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cafe.daum.net/Lineage2Best
LineageII 13server Blood Pledge KINGS
[단편소설]
발 명 가
박 지
-본교에 재직 중인 이준 교수님께서 별세하셨기에 알려드립니다. 빈소는 ○○의료원 영안실 301호실. 발인은 ○월 ○○일. 장지는 충북 음성군 삼성면 ○○리 선영입니다.
-사인이 뭐죠?
미술대학 조교로부터 갑작스러운 스승의 부음을 전해 듣고 졸린 정신에도 그 말부터 튀어나왔다. 잠은 덜 깼지만 스승이 갑자기 죽어야 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사고는 아니고요. 스스로......
젊은 조교는 분명한 말을 못하고 뒷말을 잘랐다.
-자살입니까?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은 공허감 속에 앉아 있었다. 스승은 왜 갑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인가. 얼마 전에 본교에 시간강사 자리를 마련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만났을 때만해도 스스로 목숨까지 끊을 만한 절박한 일은 없어 보였다. 건강도 대체로 좋아보였다. 그런데 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밤에 조문 갈 생각을 하면서 흔들의자에 꼼짝 않고 기대 있었다. 간밤에 작업구상을 한답시고 새벽까지 잠을 설쳤더니 눈꺼풀이 천근이었다. 피로 앞에선 스승의 죽음마저 권태로운 일상사의 한 부분으로만 치부되는 것인지 별 슬픔이 없었다. 다시 잠이라도 청해보려고 눈을 감으니 눈앞에서 날파리 같은 까만 점들이 둥둥 떠다녔다. 날파리증이 심해지는 건 건강의 적신호라고 동네 병원 의사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건강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일단 창작을 시작하면 내 몸이 무슨 병을 달고 있는지는 뒷전이고 신병 들린 무당처럼 알 수 없는 열기에 취해 지냈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흔들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핸드폰을 꺼 놓고 눈을 부쳤다. 피곤의 무게에 눌려 깊은 단잠을 잤다. 깨어보니 벌써 오후의 햇살이 거실 깊숙이 들어와 허옇게 박혀 있었다. 숙면을 한 덕분인지 몸은 기류를 타고 날아오른 새의 늑골처럼 가벼워져 있었다. 그런데 거실의 풍경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거실 바닥에는 간밤에 작품 구상을 하다가 구겨 던져버린 드로잉 종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욕망의 배설구, 서울 페스티벌’. 잠정적으로 정한 전시회 테마에 맞추어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작품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요즘 들어 그런 일이 부쩍 잦아졌다. 날밤을 새고도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런 걸 슬럼프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대강이나마 집안 정리를 하고 조문 갈 생각을 했다. 며칠동안 작품구상을 한답시고 면도조차 하지 않았더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목욕탕 거울 앞에 서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동굴 속에서 타제석기를 갈고 살았던 네안데르탈인처럼 보였다. 샤워기를 틀어놓고 한동안 뜨거운 물줄기 속에 서 있었다. 몸을 씻어내자 나른한 피로감이 껍질을 벗고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얼굴에 비누칠을 하고 나서 면도기로 지저분한 콧수염과 턱수염을 밀어냈다. 면도를 마치고 물로 헹궈낸 얼굴도 너무 말끔해보여서 내 얼굴 같지가 않았다. 이래저래 내 얼굴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진짜 내 얼굴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샤워라도 자주 하며 살려는 생각조차 잘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나는 대단히 게으른 인간임에 틀림없었다. 그러한 일상적인 일조차 귀찮아서 생략해버리기 일쑤이니 말이다. 대단한 작품을 만들지도 못하면서 일단 작품 구상에 착수하면 다른 일은 좀처럼 거들떠보려 하지 않는 성격이 있었다. 병은 병이었다. 좀처럼 치료가 되지 않는 중증이었다.
