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국조인물고 김정경 [金定卿]
원본글 출처 : 김정경의 묘표(墓表) 저자 : 이의현(李宜顯)당시 대제학, 이후 영의정(領議政) 본관 : 안산(安山) 이명 시호 : 위정(威靖) 원전서지 : 국조인물고 권36 음사(蔭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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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국조인물고" 묘표(墓表)는 우리 문중에 아주 중요한 자료입니다. 철종 14년(1863년 4월)에 하남시 감북동 위정각에 세운 연성군 할아버지의 신도비에 쓰여진 비문에 대한 이전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연성군 신도비 보다 137년이 앞서는 1726년(崇禎紀元後 再丙午 3月)에 작성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묘표(墓表)는 우리 족보에도 실려 있는 내용이긴 합니다.
또한 기록내용으로 보면 위정공이 돌아가신 지 이미 3백여 년이나 되어 묘비에 새긴 글자가 닳아서 없어졌으므로, 지금 김필(金珌)의 6대손 정랑(正郞) 김정오(金定五)와 동종(同宗)의 여러 사람들이 다시 비석을 세울 것을 도모하여 나 이의현(李宜顯)에게 묘비의 글을 가지고 와서 그 뒤에다 추기(追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는 내용으로 보면 1726년 이전부터 묘표(墓表)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묘표를 쓰신 분은 영의정을 지내신 문간공 이의현(1669-1745)선생이며, 묘표에 추기를 부탁하신 분은 안산김씨 김필(金珌)의 6대손 형조정랑(正郞) 김정오(金定五, 1660-1735)선조이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의 생존연대를 보면 1726년에 작성된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족보에 기록되지 못한 외손들의 기록입니다. 외손들의 족보기록에서 우리 선조들에 발자취를 일부라도 찾을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영의정을 지내신 이의현 선생의 기록을 참고하여 만가보 용인이씨 족보편에서 찾아 살펴 본 교감공(김맹강) 사위 이종형 기록 (우리족보에는 누락됨)
살구골(양주시 은현면 도하2리) 상상공(上庠公, 이종형)묘소 배 안산김씨 부좌 (配 安山金氏 ?左)
영의정(당시 대제학) 이의현 선생이 자신의 8대조 상상공(上庠公, 이종형)은 실로 교감공(校勘公, 김맹강)의 사위가 되시는데, 예전 선고(先考) 의정공(議政公, 이세백(李世白)이 나온 뿌리를 미루어 족보를 만들 적에 언제나 공의 행적이 가려져 아직 드러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였음을 나는 기억한다. 라고 하셨는데 교감공의 사위에 대한 기록이 우리 족보에는 안보이고 안산김씨 외손들을 여러명 열거해 놓으셨는데 이러한 기록들도 눈여겨 살펴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만가보에 실려 있는 안산김씨 경주분파 족보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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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족보에 실려 있는 威靖公(위정공 김정경) 墓表(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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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국조인물고 김정경 묘표(墓表)
공은 휘(諱)가 정경(定卿)이고, 본관은 안산(安山)이다.
문하 시중(門下侍中) 김위(金渭), 판삼사사(判三司事) 김원상(金元祥), 진주 목사(晉州牧使) 김성경(金星慶)이 바로 그 증조, 조부,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평양 조씨(平壤趙氏)로 밀직 부사(密直副使) 조천기(趙千)의 딸인데,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을유년(乙酉年, 1345년 충목왕 원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우리 태조(太祖), 정종(定宗), 태종(太宗), 세종(世宗)을 섬겼는데, 삼군 절제사(三軍節制使), 이조 전서(吏曹典書)를 지내면서 군정(軍政)에 참여했고 전선(銓選)을 관장하여 모두 명성과 공적이 있었으며, 두 번이나 중국 조정에 사신으로 가서 수고로움이 갖추 지극했고, 박포(朴苞)의 난을 만나 힘을 합쳐서 난리를 평정하여 좌명 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져 품계는 숭정 대부(崇政大夫)에 이르렀다.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기해년(己亥年, 1419년 세종 원년)에 병이 들어 누웠을 적에 임금은 의관(醫官)을 줄곧 보내 진찰케 하여 약물(藥物)을 내렸고 내시(內侍)를 보내 문안케 하였으며, 공이 일찍이 노루 간을 먹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고 사냥을 특별히 명하여 하사하였었는데, 이해 10월 15일에 졸(卒)하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은 몹시 애통해 하여 조정의 업무를 멈추고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며, ‘위정(威靖)’이란 시호를 내렸다.
