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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學이
三峰에게
말하기를
孤雲 田 萬 秀
無學은 무학대사로 더 잘 알려진
조선 태조 이성계의 王師이시고,
三峰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세운 정도전임.
보는 순서
1. 朝鮮王朝 건국 세력의 등장 4
2.고려의 불교와 조선왕조의 性理學 12
3. 조선왕조 건국의 두軸 ― 무학과 삼봉 19
무 학 19
삼 봉 44
4. 무학과 삼봉의 다름과 같음 72
5. 무학이 삼봉에게 말하기를 74
1. 朝鮮王朝 건국 세력의 登場
몽골제국의 징기스칸(CHINGIZ KHAN, 1155~1227, 재위 1206~1227)은 인류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세운 인물이다. 그가 세운 제국은 元이며, 우리도 원나라로부터 수탈과 서러움을 받았다. 그러나 권력은 有限한 것이다.
원의 세력이 점점 약해지고 있을 때 고려의 공민왕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 결과 1356년 이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정국은 안정되고 있었다. 한편, 원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만주에서는 홍건적이 준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거쳐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들이 머리에 붉은 때를 두르고 있었기에 홍건적이라고 불렀다.
왜구가 남쪽에서 침범하여 민심이 흉흉하던 차에 북쪽에서 홍건적이 침입하여 정국이 불안해 졌다. 이틈에 武將의 정치적 비중이 커 갔다.
이때 최영 장군이 부각되며, 흥왕사에서는 공민왕 시해 음모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놀란 공민왕은 자신과 국가의 운명을 무장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와중에서도 공민왕은 왕권을 회복하고 정치․경제․사회 등 전반적인 改革을 계획한다. 이를 위해, 공민왕은 원나라의 잔재를 없애기 위하여 자신의 몽골머리형을 고치고, 원나라 순제 황후의 오빠로 고려에 권세를 부리던 기철을 죽이는 등 원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노력했다.
한편, 기존세력과 전혀 손이 닿지 않아 마음껏 개혁할 수 있으며 개인적 욕심을 갖지 않은 僧侶 신돈을 기용한다.
공민왕은 자신은 전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신돈을 대리자로 세워 개혁의 전권을 맡기고 뒤에서 강력히 지원했다. 공민왕이 전면에 나서지 않은 이유는 개혁 대상이 자신의 왕권을 뒷받침 해주는 세력들이기 때문 이였다.
신돈은 최영을 몰아내고 권력의 핵심에 있던 무장세력과 권문세족을 대폭 숙청한다.
문란한 토지제도와 노예제도를 개혁하여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탈취한 논․밭을 원래 주인에게 되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남․여 노예)가 된 사람은 良人으로 환원시켰다. 이러한 개혁은 부패한 권력에 눌려 기를 못 펴고 살던 많은 피지배층의 지지를 얻었고, 신돈은 이들로부터 聖人이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곧 기득권자인 권문세족들의 개혁반대에 부딪힌다. 신돈의 개혁세력과 권문세족 세력이 팽팽하게 맞선사이에 신진사대부가 중앙에 서게된다.
이들이 性理學을 중심으로 한 정몽주, 정도전, 박상충, 이숭인, 권근, 이첨 등 이다. 신돈은 신진사대부와 타협하여 개혁을 추진하였으나,1371년 그가 제거되면서 개혁은 중단된다.
신돈을 제거한 무장세력이 다시 무대에 등장하면서 한동안 소외되었던 권문세족이 힘을 얻는다.
공민왕이 신돈을 제거한 이유는 자신의 권력기반인 권문세족들이 개혁을 반대하므로 자칫 잘못하면 왕권이 위태롭게 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신돈은 자신의 뜻과는 관계없이 공민왕의 뜻에 따라 개혁 정치에 관여하였다가 공민왕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불운을 겪었다. 또 조선왕조를 세운 신진사대부들로부터도 심하게 모욕을 당하는 등 수모를 겪는다.
신진사대부들은 불교를 배격하고 자신들의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신돈을 제물로 희생시켰다. 요즘도 불교를 비판할 때면 신돈을 들먹이고 있으나 이는 잘못 알고 하는 것이다.
신돈은 고려조를 뒤집고 조선왕조를 세운 세력의 排佛崇儒 정책과, 고려조의 왕권을 수탈하기 위한 자들에게 희생된 사람일 뿐 그가 인간적 패륜을 범하지는 않았다.
역사는 승자가 쓰고 있다. 역사는 패자에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심히 불공정한 게임이다. 백제의 의자왕이 그렇고 신돈이 그렇다.
북미는 약 20,000여 년 전부터 우리와 혈통이 비슷한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땅이었다. 그런데 불과 500여 년 전에 백인이 첫발을 디디고서 자기들이 발견한 대륙이라고 떠든다. 그때까지 20,000여 년을 살은 그 땅의 주인인 인디언들의 존재는 깡그리 무시당한 결과다. 그리고는 무력으로 내 쫓았다.
왜 이런 현상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는 무력으로 승리한 백인을 중심으로 역사가 쓰여졌기 때문이다. 인디언의 입장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불공정한 역사를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우리는 누구인가?
그러면서도 백인들은 자기들이 지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인간으로 행세한다.
비둘기의 목을 조른 그 손에 십자가를 들고!
조선왕조를 세운 세력들은 고려를 아주 하잘 것 없는 나라로 만들었다. 그들이 고려사를 쓰면서 자기들이 고려를 멸하고 역성혁명을 일으킨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쓴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그들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보다 더 강하고 훌륭한 국가였다.
권문세족이 권력을 쥐고 있는 중에 신진사대부들도 급속한 성장을 거듭하면서 대립관계를 유지한다.
이때 중원에서는 明나라가 元나라를 몰아내기 위하여 심하게 다투고 있었다.
고려조에서는 친원이냐, 친명이냐를 놓고서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간에 갈등이 벌어졌다. 권문세족은 친원정책을, 신진사대부는 친명정책을 주장하였다.
이런 중에 명이 승리하여 결국 신진사대부가 승리한 것이 되었고 그들의 세력이 우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신진사대부의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다. 명은 건국 후 고려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과도한 조공을 요구하였다. 이 틈을 타서 권문세족이 신진사대부를 누르고 권력을 되찾았다. 이 과정에서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등이 파직된 후 유배지로 떠나고,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 최영 등에게 권력이 집중된다.
이러한 결과는 신돈이 이루어 놓은 토지개혁과 노비제도가 개혁 이전과 같이 문란해 져서 다시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이때 왜구는 더욱 극성을 부려 개선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고, 천민들이 왜구 행세를 하며 노략질을 일삼았다. 또 개인이 소유한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켜 사회가 극도로 혼란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혼란은 유배지에서 풀려나 권문세족들의 비판세력으로 물러나 있던 신진사대부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최영이 이성계와 손을 잡고 권문세족 중에서 비판받는 임견미, 염흥방 등을 제거한다. 이는 동북변방의 호족에 불과하던 이성계에게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해 주게된다. 야심을 가진 호랑이에게 발톱을 주고, 독수리에게 부리를 준 결과다.
최영과 이성계는 곧 대립관계에 선다. 최영은 국력을 집중하여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문제로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자 요동을 처 옛 국토를 회복하자는 원대한 꿈을 펴는 반면, 이성계는 소국이 어찌 대국을 칠 수 있느냐하며 불가론을 편다. 그래도 이를 강행하는 최영에게 불만을 품고 마지못해 출전한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성으로 돌아와 최영과 그 세력들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후 창왕을 옹립한다. 이성계는 정치적, 군사적 실권을 굳혔다. 이듬해에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뒤 수문하시중이 되었으며 1390년에는 전국 병권을 완전하게 장악한다.
실권자 이성계와 결속한 신진사대부는 혁신파 정도전, 조준을 중심으로 토지제도를 전면 개혁하여 私田을 혁파하고 다시 분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며 이색, 권근 등 온건파와 대립한다. 이들은 공양왕 3년(1391년)에 三軍都總制府를 설치하고 이성계로 하여금 전권을 장악하게 한다.
이들은 또 科田法을 제정하여 권문세족들의 토지를 완전히 몰수하므로서 몰락시켜 재기를 못하게 하고, 온건파들도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그들은 1392년 7월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왕조를 건국한다.
2. 高麗朝의 佛敎와 朝鮮王朝의 性理學
2-1. 佛 敎
불교는 석가모니를 교조로 삼고 그가 가르친 敎法을 宗旨로 하는 종교이다.
불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① 불교는 神을 내세우지 않는다. 물론 석가모니가 現想化되고 절대․무한한 존재로 부각되고 있으나, 창조자․정복자와 같이 절대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석가모니를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식의 가정은 성립되지 않으며, 석가모니가 가르쳐준 방법(佛法)에 의하여 자기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자비를 베풀며 本性을 찾아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
② 知慧와 慈悲를 중시한다. 지혜란 자신의 마음을 맑게하여 항상 깨어있어 현실을 직시하는 것을 말하여, 자비는 무한하며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랑이다.
③ 모든 일에 執着하지 않으며, 과도한 욕심을 금한다. 필요한 만큼만 소유하고, 필요한 만큼만 소비하는 절제된 삶을 요구한다.
④ 상대를 증오하거나, 시기하며, 미워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⑤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 즉 解脫을 理想의 경지로 한다.