속옷을 갈아입고 옷장을 열어보니 조문에 입고 갈만한 검은 양복이 없었다. 옷장 구석에 처박혀 있는 십년 묵은 검정 양복을 꺼내 입어보았다. 대학 졸업하면서 졸업 기념으로 부모님이 맞춰준 양복인데 다른 곳은 봐줄만한데 그동안 허리가 불어서 바지 단추를 채우는데 애를 먹었다. 숨쉬기가 불편해서 자크 위쪽의 단추를 풀자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나중에 제대로 된 양복을 맞춰 입더라도 우선은 이걸로 입을 수밖에 없었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핸드폰을 켜보니 자는 동안 추 관장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심심해. 나를 신나고 재미있게 해줘.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면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나보다 나이가 열 살이나 더 많은 그녀가 보채는 모습은 어린애처럼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그녀의 화랑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 뭉크의 절규에 나오는 해골바가지처럼 경악하지 않을까. 추 관장을 통해서 몸을 섞은 남녀에게 세속의 나이는 밥그릇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젊은 애인을 소유한 그녀는 발정기의 암고양이처럼 굴었다. 성공을 위해서 그녀에게 접근했던 게 주효했다.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그녀는 나를 미술계에서 빨리 성공시키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다. 작품 전시회도 그녀가 서둘러 기획해 주었다. 그러니 그녀가 놓아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성공이라는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작품이 좀처럼 나와 주지 않는 것이다. 의욕이 넘칠 때는 기회가 없더니 기회가 되니까 작품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원룸을 나와서 지하철을 타러갔다. 어두워지려면 아직 멀었기에 서두르지 않았다. 밤이나 돼야 대학 동창들이 직장 일을 끝내고 조문을 올 것이다. 학교 다닐 때는 그림 그려서 나중에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까 싶었던 친구들도 졸업하고 나서는 다들 자리를 잡았다. 친구들의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환경에 맞추어 살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지하철 계단에 이르자 아직 퇴근시간 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내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빠른 걸음걸이에는 삶의 속도가 묻어 있었다. 치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듯 바쁘고 빨랐다. 그것이 삶의 논리인 모양이었다. 그에 비해 나의 발걸음은 상대적으로 느리기만 했었다. 뉴욕의 브루클린에 있는 프랫인스티튜트 대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했을 때도 그랬다. 그 때 나를 선뜻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교수 채용 원서를 내는 대학마다 탈락했고, 국내 화랑들은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가 제출한 포트폴리오를 고스란히 되돌려 주었다. 대학과 화랑에서 입성을 거부당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대낮에 들개처럼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일뿐이었다. 배가 고파 속에서 쫄쫄 소리가 나는데도 먹어야겠다는 의욕이 없었다. 그 때는 느림이 미학이 아니라 고통이었다. 온 도시가 나를 옥죄는 감옥처럼 여겨졌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 거리의 퍼포먼스였다. 내가 전하려는 작품의 메시지는 단순했다. 그것은 사회의 편입을 거부당한 자가 내뱉는 무언의 신음이었다. 공사장에서 쓰다버린 나무 조각들과 찌그러진 철판, 철사와 못을 주워다가 공중전화 부스 크기만 한 감옥 상자를 만들었다. 상자를 행인들이 다니는 복잡한 거리에 내다놓고 사각팬츠만 입고서 그 안에 들어앉아 버렸다. 내 목에는 ‘罪’라고 쓴 패널이 개목걸이처럼 걸려 있었고, 내가 갇혀 있는 감옥 상자가 미술 작품임을 알려주는 것은 상자 바깥쪽에 써 있는 ‘묵시록, 침묵과 아우성 展’이란글귀뿐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의 의도를 제대로 알리 없었다. 처음에는 행인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지나갔다. 저게 뭐야? 글쎄, 쇼하나 봐. 손가락으로 머리 위에 원을 빙빙 그려 보이며 돌았잖아, 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사흘 째 되던 날 어떻게 알았는지 신문사 미술 담당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찾아왔다. 왜 이런 전시를 기획하시게 되었나요? 은테안경을 쓴 젊은 기자는 나를 취재하려고 들었다. 답답해서요. 코리아가 너무 답답해서 숨 막혀 죽을 것만 같아서요. 왜요? 무엇이 그렇게 답답하던가요? 그는 나의 하소연에 호기심이 이는 모양이었다. 코리아 화단이 너무 답답해서 퍼포먼스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가 수긍하며 수첩에다 적기 시작했다. 당신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뭐죠? 그는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사회라는 형틀 속에 갇혀 수인처럼 살아가는 도시인의 고독한 자아이죠. 버림 받은 자에게 도시는 낙원이 아니라 감옥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기자는 나의 약력을 묻기도 했다. 기자가 다녀간 후 중앙지 문화면에 나의 퍼포먼스 기사가 실렸다. 나로선 충동적인 행동이었지만 그 일로 나의 존재가 미미하나마 화단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지방도시에서 열리는 비엔날레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다. 비엔날레가 열리는 동안 서울에 있는 유명 화랑의 관장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추 관장이었다. 돈 많은 남편 덕에 화랑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미대를 나와서 작품에 대한 전문적인 감식안도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왜 핸드폰을 꺼 놓고 있어?
추 관장에게 전화를 걸자 볼멘소리를 했다. 간밤에 일하고 나서 잠을 자느라고 그랬다고 하자 그제야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지금 선생님 조문가는 길이야.
-어머나, 선생님이 돌아가셨어. 어쩌다가?
사정 얘기를 하자 추 관장이 깜짝 놀랐다.
-정말 충격이 심했겠다. 너무 상심하지 마.
추 관장은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금방 막내 동생을 위로하는 자애로운 큰 누님의 음성으로 되돌아 와 있었다.
-그건 그렇고 전시회 준비는 잘 돼가고 있는 거야?
-별로 진전이 없어.
전시회 이야기만 들어도 몸에서 맥이 풀렸다.
-날짜가 잡힌 것도 아니니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봐. 그 동안 내가 너무 재촉했나 보다 그치?