애도하고 영화롭게 한 은전(恩典)을 전례보다 더하여 예를 갖추어 광주(廣州) 현주리(玄州里)에 장사지내었다.
공의 성품은 충성스럽고 미더웠으며 절약하고 검소하였다. 평소에 육도 삼략(六韜三略)을 자부하여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를 즐겨 보았고 언제나 남용(南容, 공자의 제자)의 백규(白圭)에 관한 말2)을 외었으며,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공은 모두 세 번 장가를 들었는데, 판서(判書) 신익(申翼), 신양군(新陽君) 노영(盧英), 남평군(南平君) 왕화(王和)의 딸로 5남 1녀를 낳았다.
별장(別將) 김지(金沚)는 신씨(申氏)가 낳았고, 호군(護軍) 김관(金灌), 별장(別將) 김척(金滌)은 노씨(盧氏)가 낳았으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평호공(平胡公) 김개(金漑), 안성위(安城尉) 김한(金澣), 서령(署令) 안철산(安鐵山)의 아내는 왕씨(王氏)가 낳았다.
후손은 많아서 다 등재할 수 없고 그 가운데 기록할 만한 자는 평호공의 아들 교감(校勘) 김맹강(金孟鋼)이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갔으며, 손자 김곤(金琨), 김위(金瑋), 김필(金珌)과 6대손 김취의(金就義), 7대손 김항(金沆)이 잇달아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김필(金珌)은 가장 이름이 알려졌으며 사적(事蹟)은 기묘록(己卯錄, 중종 14년(1519) 기묘 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된 명현(名賢)을 기록한 책)에 나온다.
6대손 김취려(金就礪)는 학문으로 일컬어졌고, 8대손 김석명(金錫命)은 무예로 알려졌다.
외손으로 드러난 자는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이로(李輅), 영의정(領議政) 이시백(李時白), 판서(判書) 이시방(李時昉),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조창원(趙昌遠), 판서(判書) 조계원(趙啓遠), 의춘군(宜春君) 남이흥(南以興), 판서(判書) 최내길(崔來吉), 영의정(領議政) 최명길(崔鳴吉), 우의정(右議政) 조태채(趙泰采), 판서(判書) 박장원(朴長遠), 영의정(領議政) 이유(李濡), 판서(判書) 이사명(李師命),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命)이다.
공이 죽은 지 이미 3백여 년이나 되어 묘비에 새긴 글자가 닳아서 없어졌으므로, 지금 김필(金珌)의 6대손 정랑(正郞) 김정오(金定五)와 동종(同宗)의 여러 사람들이 다시 비석을 세울 것을 도모하여 나 이의현(李宜顯)에게 묘비의 글을 가지고 와서 그 뒤에다 추기(追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체로 나 이의현의 8대조 상상공(上庠公, 이종형)은 실로 교감공(校勘公, 김맹강)의 사위가 되시는데, 예전 선고(先考) 의정공(議政公, 이세백(李世白)이 나온 뿌리를 미루어 족보를 만들 적에 언제나 공의 행적이 가려져 아직 드러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였음을 나는 기억한다.
