始祖(시조)阿飡公(아찬공) 諱 三宰(휘 삼재)]府君 遺墟碑(부군 유허비] 重修 소식
<阿飡兪公 遺墟碑>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현내리 490번지에는 阿飡兪公 遺墟碑閣(아찬유공 유허비각)이 있다.
이 문중의 보물인 시조님 유허비각을 부운재 화수회에서 (재) 부운장학회 에서 예산을 지원 받고 일부는 부운재 화수회 예산으로 다음과 같이 重修(중수), 완공하였음을 2012년도 시조님 시제 전일(前日)시행된 화수헌 회의에서 발표하였다.
1. 유허비각 번와 및 보수공사
○ 공사기간 : 2012. 03. 27 ~ 03. 29
○ 공사내용 : 유허비각의 번화(翻瓦 : “기와를 덮는 것”을 말하며 낡아 비가 새는 기와를 이어 덮었다) 및 지붕과 석가래 등 관련 시설물 보수공사
○ 시공자 : 용승건설(대표 : 오태용)
○ 공사비 : 20,395,000원[재(재) 부운장학회에서 예산을 지원 받음]
2. 유허비각 유허비각 단청공사
○ 공사기간 : 2012. 04. 26 ~ 05. 07
○ 공사내용 : 유허비각의 단청(丹靑 : 옛날식 집의 벽, 기둥, 천장 따위에 여러 가지 빛깔로 그림이나 무늬를 그림. 또는 그 그림이나 무늬)공사
○ 시공자 : 이상길(지정문화재 단청기능보유자)
○ 공사비 : 7,000,000원(부운재 화수회 예산)
□ 다음은 2012년도 시조님 시향에 참석하기 위해 부운재로 가는 길에 들려 둘러보고 본 시조 할아버지 遺墟碑 (유허비) 모습입니다.
우리 기계유씨의 관향(貫鄕)이 기계인 근거 중 하나로 시조님 유허지를 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근거를 지키려고 하신 선조님들의 노력은 대단하였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위 표석에 말그럴 "兪"자의 각자를 지워버리려고 정으로 쪼은 흔적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일가님 중에 왜 하필이면 관향이 기계냐 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계전동 선조묘소와 함께 남의 문중 유적지를 폄훼하려는 사람들은 왜 그러한 짓을 하려고 하는지를 생각해 보고 현재에서 우리가 해야 할 역할 들에 대하여 잘 대처하여 후손에게 물려 줘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누구가가 폄훼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을병기사" 내용을 요약해서 게시판 형태로 표석을 세우자는 일부 일가님들의 주장에 대하여 문중어른들의 생각은 우리 일가들은 우리 선조님 유허지를 모르는 종인이 없고 긍지를 가지고 살면 되지 밖으로 뽐내고 자 그러한 표지를 하면 불란만 일어 날 것 같아 망설이고 있다는 뜻을 표명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에 관하여 저는 문중 어른들 께서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뜻도 무리가 아니라는 개인적인 생각도 해 봤습니다.
우리의 보물을 우리가 귀하게 인식하여 비각을 중수하고 주변을 정화하고 관리하시는 대 종중과 지역 종중어른들께 존경과 감사드리며 후손에게 귀감이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을병기사와 효정공
효정공(孝靖公) 휘 한모( 諱 漢謨, 1734 ~ 1816)
효정공은 자산공파조 휘 영(諱 泳)의 둘째 아드님으로 가산군수를 역임하신 희증(希曾)공의 7세손이시고 경모2집 자료에 의하면
공은 조선후기 문신으로 자는 어직이고 시호는 효정공이다. 부는 위 언호이고 모는 창령조씨 이조판서 명교의 따님이다. 관직은 1771년 (영조21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공은 1795년부터 다음해 1796년까지 시조가 사시던 터인 유정에 관한 전말을 기록하였다. 이를 을병기사라고 한다. 이 을병기사는 포항시 북구 기계면 미현리에 있는 유허비각 안에 보존되다가 나중에 부운재에 보관하였으나 현재는 그 소재를 모르고 있다.