추 관장의 목소리에 애교가 섞여 있었다.
-그건 아닌데. 통 작품이 안 나와.
-그 동안 너무 과로해서 그런 걸지 몰라. 중견 작가들도 그럴 때가 있어. 좀 쉬면 나을 거야.
-그럴까?
-틀림없어. 내가 많은 작가들을 상대해봐서 작가들의 생리를 잘 알아. 쉬고 나면 다시 창작열이 펄펄 끓어오를 거야. 그건 그렇고 조문 마치고 나서 술 한 잔 하자. 어때?
그러자고 대답하고 나서 핸드폰을 끊었다. 스승의 상중이지만 딱히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그녀는 나의 성공에 꼭 필요한 인물이었고, 나의 욕망 또한 그녀 못지않았다. 비엔날레에서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나이 많은 그녀에게 끌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런 거부하기 어려운 감정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먼저 술자리를 제안했다. 몇 번 술을 마시고 호텔에 다녀온 후 우리는 서로가 아주 잘 맞는 상대라는 것을 알았다. 욕망이란 참으로 묘했다. 마치 달과 같아서 비어 있으면 차오르고 차오르면 극점을 지나 꺾이게 마련이었다. 터질 듯이 포만한 욕망을 비워내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를 갈구했다. 추 관장은 평소에는 난초처럼 고고한 품위를 지키다가도 욕망의 달이 가득 차오르면 나를 찾았다. 남자 구실을 못 하는 그녀의 돈 많은 남편이 풀어주지 못하는 욕망을 나를 통해서 풀었다. 그녀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나의 두 눈에는 보름달처럼 터질 듯한 그녀의 육체가 떠올랐다. 욕망은 비워내기 위해서 차오른다는 것을 그녀를 통해서 알았다.
서울 지하철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낯설었다. 무표정한 사람들의 경연장 같은 이곳에서 낯선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머나 먼 모하비 사막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낯선 지하철 사막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표정은 있었다. 반쯤 감은 눈으로 조는 척 하는 청년,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볼 건 다 보는 아주머니, 책이나 신문을 들여다보며 독서열을 불태우는 안경 쓴 아저씨, 전철의 균형감각을 확인하려는 듯 팔짱을 낀 채 서서 가는 젊은 여성, 전동차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뉴욕 양키즈 모자를 눌러 쓴 청소년, 삐딱한 시선들과 초점 없는 눈, 먼 곳을 보고 있는 듯한 황량한 표정들.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는 젊은 여성의 짧은 오렌지색 스커트가 신경 쓰였다. 스커트 사이로 드러난 허연 무릎이 무심한 눈길을 자극했다. 괜한 오해를 받을까 싶어서 시선을 바닥으로 돌렸다. 그곳에 각양각색의 신발들이 나열되어 있다. 랜드로바의 풀어진 한쪽 신발 끈, 하이힐의 상처 입은 모서리. 나이키 운동화, 검정 구두, 빛바랜 꽃무늬 단화. 가끔 물건 파는 판매원이 지나가며 낯선 풍경을 깨놓기도 했다. 먹고 남은 음식물을 밀봉하기에 딱 좋은 집개가 나왔습니다. 국물조차 새지 않습니다. 집개 열개 한 세트가 단 돈 천원. 자, 보세요. 이렇게 쉽잖아요. 판매원은 집개로 밀봉한 물 봉지를 거꾸로 세워 보인다. 물 한 방울 새지 않는다. 한 청년이 무표정하게 앉아 있다가 재빨리 천 원짜리 지폐를 내민다. 몇 사람이 민첩하게 더 산다. 무심한 척 하고 있으면서도 다 보고 있었다. 서울의 지하철은 그랬다. 지하철에서 허비하는 무료한 시간들이 아까웠다. 뉴욕 지하철에서 3인치 그림을 개발한 강익중처럼 창의적으로 보내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그게 잘 안 되었다.