선고의 뜻을 생각하면 도리에 사양할 수 없는 바가 있어 삼가 가승(家乘)에 근거하여 대강 개략(槪略)을 위와 같이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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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기원후 네 번째 계해년(철종 14, 1863년) 4월에 세운 연성군 김정경 신도비 -------------------------------------------------
연성군(안산군) 김정경 신도비(金定卿 神道碑) 해석문
유명조선 좌명공신 이조전서 연성군 시위정 김공 신도비명
有明朝鮮佐命功臣吏曹典書蓮城君謚威靖金公神道碑銘」
추충분의 익대동덕 좌명공신 숭정대부 행 이조전서 연성군 시위정 김공 신도비명병서
본관은 안산이고, 선계는 고려좌복야 긍필에서부터 나왔다. 시중 위와 판삼사 원상과 목사 성경이 공의 증조와 조부,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평양조씨로 밀직부사 천사의 딸이다. 원나라 지정 을유년(충목왕 1, 1345년)에 태어나 벼슬하여 연강전직 · 판호군종부부령 · 군부총랑 · 중정대무가 되었고, 우리 태조를 섬겨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태종때에는 박포의 반란을 평정하여 좌명공신에 책봉되어 품계가 숭정에 올랐으며, 작위를 봉하고 전호와 민호를 하사한 권서가 있다. 일찍이 의흥친군위 절제사를 지냈으며 이조를 관장하였다.
두 번이나 명을 받들고 명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가서 공적이 모두 현저하였다. 병들어 눕자 세종께서 대의를 보내어 진료하게 하고, 내시를 보내어 문병하셨으며, 사냥하여 노루 간을 하사 하셨으니, 이는 병중에 먹고 싶어하기 때문이었다.
공은 성은에 감읍하여 끝내 만에 하나도 갚을 수 없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7월 15일에 마침내 부음이 들렸으니 향년 75세이며, 해는 영락 기해년(세종 1, 1419년)이다. 조정의 정사를 거두고 제물과 제문을 모내어 조상하고, 위정이란 시호를 추증하여 신하의 죽음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오호라! 성조가 용흥하여 하늘이 한번 다스림을 열어주시어, 기미에 밝고 권형에 통달한 분들이 마치 산천에 구름이 일듯하여 그 사람이 많았다. 학문은 양촌이요, 나라를 위한 계책은 방촌이며, 질박하고 검소함은 하정이니, 모두 운을 타서 세상에 이름난 인재들이다.
공으로 말하자면 평소에 육도삼략을 지고 화란을 평정하여 제공들과 명예를 나란히 하여 국초에 영호가 될 수 있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그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아름다움을 맞이하고 그 복지를 육성 발전시키는 것이 당연하도다.
별장 지는 신씨 소출이요, 호군 관 · 별장 척은 노씨 소출이요, 판중추 평호공 개와 안성위 한과 서령 안철산 처는 왕씨 소출이다.
평호공의 아들 맹강은 교감 그리고 맹강의 아들 필이 비로소 과거에 1등으로 합격하여 진출하였고, 손자는 곤 · 위 · 비인데, 비는 기묘년 휘정 때에 저명했다. 6대손 취의와 7대손 항은 계속하여 문과에 올랐으며, 6대손 부사 취려와 7대손 참봉 성대 · 증지평 성옥과 8대손 참봉 시성은 모두 학행으로써 일컬어졌으며, 석명 · 석고는 무로써 드러났다.
9대손 지충추 상두와 현감 정오는 함께 신축사화에 걸렸으며, 목사 상정과 10대손 방어사 양일은 함께 분무훈에 올랐고, 양심은 문과 대간이다.
외손도 높은 벼슬과 현달한 사람들이 많았다. 현천의 무덤을 완성하고 나서 신씨와 노씨는 부장하였으며, 왕씨는 그 아래에 임좌로 장사 지냈다. 14대손 악붕이 도곡 이공께서 찬한 묘표를 가지고 와서 신도비를 청하니, 나는 사양 할 수 없어서 차례를 모아 비문을 짓고 이어서 명하노라. 전조의 일을 맡아 왕명을 받드니 시용에 공적이 많았도다.
묘비 글을 지으신 예조판서 신석우(申錫愚)에 대하여 글씨와 전액을 쓰신 영명위 홍현주에 대하여 해거도인(海居道人) : 홍현주(洪顯周)의 호, 자는 세숙(世叔), 호는 해거재(海居齋), 약헌(約軒), 정조(正祖)의 딸인 숙선옹주(淑善翁主)에게 장가 들어 수록대부 영명위(永明尉)가 되었다. 풍산인(豊山人), 영의정(領議政) 낙성(樂性)의 손자이자, 우부승지(右副承旨) 인모(仁謨)의 아들이다. 형 석주(奭周)는 좌의정(左議政)을 지냈다, 순조 15년(1815)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고, 문장에 뛰어났다 종친(宗親)은 왕의 친족 부계친(父系親)으로서 四대손까지로 하고 의빈(儀賓)은 왕과 왕세자의 사위를 말하는 것이다. 正一品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영의정),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종친이면 현록대부(縣祿大夫), 흥록대부(興祿大夫), 의빈이면 수록대부(綏祿大夫), 성록대부(成祿大夫).