이를 靜이요 空이라 한다. 해탈 즉 깨달은 자가 머무는 세계를 佛國淨士라 하며, 이곳에는 움직임과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⑥ 輪廻를 중시한다. 불교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를 이승․此岸이라 하며 고통의 바다(苦海)로 보는 반면, 죽어서 영혼이 머무는 세계를 저승․彼岸이라 한다. 그리고 깨달은 자(이를 부처라 함)가 머무는 세계를 불국정토라 하여 이상의 세계로 본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영혼이 육체를 떠나 저승에 가는 것으로 보며, 중생(깨닫지 못한 모든 생명체)의 영혼은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돌 듯이 이승과 저승의 세계를 반복하여 왕래한다. 몸을 받아 이승에 태어나 病․老․生․死의 고통을 겪다가 죽어 저승으로 간다. 다시 돌아와 병․노․생․사를 거듭한다.
이를 輪廻轉生, 輪廻生死라 한다. 이러한 고통의 연속을 끊고 영원히 조용하고 편안하게 살려면 깨달음을 얻어 불국정토에 들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세에서 貪(욕심). 瞋(증오․질투․시기), 痴(어리석은 마음과 행동)에서 벗어나 자비를 베풀고, 끊임없이 자기 수양을 해야한다.
불교 이론에 4向 4果가 있다. 이들을 각각 預流, 一來, 不還, 阿羅漢으로 구분한다. 예류는 출가하여 수도하는 단계이며, 일래란 이승과 저승을 한번만 왕래하면 불국정토에 들 수 있는 단계이다. 불환은 불국정토에 들은 상태를, 아라한은 더 이상 배우고 닦을 만한 것이 없는 지고의 단계를 말하여, 이를 無學이라 한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무학대사는 이러한 경지에 오른 승려임을 뜻한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년) 6월 진나라의 순도와 아도가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온 것이 처음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크게 발전한 불교는 고려로 이어져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 1,600여 년 동안 우리 민족의 종교로 터를 잡은 불교는 우리의 도덕과 가치기준으로 자리 매김 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불교를 국교로 삼고 승려를 우대하였으며, 많은 사찰을 세웠다.
고려 때 승려 신분은 매우 높았으며 귀족의 자제들이 출가하여 승단을 이루었다.
조선왕조에서는 성리학을 국교로 삼고 배불숭유 정책을 택하여 불교가 박해를 받았다. 박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몸부림 친 흔적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승려계급의 사회적 신분은 급격히 낮아졌고 사찰 내에 민간신앙을 받아들여야 하는 슬픔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가치기준은 여전히 불교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정도전은 성리학을 국시로 삼고 건국한 사람이면서도 기층신앙으로 굳어진 불교․도교 등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 강제 침략기에는 정통 불교가 아닌 대처승 제도가 정치력을 등에 업고 이 땅에 들어와 독버섯처럼 퍼져나갔다. 그들은 일제의 한국정신 말살 정책에 의하여 한국사찰을 지배하였으며, 정통 한국 불교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해방이 된 후에는 정통 한국 불교의 승려들과 대처승간에 사찰을 놓고 소유권 다툼이 벌어져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출가 승려가 재산 싸움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비판을 들어야 하는 슬픔도 겪었다.
그러나, 오늘에는 몇몇 뜻 있는 승려들의 각고의 노력에 힘입어 정통 한국 불교 정신을 다시 찾았고, 이제는 세계에서도 가장 정통성을 인정받는 불교로 발전하고 있다.
현재 사찰 수는 전국에 5,700여 개소이며, 승려가 2만 여명, 신도 수는 1,300여 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2-2. 性 理 學
성리학은 儒敎를 정리한 학문이다. 유교는 중국사상을 대표하고 있다. 초기에는 종교나 철학으로 분리되지 않은 단순한 도덕사상이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로는 孔子, 孟子가 있다. 그래서 이를 공맹사상 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唐代까지는 불교가 국교로 육성되어 크게 번성하였다. 당을 전복시킨 宋의 건국자들은 통치 기반을 확립하기 위하여 불교 이념에 대처할 수 있는 민중신앙을 전파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유교를 비롯한 각종 중국사상을 집대성하여 4書3經으로 요약하였고, 이를 이룬 朱子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 또는 성리학이라 불렀다.
성리학은 크게 나누어 太極說, 理氣說, 心性論, 誠敬論으로 구별한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들어온 것은 고려 충렬왕(1274~1308)때 안향이 원나라에서 <朱子全書>를 가지고 와 공부하기 시작한데서 비롯된다.
고려 때 대표적인 성리학자로는 정몽주, 이색, 길재, 정도전 등을 들 수 있으며, 정몽주는 一家를 형성할 만한 학풍을 세웠다. 그의 학풍은 길재로 이어졌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져 내려왔다. 한때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을 겪으며 희생되어 주춤하였으나, 한국 성리학의 쌍벽인 이퇴계와 이율곡 때 大峰을 이루고 서화담, 이항, 김인후, 기대승, 성혼 등으로 이어져 왔다.
퇴계의 성리학은 理와 氣를 엄격히 구분하여 그 혼돈을 용납하지 않았으나, 율곡은 정통 성리학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불교, 노․장 사상과 양명학 등 여러 학파의 사상도 받아들였다.
성리학은 조선시대 지배계급의 주된 가치기준, 철학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성리학은 임금이 백성을 편안하게 살도록 살피는데 노력할 것을 주된 이념으로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조에서는 지배계급, 즉 士계급이 그 이하 계급을 지배하는 도구로 이용하였다는 비난을 면하기는 어렵다.
성리학에서는 名分을 중시하다 보니, 實事를 등한시하고 형식을 중시하는 폐단을 낳았다. 이러한 결과는 현실보다는 공허한 이론에 치우쳐 국가발전의 저해를 가져왔다.
그러나 조선왕조를 500여 년까지 유지시키는데 공헌하였다.
3. 朝鮮王朝 건국의 두軸
3-1. 無 學
說話로 전하는 탄생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의 정신적 스승인 無學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무학은 법명이다. 으레 따라 다니는 大師를 붙여 무학대사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속성(출가전 성)은 박씨이며, 속명은 白超이다. 아버지 朴仁一과 어머니 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327년(충숙왕 14년)에 태어나서, 1405년(조선 태종 5년)에 입적(출가 수도하는 사람의 죽음을 말하며 열반에 들음을 뜻한다)하였다. 이성계보다 8살 위다.
그는 경남 합천군 삼기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의 가문이 미천하고, 속세를 떠나 수도생활을 하였기에 어린 시절은 물론 그의 일대기에 대한 기록이 극히 미비하다.
태조 3년3월에 무학의 本鄕이기 때문에 삼기현을 군으로 승격시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경상남도가 고향인 듯 싶으나 확인은 안되고 있다.
무학은 그의 일대기가 설화나 전설로 전해지는 부분이 많다.
그의 출생과 관련된 설화를 몇 개 알아본다.
「경상도 고성 출신인 채씨는 열 다섯 살 되던 해에 고향에서 한 도사를 만났다. 그 도사로부터
“첫 아이를 가질 때까지 말을 하지 않으면 장차 큰 인물을 잉태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 여인은 그 날부터 스스로 벙어리 시늉을 했다. 10년 후 삼기면 박인일이 찾아와 인연을 맺고 둘 사이에 아이를 갖게되자 입을 열었다.
이 무렵 경상도 해안에는 왜구의 침몰이 잦았다. 아기를 갖던 해에도 왜구가 상륙하여 청장년과 부녀자를 무자비하게 배에 싣고 일본으로 갔다. 그 여인도 남편과 함께 붙들려 왜놈의 배에 실렸다.
왜놈들이 여인을 능욕하려 했다. 남편 박인일은 난투 끝에 어깨에 부상을 입으면서 왜놈들을 모조리 몰 속에 넣을 수 있었다. 노도 저울 줄 모르는 사람들을 태운 왜놈의 배가 바람 부는 대로, 조류가 흐르는 대로 흘러서 표류하다 다달은 곳이 충청남도 안면도이다.
안면도서 갈대로 삿반을 만들어 팔며 근근히 생활하면서 지냈다. 생활이 어려워 현청의 환곡을 빌어 쓰고 갚지 못하여 성화가 빗발치는데 대책이 있을리 없다. 그러던 어느 날 현의 아전이 그 여인을 붙잡고 막무가내로 관으로 끌고 간다. 그러나 여인은 만삭이었다. 무거운 몸을 끌면서 안면도 포구에서 배를 타고 서산으로 향하는데 도중에 산통이 심하다.
당황한 뱃사공과 아전은 급히 서둘러 예정된 포구도 아닌 간월도에 배를 댔다.
산모는 배에서 내리기 바쁘게 분만을 하였고, 한참만에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아이는 바위에 누워있었다.
먹을 것도 없는데 태어나는 아이는 축복의 대상이 아니다. 여인은 아전의 성화에 아이를 체념하고 관아로 향했다. 해질 무렵 관아에 도착하니 현감의 꾸지람이 보통이 아니다.
“왜 이리 늦었느냐?” 현감의 호통에 아전은 죽는 몸짓을 보이며 도중에서 일어난 자초지종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대충 들은 현감은 놀라면서,
“아니 그래, 아이를 버려 둔 채 산모를 이곳까지 데려왔단 말이냐?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나! 이 봐라 어서 차비를 차려라”하는 명령과 동시에 대령한 말에 올라 여인을 데려온 아전을 앞장세운다. 여인은 뒤에서 지친 몸을 이끌며 따라온다.
간월도는 물이 들어오면 섬이 되나, 물이 나가면 육지와 연결되는 자그마한 바위섬이다. 아이가 놓여진 곳에 이르니 커다란 鶴이 아이를 품고 있다가 인기척에 놀라 서서히 몸짓을 하더니 하늘로 날아올라 주위를 한바퀴 돌고는 사라진다. 학의 품에 있던 아니는 엄마를 보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방긋이 웃는다.
