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7일(금)
전도 이전에 반드시 선행 되어야 할 그것!
(행24:10~23)
더둘로의 발언후 바울은 고소내용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그내용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한다.
바울의 변론 내용을 단지 자신의 무죄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도 복음의 내용을 이야기 한다.
변론을 들은 벨릭스는 이미 복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으므로 바울이 죄가 없음을 알고 있었고
바울에게 자유를 주며 자유롭게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조치하며 재판을 연기 한다.
(묵상)
재판 과정에서 변론하는 바울의 모습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이야기하는 그의 복음을 향한 열정을 보게하며 나에게 이 아침 도전을 준다.
교회개척 당시에 전도하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무 연고자도 없는 낯선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고 3식구로 출발한 교회...
남편의 단독목회에 대한 응답을 얻지 못한 나는
영혼구원(전도)을 첫째 목표로 삼고 목회 하겠다고 호언 장담하던 남편, 의욕만 앞섰지 주님의 뜻을 구하는 무릎꿇는 시간도 없이 개척을 시작함에 내조자인 아내의 위치로 확신없이 어쩔 수 없이 동참게 되었고,
그 때로 부터 나에겐 수많은 의무들이 부여 되었다.
특히 전도생활!
자신이 전도 하겠다고 호언 장담하던 남편은 축호 전도의 대상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나를 앞세우게 되었고 자신은 내 뒤에서 자리 지킴이(?)...
그런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복음(내가 누리고 있지 못하였으므로 )을 전하였다.
"예수님을 마음가운데 모셔들이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임한다고, 그로인해 자신의 처해진 상황이 어떠 하든지 믿음의 삶으로 기쁨과 감사가 넘쳐 나면 삶의 형통은 저절로 따라오는 보너스.."라고 !!!
전하면 전할 수록 내 안에 기쁨이 사라지며 죄책감이 나를 누르기 시작했다. 내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 '너는 그렇게 살지 못 하쟎아? 너 지금 평안 하니?피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쟎아,더 괴롭쟎아?"등등의 소리들...
확신 없는 전도는 나를 더욱 지치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나의 영적 고갈(영적 충전없이)을 남편은 외면한체 전도와 목회 전반의 수행되야 할 일들을 내게 짊어주는 격이 되었다.
이상한 것은 그렇게 확신 없는 전도에도 한동안 결신되어 성도들이 늘어났다.
성도수가 늘어 날 수록 내가 감당할 일들은 점점 늘어만 났고
심지어 차운행 까지도 나의 몫이었다.
에배가 없는 날엔 전도로,
예배가 있는 날엔 새벽부터 식사 준비에 반주, 찬양인도, 아이들 돌보기, 주일학교,전화심방,성도들 케어링(상담..)차운행...모두가 나의 몫이었다.
모든 교회일정이 끝나면채력은 고갈상태이지만 이어지는 가사일들,
영혼육 모두가 지쳐만 갔다.
남편의 위로와 격려를 바라지만 남편은 더욱 힘쓰기만을 기대하며 내게 영육의 수퍼우먼을 강요(?)
남편으로부터의 위로와 격려는 조금도 기대 할 수 없었다
급기야는 우울증에 빠지고 말았고 그 우울증 조차도 사모라는 위치때문에 가슴깊이 꼭꼭감추고 위선(?)을 떨어야만 했다.
그러한 상태에서 나는 전도를 계속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전하는 복음의 열매가 내안에 없는 상태에서 전하고 있는 내 자신이 사기꾼 같이 느껴 졌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인센티브를 늘리기 위해 좋지도 않은 물건 열심히 팔러다니는 영업사원처럼 교인숫자 늘리기위해 복음을 팔러다니는....
상황이 거기에 이르자 내가 전하는 복음은 더이상 복음이 아니었다.
그래 전도를 중단한 나에게 남편은 영적 점검과 도움을 주기는 커녕 전도하지 않는 나를 믿음없는 게으른 사모, 나태한 사모로 질책만을 하였다.
나의 우울증은 더욱 깊어만 갔고 아들앞에서 조차 무너진 나의 모습을 감출 힘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한 나에게 주님은 안식을 허락 하시며 말씀으로 직접 치유해
주신 것이다.