왕화(王和)에 대하여 왕화(王和) ?∼1394(태조 3). 고려의 왕족. 개성왕씨(開城王氏).
할아버지는 순화후 유(淳化侯 유)이고, 아버지는 학성부원군 향(鶴城府院君珦)은 공양왕의 숙부이며 고려 신종의 6대손이다.
남평군(南平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가 주살될 때 도평의사(都評議司)의 탄핵을 받아 원지에 유배되었다.
조선이 개국한 뒤인 1394년(태조 3) 고려 종실들이 다시 거제도에 유배될 때 안동에 투옥되었으며, 이어 수원부에서 국문당한 뒤 주살(죄를 물어 죽임)되었다.
고려 34대 공양왕
고려 제34대 마지막 왕(1345~1394). 이름은 요(瑤).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균(鈞)의 아들.
시호 : 공양대왕 恭讓大王
신종의 7대손, 양양공(襄陽公) 서(恕)의 6대손, 시안공(始安公) 인(絪)의 5대손, 서원후(西原侯) 영(瑛)의 고손자, 익양후(益陽侯) 분(昐)의 증손자, 순화후(淳化侯) 유(柔)의 손자이다. 이성계 일파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정몽주가 살해된 후, 덕이 없고 어리석다는 이유로 폐위되어, 귀양을 갔다가 2년 뒤에 삼척(三陟)에서 살해당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34대 475년 만에 멸망하였다. 재위 기간은 1389~1392년이다
왕화는 공양왕과는 사촌간이다. 사위는 이조판서를 지내고 연성군에 봉군된 안산김씨 김정경이다.
위정공 안산군(연성군) 김정경 묘 (경기도 하남시 감북동 57)
현천의 무덤을 완성하고 나서 평산신씨와 교하노씨는 부장하였으 며, 개성왕씨는 그 아래에 임좌로 장사 지냈다.
안산군(연성군) 부인 개성왕씨 화혜택주 묘 * 옹주 및 택주 설명 조선시대 외명부(外命婦) 봉작(封爵)의 하나. 왕자군(王子君)과 종1품 종친의 처(妻)에게 이런 호칭을 붙였다. 군부인은 중국 당나라 때의 외명부제도에서 문무관 3품 이상의 모(母)와 처를 칭하던 데서 비롯되었다. 고려 공양왕 때에는 대군과 군의 처를 구별하지 않고 옹주라 하였으나, 조선 초기에 와서 대군의 처를 옹주, 군의 처를 택주(宅主)라 하여 서로를 구별하였다. 세종 때에는 종실 종1품의 적처(嫡妻)와 공신 정1품·종1품의 적처를 모군부인(某郡夫人)이라 칭하고 군부인의 앞에 읍호를 붙이도록 규정하였다
위정공은 부인을 세 번 맞이하였으니, 판서 신익지, 신양군 노영, 남평군 왕화의 딸이다. 5남 1녀를 낳았다. (부인 : 평산신씨, 교하노씨, 개성왕씨)
별장 지는 신씨 소출이요, 상호군 관 · 별장 척은 노씨 소출이요, 판중추 좌참찬 평호공 개와 안성위 대호군 한과 사섬시 서령 안철산 처는 왕씨 소출이다.
* 사섬시는 사담서로 개칭되었으며 조폐관청 저화의 제조와 외거노비의 공포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으나, 동전과 전폐의 주조사업도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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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인물백과사전 '국조인물고'>
2천91명 수록, 32권으로 완역
조선왕조 인물 DB라 할 수 있는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가 완역됐다. 번역본 기준 전 32권에 200자 원고지 5만5천장, 수록인물은 2천91명.
