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강은 문학의 모향(하영필)(낙강 53호).hwp
낙강 53호에 실었으면 해서 글을 써 보았습니다.
낙강은 문학의 모향(母鄕)
-하영필 시인
김우연(시인·문학평론가)
원정(園丁) 하영필 선생님은 1926년 5월 5일에 경남 거창군 고제면 봉계리에서 태어나셨으며, 포항대신국민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셨다. 1979년 「시조문학」 천료로 등단하셨으며, 낙강 11대(1989.2~1992.1) 회장을 역임하셨다.
낙강에는 2016년 낙강49집에 「날아간 새」를 마지막으로 발표하셨는데 요즘은 생사를 모르고 있다. 다만 몇 년 전에 서울 따님 댁으로 모셔갔는데, 따님께서 “내 죽더라도 낙강에는 바로 연락하지 말아라.(‘낙강에 경제적인 부담이 되지 않게 나중에 알려라’는 말씀)”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듣는 후배들은 가슴이 아픈 말이다.
낙강이 한 때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으나 이제는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오래 오래 살아계시기를 기원합니다. 퇴직 후부터 보청기를 사용하신다는 선생님의 모습이 선하고 말없이 빙그레 웃으시면서 꼭 필요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 음성이 들려오는 듯 하다. <洛江>이 활기찬 새봄을 맞이한 소식을 전해드리고 싶으나 답답할 따름이다.
먼저 낙강은 문학의 모향(母鄕)이요 모토(母土)이기 때문에 영원히 떠날 수 없다는 원정(園丁) 하영필(河榮弼) 선생님의 말씀이 쟁쟁하다.
嶺南과 洛江 그 風土도 文學도 내 心身을 낳으시고 길러 주신 母鄕이고 母土이다. 그 母를 버리고 어찌 길을 갈 수 있으며 글을 쓸 수 있겠는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피가 마를 때까지 그 애정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洛江은 그 山河가 엄연하고 태연하고 청아하고 유연하듯이 그 모양 그대로 흘러갈 것이다. 嶺南과 洛江이 영원하듯이 그 이름 嶺南과 洛江의 時間도 영원할 것이다.
원정(園丁) 선생님의 표제시 「조선솔의 바람소리」는 다음과 같다.
홍익과 광명의 나라/ 아사달을 꿈꾸던 솔// 그 뿌리 면면히 내려/ 내 안에도 내려 주어// 안총이 흐리던 날은/ 독경소리 내어 주데// 백두에서 한라까지/ 삶을 함께 누리면서// 바람은 얼이 되고/ 얼은 바람이 되어// 겨레 속 정기로 살아/ 억겁으로 흐르데.
-하영필, 「조선솔의 바람소리」 전문
1965년 경북 달성군 본리초등학교 교감으로 재직 중에 박정희 대통령께 건의 서한을 올린 것은 진정한 교육자의 모습을 보여준 일화로 남아 있다. 대통령 비서실에 접수되었으며 대통령께 보고가 되었다는 답변서를 책에 싣고 있다. 지금은 급식까지 무료로 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무엇보다 당시 군부에 이런 건의를 한다는 것은 우직한 선비 정신이 없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평소 온화하고 후덕하신 성품을 생각할 때 때묻지 않은 순수한 정신의 교육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1981년 10월 13일 정표년 시인님께 보낸 편지가 책에 실려 있다. 고령 일대와 해인사 답사를 안내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 나타나 있는데 한 편의 수준 높은 수필인데 일부만 살펴본다.
이튿날 이른 아침의 뒷산 고분군의 순방도 즐거웠습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몸도 경쾌해지는가 보지요. 우거진 산 풀 속의 이슬에 젖으면서 아침 山氣를 마시는 快味에 힘이 새로 솟았던가? 건강에 요주의 하시던 白水先生님도 다리에 불편을 느끼시던 김남환 시인도 가파른 산길을 단숨에 오르시고 멧부리 같은 거대한 능묘를 다 같이 두루 돌아보셨으니…그리 크지 않던 가야국이 어떻게 그 거대한 역사를 할 수 있었을까? 국가의 사직의 수호에 전 국민이 한 덩이가 되어 있었음을 이 산릉들은 말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렇게 애중하던 조국이 무너질 때의 그 비통을 어떻게 감내했겠습니까. 백제가 가고 낙화암의 붉은 꽃이 천고에 향훈을 피우고 있듯이 저 탄금대를 울렸던 가야금의 애절한 흐느낌도 망국한의 슬픈 여운이 아니었을까요?