을지로 4가 역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 나오는 동안 벽면에 장식되어 있는 벽화로 눈길이 갔다. 벽화는 두루미나 사슴 같은 문양을 표현했지만 상업 디자인처럼 도식적인 그림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 지하철에도 뉴욕처럼 전문 작가의 작품을 설치한다면 지하철의 품격이 높아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 퀸스 지하철 역사에 설치된 재미 한국작가 강익중의 작품을 떠올리면 더 그랬다. 퀸스 역에서 지하철을 탈 때마다 검표 출입구 위 벽면을 가득 채운 3인치 그림들이 거대한 모자이크처럼 눈길을 사로잡곤 했었다.게릴라처럼 출몰하는 낙서족의 존재까지 인정한다면 뉴욕의 지하철은 현대미술의 전시관이나 다름없었다. 뉴욕 지하철의 낙서화로 일약 현대미술의 총아로 떠오른 바스키아나 키스 해링이 아니더라도 뉴욕 지하철의 작가층은 풍부했다. 낙서의 남발이 지하철의 미관을 해친다는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실험정신의 충일이야말로 작가정신의 발현이었다. 예술은 어차피 실험이자 도전인 것이다. 그런 파괴와 도전정신 없이 진보는 없는 것이다. 뉴욕 유학시절 회화를 포기하고 설치미술로 전향한 것도 그런 고뇌의 소산이었다.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에 심각한 회의를 느끼고 있을 때 다가온 작가가 독일의 요셉 보이스와 백남준이었다.특히 제 2차 세계대전 중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여 러시아에서 격추되었다가 타타르족의 펠트 담요와 비계 덩어리로 소생한 요셉 보이스는 많은 영향을 주었다. 뉴욕의 생활고보다 더한 번민 끝에 대학원 1년 과정을 마치던 날 그동안 그렸던 캔버스를 죄다 모아다가 도자기 가마 속에 넣고 불태워버렸다. 불길이 완전히 사그라질 때까지 가마 속을 노려보면서 그림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벌써 물감 칠을 하지 않은 지가 꽤 오래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나를 화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리둥절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서 일일이 대꾸 할 필요성은 없었다. 남들이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었다. 백남준의 말처럼 미술은 이제 비빔밥일 뿐이었다. 이것저것의 잡탕인 것이다. 그 안에는 물론 그림도 있고, 조각도 있고, 설치도 있고, 해프닝도 들어 있었다. 그림을 버린 후 작업장 인부처럼 작업을 해왔다. 지상의 모든 물건이 다 작품으로 둔갑할 수 있었기에 고물 수집가처럼 주택가를 돌면서 쓰다버린 물품을 수집하기도 하고, 조각가처럼 쇠나 나무를 깎고, 용접공처럼 철판을 용접하고, 재단사처럼 가위를 들고 천을 잘라 물건에 휘감기도 하며, 심지어는 연극배우처럼 직접 몸으로 작품과 관계된 어떤 행위를 연출하기도 했다. 가끔은 내가 미술을 하고 있는 건지 쇼를 하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다. 차라리 미술이 캔버스에다 물감 칠만 하고 살았던 시대에 작업했더라면 편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의 작업은 출발점을 떠난 육상선수처럼 되돌아올 수 없는 지점을 지나 있었다. 설치작가로의 변신이 실패한다 해도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와 거리를 배회했다. 선뜻 죽은 스승의 영정을 마주 대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평소에 스승은 나에게 깊은 애정을 보여주셨다. 나의 작품을 인정해주고 격려도 해주었다. 그런 스승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어려웠거니와 그 죽음의 방식을 해석할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장례식장에 가까워지자 그런 생각들이 더욱 절실해졌다. 모교에 시간 강사 자리를 마련해준 것도 스승이 보여주신 관심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런 스승에게 너무 무심했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물감 칠이나 한다고 작품 세계를 별 것 아닌 것으로 폄하하기도 했었다. 나에게 그런 자격이나 있는 건지 죄책감이 들었다. 어두워져서야 장례식장에 들어갔다. 영안실 건물 밖에서 친분 관계가 깊지는 않지만 눈에 익은 미술계 인사들과 마주쳤다. 그들과 악수를 나누고 분향소로 향하다가 복도에서 동양화가이신 대학 은사님을 만났다. 그 분은 모교의 교수님들 중 스승과 가장 막역한 분이었다. 은사님은 나를 잡고 슬픔을 토로하기 시작하였다. 이 보게 정군. 참으로 놀라운 소식 아닌가. 무봉(無峰)이 이렇게 허무하게 가다니 말일세. 깊은 슬픔에 잠긴 그 분의 입안에서는 술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주말마다 자전거를 같이 타기로 해놓고서 저 혼자서 가 버렸어. 시간이 지나면 가야 할 길인데 뭐가 그리도 급하단 말인가. 안 그런가, 정군? 은사님은 누구를 만났어도 늘어놓았을 탄식을 들려주셨다. 은사님의 슬픔을 이해하기에 그 분의 슬픔을 받아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게 잘 안되었다. 내게는 아직 그 분만한 슬픔이 없었다. 그러나 잔정이 많으신 은사님은 스승의 빈자리가 너무 크신 모양이었다. 자전거를 같이 타자던 사람이 그렇게 서둘러 가도 되는가? 은사님은 자전거 이야기를 되풀이 하셨다. 얼마 전에 스승도 자전거 이야기를 하셨다.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는데 당 수치가 높게 나왔다면서 당뇨를 고쳐보려고 자전거를 타신다고 하였다.강의를 마치고 자전거 타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고 하였다. 한쪽 팔을 잃어버린 기분일세. 누가 죽어도 이렇게 슬프지는 않았을 걸세. 그 분의 진한 슬픔에 잡혀 나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 때 은사님을 잘 아시는 동료화가 한 분이 다가와 그 분에게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면 더 오래 잡혀있어야 했을 것이다. 동료화가를 만나자 은사님은 다시 나에게 들려주었던 탄식을 되풀이하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고 발길을 돌렸다.
