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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고성표 기자]
“호랑이 등에 올라타기가 어렵지, 일단 타면 호랑이가 멈추기 전까지는 내려올 수 없다.”
가짜 인생을 살아온 신정아(35) 전 동국대 교수의 지난 10여 년 행적은 호랑이를 탄 형국이었다. 명문대 졸업생이라는 거짓말이 쉽게 통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환심을 샀다. 문화계 유력 인사들과 자연스럽게 인맥을 형성했고 미술계의 주목 받는 인사로 떠올랐다. 정부의 막강한 실세였던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후원까지 등에 업었다. 그러나 신씨는 허위 학력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 결국 호랑이 등에서 굴러 떨어지는 신세가 됐다.
신씨는 18일 영장실질심사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에게 쏠린 의혹의 일부를 시인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전까지 그는 당당하게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자신을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은 인사와 언론에 적대감을 내보였다. 변명과 거짓말이 한계에 이르렀는데도 신씨는 ‘예일대 박사’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자신은 분명히 박사학위를 받았고, 오히려 브로커에게 사기당한 피해자라고 항변했다.
신씨의 이런 행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일부 정신과 전문의와 심리학자들은 공상허언증(空想虛言症)으로 진단했다. 공상허언증은 거짓말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스스로 진실이라고 믿게 되는 정신질환의 한 형태다. 신씨의 정신 상태를 공상허언증으로 규정하면 법적인 잣대로 처벌할 수 없다. 하지만 신씨의 경우를 공상허언증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공상허언증 환자는 아니다
신씨의 거짓 행각을 굳이 이름 붙이면 ‘성격장애로 인한 자기합리화’다.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신질환자가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삐뚤어진 성격의 소유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은 사회 규범이나 규칙, 법의 권위를 우습게 생각하고 자신의 행위를 다양한 이유를 붙여 정당화한다. 범죄학적으로 이들의 자기합리화 행태를 ‘중화이론(中和理論)’이라고 한다.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해 스스로가 져야 할 책임을 없애는 것이다. 따라서 죄책감도 없다. 박사학위가 가짜로 드러나자 “브로커에게 속았다”거나 “(각종 루머가 나도는 것은) 내가 싱글이고 여자인 게 문제”라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신씨의 언행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성격장애의 정도가 심해지면 반사회적 ‘사이코 패스’로 발전할 수 있다.
이번 사건은 2002년 허위 경력이 드러나 방송계에서 퇴출당한 사건과 흡사한 점이 많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의 유명 대학에서 국제금융 박사를 취득한 뒤 CNN 기자와 해외 펀드매니저로 활동했다며 화려한 학력과 경력을 내세웠던 H씨.
귀국 후 라디오·TV 프로그램에 출연해 국제경제 전문가로서의 입지를 굳혀갔다. 하지만 그가 내세운 화려한 이력은 새빨간 거짓말로 드러났다. 처음 자신에 관한 의혹이 제기됐을 때 H씨는 “나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날조된 사실을 퍼뜨린다”며 거짓과 변명으로 일관했다. 학력이 허위였다는 사실이 동문들의 제보와 객관적 자료로 확인되고 나서야 그는 침묵했다.
신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학력만 받쳐주면 나머지는 자신의 능력으로 커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10년 전인 1997년 금호미술관에 영어 통역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갈 무렵부터 신씨는 이런 생각을 실천으로 옮겼다. 그 이후의 모든 과정은 설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단계별·상황별로 치밀하게 짠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었다.
현재까지 검찰 수사에서 드러난 사실과 정황으로 살펴보면 그의 행위는 전형적인 화이트칼라 범죄에 해당한다. 검찰은 사문서를 위조해 해당 기관의 업무를 고의로 방해하고,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청탁과 횡령을 한 것으로 보고있다. 많은 화이트칼라 범죄에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신씨는 더 대담하고 치밀하게 행동하고 방어해 왔을 뿐이다.
혐의 드러나면 말 바꿔
고위직에 있거나 명망 있는 인사일수록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에 연루되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지금까지 쌓아놓은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잃지 않기 위해 방어기제가 자연스럽게 작동한다. 학력 위조 의혹이 한창 제기되던 7월 중순 신씨가 돌연 미국으로 도피성 출국을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일단 소나기를 피하고 보자는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는 미국에서 두 달간 머물며 이번 사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를 모색했을 것이고, 예상을 깨고 전격 귀국했다.
공상허언증 환자들은 신씨처럼 계획적이고 고의적인 행위를 할 수 없다. 이성적인 판단과 대처도 불가능하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하는 법도 없다. 그들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신씨는 검찰 수사로 자신의 혐의 일부가 사실로 드러나자 지금까지의 입장을 바꿔 학력 위조를 뒤늦게 인정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16일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긴급 체포된 신씨는 18일 법원에서 구속영장이 기각돼 풀려났다. 신씨는 “검찰 수사에 성실하게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이 말이 모든 혐의를 인정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구속영장 기각으로 체면을 구긴 검찰이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가운데 이번 사건이 어떻게 결말을 맺을지 주목된다.
이수정 교수.고성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