세종대왕기념사업회(회장 박종국)는 교육인적자원부 지원 아래 1999년에 시작한 '국조인물고' 번역 작업을 최근 마무리했다고 2007.4.10일 말했다. 올 연말에는 색인집 2권이 별도로 추가된다. 참가한 번역자는 21명.
국역본은 원문 순서에 구애받지 않았다는 데 가장 큰 특징이 있다. 수록 인물명 가나다 순서로 재배치함으로써 검색에 편리하도록 했고, 또, 번역문 뒤에는 원문을 영인 첨부했다. 민족문화추진회 고전번역 작업이 원문은 수록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는 점과는 대비된다.
국조인물고는 편찬시기가 확실치 않으나 수록인물 활동 연대가 조선 건국 초기에 시작해 영조시대(1724-1776) 초기까지 미치는 점으로 보아 영조 중ㆍ말년이나 정조시대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는 74권이었으나 제4권과 7권이 없어져 현재는 72권이 존재한다. 한데 이에 수록된 인물전기는 국조인물고 편찬 당시에 새롭게 쓴 것이 아니라, 기존에 알려진 비명(碑銘)이나 묘갈명(墓碣銘), 묘지명(墓誌銘), 묘표(墓表), 전(傳), 행장(行狀), 시장(諡狀), 유사(遺事) 등에서 잘된 글을 하나씩 뽑아 수록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편찬이 아니라 편집이라 해야 한다. 편자 역시 알려져 있지 않다.
나아가 이런 전통은 역사는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술이부작(述而不作)한다는 정신을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번역 저본은 20세기 초에 나왔다고 추정되는 규장각 필사본. 1978년 서울대도서관에서 전 3책으로 영인하기도 했다.
국조인물고는 23개 항목으로 나누어 인물전기를 수록했다. 1-10까지는 직임이나 신분을 기준으로 삼았으며, 11-23번은 사건이 분류 기준이다. 예컨대 13항목에는 '단종과 세조의 왕위 교체기에 절개를 지킨 사람'이라는 항목 아래 관련 인물 20명을 배치했으며, 이 외에도 '중종 시대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사람'(58명), '계해년 인조 반정 때 공을 세운 사람'(30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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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 [상.중.하]전3冊 1978년 서울대학교 출판부 영인 발행본 주요 항목과 수록 인물수는 원고에 상신(相臣) 54명, 국척(國戚) 74명, 유학(儒學) 36명, 문관(文官) 91명, 무변(武弁) 40명, 경재(卿宰) 286명, 명류(名流) 318명 등 22항목 1,895명을 싣고, 여기에서 빠진 부분을 속고에 17항목 170명을 추가로 보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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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표와 묘갈 그리고 신도비란 ?
묘비는 전통적인 조선 시대 분묘의 봉분 바로 앞 등에 세우는 비, 즉 묘석(墓石)을 이르는 말로 묘표(墓標) 또는 묘갈(墓碣)이라고도 했다. 우리나라에 전래한 중국 자료에 따르면, 비를 세우는 문화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옛사람의 글에 장방형의 각석을 세운 것을 비(碑)라 하고 원수형(圓首形)이나 방원(方圓)의 사이에 위는 작고 아래는 커다란 각석(刻石)을 갈(碣)이라 하였는데, 진시황이 돌에 공적을 새겨 이때부터 비갈(碑碣)의 원형이 갖추어졌다. 동한(東漢) 이래로 비갈이 점점 많아져서 비송(碑訟)과 비기(碑記)가 있었고, 또한 묘비(墓碑)가 있어 사실을 기록하고 덕을 칭송하는 데 비의 일정한 격식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후세에는 비갈의 명칭이 혼용되었다.
또한 묘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묘비는 묘 앞이나 묘도(墓道) 내에 세우는데, 죽은 자를 표창하는 고로 묘표라 칭한다. 당(唐) 유완종(柳完宗)의 『유선생전(柳先生集)』, 문통선생강급사묘표(文通先生降給事墓表)와 같다. 묘도 위에 세우니 또한 신도표 또는 신도비라 칭하기도 한다. 『중국공예미술대사전(中國工藝美術大辭典)』
원수형 묘비.
묘갈이라고도 하였다.
