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밋밋하게 출발하다. **
여행 경비의 40%를 지원 받는 좋은 기회라 해도 3년 주기 학교평가를 위한 200여 쪽이 넘을 보고서 작성을 앞두고 여행을 결심하기란 쉽지 않았다. 출발 전에 초본이 나오면 내가 검토만 하면 되리라 여겼는데 연구부장은 이 일이 처음이라 일의 진행이 좀 더뎠다. 목 마른 자가 우물 판다고 결국 중간에 내가 끼어들어 같이 작업을 했으나 출발 전까지 초본이 나오지 못했다. 거기다 독도 문제로 일본여행을 자제하라는 공문도 왔지만 나는 괘념치 않기로 했다. 그건 깡이었을까. 내가 그렇게 부러워하는 ‘배짱을 한번 부려보는 것’이었을까. 모르겠다. 아무튼 전날 밤 잠자리에 들 때까지 무엇을 입고 갈지 결정도 못하고 대충 짐을 꾸렸다. 여름이라 그런지 몇 가지 옷을 챙겼는데도 가방이 참 단출하다. 23일 새벽 5시 10분, 회색 마 원피스를 입고, 내가 떠나 있는 동안 이 곳이 무더위였으면 좋겠다는 이기심을 가득 품고 집을 나섰다.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다. 북해도 여행 갈 때 읽으라고 며칠 전 조카가 건넨 윤대녕의 소설집 ‘눈의 여행자’를 펼쳐들었으나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이는 내가 여행 기분에 빠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면세점을 기웃기웃하였다. 멋진 가방과 구두에 제일 먼저 눈길이 갔지만 차마 매장 안에 들어서지 못했다. 갖고 싶은 상품들이 잘 진열된 세련된 매장 안은 하나같이 한가했다. 그러니 더더욱 선뜻 들어설 수가 없었다. 값이 얼마쯤일지 짐작도 되지 않는 상품들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사지도 못할 것을 들어보고 신어보고 값을 물어보는 일은 구차하다. 여행의 설렘이 충만하게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면 나도 한번 호기를 부리며 내 안에 깃든 사치에 대한 욕망을 낭만이라 포장하며 살짝 즐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체 설레지 않았다. 눈으로만 즐기다가 사람들이 제법 많은 상점에서 구찌 선글라스를 샀다. 너무 평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튀지도 않는, 그래서 사고 보니 오히려 밋밋하게 몰개성적이다. 물경 25만원이다.
하나투어에서 전세를 냈다는 점보 비행기 안엔 온통 한국인뿐이다. 무려 300명이 하나투어의 이 여행상품을 이용해서 북해도로 간다니 입이 짝 벌어질 일이다. 북해도, 도대체 그 곳은 어떤 곳일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빨아들일 만큼 대단한 매력이 있을까. 부질없는 잡생각이 먹구름처럼 머릿속을 점령했으니 소설이 읽힐 리가 없다. 창밖은 하얀 구름바다다. 천사가 있다면 저 곳에 살지 싶다. 고요하고 평화롭고 꿈 같은 적요의 바다였다.
입국심사장을 빠져나오는데도 한참 걸렸다. 치토세 공항은 작은 지방공항이란다. 막 비가 그친 듯 땅은 촉촉이 젖어 있다. 그래서였을까. 약간 습하다. 선선한 초가을 날씨를 기대했는데 실망이다. 공항 화장실에서는 약간 퀴퀴한 냄새가 났다. 그런데 그 냄새가 왜 그리 안도감을 주는지 혼자 웃었다. 일본도 별 거 아니네, 뭐 그런 생각이었나 보다. 하지만 버스를 타고 오타루로 이동하면서 나는 생각을 바꿨다. 일본은 ‘별거 아닌 게’ 아니었다. 참 깨끗하고 가지런하다. 막 양치질을 한 뒤의 상쾌함 같은 것이 온몸을 관통한다. 기분이 참 좋다.