빈소에 가 보니 대학 선배이자 모교의 전임강사인 최 선배가 입구에서 부조를 받고 있었다. 그는 아그리파 석고상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최 선배는 스승의 도움으로 모교에 교수 자리를 얻은 사람이었다. 그가 스승의 수제자라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최 선배가 나를 보자 손을 들어 보였다. 조문하고 나서 나 좀 보고 가게. 네, 그러죠. 분향대로 가 보니 스승은 영정 사진 속에서 평소의 인자한 모습으로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얼마 전에 본 스승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반갑게 맞아줄 것만 같은 생생한 모습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어디인지 아뜩한 생각마저 들었다. 삶의 곁에 죽음이 있는 것인지 그 거리는 너무나 가까워만 보였다. 스승의 영정에 향을 피우고 절을 했다. 그 옆에서 조문을 받고 있는 스승의 장성한 두 아들과 사위에게 절을 하고 위로의 말을 전했다. 조문을 하고 나서 최 선배에게 가 보니 그가 접객실의 손님들을 잘 접대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따가 시간 봐서 술이라도 한 잔 하지? 평소에는 별 친분 관계가 없던 그가 친근함을 보였다. 시간 강사 자리를 얻은 걸 축하해 주면서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했다. 머지않아 그가 모교의 미술대학을 장악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만큼 그는 정치적이고 이해타산에 밝은 인물이었다.
접객실에서 대학동창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과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대학 졸업하고 나서 처음 보는 친구도 있었다. 지방에서 미술교사를 하는 그 친구는 아예 그곳에서 뿌리박고 산다고 했다. 시골에서 사는 게 마음이 편해. 아이들 그림지도나 하고 가끔 교사 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는 게 전부지. 고통 없이 그리니까 부담도 없고 건강에도 좋더라. 친구는 껄껄 웃으면서 근황을 전했다. 친구는 그 동안 몰라보게 몸이 불어 있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던 예전의 마른 체구는 간데없고 비대한 느낌까지 들었다. 학교에서 회식하면서 삼겹살에 소주를 자주 마셨더니 살이 불더라. 이게 순 삼겹살로 붙은 살이야. 공포의 삼겹살이지. 친구의 너스레에 동창들은 일제히 폭소를 터트렸다. 어떤 친구는 나의 무심함을 탓했다. 유학 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귀국해서도 왜 연락 한번 없었니? 사는 게 힘들어서 그랬다고 하자 앞으로는 자주 만나자고 했다. 귀국 후 거리에서 벌였던 퍼포먼스를 신문에서 보았다는 친구도 있었다. 네 기사를 읽고 놀랬어. 미국 유학 경력도 있는데 알아주는 화랑이 없었니? 라고 물었다. 국내 화랑도 유래 없는 불황이잖아. 하긴, 어렵지. 검증 받은 중견 아닌 신인을 잘 인정하지 않겠지. 내 궁색한 변명을 친구는 수긍해 주었다. 선생님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걸까?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일산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경호가 스승의 이야기를 꺼냈다. 갑자기 나온 경호의 물음에 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 물음은 사실 모두가 묻고 싶었던 물음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의 작가정신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짧은 침묵이 흐른 뒤 서양화를 그리는 채묵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작가정신? 그래. 선생님은 죽음으로써 지금까지 추구해온 예술가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던 거야. 모두들 심각하게 채묵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화단에서도 선생님이 현대 추상화에 기여한 부분을 인정하잖아. 현대 추상화에 동양의 미(美)인 여백의 품격을 되살려냈다고 말야. 선생님은 가열한 예술 혼을 죽음의 미학으로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싶었던 걸 거야. 반 고흐나 잭슨 폴록처럼 말야. 38구경 리볼버 권총으로 한방에 끝내고 싶으셨던 거지. 그래서...... 채묵의 마지막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럼 선생님이 권총 자살 하셨어? 그래. 너, 몰랐니? 채묵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다른 친구들은 그 사실을 다 알고 있는 듯했다. 총알이 정확하게 두개골을 반으로 갈라놓았다고 하더라. 머리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작업실에 흥건했대. 채묵의 말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선생님 그림 몇 점이라도 사놓는 건데 그랬다. 옆에서 얌전히 듣고만 있다가 함석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무거운 분위기가 일거에 깨졌다. 모두들 웃었다. 작품 가격이 뛰는 건 불을 보듯 뻔하잖아. 요즘 마누라가 팔리지도 않는 그림 그려서 물감 값만 축낸다고 노골적으로 불만이야. 아파트 중도금 마련한다고 할인점 캐셔 일까지 뛰는 아내를 보면 그런 말을 해도 할말 없더라. 함석의 말을 누구도 철없다고 탓하지 않았다. 다들 살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유학 갔다 와서 넌 뭘 그리는 거니? 경호가 나를 향해서 물었다. 경호의 말이 심히 불편하게 들렸다. 난 그림을 그리지 않아. 지금은 설치 작업을 해. 아, 그러니. 예전에 네 그림 좋았는데. 대학 때 중앙 미전에서 특선도 해잖아. 왜 그거. 맨홀 뚜껑 그림. 정말 극사실적으로 실감나게 그렸었는데. 경호가 지난날을 상기하게 해주었으나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미대 동창들은 주로 그림이야기를 했다. 설치는 그들에게 관심 밖의 분야였다. 나도 미대 나와서 그림 그리지만 솔직히 설치미술은 정말 모르겠더라. 함석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한마디로 철학의 과잉이지 뭐. 설치미술에 얼마나 많은 철학이 들어가 있는지 아니? 옆에 있던 채묵이 거들고 나섰다. 철학을 모르면 미술도 못해요. 하여간 너무 난해하다니까. 미술 평론가라는 인간들도 다른 사람이 이해 못할 말들만 써놓는 경향이 있어. 친구들의 대화를 듣다가 도중에 슬며시 빠져나왔다. 추 관장에게서 온 전화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이상 거기에 앉아 있을 기분도 아니었다. 같은 미술대학을 나오고도 우리가 생각하는 바가 너무 다르다는 단절감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 뭐해, 전화도 안 하고 그렇게 바빠?