이같이 명칭과 개념이 정리되고 그 쓰임새가 구분되어 있었지만, 후대에 이르면 모두 혼용되어 함께 사용되었다.
조선 시대에도 중국처럼 초기에는 혼용되어 사용되다가 차츰 정리되어 묘표와 묘갈 그리고 신도비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비갈의 구분법은 겉모양보다는 비석에 새겨진 제목[碑題]에 따라 비를 구분하였다. 예를 들어 같은 모양과 크기의 비라 하여도, 실제 비에 ‘홍길동 묘표’라고 되어 있으면 묘표로, ‘홍길동 신도비’라고 되어 있으면 신도비로, ‘홍길동 묘갈’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면 묘갈이라 구별하면 무방하다.
묘비의 유래를 살펴보면, 중국 후한(後漢) 말 헌제 10년(205)에 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조조는 박장령(薄葬令)과 함께 묘비의 건립을 중지시켰다고 한다.
그 영향 때문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통일신라 시대에는 왕릉의 비와 고승의 탑비 등을 제외하고 남아 있는 묘비가 거의 없다. 또한 고려 시대에는 무덤에 묻는 묘지가 많이 이용되고 분묘의 외곽에 세우는 묘비는 거의 없어지다시피 하였는데, 고려 말에 성리학이 들어오면서부터 다시 묘비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조선 시대의 비(碑)는 비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비두(碑頭, 개석(蓋石)이라고도 한다)와 비문을 새기는 비신(碑身) 그리고 비를 받치고 있는 비부(碑趺, 비대(碑臺)·비좌(碑座)·대좌(臺座)라고도 한다)로 구성되어 있다.
비의 재료를 살펴보면, 조선 초기에는 몇몇 예를 제외하고 대개는 비신과 비두가 서로 연결된 통석(通石)으로 되어 있고, 재질은 주로 대리석이며, 비부는 화강석이 많다. 그리고 조선 숙종 연간부터는 비두와 비신이 분리된 별도의 석재로 이루어졌고, 비신은 검은색의 오석을, 비두와 비부는 회색의 화강암을 주로 사용하였다.
비두 가운데에는 조선 전기에 많이 사용하던 이수(?首) 형태가 있는데, 이수에는 용이나 이무기가 여의주를 놓고 다투는 모양이 많다. 또한 구름무늬나 연꽃무늬 등을 비신의 머리 부분에 조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묘표나 묘갈 가운데에는 비신의 윗부분을 둥글게 깎은 원수형과 귀접이를 한 규수형(圭首形) 등이 있다. 후기에 이르면 지붕 모양을 한 개석(蓋石)을 올려놓은 것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비두는 기능적인 면으로 볼 때 비신을 보호하는 기능이 강하다. 그런데 용과 같이 상서로운 동물을 조각한 이수형 비두는 기품은 있으나 제작비가 많이 들고 비바람으로부터 비신을 보호하는 기능이 약해 비문이 쉽게 마멸되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후대에는 비용이 덜 들면서도 제작이 쉽고 비문 보호에도 더 효과적인, 팔작(八作) 지붕 구조를 가진 개석형이 차츰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비신에는 비문을 새기는데, 앞면을 비양(碑陽, 비면(碑面)·비표(碑表)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뒷면을 비음(碑陰)이라 한다. 비문은 앞뒤 양면에 다 새기게 된다. 묘표나 묘갈에서는 단지 비양에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선 초기에서 중기까지의 비신은 대개 대리석을 이용하였는데, 비바람에 취약하여 쉽게 마모되어서 비문을 오래 보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후대로 오면서 비신은 좀더 강한 성질을 가진 오석으로 교체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조선 후기의 방부개석형 비.
비부는 비신을 지면으로부터 들어올려 보호하고, 비신이 서 있도록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전기에는 거북 모양으로 만든 귀부(龜趺)와 연꽃, 당초문 그리고 안상(眼象) 등 장식이 가득한 (비교적 낮은) 비부가 사용되었고, 후대에는 같은 장방형이지만 장식 없이 단순하고 높으며 큰 방부가 주로 사용되었다.