현감은 깊은 안도의 숨을 쉬면서 그 여인의 환곡을 탕감하고 산모와 아이에게 당장 필요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어 집으로 보내면서
“산모와 아이에게 든 비용은 모두 내 월급에서 충당하라”고 했다.
학이 아이를 품었던 자리에는 간월암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의 골상이 특이하다. 머리 가운데 정수리가 솟았고 양쪽 눈썹 꼬리가 유난히 치켜 올라갔으며, 콧 머리는 세 봉우리가 우뚝하다.
아버지 인일은 舞學이라 이름을 지어주고 마음대로 세상을 날도록 아이의 앞날에 아무 간섭도 하지말고 키우라는 유언을 남겼다」
두 번째는 금강산 어느 절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다. 「한 늙은 선비가 장가든 아들을 먼저 저승에 보내고, 청상과부 며느리와 단 둘이서 한집에 살게 되었다. 늙은 선비는 아들을 대신할 손자를 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하루는 며느리더러 절에 가서 백일기도를 드려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하였다.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절에 가서 백일기도를 드리고 집에 돌아와 먹음직한 천도복숭아가 있는 것을 보고 그만 한 입에 집어삼켰다. 그랬더니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이 아이가 곧 무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아이를 낳고 보니 동네에서 망측스런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결국 아이를 몰래 버리기로 했는데 버린 이튿날 현장에 가보니 학이 날아오르고 그 밑에 아이가 방긋이 웃고 있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더 이상 아이를 죽일 수 없었다. 그대로 기르기로 했는데, 이름을 날아가는 학 즉 舞鶴이라 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충남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 쑥당터에 무학의 탄생 설화가 전해진다.
「애정리 쑥댕이 마을에서 예전에 장사하던 여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데리고 살기가 너무 어려워 그냥 쑥으로 덮어놓았다고 한다. 그랬더니 학이 아이를 품고 있어 그 뒤로 사람들이 그 아이를 舞鶴이라 했고, 그곳에 당집을 지어 무학당 이라고 했다」한다.
충청남도 대천에서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무학의 출생지를 정확히 밝힐 수 없는 상태에서 설화로 전해지는 무학의 출생 이야기는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쉽다. 허무맹랑한 것 같은 건국신화에서 우리는 글로 역사를 기록할 수 없었던 시기의 역사적 사실을 찾을 수 있듯이 이 무학 설화를 근거로 그는 충청남도 서해안 지역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무학의 부모는 경상남도 합천 사람이고 그의 본향은 삼기라 하더라도, 그의 부모가 무슨 사유에 의하여 충청남도 서해안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하겠으며, 이러한 사유로 무학은 충청남도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의 금강산 설화는 무학이 그곳에서 오랜 동안 수도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학이 등장하는 것은 그의 법명 無學의 無자를 鶴과 연관지어 설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무학은 영특하여 다섯 살에 글자를 깨우치고, 여섯 살에 4서를 읽었다고 한다.
그 후 사기와 열전을 통독하고, 열한 살에는 삼경에 이어 춘추와 주역에 통달했다 한다.
出家 修行
이렇게 뛰어난 두뇌를 가진 무학은 18세(1344년)에 출가하여 조계산 송광사로 갔다. 이곳에서 소지선사를 만나 무학이라는 법명을 얻는다. 후에 경기도 가평에 있는 용문사에서 혜명국사를 모셨다. 그는 혜명국사로부터 배움을 얻은 뒤 묘향산 금강굴에 들어가 계속 불도를 닦았다.
어느 날 그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았다고 하는데, 불교에는 이를 頓悟(돈오)라 한다.
스물 셋 되던 해에는 진주 길상사에서 수도하다 다음해에는 묘향산 금강굴에 다시 들어가 머물면서 수도에만 전념하였다. 무학은 스물 여섯 살 되던 1353년(공민왕 2년)에 원나라 연경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인도 승려 志空(지공)을 만나 도를 인정받는다. 이듬해 천법사에서 고려 승려 懶翁(나옹)스님을 만나는데, 후에 나옹은 무학의 큰 스승이 된다.
나옹은 무학이 큰 그릇 임을 간파하고 그에게 배움을 준다. 무학은 무령, 오대산 등지를 다니며 수도하다가 나옹스님이 수도하고 있는 영암사를 찾아가 그곳에서 몇 해를 머물면서 수도했다.
어느 날 무학과 선문답을 나눈 나옹은
“서로 안다는 사람이 천하에 가득하다 하여도, 마음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하였다.
무학은 1356년 나옹과 하직하고 귀국하였으며, 나옹도 귀국하여 천성산 원효암에 머물렀다.
그가 1359년 다시 나옹을 찾아가자 나옹은 법을 표하는 표시로 佛子를 주었다.
그 뒤 나옹이 신광사로 자리를 옮기자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 승려들 중에는 그를 꺼리는 사람이 많음을 알고, 고달산에 들어가 암자를 짓고 살았다. 나옹의 제자들이 무학을 배척한 것은 무학이 천민 출신이며, 자신들의 보수적 성향으로 무학의 혁명적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고려의 승려들은 귀족적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그 출신도 훌륭한 가문이었다.
그러나 무학은 한미한 출신이므로 이들로부터 경멸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러한 승려 생활의 환경이 그를 혁명적 사고를 갖도록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나옹은 1371년 왕사로 책봉 받았으며, 송광사에 머물면서 무학에게 衣鉢을 전하였다. 그는 1376년(우왕 2년)에 경기도 양주에 회암사를 크게 짓고 무학에게 首座가 되어달라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였다. 그 해 나옹이 입적하자 무학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숨어 지냈다.
공양왕은 그에게 왕사가 되어 달라고 청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무학이 고려 王師는 거절하고 이성계의 왕사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고려의 멸망을 미리 알아서 그랬을까? 아니면 이보다 먼저 이성계를 만나서 그랬을까?
이성계와의 만남
고려의 기성세력에 불만을 가진 이성계와 무학이 언제 만났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 휴정스님이 지은「석왕사기」에 의하면 이성계가 먼저 무학을 찾은 것으로 되어 있다.
무학이 금강산과 묘향산에서 수도하였고, 이성계는 동북면 함흥에서 호족으로 있을 때 만났을 수도 있다. 그 당시에는 사회가 단순했으므로 훌륭한 인물이 천리길에 있다 해도, 찾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으며, 이성계는 말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으니 가능했을 것이다.
이성계가 북방 오랑케와 싸울 때다. 접전 후 우리측이 이길 성싶으면 꼭 나타나는 적장이 하나 있었다. 그는 쇠꼬리를 달은 긴 창을 쓰는 솜씨가 매우 뛰어 났으며, 그 창을 한번 휘두르면 우리 군사가 풀 베듯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이성계가 대적하는데 과연 창 솜씨가 가공할 만 하다. 이성계는 거짓 창에 맞아 쓰러지는 척하다가 말의 배 밑에 붙어 달리면서 활을 쏘아 적장의 머리를 꿰뚫었다고 한다. 그는 말 타는 솜씨와 활 솜씨가 대단했던 것 같다.
또, 이성계는 착실한 불교신자였다. 무학이 이성계에게 “살생을 하지 말아 달라”고 말하니, 그는 “장수가 어떻게 살생을 피할 수 있단 말이요”하며 현실론을 펴면서도 함부로 사람을 베는 일을 하지 않았음을 보아도 그가 무학의 말에 늘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둘은 가끔 오가면서 부처님 이야기와 불안한 시국에 관하여 우려를 하면서도 현실 불만을 토로하면서 혁명의 필요성을 공감하였을 것이다.
무학의 현실 불만은 이성계를 만난 뒤부터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왕국건설을 꿈꾸는 혁명가였으므로, 이 면에서 이성계와 뜻이 맞았을 것이다.
이성계가 시중이라는 벼슬에 있을 때의 일이다.
「꿈에 꽃이 땅에 떨어지고, 거울이 떨어지더니 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요란했다」
꿈에서 깬 이성계는 뒤숭숭한 마음에 잠을 못 이루고 있다가 날이 밝자 무학을 찾았다. 이때 이성계를 맞이하는 그의 태도로 보아 이미 친분이 오래인 듯 싶다.
꿈 이야기를 들은 무학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꽃이 다 떨어진 뒤에 열매가 맺히니, 일이 결실을 얻을 것이며, 거울이 떨어질 때 소리가 요란했으니, 대감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질 것입니다」하였다.
흐뭇한 마음으로 개경에 돌아온 이성계는 어느 날 다시 무학이 머무르는 설봉산 암자를 찾았다. 역시 꿈 때문이다. 이성계가 지난밤의 꿈 이야기를 하는데
「꿈에 어느 한곳에 이르니 큰 집 한 채가 있는데 집이 낡아 벽이 무너지고, 허술하여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나오니 마침 사방의 여러 집에서 일제히 닭이 울었다」고 한다.
무학은 이성계를 조용히 바라보더니 주위에 사람이 있나를 살핀 다음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졌으니 임금왕자요, 장차 헌집처럼 무너지는 왕씨의 기업(고려조)을 이으실 吉夢입니다. 그리고 많은 닭이 한꺼번에 울었으니, 장차 임금이 되겠다는 길몽입니다. 닭이 꼬끼오하는 것은 高貴位 즉 가장 높은 지위에 서겠다는 뜻이니 대몽이 아니겠습니까? 이 꿈은 하늘이 주시는 운수에 따르라는 길몽이오니 天機를 가벼이 생각 마십시오. 대감께서는 반드시 등극할 몽조 이옵니다」하고 이성계에게 왕의 기상이 깃들었음을 각인 시켜 이성계가 왕의 꿈을 품기 시작하였으며, 이성계는 그 후로 무학을 스승으로 섬겼다
國師가 되다.