해인사는 언제 보아도 큰 가람이며 절경이었습니다. 속살이 보일 듯 말 듯 연하 휘두르고 다투어 등천하는 아아한 봉우리들 유연히 버티고 서서 淸風高節을 말하고 있는 천년 노송들이며 그 사이 기암괴석을 누비며 분주하는 천차만파의 紅流洞天 10리 풍치는 표현할 말을 잃고 다만 연연할 따름이었습니다.
청태 속 그윽한 승방들을 돌아보면서 그 별천지에 깊이 묻혀서 고해를 건너고 있는 또 한 인생의 정경에 젖어 보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산수가 유혹해도 그 곳에 영영 머물 수 없는 몸들, 그 맑은 청류에 속진이나 씻고 가자고 손발을 깨끗이 씻고 조촐하게 싸 온 점심 도시락은 어떤 산해진미보다도 더 맛있었습니다.
세상에 나가면 고달픈 인생들이나 그 한때는 남부럽지 않은 즐거운 날이 되어 주었습니다.
2008년에 발간한 시조집 『三寶頌』을 몇 작품을 소개한다.
여기서 삼보는 불교의 불법승 삼보가 아니다. 원정 선생님은 머리글에서 “우리 선인先人들께서 받아서 지키고 물려주신 천자천손天子天孫 홍익인간弘益人間 광명이세光明理世의 계보와 이념과 이상은 창시 이래로 인류가 수수授受한 문화유산 중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이며 고귀한 가치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삼보三寶라고 했다.”라고 하셨다.
태초에 하느님이 귀한 보물 내리시니// 천자천손, 홍익인간, 광명이세 삼보라// 인류의 사는 길 큰 벼리 명시하여 주시다.
-「서序」 전문
하느님은 환웅님을 단군님의 탄강은/만물을 사랑으로 낳으시는 계보라/ 이 겨레 명줄로 받들고 바르게 이어 왔다// 때때로 이리 떼들 목숨을 겨누어도/ 우리는 고귀한 천손 그 긍지 하나 갖고/ 머리를 하늘로 세우고 꼿꼿하게 살아왔다.
-「천자천손天子天孫」 전문
땅 위로 보내면서 간곡하신 당부 말씀/ 중생을 기르는 길은 홍익인간 이념이니/ 사랑을 도우는 행동으로 베풂이라 하시다.// 세상일 덧없어도 긴 세월 한결같이/ 서로 돕고 나누면서 길흉화복 함께했네/ 그 미풍 본보기 되어 평화 세계 이끌리라.
-「홍익인간弘益人間」 전문
하느님과 맘과 몸은 사랑이고 빛이라고/ 그 희구 광명 세상 동으로 동으로 와/ 머문 곳 임금과 물물 이름 밝음으로 짓고 살다// 음흉하고 간사한 자 소인이라 비하하고/ 광명하고 정대한 사람 대인으로 우러르며/ 사랑과 밝음이 가득한 지상천국 바라시다
『삼보송』에서 소개한 작품들은 원정(園丁) 선생님의 사상의 한 모습을 드러낸 작품들이다. 우리 겨레는 천손天孫임을 자각하고 긍지와 서로 사랑을 베풀면서 살자는 교훈을 주고 있다.
『조선솔의 바람소리』에서 “귀여운 손자놈의/ 사랑스런 돌잔치에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 선물로 줘야겠다고// 토실한 고사리 손에/ 유사 한 권 쥐어줬다.// 반만년의 내력이며/ 아사달의 햇살이며// 이 세상 이롭게 할/ 인간살이 등불이며// 골라도 또 골라 봐도// 이보다는 더 없었다.”(「삼국유사」 전문) 라며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삼보’라서 삼국유사를 돌잔치 때 손자에게 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선생님의 삼보송은 평생을 품어온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손자’를 초등학교 담임이 된 채천수 시인은 그 아이는 영재반에서도 매우 영특하여 천재였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몇 작품을 소개한 것은 원정(園丁) 선생님의 작품이 대부분 사상시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정시의 본령인 개인적 서정시가 주가 된다. 그의 시관을 다음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시 그대는 무지개다/ 태초에서 영원으로// 지상에서 으뜸으로 아름답고 황홀한// 저 건너 시냇가에도 내 안에도 서려 있는// 아련한 그대 얼굴/ 애절한 그리움이다// 저어 가도 저어 가도/ 저만치 가서 있고// 옥동자 얻지 못하고도// 연연한 사랑이다.