추 관장은 술을 마셨는지 풀린 혀로 투정을 부렸다.
-대학 동창들을 만나고 있는 중이야.
-나 혼자 있거든. 여기 와서 술 한 잔 마시고 가.
-거기가 어딘데?
-청담동 ‘글루미 플라워’에 있어. 당장 안 오면 내가 그리로 갈 거야.
추 관장은 금방이라도 달려올 기세로 엄포를 놓았다.
-알았어. 지금 갈게.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추 관장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귓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영안실을 빠져 나와 의료원 앞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도로에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검은 모자를 눌러 쓴 젊은 택시 운전사는 목적지를 물었다. 청담동이요. 목적지를 대자 택시 운전사는 백미러로 힐끗 나를 쳐다보더니 곧바로 끼어들기를 하며 급히 차를 몰았다. 택시는 자동차 경주를 시작한 것처럼 이리저리 잘도 빠져 다녔다. 피곤이 몰려왔다. 뒷좌석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얼마 전에 만난 스승이 생각났다. 보성 우전차를 사들고 스승의 연구실로 찾아 갔을 때 스승은 난촉을 헝겊으로 닦아주고 있었다. 스승은 마치 어린 아이의 손발을 닦아주듯 푸른 난촉을 하나하나 정성들여 닦아주었다. 푸른 난촉 사이로 희고 여린 꽃대가 올라와 있었다. 김군, 난향이 느껴지는가? 스승은 그런 질문을 던졌다. 잘 안 나네요. 코가 자주 막히고 비염 증세가 있는 나에겐 난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향은 코로만 맡는 것이 아닐세. 눈으로도 향을 느낄 수 있네. 네.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스승은 다시 향의 여백을 보라고 했다. 향의 여백도 있습니까? 동양의 선문답 같은 질문이 곤혹스러워 다시 반문하자 스승은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여백을 만들고 지나가네, 라고 했다. 알 듯 모를 듯한말씀이었다. 스승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가 여백이었다. 60년대에 추상화를 시작한 이래 스승이 줄기차게 추구해온 세계이기도 했다. 무슨 여백이 그리 많은 지 스승은 전시회를 할 때마다 다양한 여백을 보여주었다. 검정 계열에서 흰색까지 여백 속에 담기지 않은 색깔이 없었다. 스승의 방식대로라면 세상의 모든 사물이 다 여백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로서는 스승이 왜 그토록 여백에 집착하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꼭 여백이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오랫동안 궁금했던 걸 묻자 스승이 지그시 미소 지었다. 그게 내 방식이고 세계일세. 작가는 자기만의 편견과 고집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던가? 여백은 나의 편견이고 고집이었네. 스승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스승이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더 할말이 없었다. 자네, 난을 키워볼 생각은 없는가?스승이 난촉을 다 닦고 나서 엉뚱하게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 죽이지 않고 키울 자신이 없다고 하자 스승이 소리 내어 웃었다. 생명을 죽이는 건 사랑이 없어서야. 사랑만 있으면 난을 키울 수 있을 걸세.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키워보게. 내가 키우겠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스승은 떠넘기듯 내 품에 난 화분을 안겨주었다. 내 분신이라고 생각하고 잘 키워주게. 스승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간곡한 구석이 있었다. 점심을 대접하려고 스승을 모시고 학교 근처의 중국 음식점으로 갔다. 그곳에서 스승이 좋아하는 중국 정식을 시켰다. 자네, 그림은 아주 그만 둔 건가? 자리에 앉자 스승은 내 걱정을 해주었다. 자네 그림이 아까워서 하는 말일세. 설치나 그림이나 결국 같은 것이야. 그림으로 올라서나 설치로 올라서나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건 같다는 말일세. 미의 실현이지.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든 미의 완성이 예술가의 궁극적인 목적이야. 스승의 말씀이 가슴을 향해서 화살을 쏘는 것처럼 날아와 꽂혔다. 일반적인 얘기였지만 거부할 수 없는 진정성이 있었다. 스승은 유학을 다녀온 동안에 많이 늙어 있었다. 얼굴에 검은 곰팡이 같은 검버섯이 늘었다. 몸도 안 좋은지 당뇨가 심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요즘은 여백마저 비워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드네. 여백마저 비우면 뭐가 됩니까? 여백마저 비우면 무(無)의 세계가 되지. 요즘은 지금껏 내가 해온 작업이 하찮은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 그럴 리가요. 내가 부인하자 스승이 손을 내저었다. 아닐세. 내가 작업했던 여백은 나의 한계에 불과했네. 나에겐 천품(天品)이 없었네. 스승은 자조적으로 말하였다. 스승의 얼굴엔 깊은 고뇌가 각인되어 있었다.