『석왕사기』에 보면, 「이성계는 설봉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안변에 살고 있었다. 무학의 말에 따라 절벽에 집을 짓고 남몰래 천일기도를 드리며 왕이 될 야망을 불태웠다. 이후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무학의 예언에 힘을 얻은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성계는 무학이 설봉사에 있을 때 그를 만났고, 그는 이성계에게 왕이 될 수 있다는 야망을 확실하게 심어주었다.
1392년 7월에 등극한 태조 이성계는 10월에 무학을 國師로 삼으면서 묘엄존자라는 호를 내렸다. 이때 무학은 “불교는 慈悲를 가르치고, 유교는 仁을 말하지만 그 작용이 하나라는 것과 백성을 자식처럼 보살필 때 백성의 어버이가 되고, 나라는 저절로 잘될 것”임을 설법하였다. 그리고 “죄를 짓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용서하여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태조는 그 청에 따라 죄인을 풀어 주었다.
개국 후에도 고려의 충신들은 심하게 반항하였다.
이성계는 구세력이 굽히지 않고 저항하는 개경이 싫어졌다. 수도를 옮기기로 결심하고 무학과 함께 계룡산으로 갔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서로 만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인연 아니겠습니까? 국사께서는 보통 사람의 눈과 다르니 과연 계룡산 신도안이 수도로 정할 만한 곳입니까?”하고 물었다.
이성계는 무학을 천하 제일의 도인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최종 결정은 무학의 의견에 따랐다. 무학은 계룡산을 반대했다. 정도전도 반대했다. 그래서 공사를 중단하고 이름만 신도안으로 남게되었다. 그 다음의 후보지가 한양이다. 한양을 새 수도로 정할 때에도 태조는 무학대사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번에는 무학의 대답이 모호했다. 태조가 “이곳 한양이 어떻습니까?”하고 물으니, 무학이 “이곳은 사방이 높고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 쌓여있고 중앙이 평탄해서 도성으로는 알맞은 곳입니다. 그러하오나, 대신들에게 의견을 묻고 따르심이 옳을 듯 합니다.”한다. 무학은 말끝을 흐렸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무학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는 문제를 놓고 정도전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무학은 정도전과는 달리 무악산밑, 지금의 신촌에 궁궐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무학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고 궁궐을 북한산 아래에 남향으로 지어야 한다고 우겼다. 태조는 입장이 곤란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신촌은 땅이 좁은 것은 차치 하더라도, 산이 동쪽에 기울어 있어 궁궐을 서향으로 짓게되니 그 모양새가 좋지 않아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태조는 정도전의 주장 쪽으로 기울게 되었고 무학의 동의를 구했던 것이다.
무학은 항상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왕이 물으면 “잘 모르겠다”고 경솔함을 경계한 후에 다시 물을 때 비로소 대답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한양천도를 놓고 무학과 정도전이 싸움을 벌인 것은 단순한 개인차원의 싸움이 아니라 불교와 성리학의 힘 겨누기라고 보아야 한다. 무학은 한양천도 문제를 놓고 정도전에게 졌으나, 의미심장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앞으로 두고 보십시오, 2백년 뒤에 큰 난리가 날 것이고 5백년 뒤에는 흉년이 들어 온 백성이 굶어 죽을 것입니다.”
정도전은 이 소리를 듣고 가슴이 뜨끔했으나 겉으로는 태연하게
“대사 걱정하지 마십시오. 남쪽에 보리가 있지 않소? 보리 먹고살면 배고프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무학의 예언은 적중했다. 2백년 뒤에 임진왜란이 터져 왜군이 한양을 유린했고,
한말에는 백성들이 굶거나 배고파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나라까지 망했다.
무학의 눈은 정확했다. 그러나 경복궁 자리는 학의 등에 해당하는 곳이라 궁궐을 지으면 이내 기둥이 쓰러지는 자리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무학은 거듭되는 실패에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워 한양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용문사로 가는 도중 지금 전농동을 지나가는데 소를 몰고 밭갈이를 하는 한 농부가 있었다. 그는 자기 소를 보고
“이놈의 소가 무학이 처럼 미련한 놈이구나”했다.
이 소리를 들은 무학은 농부에게 다가가서
“왜 무학을 미련하다 하시오?”하고 물었다.
그 농부는
“누군지 모르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이 바닥에는 한양 터가 학 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무학 하나만 모르고 학의 등에다 궁궐을 짓고 있으니 학이 날개를 펴고 퍼덕거리면 집이 무너지고 마는 거요”한다.
무학이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하고 물으니, 농부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 양반아, 그걸 몰라서 묻소 먼저 도성을 쌓고 사대문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 학이 날개를 펼 수 없게된다 이 말입니다.” 한다.
그 농부는 사람이 아니라 삼각산 산신이 둔갑한 것이었다. 한양에 궁궐을 지으면서 산신에게 제를 올리지 않아 삼각산이 노한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그 뒤 삼각산과 남산에 국사당을 짓고 안녕 질서를 빌었다고 한다.
무학은 처음부터 태조에게 한양천도를 권했으나, 개성의 송악산에서 바라보면 북한산이 가로막아
“한양이 좋기는 하나 1천년 갈 것이 5백년 밖에 못 가게 되었구나”하면서 개탄했다고 한다.
무학은 농부의 말을 듣고 한양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는 즉시 도성부터 쌓고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
한양은 정도전 혼자서 설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서대문자리를 놓고 격돌했다고 한다.
무학은 서대문을 무악재 고개에 짓자고 했는데 정도전이 이를 반대하여 지금의 서대문자리에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학은 또 다시 한번 패배하면서,
“5백년간 불교는 힘을 못 쓰게 되었구나. 승려는 선비들의 종노릇이나 하게 되었다”고 개탄했다. 결국 조선왕조 5백년간 승려는 한양 4대문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1393년 9월에는 지공과 나옹의 사리탑을 회암사에 건립하였고, 나옹의 초상화를 모시는 불사를 광명사에서 베풀었다. 또, 10월에는 국가 주관 아래 대장경을 읽는 전장불사가 연복사에서 개최되었을 때 무학은 그 주석이 되었다.
태조는 1397년에 회암사에 무학의 부도(수탑이라고도 하며, 화장 후 사리를 보관하는 일종의 돌로 된 무덤, 사리란 볼래 승려가 입적한 후 남긴 시신의 한 부분을 말함)를 만들라 하여 회암사 북쪽에 부도를 세웠다.
1398년에는 용문사로 돌아와 수도하다가, 1402년(태종 2년)에 왕이 회암사 監主로 삼고 부르므로 옮겨와 태조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 해 8월에 태종이 부왕 태상왕(이성계)을 만나려고 회암사에 왔다.
태상왕은 무학의 가르침에 따라 고기를 먹지 않아 날로 야위어 갔다.
태종이 이 말을 듣고 무학에게 말하였다.
“내가 태상왕 앞에 나아가 獻壽하고자 하는데 만일 태상왕께서 고기를 드시지 않으면 왕사에게 그 책임을 돌리겠습니다”하였다.
태종이 태상왕을 뵙고 고기를 권하니
“국왕이 만일 나같이 부처님을 숭상한 다면 내가 고기를 먹겠다”고 하였다. 이어서 “왕사의 말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면 후생에 반드시 머리 없는 벌레가 된다고 하기에 내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였다.
왕실의 간섭이 싫은 무학은 다음해 국사직을 사퇴하고, 금강산 진불암으로 들어갔다.
1405년 금강암으로 옮겨 그곳에서 入寂하였다. 나이 78세, 법랍(출가하여 부처의 제자가 된 후 수도한 세월) 62세 이다.
그의 사리는 태상왕이 무학을 위하여 미리 준비해 놓은 회암사 부도에 안치되었다.
태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상왕의 명임을 이유로 안탑, 법호, 조파, 비명, 등사를 상정하였다.
무학의 思想
무학은 승려로서 조선왕조를 건국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고려조를 개국할 때는 도선 선사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앞날을 밝혀 개국을 도왔다면, 조선왕조를 건국하는데는 무학이 그 일을 하였다.
무학은 탄생과정에서부터 풍수에 이르는 많은 설화를 가지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첫째, 후대 사람이 자신의 의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보다 더 큰 힘에 의존하려다 보니 만들어진 이야기도 있을 것이고,
둘째, 평소 그의 사상이 깊고, 넓고, 커서 주위 사람이 감히 따를 수 없어 설화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사실을 다소 과장하여 재미있게 꾸미다 보니 설화가 되었을 수도 있다.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무학은 많은 설화를 갖고 있으면서도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훌륭한 업적과 사상이 후에 글을 아는 성리학자 들에 의하여 기록함을 거부당하였거나, 기록이 철저히 멸실 되었을 것이다.
그는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외롭고 쓸쓸한 유년 시절을 겪었으며, 출가하여 수도를 하면서도 신분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승려 사회에서도 소외되는 등 세상일이 자기의 뜻과는 너무 멀리 있음을 뼈아프게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주위 환경이 그의 마음에 혁명적 사상을 싹틔우고, 또 자라게 촉진하였을 것이며, 이것이 이성계를 만나 결실을 거두었다 할 수 있다.