비의 양식과 문양이 지니는 상징을 보면, 이수에 사용되던 용(또는 이무기)이 비두에 등장한 것은 상상 속의 동물인 용이 지닌 좋은 이미지와 함께 큰 괴력을 가지고 비주(碑主)의 영혼을 수호한다는 개념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귀부에 사용된 거북은 수명이 긴 동물 또는 물과 육지를 자유롭게 다니는 동물로서, 신과 인간 사이를 오가며 연결하는 동물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거북의 등에 비석을 올려놓은 것은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가서 영생하기를 바라는 상징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연꽃은 부처와 불교를 상징하므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전기의 묘비에 많이 나타나던 불교적인 요소들은 16세기 중반 성리학적 사회 질서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다음에 급격히 그 자취를 감추어간다. 그리고 후기에 주로 유행하던 지붕 모양의 개석은 비문 보호라는 실질적이고 건축적 기능 외에 다른 상징이나 기능은 찾기 어렵다.
비는 보통 묘표와 묘갈 그리고 신도비로 구분한다. 먼저 묘표는 왕실과 관료층 그리고 일반 사대부를 비롯하여 중인이나 서민들까지도 입석할 수 있었다. 서민의 경우 그 크기가 두 자[尺]로 한정되어 있어 만약 이를 어기거나 허위 사실을 기재할 경우 강력한 처벌을 받았다. 반면에 양반 사족의 경우에는 어떤 제한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묘표의 특징은 비부에 있어 귀부를 사용하지 않고 방부를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정조 대 이후의 비좌는 거의 문양을 새기지 않았으며, 모양도 장방형에서 사다리꼴로 변모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갈(碣)이라는 말을 묘갈(墓碣)에만 사용하였는데, 묘갈은 사대부 층이 주로 입석하였지만 공주와 후궁 등 왕실에서도 사용하였고, 서민층에서도 세운 기록이 보인다. 묘갈의 규모나 양식은 묘표와 거의 같은 것으로 보면 된다.
신도비는 죽은 사람의 평생사적(平生事蹟)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운 비 가운데 하나로서, 중국에서 한나라 때 처음 세웠다는 설이 있다. 처음에는 비에 새기기를 ‘모제(某帝)’ 또는 ‘모관신도지비(某官神道之碑)’라고만 하였다. 신도비를 묘의 동남쪽에 세우게 된 것은 풍수지리상 묘의 동남쪽을 귀신이 다니는 길, 즉 신도(神道)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는 신도비가 태조의 건원릉신도비와 세종의 영릉신도비 등 초기 왕릉에만 있으며, 이후 국왕의 사적은 실록에 기록된다는 주장에 따라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 반면 많은 사대부들은 신도비를 세웠는데, 실제 관직이나 사후에 추증된 관직(증직, 贈職)으로 정2품 이상인 경우에 세울 수 있었다. 비의 크기를 보면 높이가 네 척 정도부터 일고여덟 척되는 큰 비까지 있어 웅장한 자태를 보이고 있다.
조선 후기로 가면 신도비의 비제(碑題)도 길어지고 비문도 장황하게 길어져서, 비양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측면을 지나 비음까지 이어진 경우도 곧잘 나타난다. 이는 조선 후기 가문의 성세를 돋보이고자 하던 추세에서 나타난 결과이다. 게다가 비문의 내용 가운데에는 과장된 것들이 흔해 역사적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많다.
지금까지 살펴본 각종 비를 활발하게 세우던 시기는 숙종(1675~ 1720)부터 정조(1777~1800) 대까지였다. 이 시기는 문화사적인 면으로 볼 때 진경(眞景) 시대라 불리던 조선 후기 문화의 황금기였다. 이 시기에 조선의 문화가 난만한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은 그 문화의 근원이 되는 조선 성리학이라는 고유 이념이 이때에 이르러 완벽하게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조선 성리학이 사회 저변으로 더욱 확대되면서 종래의 불교적인 생사관에 지배되어 오던 일반 백성들이 성리학적 세계관과 인생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진경 시대의 묘비들은 비두를 원수나 개석형으로, 비부는 방부형으로 한 것이 가장 많으며, 화려한 장식을 가하지 않은 단순 질박한 양식을 선호하였다. |
출처: 안 산 김 씨 원문보기 글쓴이: 희망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