-어서 와. 목 빠지는 줄 알았어.
‘글루미 플라워’에 들어서자 추 관장은 나를 보고 투정부터 부렸다. 여자의 나이란 고무줄인 것이 틀림없었다. 나이가 많건 적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선 사사로운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녀는 과일 안주 한 접시를 앞에 놓고 양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앉자 술잔부터 내밀었다.
-갑자기 스승이 왜 자살한 거야?
취기가 있는 목소리로 추 관장이 물었다.
-글쎄. 유서가 없으니까 그 이유는 아무도 몰라.
-후후,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지. 그러니까 살아있을 때 실컷 즐겨야 하는 거야. 알았어?
추 관장이 스트레이트로 잔을 비우고 나를 향해 쭉 내밀었다. 검정 실크 블라우스 소매 사이로 살집 있는 그녀의 흰 팔뚝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옷 때문에 그녀의 흰 살결이 더 고혹적으로 보였다.
-나, 오늘은 기분이 몹시 우울해.
그녀의 양미간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녀에게도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째서?
-고자인 줄 알았던 남편이 젊은 년을 몰래 끼고 있었지 뭐야. TV에도 나오는년이야. 감쪽같이 속았지 뭐야.
추 관장은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였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까 오히려 남편이 남자로 보이지 뭐야. 전에는 바보로만 보이더니 어쭈 제법인데,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우습지?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추 관장의 표정은 전혀 우스워 보이지 않았다. 마치 오래 사귀던 애인에게서 버림 받은 여자처럼 쓸쓸한 표정이었다. 양주 한 병을 마시고 우리는 콜택시를 타고 남산으로 갔다. 그곳에 우리가 자주 애용하는 호텔이 있었다. 술은 마셨지만 추 관장의 정신은 아직 멀쩡했다. 알콜이 불타는 그녀의 욕망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는지 호텔방에 들어가자마자 갈급하게 굴었다. 추 관장의 입술에서는 술 냄새가, 몸에서는 향수 냄새가 진동했다. 허물을 벗듯 실크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걷혀 나가자 그녀의 달아오른 몸이 보름달처럼 부풀어 올랐다. 아아, 아이를 갖고 싶어. 추 관장은 내 앞에서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말을 뱉어냈다. 사는 게 너무 허무해. 아이라도 있었으면 덜 외로울 텐데. 욕망으로 달아오른 그녀의 입에서 신음처럼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정말로 아이라도 가지려는 여자처럼 욕망의 극점을 향해 기를 쓰고 달려들었다. 땀을 흘리면서 정사에 몰두하던 중 우연히 호텔의 열려진 창문을 통해서 둥근 달을 보았다. 오늘이 보름이라도 되는지 흠집 하나 없는 완전한 형태의 둥근 원이었다. 달의 분화구인 크레이터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달빛이 열린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교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달과 관계된 잔인한 충동 하나를 느꼈다. 둥근 달의 캔버스에 그녀의 풍만한 여체를 하나하나 찢어서 내달고 싶었다. 붉은 피가 흐르는 채로 그녀의 팔과 유방과 하체를 찢어 대못으로 쿵쿵 박아놓고 싶었던 것이다. 절정의 순간에 달의 캔버스에 매달려 찢겨진 채로 꿈틀거리는 그녀의 허연 육체의 조각들을 보았다.