** 아쉽게 돌아오다. **
4일째 아침이 밝았다. 신내 호텔이라 그런지 식당 규모가 작다. 문 밖에 서서 기다렸다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맛있었다. 가볍게 먹어야지 마음 먹었지만 또 배부르게 먹고 말았다. 방으로 돌아와 짐을 다시 꾸렸다. 삿포르 맥주공장에서 산 캔맥주와 치즈 상자는 가방이 큰 사람에게 맡겼다.
오늘 날씨는 마치 10월초 같다. 하늘은 높푸르고 하얀 구름은 가볍고 바람은 선선하고 볕은 따갑다. 구(舊) 북해도 청사로 가는 길에 삿포르 시민들이 사랑한다는 시계탑을 구경했다. 지금이야 별 거 아니지만 1881년 당시로서는 삿포르의 랜드마크로 놀라움이었을 것이다. 오래 된 것들을 만날 때는 시간의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감동이란 오늘의 길 위에서 어제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증폭된다. 어제의 시선 속에서만 시간의 가치를 벅차게 느낄 수 있다. 어제의 시선 속에서 붉은 벽돌의 중후한 청사 건물은 위용을 자랑했다. 어제의 건축적 위용 위에 오늘의 온갖 꽃장식들이 아름다움을 더해주었다.
시내 면세점에 들렀다. 인솔자는 낯이 덜 두꺼운지 물건 사기를 종용하지 않았다. 키토산이 들어간 영양제를 많이들 사는데 망설이다가 결국 안 샀다. 안 먹을 게 뻔했다. 무릎 아픈 엄마에게 줄 관절연고와 파스, 내가 쓸 일회용 해초 마사지 시트 한 상자를 샀다. 시세이도 화장품은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싸지도 않기에 만지작거리다 안 사고 말았다. 그래도 비닐 쇼핑백이 제법 묵직하다. 과자를 좀 사고 싶었는데 없었다.
공항은 북새통이었다. 짐을 부치는 창구도 몇 안 되고 탑승구역으로 들어가는 곳은 단 한 곳이었다. 기다리는데 1시간 30분이나 걸렸다. 여행지에서 오가며 스쳤던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대체로 부은 표정이다. 저들에게도 3박 4일, 여행을 제대로 하기엔 좀 짧고 자유시간도 없고 방문한 몇몇 장소는 전혀 마음에 와닿지 않는 곳들이었나? 내가 잘못 본 것일까. 아무튼 내게 이번 여행은 살짝 김 빠진 맥주맛이었다. 더구나 떠나 있는 동안 한국은 비가 많이 와서 그리 덥지도 않았다 하니 이번 여행의 맛이 더 줄어든다. 나도 참 웃기다.
집에 돌아와 짐을 푸는데 물건 하나가 안 보인다. 다 뒤져도 안 나온다. 행운의 상징이라는 부엉이 목각이다. 작아서 손 안에 쏘옥 들어오는 것이었는데 어디서 놓쳤을까? 아침에 짐을 다시 꾸리며 잠깐 가방에서 꺼내 탁자 위에 놓았던 생각이 났다. 안타깝다. 부엉이를 선물로 받을 그에게 갈 행운마저도 내가 길에서 잃어버린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싸했다.
첫댓글 삿포르의 눈은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치솟을 만큼의 눈이라고 하더군요. 얼마전 일본의 한 맥주업체는 덥혀서 먹는 맥주를 내놨다던데.. 침이 꿀꺽.. 그런데 독도에 딴지거는 일부 십장생들 따문에..풉. 북해도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북해도 여행은 이 문장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시절에 하는 것이 제격일 듯해요. 어쩐지 좀 싱거운 여름여행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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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한 느낌은 어쩌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우동 한 그릇'이란 글과 닮아 있어서 아닐까 싶어요. 네, 모든 여행은 고유의 색깔이 잇지요. 두고두고 곱씹을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색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