려는 저항의지의 표출.
∘ 운율 : 4음보가 기본 율조이나 산문적임.
∘ 성격 : 낭만적, 상징적, 격정적, 관념적
∘ 표현 : 가능한 간접적인 묘사 방식을 피하고 바로 대상과 관념에 직핍하는 표현 방식을 택하고 있음.
∘ 심상 : 시각적 심상과 상징적 심상이 다분히 서사적인 표현 속에 반복되어 있음.
∘ 제재 : 자화상
∘ 주제 : 역사의 시련기를 겪으면서 고통스럽게 살아온 삶에 대한 회고
∘ 구성 : 1연 - 봉건적인 사회 제도하에서의 비참하고 가난한 삶의 모습 제시
2연 - 고난의 바람과 부끄러운 성장 및 허심탄회한 심정
3연 - 고난의 삶의 승화
∘ 감상 : 이 시는 미당이 스물 셋의 나이에서 자신이 살아온 지난 생애를 회고하는 내용이다. 그가 이 글에서 밝히고 있는 그의 가족사와 이력이 사실에 얼마나 부합되는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과장하거나 미화하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일텐데, 도리어 그는 자랑스럽지 못한, 부끄러워 감추려고 할 만한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밝히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비상한 충격과 함께 신선한 감동을 자아낸다. 제1연은 화자의 사회적 존재를 알게 해 준다. 그는 종의 자식이며 갑오년인가에 집을 나가 끝내 돌아오지 않는 외할아버지의 피를 받았다. 갑오 동학 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생각하면, '애비는 종이었다'는 첫 구절은 개인적인 솔직성을 넘어서서 차라리 떳떳하고 당당하며 도전적이기까지 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그가 봉건적인 사회 현실 속에 매몰되어 있지 않음을 뜻한다. 이런 유의 당당함이란 그 자신이 역사 발전의 주체라는 자각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 자각된 입장이, 개처럼 헐떡거리며 살 것을 강요하는 현실에 자신을 대결시키는 저항 의지로 나타난다. 제2연은 바로 봉건적인 인간 관계가 한 개인에게 부과하는 굴욕적인 삶과 그것에 맞서는 의지의 표현이다. 불평등한 인간 관계 속에서 어떤 이는 죄인, 천치 취급을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뉘우치지 않는다. '스믈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는 구절 속에서 우리는 그가 그러한 시련을 통해서 오히려 굳건해진 사람임을 알게 된다. 굴욕적인 현실은 그를 주저앉히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의지로 끌어올린다. 그런데 제3연의 1-3행에서 현실적 고통을 오히려 반짝이는 시의 이슬로 승화시킬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침'은 새로운 인간 관계의 지평이 열리는 순간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혁명과도 같은 아침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다. 물론 문맥적으로는 그 피가 시의 이슬에 맺혀 있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시'와 '아침'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공통적으로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의미한다. '아침'으로 표현된 인간적인 진실 속에서만 참다운 '시의 이슬'이 맺힐 수가 있는 것이다. 마지막 대목에서 `병든 숫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고 그가 말하는 것은, 그러므로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쓰디쓴 회고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릴 수 없는 생명적 욕구에의 강렬한 확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