비위는 강릉김씨 대사간 상구의 따님과 창원황씨 선의 따님이다. 자는ㄴ 영동현감 정주이다. 묘소는 충남 아산시 선장면 대흥리 축향에 합폄되어 있다
또한 우리 카페의 동재 자문위원께서 선조의 발자췌방에 임철순칼럼 - 蒼厓(창애)를 찾아서(상, 하편)을 연재하시면서 효정공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하편의 내용에서 일부 발췌를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강원도 동해시 두타산 무릉계곡의 무릉반석, 450여㎡(1,500여평)의 그 너른 바위에는 수많은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연암이 일찍이 “쓸데없는 관직”이라고 일갈한 바 있는 조선시대 討捕使(토포사) 무리의 이름이 가장 많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검찰 경찰 등 힘깨나 쓰는 사정기관 사람들입니다. 그 많은 이름 가운데 가장 크고, 멀리서도 한 눈에 띄는 이름은 兪漢雋(유한준)입니다. 兪라는 글자의 어느 획은 주먹이 들어갈 만큼 깊고 크고, 한 글자의 세로길이는 가랑이를 넓게 벌려야 될 정도입니다. 창애의 이름 윗 부분에는 兪漢謨(유한모)라는 작고 흐린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창애와 관계가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1㎞ 정도 산으로 올라가면 가슴이 시원해지는 3단폭포 龍湫(용추)가 있고, 맨 아래 폭포 옆의 바위에 거의 2m 크기로 兪漢雋의 이름이 龍湫라는 글씨 옆에 또 새겨져 있습니다. 1797년(정조 21년) 12월, 삼척부사이던 창애 유한준이 용의 덕을 바라면서 폭포의 이름을 짓고 새긴 글씨입니다. 창애가 새긴 이름은 그로테스크하다 싶을 만큼 문자 그대로 宏壯(굉장)합니다.』 ...이하 중략
위 내용을 보면 효정공은 강원도에서 관직을 역임하신 것을 알 수 있고 같은 자산공파 저암공(著菴公)[諱 漢雋(휘 한준)1732 ~ 1811)]로서 동시대의 선조님들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카페에서는 충남 아산시 서장면 대흥리에 뫼셔 계시다 함으로 사업계획에 반영, 참배계획을 수립, 시행할 것을 권고드립니다.
유허비 연혁(遺墟碑 沿革)
정조19년(1795) 을묘(乙卯)에 후손 유한모(형조판서)가 경주부윤이 되었을 때 시조가 살던 옛터를 기계고현에서 찾아 비를 세우고 "아찬유공유허비"라 표하면서 그 전말을 적었는데 이를 "乙丙기事"라 한다.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을묘 중추에 미현리 시조묘소 시향에 참례하였는데 마침 족제 한인(당시 자인수 장령)이 왔고 근읍 종인(宗人) 삼십팔인이 모였다. 참배 후 기계고현으로 돌아왔다. 고현읍내 한 들판이 예로부터 "라대유씨세거지"라하며 또 유씨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읍내에 십 여대를 사는 토호가에 유정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로의 말에 의하면 한 농부가 밭을 갈다가 고정(옛 우물)을 발견하였는데 튀어나온 돌 밑에 과연 우물이 있어 쌓아 올린 돌이 완연하고 그 밑에 맑은 물이 출렁거렸다 한다. 드디어 우물 옆에 비를 세워 유허를 표하였다"고 했다. 고종3년(1866) 병인에 후손 유석환이 경주부윤이 되었을 때 비각을 중수하고 1984년 갑자에 대종회에서 이를 개건(다시 지음)했다. 경주부윤 유석환은 "비각중수기(현재유하비각에 걸려있는 안내판)"에서 "경주의 기계현은 시조 아찬공의 구거요 우리 유씨의 관향이다. 신라로 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번영과 현달을 거듭했다. 또 후손들의 도덕, 절의, 경술, 문장이 강호에 떨쳤으니 어찌 시조부군의 음덕이라 아니하겠는가. 내가 본 고을의 부윤이 되어 산소에 성묘하고유허를 찾으니 추모의 정 간절하다. 이에 족대부 판서 한모공이 세운 비에 각을 짓고 글을 남긴다"고 했다.
유허비 연혁(遺墟碑 沿革)
正祖十九年(1795) 을묘(乙卯)에 後孫 兪漢模(刑曹判書)가 慶州府尹이 되었을 때 始祖가 살던 옛터를 杞溪古縣에서 찾아 碑를 세우고 "阿飡兪公遺墟碑"라 表하면서 그 顚末을 적었는데 이를 乙丙記事라 한다. 글을 要約하면 다음과 같다.
『乙卯中秋에 美峴里 始祖墓所 時享에 參禮하였는데 마침 族弟 漢人(당시 慈仁守 掌令)이 왔고 近邑 宗人 三十八人이 모였다. 參拜 後 杞溪古縣으로 돌아왔다. 古縣邑內 한 들판이 예로부터 羅代 兪氏世居地라하며 또 兪氏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邑內에 十餘代를 사는 土豪家에 兪井이 있었다는 記錄이 있고, 古老의 말에 依하면 한 農夫가 밭을 갈다가 古井을 發見하였는데 튀어나온 돌 밑에 과연 우물이 있어 쌓아올린 돌이(築城) 完然하고 그 밑에 맑은 물이 출렁거렸다 한다. 드디어 우물옆에 碑를 세워 遺墟를 表하였다』고 했다. 高宗三年(1866) 丙寅에 後孫 兪錫換이 慶州府尹이 되었을 때 碑閣을 重修하고 1984年 甲子에 大宗會에서 이를 改建했다. 慶州府尹 兪錫換은 碑閣重修記에서 "慶州의 杞溪縣은 始祖 阿飡公의 舊居요 우리 兪氏의 貫鄕이다. 新羅로 부터 高麗를 거쳐 朝鮮朝에 이르기까지 繁榮과 顯達을 거듭했다. 또 後孫들의 道德, 節義, 經術, 文章이 江湖에 떨쳤으니 어찌 始祖府君의 陰德이라 아니하겠는가. 내가 본 고을의 府尹이 되어 山所에 省墓하고 遺墟를 찾으니 追慕의 情 懇切하다. 이에 族大父 判書 漢模公이 세운 碑에 閣을 짓고 글을 남긴다"고 했다.(飜譯 : 兪致雄.富雲報)
다음 사진은 유석환 공의 비각 중수기 현판 입니다.