말씀 묵상을 통한 지성소의 만남으로!
며칠전 오랜만에 만난 대학 선배와 며칠후 만났던 후배의 표현으로 오늘의 치유된 나를 확인 시켜 주시기도했다.
내 모습속에서 어둠이 사라졌다고 빛이 느껴 진다고...
후배는 연유에 관해 질문해 왔고
나는 당연히 말씀 묵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재를 말하게 되었다 그 후배 또한 잘은 안되겠지만 말씀 묵상을 시작 하겠노라고 다짐하고 헤어졌다.
진정한 전도의 원리는 이것이다.
먼저 내가 복음을 누리는 것,참으로 중요하다.
과거에 내가 전도할 때 전한 복음은 내용 면에서는 잘 전하였다.
내가 전한 복음은
불신자로 하여금 현세적 삶의 열매를 바라기 보다는 영적 풍요를 소망하도록 전하는 것이 핵심 이었기때문에
그러나 문제는 내가 그 복음을 누리고 있지 못함에 있었고 그러한 상태에서의 전도가 사단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복음의 진수를 누리는 나를 향해 만나는 사람들의 질문이 있고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이 자연히 복음을 전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기쁨과 소망을 품고 돌아가게된다.
이것이 참된 복음전도의 원리가 아닌가?
전하는것 이전에 누리는것!
복음을 누리는 것이란
십자가에 나는 죽고 그리스도와 하나가되어 부활의 삶을 사는 것
즉, 현실의 조건에 지배 당하지 않고 천국을 누리는 삶!
부활의 삶을 사는 자만이 참된 전도자의 삶을 능력있게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 남편을 비롯해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복음을 누리고 있는가 보다는 한 성도가 전도하는 자로 일하기를 바라고 그렇게 강요 한다.
심지어 총동원 주일에 관광버스 몇대씩 동원해서 등록되어지는 그들 그들은 과연 어떤것을 기대하고 동원 되는 것일까? 과연 복음을 옳게 소개받은 것일까?
바울의 재판을 보류하며 바울에게 자유로운 지인들과의 만남과 자유로운 생활을 보장한 벨릭스의 처분을 보면 본문에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지세히 아는고로(22절)"표현 되어있다.
복음에 대해 긍정적인 앎이었기에 바울에게 선처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때문이었을까?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삶의 소문 때문이었을 것이다.
복음을 온전히 누리는자는 저절로 율법을 지키게 된다.
억지로 얽매어서 행하는 것이 아닌 자의로,능동적으로...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경험한 사람은 그 은혜가 감사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심사숙고 하게되어지고 자연히 주님 기뻐하실일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히그러한 사람의 삶은 주님을 닮게 되어지고
분쟁하고 다투고 움켜쥐기 보다는
화목하고 포용하고 나누고....
자연히 선한 행실(율법적 행실이 아닌)을 보고 믿는자의 수가 많아지는것 이것이 참된 전도의 원리인 것이다
지금 사회에서 바라보는 교회는 어떠한가?
심지어 '개독교'라 명명하며 기독교를 안티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 지고 있는 것이다.
교회들이 성도 숫자 늘리기에만 몰입되어있는 현실의 부작용이라 하겠다.
이 땅위에 모든 교회와 사역자들이
참으로 복음이 복음되게하는 교회들과 사역자들이 되어
세상가운데 그리스도의 참된 능력을 나타내므로
그 소문을 듣고 믿는 무리의 수가 넘쳐났던 초대교회의 부흥처럼
참된 부흥이 있기를 이 아침 뜨거운 맘으로 기도하게 된다.
(기도)
복음을 누리지 못하고 알기만 하였던 저의 실패의 모습.
그로인해 너머진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안아 일으키시어
오히려 복음의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 주시고 참된 복음의 열매 낙원을 회복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억지로가 아닌 절로 되어지는 복음전파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고 복음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이땅의 교회들과 사역자들이 이미 인도되어진 주의 백성들을 천국을 누리는 기쁨의 자리로 안내하는 사명을 다하게 하소서.
그러한 복을 누리는 자들이 저절로 복음을 전파하게되는 원리를 실천하는 복된 땅이 되게하소서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