그는 수도 승려답게 모든 일을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았으며, 자기에게 이익 됨을 이유로 나서거나, 집념을 갖지 않았다. 오로지 자연의 도리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절제된 의식과 행동을 변함 없이 보여주었다. 그러한 그의 생활태도가 피를 많이 흘린 건국초기에도 정도전과는 달리 변고 없이 넘길 수 있게 하였다.
그는 큰 뜻을 실천하면서도 무소유의 욕심 없는 마음, 집착 없이 자연의 이치에 따라 행동하였다. 그의 그러한 태도가 우리에게 크게 와 닿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머물러야할 자리와 물러설 때를 알고 있었다.
무학이 말년에 금강산 진불암에 머물 때 가벼운 병을 앓게 되었다. 그때 제자가 정성들여 약을 달여드리자
“나이 80에 병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약은 무슨 약”하며 거절하였다.
그 해 4월, 하루는 제자들에게
“머지않아 세상을 떠날 것이니 그리 알아라” 했다.
한 제자가
“죽어서는 어디로 가시나이까?”고 물으니
“모르겠다”라고 대답했다.
제자가 또 물었다.
“스님이 병중이신 데 도대체 병은 누가 만들어낸 것입니까?”
무학은 또 손을 가로 저으면서
“모른다”고 대답했다.
제자가 다시 물었다.
“육신은 결국 썩어 없어지는데, 없어지지 않는 眞法身은 어디서 생긴 것입니까?” 무학은 그때 두 팔을 뻗으면서
“바로 이것이다” 하더니 이내 입적하였다고 한다. 아는 척만 하는 모든 후학들에게 무학의 겸양을 가르쳐준 것인지도 모른다.
이 제자와 나눈 문답을 후에 사람들은 무학 사상의 총결산이라고 평했다.
이성계와 함께 새 왕조를 세운 세력은 성리학자들 이었다. 이들은 새 왕조를 세우는 명분으로 고려국의 주 이념이었던 불교를 배척하여야 했으며 이러한 명분 쌓기에서 고려말의 개혁세력의 주체였던 신돈을 희생의 제물로 삼았다.
무학은 불도로서 불교 배척자인 성리학자들과 함께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불교적 입장보다는 개혁에 대한 염원이 더욱 간절하였지 때문이었다.
그는 조선개국의 주체이면서도 전혀 그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것이 무학의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己和가 있고, 저서로는 <印空吟> 한 권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으며, <무학대사어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 외 <무학비결>이라는 필사본이 있으나, 위서라는 설도 있으니 믿기 어렵고, 현존하는 분명한 저서로는 <佛祖宗派之圖>가 있다.
3-2. 三 峰 (鄭 道 傳)
母系의 신분이 종 [妃]
정도전은 1342년(충혜왕 복위 3년)에 나서 1398년(조선 태조7년)에 생을 마친 사람이다. 다른 기록에는 1337년에 탄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호는 三峰, 본관은 봉화(경상북도)이며, 자는 宗之이다.
형부상서 鄭雲敬의 맏아들이며 선향은 경상북도 영주이나 출생지는 충청북도 단양군 삼봉이다. 정도전은 고려말의 성리학자들이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 정공미는 고을의 아전격인 豪長이었으며 대대로 미비한 벼슬을 유지하다가 아버지 정운경에 이르러 형부상서라는 중앙관직으로 진출하였다.
더구나, 그의 어머니는 서얼 출신의 노비였다. 이러한 신분관계는 정도전을 내내 쫓아다니며 괴롭혔고 혁명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이다.
고려말 유학자이며 고려사 열전에 실린 우현보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맏아들 홍수는 벼슬이 첨서밀직사에 이르렀고, 성범, 승범, 홍범, 회범 등 네 아들을 두었는데 이중 성범이 고려 공양왕의 사위이다.
우현보의 친척 중에 김진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김진이 그의 종(수이)의 아내와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종은 어머니의 신분을 쫓아야하므로 종의 딸은 아버지가 양반이라 해도 종이다. 그는 후에 종(수이)를 내쫓고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았다. 그 딸이 성장한 후 우연에게 시집 보내졌고, 우연이 다시 딸 하나를 낳아 정운경에게 시집보냈다. 정운경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정도전이 맏아들이다. 정도전이 벼슬길에 올랐을 때 우현보의 형제와 그 자식들이 그를 경멸하였다. 그래서 정도전은 우현보의 자식과 형제들을 늘 원망했고, 분개하였다.
정도전은 가문은 미천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형부상서에 이른 관계로 이곡과 교우관계가 있어 이곡의 아들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정몽주, 박상충, 박의중, 이숭인, 이존오, 김구용, 김제안, 윤소종 등과 교우할 수 있었다.
言辯과 文章力이 뛰어난 정도전
그는 1360(공민왕 9년)에 성균관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충주사록, 전교주부, 통례문지후를 역임하였다.
1370년 성균관 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윤당에서 성리학을 수업하고, 강론하였으며 이듬해 태상박사에 임명되고, 5년 간 전선을 관장하였다.
정도전은 언변과 문장력이 매우 뛰어났었다.
1374년(우왕 원년)에 원나라에서 사신이 오도록 되어 있었다. 이때에는 고려의 구세력인 권문세가는 친원 정책을 쫓았고, 신진세력인 신진사대부는 친명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정도전은 권근 등과 같이 원나라 사신 영접을 적극 반대하였다. 그런데 반대 상소문 내용이 과격하고 불손하다 하여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의 거평부곡에 유배되었다.
1377년에 용서를 받아 三角山밑에 초가를 짓고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에게 배우려는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는 항상 후진을 지도하고 異端을 배격하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삼고 성리학 이외의 모든 사상․이념, 즉 불교․도교․도참사상 등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이러한 그이 성격은 주위에 따르는 자보다 멀리하는 자를 많게 하는 원인 되었다.
고성 사람 이금이란 자가 미륵이라 자칭하고 하는 말이
“내 말을 곧이듣지 않으면 3월에 가서 해와 달이 모두 빛을 잃을 것이다”라 하며 사람들을 현혹했다. 현대판 말세론 이다.
이러한 허무맹랑한 태도를 보고 승려 찬영이
“지금 한말은 모두 허무맹랑하다. 해와 달이 빛을 잃는다는 말은 더욱 우습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서 온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믿는가?”하며 세태를 우려하였다.
이에 대해 정도전은
“이금과 석가는 그 말이 다를 것이 없다. 석가는 멀리 딴 세상 이야기를 말하니 사람들은 그것이 헛소리인줄 모르고, 이금은 가까이 3월을 말하니 허무맹랑함이 곧 들어날 뿐이다.” 하였다. 그 당시 분위기로는 극단적인 언사이며, 남을 이해하는 마음이 없는 극히 편협한 성격의 소유자이거나, 아니면 욕구불만이 가득한 반항적 성격 이였던 것 같다.
삼각산 밑 초가를 재상이 철거하였다. 할 수 없이 부평으로 이사하였는데 그곳에서도 재상이 별업을 만든다는 이유로 재옥을 철거하여, 다시 김포로 이사하였다.
1383년(우왕10년)에 9년 간의 유배와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등용되어 성균제주가 되었다. 그러나 정도전 자신이 희망하여 남양부 수령으로 나갔다. 이때 정도전은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를 찾아 함주 막사에서 운명의 인연을 맺는다.
그 후 이성계가 추천하여 성균판사성에 임명되었다.
新進改革 세력의 선두 주자
1388년 6월 위화도회군 사건을 일으킨 이성계가 최영 등 구세력을 축출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때 정도전은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 등과 함께 私田을 모두 회수하여 재조정하자는 田制改革案을 적극 건의하여 이성계가 이를 채택함으로서 조민수 등 구세력을 완전히 몰락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로 인하여 조선왕조의 건국 기반이 확립되었다. 실권을 완전하게 장악한 이성계와 그 추종자인 정도전,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등과 모의하여 우왕을 신돈의 자손으로 몰아붙이고, 우왕의 아들인 창왕도 신돈의 자식이므로 사직을 받들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창왕을 폐하고 제비뽑기로 공양왕을 옹립한다. 이 과정에서 정도전은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그래서 그는 좌명공신 이라는 공신호를 받았으며, 忠義君으로 봉한 후 삼사우사로 임명되었다.
공양왕으로부터 공신호를 받을 때 그에 대한 교서의 내용은 장황하기 이를 데 없다.
간단히 몇 구절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그대는 학문이 하늘과 인간사를 통달하고, 지식이 고금을 꿰뚫었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봉녹이 많은 벼슬에 올랐다가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옛 성인이 제정한 대로 제사를 마치었다(정도전은 부모가 연달아 세상을 떠 3년 간 초막을 짓고 상을 마치었다) 그리고 어린 아우를 교양하여 잘 성취시켰으며 건강한 노비를 모두 다 아우와 여동생에게 주고 자기는 늙고 허약한 자를 가졌다.
그대의 타고난 효성과 우애가 그러할 것이다. 공민왕이 그대를 선발하여 태학에 두었으며, 제고를 맞아 보게 되었던 바 周程의 학설을 제창하고 異端의 설을 배격하였으며, 꾸준히 교양사업을 진행하여 인재를 양성해내고 詩․賦․雜文에만 힘쓰던 우리의 구습을 일신시켰다.
그대는 태상으로서 음율을 조화하고 제도를 정하여 공민왕이 더욱 소중히 여기는 바가 되어다. 공민왕이 세상을 떠나고 힘있는 자들이 우왕을 세울 것을 논하였을 때 그대는 왕대비가 섭정할 것을 청하려 하였으나, 계획이 실현되지 못하자
‘충신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하고 탄식하였다.