경주부윤공(諱 錫煥)은 진사공파조 贈 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公(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諱 涵 (휘 함)의 제3자(第三子)이신 贈 自獻大夫 吏曹判書 行(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수안군수공(諱 大儆)의 독자(獨子)이신 증 이조참판 행 예빈시 참봉공(諱 養曾)의 8대손으로 시남 문충공(諱 棨)의 아랫 동생이신 증 이조참의 경연참찬관공(諱 槩)의 직손이십니다. 이 선조님의 약력은 다음과 같으며 지난번 2012년도 제4차 선조묘소 및 유적지 참배 대상으로 충남 부여지역을 심방 할 때 찿아 뵈려고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일정이 촉박하여 추후로 참배를 미뤘었습니다.
가정대부(嘉靖大夫) 이조참판公(吏曺參判) 行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겸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總管) 휘 석환(諱 錫煥, 1806~1879, 73세)
공의 자(字)는 군삼(君三)이고 부(父)는 증 이조참판 (贈 吏曺參板) 휘 정주(諱 楨柱)이며 모(母)는 창원황씨(昌原黃氏) 재복(載復)의 따님이다. 관직은 1834년(순조34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장령, 홍문관 교리 등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851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852년 동래부사(東萊府使) 1864년 한성우윤(漢城右尹), 승지(承旨),1865년 형조참판(刑曺參判),1866년 경부부윤(慶州府尹), 1871년 이조참판(吏曺參判) 등을 지냈다.
배위(配位)는 광주안씨(廣州安氏) 승지(承旨) 효술(孝述)의 따님이다. 자(子)는 계자(繼子)치훈(致薰), 무과(武科)에 올라 사과(司果)를 지낸 치목(致穆)이 있다. 묘소는 충남 부여군 충화면 복금리 고묘하 손향(巽向)에 뫼셔져 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가정대부(嘉靖大夫) 이조참판公(吏曺參判) [諱 錫煥]께서는 경주부윤 재직(1866~1871, 5년) 중 부임 첫해에 시조님 유허지 부터 심방하시고 유허비각 부터 중수하셨다는 것입니다. 충남 부여 종가의 기록을 다시 열람해서 자료를 찿아서 고증을 할 예정입니다만. 이 할아버지께서 재직 5년동안 부운재와 시조묘소관리을 어찌 소홀히 하셨겠습니까? 새삼 경모하는 마음에 가슴이 저밈니다. 또한 부여 중중에서는 이런 선조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에 긍지를 느낄 만하다고 사료됩니다.... 우리 카페에서는 어떻게 라도 시간을 쪼개서 충남 부여군 양화면 복금리 公의 선영을 참배해야 할 것입니다.
한가지 부운재 종중이나 포항종친회에 건의드릴 말씀은 을병기사의 원본 현판도 현재 부운재에서 보관 중이다가 소재를 모른다고 하니 이 이조참판공이 "유허비각 중수기"를 판액한 현판은 잘 보관해야 할 터인데 현재 유허비각의 외관상 보안관리상태에서는 분실할 우려가 많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현재의 현판이 진본이라면 안전한 박물관 같은 곳에 위탁보관, 관리하시고 현재의 위치에는 가품을 게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검토, 시행을 부탁드립니다......
이 안내 표석의 음기를 보면 2000년 보은 종중의 정식(丁植)일가님이 건립하신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마침 대구, 경북 종친회 임원분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나누고 함께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대구, 경북종친회 원로분들과는 지난 번 만식 전 대종회장님 묘소 참배를 위해 경북 군위군 선영을 참배시에 뵌바 있으며 아마도 대구,경북종친회에서도 금번 시조님유허비의 중수 소식을 알고 유적지를 참배오신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구, 경북 종친회 원로님 들 고맙습니다...........
우리 카페 일생도 몇 컷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이 시조님 유허비 안내표지가 세워진 곳은 소위 "비석거리"라고 할 만큼 잘 정비된 공원에 위치해 있고 잔디밭에 조경수까지 식재되고 잘 관리되고 있어 문중의 일원으로 감사한 마음 금 할 수 없었습니다.....
비석거리 공원의 잘 정비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포항시에서 계속 이렇게 관리를 해 주면 관광객도 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