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3년 10월 10일 오후 3시에 동아미디어센터 21층 강당에서 인촌상 수상식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박종현 선생님께서 하신 수상 소감을 알려 드립니다.
"인촌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인촌상을 학계의 한 모퉁이에서 조용히 일해왔을 뿐인 제가 받게 되었다는 통보를 받고서, 사실 저는 몹시 놀랐습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어떻게 이처럼 구석진 학문의 영역이 심사위원들의 관심거리로 될 수 있었을까 하여 갖게 된 놀라움이었습니다. 우리의 학계가 마침내 이런 데까지 관심을 갖고 배려하게까지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그 동안 이 나라에서 헬라스 고전의 세계는 거의 간접적으로만 알려져 왔을 뿐이었습니다. 이 나라 학계에서는 마치 산간 벽지처럼 접근하기 힘든 고장으로 여겨져 오던 그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이곳에도 놀랍고 눈부신 경관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이 나라 사람들에게도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야 이곳이 이 나라 학계에서도 찾아가 봄직한 명승지들 가운데 하나로 알려지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헬라스 고전의 세계가 그처럼 오래도록 우리에게 접근하기 힘들었던 데는 두 가지 까닭이 있어서였습니다. 하나는 언어적 장벽이고, 다른 하나는 그 언어로 된 원전에 대한 제대로 된 역주서와 참고 문헌이 거의 없었다는 겁니다.
서양의 사상이 이 나라에 유입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 토양은 미처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채로 다 큰 나무들을 이식해 온 셈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합니다. 또한 이제껏 이 나라에서는 동서의 사상적 차이를 말할 때, 마치 당연한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서양의 고대 사상은 아예 한쪽으로 제쳐놓은 채로, 근세 이후의 서양 사상과 동양의 고전들을 중심으로 한 사상을 바로 비교해 왔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건 마치 동양의 할아버지 생각과 서양의 손자 생각을 비교하는 것과도 같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시대로 따지자면, 공자(552-479)와 맹자(372-289) 사이의 기간에 소크라테스(469-399)와 플라톤(427-347)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384-322)가 살았으며 활발한 활동도 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지역과 역사적 상황만큼이나 큰 차이를 보이는 면도 있지만, 참으로 놀랄 만큼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중용 사상과 같은 공통 관심사에 접하면, 어쩌면 그리도 비슷한 생각들을 비슷한 시기에 그들이 했을까 하고 새삼 놀라게 됩니다.
저는 고전의 제대로 된 본격적인 역주 작업과 함께 이와 관련된 참고 문헌들이 우리 학계에 미칠 영향을 참나무 숲의 그것에다 비유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참나무 숲이 조성하는 비옥한 토양 때문에 거기에서는 200종이 넘는 식물이 함께 자랄 수 있다고 합니다. 고전의 그런 작업들은 이 나라 학계에 비옥한 학문적 토양을 조성해 줄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이 나라 학계의 비옥한 토양 마련을 위해 이제껏 나름대로 노력해 왔지만, 제게는 이미 한 일보다도 제 생전에 끝냈으면 싶은 일들이 더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건 이 나라에 있어서 서양 고전 학계의 학문적 자산을 몇십 년이나 앞당겨 축적해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의 이 상이 저의 그런 작업에 대한 큰 성원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동아일보의 가족과 인촌기념회 관계자 여러분, 심사 위원 여러분, 내빈과 친지 여러분! 참으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