그 외 교서의 내용에는 北元의 태자가 사자를 파견하여 왔는데 태자가 보낸 편지의 언사가 아주 불손하다 하여 정도전이 사자의 영접을 반대하다 유배되었다는 내용과, 명나라 황제 생일축하 사절단으로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明에 가서 전에 구금되었던 김유, 홍상재, 김구용 등을 데려왔다는 공적을 언급하고서 끝으로,
“조부와 아버지에게 작위를 추증하고, 영세토록 죄를 사하며 그대의 직계자손으로 하여금 작위를 세습케 할 것이다. 지금 전답, 노비, 은, 비단을 그대에게 준다. 큰 사업에 복무하면서, 더욱더 충성을 다하라” 하고 맺는다.
이보다 더 영광됨이 있을까? 이성계를 새 왕조의 왕으로 세우기 위하여 그의 추종세력에 의하여 허수아비 왕으로 옹립된 공양왕은 그에게 최대의 대우를 다 하였다.
아니 대우라기보다는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아부라는 편이 더 정확할 듯하다.
그 후 지견연사를 지낸 뒤 정당문학으로서 성절사 겸 변무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윤이, 이초의 무고 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와서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정도전의 벼슬이 승승장구하는 중에 공양왕은 불필요한 관직을 정비하기 위하여, 즉 구조 조정을 위하여 정도전에게 의견을 요구하였다. 정도전은
“옛날에 사람을 쓰는데는 文學, 武科, 吏科, 門蔭(조상의 공덕으로 벼슬에 오르는 제도)이 있었습니다. 이 4과로 인재를 선발하는데 합격하면 채용하고, 그러하지 못하면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원망하겠습니까?”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을 채용하는 제도에는 조목이 다섯이 있습니다. 첫째는 교양으로, 그 재능과 덕성을 완성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選擧라고 하여 우수한 자를 선발하는 것이며, 셋째는 銓注라 하여 그 직위에 적당한 자를 판정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考課라 하여 그 공노와 과오를 밝히는 것입니다. 끝으로 다섯 번째는 출척(黜陟)인데 무엇을 징계하며, 권장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라고 인사제도에 대하여 상세히 밝힌다.
또, “銓注는 公만을 알고 私를 버리며, 직책에 근면한 자를 功으로 하고, 公物로 사복을 채우고 관직에 태만하여 직무를 집행하지 않는 것을 過誤로 합니다.” 한다.
정도전은 옛 중국의 제도를 들어 말하였지만 실로 오늘의 인사제도 내용과 큰 차이가 없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요즘에도 이렇게만 실천한다면 국가 운영에 과오가 없다 하겠다.
그런가 하면 정도전은 잔재주를 부리다가 왕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견책을 받기도 하였다. 한번은 金星이 달을 가리니 왕이 그에게
“무슨 재앙이 있으려는가?”하고 근심을 하니 정도전은
“허물이 중국에 있고, 우리 조정에는 상관없습니다”하였다. 이 말을 들은 주위 모든 사람이 “그 말은 그르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또 말을 할 때 무례함이 있었다.
“전하가 비록 저를 책망한다 할지라도 후에 만약 베풀어주시면 어찌 감히 분발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농사철이고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았는데 전하가 저를 불러 대면해서 일을 논의하니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이전엔 장마가 저서 곡식이 잘 익지 않았는데 전하가 저를 불러 국사를 논의하였더니 장마가 걷히고 날이 개인 일이 있습니다.” 정도전의 말을 듣고 있던 왕은 매우 못마땅히 여겼다. 그 후 왕은 그를 봉화현에 귀양보냈다.
榮辱의 교차
1391년 삼군도 총제부를 두어 이성계로 하여금 병권을 장악하게 하고 자기는 우군 청제사가 되어 사실상 군사권을 쥔다. 그러나 다음해 봄 이성계가 사냥을 나갔다가 낙마하여 사경을 헤매게 된다. 이때 정몽주, 김진양 등은 이성계와 그 무리들을 쫓자낼 요량으로 정도전 등을 탄핵한다. 정몽주 등이 탄핵한 주된 이유는 “가풍이 부정하고 가계가 불명확하다”는 것이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憲司에서 규정, 박자량 등이 우홍독을 맞이하지 않았다고 규탄하고 옥에 가둔 사건에 연루되어 정도전이 평양 부윤으로 나갔다. 성현과 형조에서 글을 올려 정도전이 규정 등을 슬며시 유인하여, 대간을 비방 중상하였다고 규탄하고,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왕은 그가 공신이라는 이유로 용서하였으나, 다시 탄핵하였다.
“정도전은 제 분수를 넘어서 방자스럽게도 공신들의 대열에 섞여 있으면서 속으로 간악한 마음을 품고, 바깥으로는 충직한 체하면서 국가의 정사를 더럽혔으니, 죄목을 논하고 죄줄 것을 청하였다. 왕은 마지못하여 정도전을 봉화현에 귀양보냈다.
臺省에서도 글을 올려
“정도전은 가풍이 바르지 못하고, 족보가 밝혀지지 않았는데 방자하게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그의 벼슬과 공신녹권을 회수하시고, 그의 죄를 밝힐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왕은 이에 따라 조치하고 귀양살이하는 곳을 봉화에서 전라도 나주로 옮겼다.
大司憲에선는 김주 등이 글을 올려 정도전의 두 아들 진․담의 죄를 밝히고 폐 서인으로 하였다. 얼마 후 그의 죄를 일부 감하여 봉화현으로 옮겼다.
이렇게 정도전은 철저하게 보복을 받았다.
이 와중에서 정몽주는 김진양 등을 통하여 글을 올려 말하기를
“정도전은 출신이 천하면서 재상자리에 올랐습니다. 자기의 천한 근본을 엄폐할 목적으로 본 주인을 없애려 하였으며, 단독으로 일을 성사시킬 방법이 없으므로 글로써 근거 없는 죄를 날조하여 수많은 사람을 연좌시켰습니다. 바라건 데 귀양살이하는 곳에서 처형하여, 뒷사람에게 징계를 남길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이와 같이 정도전이 주위로부터 화살을 받은 것은 그가 개혁 신진세력의 선두주자였고, 개인적인 감정을 직위에 이용하여 상대방을 죄주고, 탁월한 달변으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키는 잔재주가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정도전이 공양왕에게
“德은 得이니, 마음에 얻는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政은 正이니, 그 몸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소위 덕은 시초에 天品에서 얻는 자가 있는가 하면, 후에 자기수양을 통하여 얻는 자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천품이라 하여 반드시 좋은 정치의 자질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천품만 믿지 말고 수양하여 결함을 경계해야 합니다.”하고 공양왕이 타고난 성품은 좋으나 왕의 수업은 받지 못하여 수양이 모자람을 직설적으로 말하며 수양할 것을 건의하는 무례함을 보였다.
또 그는 어려서부터 앙심을 품었던 우현보 등을 해칠 목적으로 상소를 올렸다.
중국 당나라 중종 때 세력가 무삼사가 있었다. 중종은 무삼사가 자기어머니 조카였으므로 죄가 상소되어도 죄주지 않고 아주 후하게 대하였다. 그러나 무삼사는 이런 은혜를 저버리고 무모하게 행동하다 중종이 피살되게 한다.
정도전은 교지에 답하는 글에서 무삼사를 우현보 일당에 비유하였고, 우현보와 이색을 죽일 것을 간하였다.
그러나 우현보의 손자 우성범이 왕의 사위였으므로 왕은 정도전을 미워했다.
이렇게 정도전은 주위에 적을 많이 갖고 있었다.
정도전이 우현보 등을 죄줄 것을 간한 후 사의를 표했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음에도 출근을 하지 않았다.
왕이 그를 불렀으나 병을 청하고 오지 않았다. 안원을 보내 간절히 타이르니 그제야 나왔다. 왕은 그에게 우현보, 이색에 대한 죄를 물으니 그 구변이 아주 유창하고 장황하다. 이러한 정도전의 태도를 왕은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말이 나가면 화가 온다는 격언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저는 화를 당할지언정, 내 일을 돌보지 않으며, 직언하여 숨기지 않습니다.”라고 왕에게 말하는 등 태도가 과격한 면이 있었다.
옛 학식있는 사람은 자기의 뜻을 웃분에게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도리이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성리학을 공부하면서도 이런 예를 갖추진 못한 것 같다.
이성계를 王으로 추대
이성계가 병으로 자리에 누워있는 동안 정몽주 등 고려왕실을 수호하는 사람들의 공격을 받은 이성계 일파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이방원(후에 조선조 태종이 됨)은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대낮에 주살하는 등 피의 잔치를 벌이기 시작한다.
이방원에 의하여 정몽주가 격살 당하자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풀려 나와 그 해 7월 조준, 남은 등 50여명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마침내 조선왕조 개창의 주역을 담당하게 된다. 정도전은 다시 충의군으로 봉해졌고, 그 아들들도 벼슬을 되돌려 받았다.
조선왕조 개국 후 개국 1등 공신인 좌명공신문화시랑찬성사의홍친위군위절제사 봉화군으로 삼았다. 그는 동판도 평의사사사․판호조사․겸판상서사사․보문각 대학사․지경연예문춘추관사 등의 요직을 겸임하여 정치적 권력과 병권을 한 몸에 지니게 되었다.
태조1년(1392년) 7월 28일 태조의 즉위 교서를 정도전이 지어 받쳤다.
