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삼천포에 빠지다
2년 전 삼천포로 이사왔을 때 중국 청도에 사는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나는 놀란 적이 있다. 한국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업을 하는 친구인데 내가 사는 곳이 삼천포라고 했더니 "그 왜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졌다'는 그 삼천포인가?"라고 느닷없이 묻는 게 아닌가. "중국에서도 그 말을 아느냐?"고 되물으니 "삼천포가 어딘지는 모르는데 그 말은 알고 있다"고 하였다. "한국에 있을 때 들어 아는가" 했더니 "중국에서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하여 적잖이 놀랐다.
삼천포에서 태어나 자란 분들이 '삼천포로 빠졌다'는 말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듯이 직장일로나, 다른 사정으로 삼천포에 내려와 사는 분들도 마찬가지다. 주변의 친구나 친척들에게 삼천포에 산다고 하면 '어쩌다가 삼천포로 빠졌나?'는 질문은 반농담조로도 필시 받게 되는데 자랑스럽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필자도 처음엔 그랬다. 십 수 년을 서울과 경기도 일산, 파주에서 살다가 진주로, 다시 삼천포로 그야말로 빠졌을(?) 때 북쪽 끝에서 남쪽 끝으로 온 것 같았다. 파주에 살 땐 더 올라가면 북한 땅이니 올라가지 말라 하던 친구가 이젠 더 내려가면 바다에 빠지니 내려가지 말라며 살갑게 놀리기도 하였다. 그래도 낚시 바늘이 바람에 떠내려가지 않고 조류에 따라 흐르듯 이곳으로 이끄신 분의 섭리를 확신하여 마음을 추스렸다.
삼천포에 와서 보니 솔직히 많이 달랐다. 단지 말투가 다른 것이 아니라 분위기가 달라 한 동안 낯설고 어색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아는 형님, 동생 사이라 혼자 꼭 왕따가 된 것 같기도 하여 90년대 초에 처음 서울에 올라가 느낀 서먹함이나 긴장감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다닌 덕이 아니었다면 적응하기 쉽지 않았을 뻔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필자는 정작 삼천포에 빠지기 시작했다. 각산과 와룡산에 올라 수려한 경관을 바라보면 누구에게라도 자랑하고 싶어졌다. 해안 길을 달리다 보면 오전에는 푸른 바다였던 것이 오후에는 은빛으로 물들고 저녁노을에 붉게 타들어가는 모습은 마치 모네의 '해돋이'를 보는 듯 절경이었다.
간간이 새벽시장엘 가면 해산물의 종류가 다양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대야마다 가득한 물고기는 금방 건져 올린 것처럼 퍼덕거리고 있었다. 알이 꽉 찬 조개며 소라, 게나 멍게, 해삼 등을 보면 이곳이 과연 천혜의 보고[寶庫]라 생각되었다. 꼭두새벽부터 시장에 나와 생선을 다듬는 어르신은 박재삼 시인의 지치지 않는 어머니 같아 때때로 흥정하는 말다툼마저 따사롭고 정겹기만 했다. 노산공원에 올라 그 옛날 시인에게 간지럼을 태우며 장난치던 바람을 맞는 것은 이곳에 사는 이만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자긍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어디 이뿐인가. 가게를 들르게 되면 종종 문을 열어놓은 채 주인이 없는 경우가 있었다. 적어둔 번호로 전화를 하고 주인을 만나 물건을 사오는 것이 처음엔 익숙지 않아 불편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삼천포의 멋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가게 문 활짝 열어놓고 사는, 그만큼 서로 신뢰하는, 그야말로 사람 사는 세상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은 다른 지방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정말 자랑해도 될 일이다. 또 하나는 야간운전을 할 때 신호를 받아 멈추면 서로 라이트를 한 단계 낮춰주는 좋은 운전습관이 있다는 것이다. 상대운전자의 눈을 배려해주는 이런 미덕을 윗지방에 살 때는 부끄럽게도 잘 모르고 있었다.
지난주엔 우리 교회에서 1박 2일 야외예배로 신수도 추섬엘 다녀왔다. 추섬에서 바라보는 삼천포 야경이 가히 환상적이라며 적극 추천한 성도에 의해 장소가 결정되었다. 그곳에서 삼천포를 바라보니 낮에는 각산과 와룡산의 능선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어 도심이 아늑해 보였고 어둠이 깔리면서 바닷물에 비취는 야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날 나는 이런 설교를 했다. "우리 중에 잘 나가다가 혹 삼천포로 빠진 분이 계실지라도 이제 정말 삼천포에 폭 빠지자. 삼천포에 반해 삼천포를 사랑하는 삼천포 사람이 되자. 누구를 만나든 친구가 되어 주고 길이 되어주는 저 바다처럼 천국의 바다가 되자"라고. 그러면서 필자는 혼자 행복한 상상을 해 보았다. '어디든 부는 바람이지만 이곳에선 "천년의 바람"이 되고, 수없이 많은 배가 있지만 이곳에선 지붕을 씌운 거북선이 되어 처음 사용된 것처럼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졌다'는 삼천포보다 더 유명한(?) 관용구를 긍정으로 활용하면 진짜 많은 사람들을 삼천포의 매력에 빠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