-「시(詩)·2」 전문
시조를 그리운 연인에 비유하였으며 연연한 사랑을 한다고 하고 있다. 이 시 자체가 한 폭의 아름다운 서정시다. 달을 소재로 한 작품이
끝내 끈이 풀려/ 달려온 호반일레// 팔매치면 돌아보리/ 지척에 자리한 님// 그 몸살/ 다시 일까 봐/ 돌아서네 무거운 발
-「湖月」 전문
누가/ 주야장천// 고운 저 달/ 홀로 두어// 그리움에/ 겨운 눈빛// 한밤 내/ 흐르게 해// 이 밤을/ 외로운 사람들/ 서성이게 하는고
-「달」 전문
「호월」이나 「달」에서 달은 그리워하는 임이다. 그러나 홀로, 또는 각자가 그리워하며 이루지 못한 사랑임을 은연히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호월」에서는 “팔매치면 돌아보리”라고 말하지만 말을 건네지 않고 돌아선다는 말이다. 「달」에서는 임을 그리워하는 심경을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운 저 달/ 홀로 두어”라며 임과의 거리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멀리 있는 임을 홀로 바라보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외로워하며 쳐다보기만 하면서 서성거린다는 것이다. 애틋한 사랑이다. 임을 연인 또는 시조라고 볼 수 있다.
가장 크게 지은 죄를/ 염라대왕 묻는다면// 몽매에도 쉬지 않고/ 사랑한 죄 지었니다// 연옥을 간다고 해도/ 사랑한 죄 지었니다.
-「사랑한 죄」 전문
이 작품은 80이 넘은 어느 해에 불쑥 「대구시조」에 ‘사랑’을 고백한 작품이다. 선생님은 평소 허튼 말씀을 하지 않으시는 성품이시라서 회원들은 그 작품에 호기심이 많았다. 그래서 봄에 문학기행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으면서 어느 시인이 “영감님 고백하이소. 누구 사랑한 것 맞죠?”라고 특유의 농담 같은 진담으로 말씀 드렸다. 그러니까 “내 죽기 전에 지은 죄를 고백해야 할 것 같아서 섰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죽음이 눈앞에 왔을 정도로 아프셨다고 하셨다.
귀한 목숨 타고 나와/ 빛도 정도 고왔는데// 이루지 못한 꿈의 파편/ 화한이 북받친다// 가까이 다가오는 이별은/ 더욱 애절하여라.
-「병상고음病床苦吟」 전문
여기서 “가까이 다가오는 이별”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건강을 회복하신 후에 「사랑의 죄」를 쓰셨다. 그런데 이 작품을 쓰신 이후에 몇 년간 발표하신 작품들은 서정성이 짙은 작품들을 발표하셨다. 이렇게 볼 때 시는 나이든 것을 탓해서는 안 되고 끝까지 치열하게 노력하면 좋은 작품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낙강』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 「날아간 새」에서 “하늘은 저리도 아득하고/ 생각 이리 간절하고”라며 생명의 근원을 돌아보시고 있다. 마지막까지 시조를 사랑하신 선생님의 모습이 느껴진다.
동인 <낙강>은 문학의 모향母鄕이라고 하셨다. 철학자 하버마스는 “행위 조정의 측면에서 보면, 의사소통 행위는 사회 통합과 연대의 산출에 기여한다”라고 하였다. 사회통합이라는 거창한 것은 목적은 논의에서 제외하더라도 “연대의 산출”이라는 말은 낙강>의 동인에도 적용할 수 있음은 분명하다. 건강이 허락하실 때까지 변함없이 <낙강>에 발표하신 것은 동인들 간의 의사소통 행위이다. 그리하여 <낙강> 동인들은 연대 의식이 강하였다.
강물은 흘러가고 새로운 물이 흘러와서 강이 존재하듯이 새로운 낙강 회원들은 먼저 존재했던 회원들을 돌아보며 역사적 연대감을 가지게 된다. 철학자 발터 베냐민은 “역사성은 현재를 통해 과거가 역사로서 살아 움직이게 하고, 역사를 통해 현재가 미래로서 살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배 <낙강洛江> 회원님들의 작품을 통해서 낙강 오랜 역사에 합류하게 된다. 그리하여 역사적 물결을 함께 이루어서 근년에 입회하신 회원님들도 가장 오래된 시조 동인의 강물에 합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선배님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한 <낙강洛江>은 지금도 넘실거리며 함께 흘러가는 것이다.
원정(園丁) 하영필(河榮弼) 선생님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피가 마를 때까지 그 애정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낙강洛江>을 사랑하신 말씀이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