정도전은 우현보와 오랜 원한이 있었으므로 기회만 있으면 우씨 집안을 몰락시키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권력을 한 몸에 쥔 이때에 이들을 해치려고 극형에 처할 것을 임금에게 글로 올렸으나 태조 이성계가 이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말렸다.
이로 인하여 결국 우현보는 해양으로 귀양가고, 그의 맏아들 우홍수는 곤장을 맞고 풀려났다.
정도전은 이색을 못마땅히 생각해 오던 차에 이참에 제거할 목적으로 자연도(섬이름)로 귀양보내려고 허주에게 명하여 그를 잡아오게 하였다.
이에 허주는
“자연도는 무인도이기 때문에 衣食을 구할 수 없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고 알렸다. 정도전은
“섬에 귀양 보내는 것은 바로 바다에 밀어 넣자는 것이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도전의 복수극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태조1년 8월 20일은 조선왕조 초기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사건이 있었다.
태조의 신덕왕후 강씨(강윤성)의 막내아들 李芳碩을 왕세자로 삼았다.
정도전, 배극렴, 조준이 태조에게「나이와 공로로서 세자를 세울 것」을 청하였다.(야사에서는 이때 왕세자 책봉을 눈치챈 신덕왕후가 옆방에 머물면서 슬피 울며 자신의 자식인 방번, 방석 중에서 세자를 세울 것을 간하였다고 함) 이때 태조가 신덕왕후의 마음을 존중하여 큰아들 李芳蕃에게 뜻이 있음을 표하였으나, 공신들이 이를 어렵게 여겼다.
“만약에 반드시 신덕왕후가 낳은 아들을 세우려 한다면, 막내가 좀 낫겠습니다”고 배극렴이 막내를 천거하자 태조가 뜻을 결정하여 막내를 세자로 삼았다.
이 내용으로 보면 신의왕후(이방원의 생모)의 자식이 아닌 신덕왕후의 자식을 왕자로 세운 것은 태조의 듯이 결정적이었다.
그런데 이방원이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죽인 목적이나 자기가 즉위하여 왕에 있는 동안 내내 정도전이 왕권을 유린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나서 자기 형제들을 배척하고 방석을 왕자로 삼았다고 하면서 모든 잘못을 정도전에게 덮어씌우었다. 그 여파는 두고두고 큰 파문을 일으킨다.
정도전의 복수전은 계속되었다. 이숭인은 고려사의 열전에 오른 사람이며, 당대의 훌륭한 성리학자이고 우현보와도 교분이 두터웠다. 그는 또 정도전과는 친구 사이였다. 그러나 조준은 이숭인을 미워하였다. 그래서 정도전이 조준 앞에서 이숭인을 몰래 험담하여 이숭인에게 곤장을 치고 귀양보냈다. 이 사건이 후에 문제가 된다. 이숭인을 단순히 볼기를 쳐서 귀양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를 죽일 목적으로 볼기칠 때 일부러 허리를 치게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조선왕조의 건국자들은 고려조 충신들을 사사로운 감정에서 희생시킨 죄를 지고 있다.
이러한 정도전에게 태조는 같은 해 9월 16일 전 200결, 노비 25명을 주었다.
또 태조는 정도전, 조준, 정총, 박의종, 윤소종에게 명하여 <고려사>를 修撰하게 하였다. 이들은 태조 4년 1월에 완성하여 바쳤다. 그러나 오늘에는 전하지 않는다. 같은 해 11월에 사은겸 정조사로서 고려조 때에 이어 두 번 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3년 7월 5일에 동북면도안무사로 임명되어 동북면 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다.
7월 26일에는 <文德曲>. <夢金尺>, <受寶籙>등 3편의 樂詞를 지어 올렸다.
이 악사는 태조 이성계를 극구 찬양하는 내용과, 무사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서술한 것이다. 이에 태조는 감사의 표시로 채색 비단을 내려주고 궁중에서 공연 때 연주하게 하였다.
8월에는 四時蒐狩를 만들어 바쳤고 9월에는 판삼사사로 임명되었다.
11월에는 임금에게 글을 올려 여러 절제사 휘하의 군사 중에서 무략이 있는 사람을 뽑아 <陣圖>를 가르치게 하였다. 임금의 허락을 받아 군사를 구정에 몰아놓고 그들로 하여금 각종 군사 기술을 익히게 하였다.
태조 3년에는 군제개혁에 관한 장문의 글을 임금에게 올린 후 경상․전라․양광 3도의 도총제사로 임명된다.
같은 해 8월 태조가 도읍을 옮길만한 곳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정도전은, 술수에 의하면 위험함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위로 天時를 살피고, 아래로 人事를 보아 적당한 시기를 찾아 도읍 터를 보는 것이 萬全한 계책이며, 조선의 왕업이 무궁하고 臣의 자손도 함께 영원할 것입니다.“고 조아렸다.
여기서「… 신의 자손도 함께 영원할 것입니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대목에서 그의 꿈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고, 성품을 읽을 수가 있다.
태조는 무학과 대신들의 의견을 들어 신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정도전, 권중화, 심덕부, 김주, 남은, 이직 등을 한양에 보내 종묘, 사직, 궁궐, 도로 등의 터를 정하도록 일렀다.
도성축조 도감이라는 관청을 신설하고 정도전이 터를 정한 후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고 하나하나 그 뜻을 달아 태조에게 올렸다.
임금이 정도전 등 공이 많은 신하를 불러 주연을 베풀면서 술이 몇 순 배 돌은 다음 태조가 정도전에게
“내가 왕이 된 것은 경의 힘이며, 서로 공경하고 삼가서 자손만대까지 기약함이 옳을 것이다” 한다.
태조의 이러한 태도를 보아 정도전을 얼마나 신뢰하는가를 알 수 있다.
1396년 4월에 설장수 등이 사은사로 북경에 갈 때 표전문을 정도전이 주관이 되고 권람이 관여하여 작성하였다. 그런데 명나라 황제가 교전문의 내용을 트집잡고 나섰다. 명 황제는
“지금 조선국왕 李씨(태조를 말함)의 文人, 정도전이란 자는 왕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왕이 만약 깨닫지 못한다면, 이 사람이 반듯이 화의 근원일 것이다. 왕은 살필지어다. 만일 바르게 살피지 않으면 나라에 화가 있어 남에게 손을 빌릴 것이다. 깊이 생각하고 익히 상량하여 삼한을 보전하게 하라”하였다. 실로 위협적인 협박이다.
분을 삭이지 못한 명 황제는 우등을 보내서 정도전을 불렀으나, 그가 병을 핑계대면서 가지 않았다. 권근이 자청하여 가서 황제의 진노를 풀고 돌아왔다.
정도전을 이를 문제삼고 권근을 탄핵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천하가 진노하였을 때를 당하여, 자청하여 가서 노여움을 풀게하여 다시 경을 부르지 않았으니 나라에도 공이 있고, 경에게도 은혜가 있다. 나는 상을 주려는데 경은 도리어 죄주기를 청하는가” 하며 그의 탄핵을 거절하였다.
이에 자극 받은 정도전은 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수복운동에 박차를 가하여 군량미 확보, 진법훈련, 사병 혁파 등을 적극 추진하였다.
1398년에는 <佛氏雜辨>을 저술하여 排佛崇儒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고, 9월에 진법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정안대군 후에 제3대왕 태종)의 기습을 받아 희생된다.
이때가 태조7년 8월 26일이며,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역사는 부른다.
그의 죄명을 정종 즉위 교서에 나와 있는 대로이다.
“정도전, 남은 등은 연줄로 타서 권세를 부리고 몰래 권력을 마음대로 하기를 도모하였다. 이에 어린 서자(방석을 말함)를 세자로 세워 후사를 삼고자 하여, 장유의 차례를 빼앗고, 질서의 구분을 문란 시키고자 우리 형제를 이간시켜 서로 선동하여 변고를 발생시켜 화가 불측한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천지와 종사의 신령이 몰래 도와주고 충신․의사들이 마음과 힘을 다함께 하여 간악한 무리들이 참형을 당하고, 나라의 운명이 편안하게 되었다.”
정종2년 11월에 태상왕의 탄일을 맞아 정도전, 남은 등의 일당을 용서하였다.
정안공 방원이 태상왕과의 모종의 정치적 타협을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한다.
정도전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정안대군 이방원, 태종은 정도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자기가 왕위에 오르는데 장애가 되었다는 측면에서는 죽여 마땅한 죄이나, 그의 재주만은 인정하는 태도였다.
태종은
“이씨가 개국한 공은 오로지 조준과 남은에게 있다. 정도전은 言辭를 잘하여 공신의 열에 있었는데 공으로 따지면 5, 6층 사이일 것이다.
부왕(이성계)때에 兩鄭이라 하였으니 정몽주와 정도전이다. 정몽주는 왕씨(고려조)의 말년 시중이 되어 충성을 다하였고, 정도전은 부왕의 은혜에 감격하여 힘을 다하였으니 두 사람의 도리가 모두 옳다”고 평하였다.
또, 태종은 9년에 홍용시위사대호군 田甫에게
“정도전의 진법을 삼군감사와 응양위, 별사위등에게 가르치도록” 하교한다.
정도전은 文人이면서도 동시에 武人의 자질을 갖추었으며, 요동정벌을 주장하였다.