일을 치루고 나서 추 관장은 샤워를 하고 잠들어 버렸다. 어찌나 깊이 잠에 빠졌는지 죽은 시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욕망의 불이 꺼진 뒤의 그녀의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워만 보였다. 그녀의 잠자는 모습을 뒤로 하고 호텔방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시간은 새벽 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콜택시를 불러 타고 다시 스승의 장례식장에 가 보니 많던 조문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겨우 두 팀 정도가 둘러앉아 화투를 치거나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학동창들은 다 집으로 돌아갔는지 한 사람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중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그가 나를 부르기에 술자리에 합석하게 되었다. 그는 전수익이라는 중진작가로 주로 플라스틱 인형을 직접 제작하여 설치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추 관장의 소개로 안면을 튼 작가였는데 그가 나를 그들 일행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설치미술계의 떠오르는 신예입니다. 주로 현대 도시인의 욕망을 주제로 작업하고 있죠. 굉장히 유망한 젊은 작가입니다. 그는 나를 치켜세워 주었다. 그 자리는 공교롭게도 미술평론 하는 대학교수 한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가 설치 작업하는 작가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설치미술의 푸대접에 맞추어져 있었다. 미술 수집상들이 설치작품을 통 수집하려들지 않아요.보관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현대가 설치의 시대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아마 백남준이나 강익중 작품 빼고는 제대로 수집되는 작품이 없을 겁니다. 작품 전시회가 끝나고 나면 작품은 철거되고 사진이나 비디오로 남는 게 고작이죠. 대가의 작품도 창고에서 원형이 훼손 된 채 방치되는 마당에 이름 없는 작가의 작품은 더 말해서 뭐 하겠습니까. 쓰레기처럼 다시 재활용되어 공중분해 되는 거지요. 이블 보따리를 공간에 배치하는 작업을 주로 하는 이참이란 작가가 분통을 터트렸다. 하하, 화단에서 그나마 인정받고 상복이라도 있는 이형은 그나마 행복한 편이지요. 저 같은 무명은 상복도 없는데다가 화랑에서 찬밥 대우를 받으니 설치 작업을 더 해야 하는 건지 회의감이 들어요. 돈만 까먹고 있어요. 과외해서 번 돈으로 작업하고 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깁니다. 도무지 수지타산이 맞질 않아요. 옆에 있던 안모라는 작가가 자책감에 빠져 말했다. 술이 취했는지 그의 표정은 심각해 보였다. 관람객들의 수준은 더 한심하죠. 전시장에서 작품을 훼손하는 게 비일비재하고 이것도 작품이냐는 식으로 낄낄거립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땐 내가 왜 이작업을 하고 있나 싶더군요. 안모 옆의 최모라는 작가도 한 마디했다. 일반인들의 그림에 대한 향수가 의외로 완강하거든요. 미술은 그림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깨지지 않는 게 문제죠. 이참이란 작가가 술잔을 기울이며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미술관을 피력했다. 그림을 버리고 설치 작업을 시작한 이래로 저는 제가 미술가가 아니라 발명가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요. 발명가라니요? 우리가 왜 발명가예요? 옆에 있던 안모라는 작가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우리의 작업은 아이디어가 곧 작품이 되기 때문이죠. 백남준이 텔레비전을 발명하지는 않았지만 미술에 텔레비전을 도입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아이디어죠.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디어가 곧 작품이 됩니다. 작품이 나오기 전에 아이디어에 의해 작품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설치로 성공하려거든 훌륭한 발명가가 되어야 하는 거지요. 아, 네. 그럴 듯 하군요. 그 말을 들은 안모는 손뼉을 치며 공감했다. 그의 말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의 말이 모두 다 맞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설치 작업이 설계도 하나만 있으면 작품이 된다는 이치를 생각해도 그랬다. 발명가라니? 설치 작가가 발명가라니. 최모 작가의 말을 곱씹으며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빈소에 가보니 다들 피곤에 지쳐 휴전휴업 상태였다. 최 선배는 부조함 위에 엎드려 불편한 자세로 자고 있었고, 상주들도 상복을 입은 채로 바닥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모두들 죽은 듯이 잠에 빠져 있는데 살아 있는 사람은 영정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스승뿐인 듯이 보였다. 묘한 풍경이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이미지가 뒤바뀌어 있으니 말이다. 빈소에서 넋을 잃고 서 있다가 나는 불현듯 사진 속에서 들려오는 스승의 음성을 들었다. 진정한 예술가는 작품으로 살다가 작품으로 죽는 걸세. 누가 뭐래도 작품에 대한 치열한 탐구만이 작가의 본업일세. 그 이외는 다 하찮은 것일세. 유학을 떠나기 전에 댁에 들렸다가 들었던 스승의 말이었다. 적막한 불빛 속에서 홀로 스승을 마주 대하고 나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굳이 울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의식하지 못한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 내렸다. 눈물 속에서 나는 나의 타락한 모습을 선명하게 보았다. 도무지 구제할 수 없는 타락의 수렁 속에 내가 서 있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새벽 2시 반의 어둠 속에 휘황한 둥근 달이 떠 있었다.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라는 백남준의 말이 떠오를 만큼 선명한 달이었다. 하늘에 달을 설치한 조물주보다 더 뛰어난 설치작가는 없어 보였다. 성욕이 사라진 뒤의 눈으로 바라본 달은 스승의 정신처럼 고고하고 숙연해 보였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작업이 한없이 초라하게만 보였다. 진정한 작가 정신을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왔다. 당장은 아무도 없는 원룸에 가서 꿈도 없이 죽은 시체처럼 자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는 깨어난 뒤에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