정도전은 그가 왕으로 모신 이성계가 요동정벌의 부당함을 들어 회군하여 고려조정을 전복하였는데도 요동정벌을 주장한 것은 석연치 않은 면이 있으며, 그는 요동정벌을 위하여 진법을 개발하여 군 양성에 힘을 썼고, 태종도 이 진법이 잘되었음을 인정하여 군에 적용시켜 나갔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지 8년이 지나도 정도전에 대한 감정이 안 풀린 듯
“정도전이 부왕의 병환이 오래되고 위독한 것을 엿보다 난을 일으켰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또 “정도전은 개국할 때에도 한마디 말도 없었고, 그 뒤에 적자와 서자를 분별할 때도 한마디 언급하지 않았다. 명나라 황제에게 죄를 얻었을 때에도 굳이 피하면서 가지 않았고, 私을 끼고 임금을 속이고 흉포한 짓을 자행하여 그 몸의 허물을 없애고 이숭인을 함부로 죽여 그 입을 열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의 죄가 공보다 크니 가산을 몰수하고 자손들을 벌주어라“하고 엄명을 내리면서 정도전을 서인으로 삼았다.
그러나 태종은 말년에 정도전의 아들과 손자 정 내, 정 속에게 벼슬을 주고, 동생 鄭道復에게도 인력부사윤이란 벼슬을 주었다.
정도복은 그의 형이 권력을 쥐고 흔들 때 서울에 오도록 권했으나,
“세력과 지위는 오래가기 어려우니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한미한 가문인데 지금 영화를 누리고 있으니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형님은 저를 번거롭게 하지 마십시오”하며 거절하였다.
같은 형제인데도 정도전은 이름 그대로 도전적인데 비하여 그의 동생은 겸양을 갖춘 선비적 자질이 엿보인다.
정도전의 思想
정도전은 개국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장량에게 비유하고 있다.
한 고조(유방)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하여 한나라를 세웠다고 하면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주역은 자신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물려받은 재산도 없고 출신도 모계계통에서 하자가 있어 소외당하는가 하면, 오랜 동안의 유배․유랑생활을 거치는 동안 구세력에 대한 반항심이 싹트고, 이러한 마음은 새 왕을 꿈꾸는 이성계를 통하여 실현된다.
정도전은 재상을 최고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관료지배체제를 원했고, 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하여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民本思想을 강조하였다.
모계혈통이 문제되어 조선조의 三奴家중의 하나가 세인의 입에 올랐다.
그와 함께 혁명을 한 조영규, 함부림, 하륜도 신분적 하자가 있는 집안 출신으로 조선왕조의 개국에는 신분적 하자가 있는 사람들이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정도전은 적자․서자나, 양인․천인과 같은 신분적 차별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뜻과는 달리 조선왕조가 오히려 신분적 사회를 더욱 엄히 지킨 것은 그가 중도에 몰락한 결과라 하겠다.
또, 수구세력인 고려의 권문세가를 뒤엎고 혁명을 한 건국주체들이 조선왕조 때에는 더욱 견고한 수구세력을 구축하여 이를 타파하려는 신진유생들과 충돌하여 士禍 등을 일으킴으로서 정치적 불안과 손실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정도전이 바란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도전은 많은 저서를 남겼다. <經濟文鑑>, <高麗史>, <朝鮮徑國典>, <心氣理>, <陣法>, <三峰集> 등 성리학에 관련된 책, 군사에 관련된 책, 의서, 약사 등이 현재 다수 전해지고 있다.
4. 무학과 삼봉의 다름, 같음
조선왕조를 건국한 이성계를 도운 두 거두는 무학과 삼봉이라 하는데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없을 듯 하다.
예부터 하늘의 뜻을 얻지 못하면 개국을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성계는 과연 하늘이 점지하여서 一國을 세웠을까? 아니면, 삼봉 말대로 주위사람들의 뜻에 의하여 왕국을 세우는데 이용당한 인물인가?
이성계가 먼저 무학을 찾아 교우를 맺은 것이 인연이 되어, 무학은 동북면의 일개 호장에 불과한 그에게 군왕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어, 그를 군왕으로 이끌었다. 반면 삼봉은 자기의 의지를 세우고 이성계를 찾아 왕국건설의 당위성을 알려주고, 그를 토하여 자기의 꿈인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이루려고 하였다.
삼봉은 그가 말했듯이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성계를 끌어들여 이를 성취하였다면, 무학은 이성계의 옆에서 그가 자기 이상을 펴는데 필요한 것을 요구하면 돕는 조언자였다.
삼봉으 스스로 하고자 하는 뜻을 세웠으면 이를 반드시 관철시키는 실천력과 아집이 강해던 반면, 무학은 자기 고집을 내세우지 않고, 이성계에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준 다음 그래도 그가 결정을 못하고 물어오면 자기의 뜻을 밝히는 겸양과 배려의 마음이 깊었다.
그러나, 이 둘은 자신들의 신분적 약점을 탈피하기 위하여 기존지배체제를 부정하고 새 왕조를 창조하고자 노력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결과는 어떠한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욕심과 집념을 내세운 정도전은 비운을 맞이했지만, 남을 도운 후에도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은 무학은 천수를 다하였다.
5. 무학이 삼봉에게 말하기를
海雲堂의 뒷마루에 봄볕이 다사롭게 내린다.
아직은 그늘진 곳에 잔설이 있어 봄이라 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지만 우수를 넘긴 해운당 뜰에는 제법 봄기운이 돈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에 곱게 자리한 해운당은 뒤쪽은 바위가 바람을 막아주고 탁 트인 앞에는 멀리 산봉우리가 아스라한데, 골골에 안개가 내려앉아 산정수리가 點點이 다정스럽다.
뜰 안의 매화 가지에는 꽃 봉우리가 필 듯 말 듯 엉거주춤 한데, 둘이 마주앉아 나누는 차 향이 더욱 향기롭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에 삼봉이 먼저 운을 뗀다.
“대사와 함께 나누니 차 맛이 더욱 그윽합니다”
“삼봉선생, 우리가 이렇게 마주앉은 지가 언제였건 가요,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진작에 찾아뵙고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늦었습니다. 그려”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군요” 삼봉은 입술을 적시며 멀리에 시선을 던지다.
또렷하고 의지에 찬 눈빛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조용하고 이웃집 아저씨 같은 무학은 안온한 눈빛으로 삼봉을 주시한다.
다시 침묵이 흐른다.
“대사님, 태상대왕께서는 안녕하신지요. 제가 떠나고 나서 몇 번 문후를 드린 적은 있으나, 문안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와 태상대왕의 만남은 악연이었나 봅니다”
삼봉의 눈가에 붉은 기운이 가년스럽다.
“인연 따라 만났다 인연 따라 헤어졌으니, 그 또한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일에는 너무 개념치 마십시오. 삼봉선생”
무학은 수능점수가 낮아 상심하는 제자를 타이르듯 목소리가 촉촉하다.
숯불화로에서는 찻물이 지지러지며 끓고 있다.
화젓가락으로 불을 뒤적이던 삼봉은 찻물을 따르면서
“대사님 우리의 만남과 헤어짐도 인연이었나요?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제 삶이 실패한 것이라고 봅니다만,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무학은 시선을 먼 데에 두고 아무 말이 없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지난 가을에 지지 못하고, 모진 겨울바람에도 대롱대롱 매달려 버티고 있는 단풍잎 하나가 잔 바람에 파리하게 떤다.
무엇이 아쉬워 떠나지 못하는가? 어리석은 마음이다.
이별을 서러워하지 말고, 만남을 기뻐하지 않음이 오히려 변함 없는 고운 마음이 아닐까
사랑도․미움도 벗어놓고, 창공같이 깨끗하게, 태산같이 말없이 사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아마 무학은 그런 생각을 하나보다.
삼봉이 재삼 재촉한다. 이에 마지못해 무학이 삼봉에게 말하기를
“삼봉선생, 사람은 누구나 완벽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함께 하면서 교차하는데, 그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잘과, 잘못이 나타난다 하겠지요.
선생께서는 각본에 따라 연기하는 무대배우가 자신의 삶과 연극에서의 삶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착오를 일으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자신의 삶은 1차적 본성이며, 무대에서의 역할은 2차적 성격임에도 선생께서는 전자와 후자를 구분하지 못한 우가 있는 듯 합니다.
아마도 그렇게 된 이유는 텅 빈 무대에서 아무도 없는 객석을 바라보며, 허무하게 망가지는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거부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인생의 무상함을 미처 모르고 착각한 것이지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세가 더 진지해 보이지 않습니까?
삼봉선생은 ‘꿈을 쫓아 현실을 외면하고, 과도한 욕심과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마음은 부족함만 못하다’는 평범한 사실을 마음에 두는 여유로움이 없었던 것이 아닐가요?
선생의 탁월한 지식은 오늘까지도 빛을 발하고 있지만, 지혜롭지 못함은 오늘도 선생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지요“
일자로 다부지게 다문 삼봉의 입이 끄덕이는 머리보다 더욱 무겁다.
아직도 철없이 대롱거리는 단풍잎은 제멋대로 인데
무학은 자리에서 일어서 왔던 길을 향한다.
“대사!”
삼봉의 무거운 목소리가 뒤를 잡는다.
무학은 걸음을 멈춘 채 시선을 창공에 던진다.
“대사가 이겼습니다.”
삼봉의 비장한 목소리는 아직도 무엇이 섭섭한 듯 하다.
무학은
“어리석은 생각, 인생에서 승자와 패자가 따로 있던가? 그 또한 집착인 것을 부질없음이야.”
무거운 마음은 태산에 묻고 멀리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전 만 수
금천구청 사무관
「내 고장 금천」「금천의 주산 금지산」
왜 금천인가? 시흥행궁터는? 시흥관아 터는」
「한국 고대국가의 지방조직」
글 전 만 수
편집 전 만 수
펴낸날 2000, 3, 10
연락 mindle49@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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