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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학>, 2009년 가을호.
<서정시학 집중 조명 대담 원고>
동해반점 외 4편
신덕룡
저녁의 마지막 햇살이
짐을 막 내려놓은 진영 읍내 여관방 창턱을 넘어
구수한 자장 냄새를 묻혀 왔다.
창문 열고 내다보니
길다방을 지나 철물점 옆 중국집에서 몰려나오는데
어린 시절, 진가네 동해반점을 닮았다.
좀처럼 웃지 않는 진가는 능구렁이처럼 의뭉해서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다고 했지만
동해반점의 자장 볶는 냄새는
한길을 건너와 콧구멍으로 목구멍으로 넝쿨처럼 벋어와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칭얼대는 허기를 들쑤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집 앞을 지나다니게 했으니
오랜 친구처럼 그와 한때
늘 목이 말랐던 내 유년의 지옥을 건너왔다는 것을
먼 길을 돌아 온 마음들이 가로등아래 모여 앉아
두런두런 노독을 풀고 있지만
굳이 어제의 상처까지 되새기지는 않는다.
아물어버린 상처란 저절로 삭아 맑은 물로 우러나
잔잔한 고요를 얻은 뒤에야
그리움 한켠에 별빛으로 들어앉기도 한다.
아득하고 때로는 시큰해서
물기를 훔치듯 마른 걸레로 닦아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린, 지우지 못한 기록들을 다 뒤적이려는지
어둠이 우르르 방으로 몰려왔다.
몸을 돌려 스위치 찾아 불을 켜려는데
누추한 풍경 몇 점
눈길도 마음도 빠져나간
망각의 그물에 걸려, 단내를 피워대고 있다.
접촉 불량
내일을 알 수 없다. 이십 여 년
눈 뜰 때마다 곁에 있던, 꼼짝없이 붙어 병수발 하던
여든 넘은 아내가 떠났다.
함께 가지 못해 끙끙 앓다 돌아선 수인(囚人)이
마지못해 한발 앞서 갔다.
없다는 사실, 딸네 집에 다니러 갔다는
지금은 없다는 사실이
남겨진 노인에겐 캄캄한 비애다. 초점이 흐린 눈에
벼랑 하나 솟아올랐다.
마주보며 한 삽 한 삽 퍼 올리던 무덤의 흙처럼
더 말라 푸슬푸슬해지기 전에
무거운 몸 털썩, 내려놓는 게 상책이겠다.
생각이 있다면 그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가 잿더미로 꽉 채워진 아궁일게다.
깜빡깜빡 끊겼다 이어지는
기억이 증거다. 온전히 혼자 몫으로 남았다.
졸정원기
쓸쓸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린 탓인지 사람의 그림자 안개 속에 두엇,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선득했고, 꼬리로 연 줄기를 치고 가는 물고기의 등이 퍼랬고, 높은 담장을 넘나드는 새들은 야위었다.
일설에 의하면 졸정원(拙政園)이 아니라 왕정원(王政園), 왕씨의 정원이었는데 노름빚에 넘어가 못날 졸(拙)자로 굳어졌단다. 일설이란 믿을 게 못된다. 뜬소문이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 잡을 수도 놓을 수도 없으면서 가시처럼 찔러대니 허무 아닌 상처다.
견산루(見山樓)에서 좀 더 오래 머물자고 했더니
조선족 안내원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노름빚에 마누라도 넘긴다지요
여긴, 마누라는커녕
먼 산조차 잊은 고수들만 앉아 한 세월 낚는 데라며……
멀리 서 온 관광객들에게 몸을 내준 정원은 담담했다. 안개로 몰려와 바람으로 들고나는 지금, 주인과 객이 따로 있겠느냐는 듯 말 없으니 다행이다. 다행이다 하며 빠져 나오는 데, 댓잎 위의 물방울이 목덜미에 뚝 떨어졌다. 잃을 게 많은 내 몸이 오싹했다.
김씨 이야기
- 원당일기 12
겨우내 비어 있던 비탈밭에 거름더미들이 쌓였다.
저건, 한밤중 뒷방에서 혼자
어둠을 벗 삼아 술을 먹는 불목하니 김씨 작품이다.
그가 소주잔을 기울이는 모습은 흡사
우리에 갇혀 치밀어 오른 화를 쥐어뜯는 들짐승 같다.
보이지도 않는 철망을 쥐고 흔들다
서울 부산 제주 목포 멀리 아라비아 사막까지 휘돌아치던
그는, 등걸잠 한숨 자고나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 지게를 지고 밭으로 간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일이 생업이지만
이제 흙을 골라 씨를 뿌리면 냄새 또 한 번 진동할 게고
잠자던 씨앗들 진저리치며 눈을 뜨지 않겠냐고
그 눈빛이 아른거려 아직은 떠날 때가 아니라고 위로하던
그는, 오늘따라 등허리에 짊어진 거름더미가
목덜미를 움켜 쥔 손 같았다며
부드럽고 따뜻해서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며
밭둑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워 문다.
내가 보기에도 그의 탄식은 물기 빠져나간 검불 같은데
헐렁한 등이 부려 놓은 거름더미들이
산비탈의 피폐한 땅에
길을 만든다면 뿌려질 씨앗의 싹을 틔울 양식이라면
봄볕 아래 수많은 생을 한꺼번에 풀어 놓는 큰 손바닥일 터
어떤 손이 이보다 더 크고 따스하랴.
산 아래쪽 세상을 향해 눈빛 반짝이는 꿈들 사이
느닷없는 연민이 끼어들었으니
오늘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든 새들 바빠지겠다.
리플을 달다
- 원당일기 13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당나귀를 끌고 가다가 아들을 태웠고, 저도 올라탔고 끝내는 땀을 뻘뻘 흘리며 당나귀를 들쳐 메고 갔다. 다 옛날이야기다.
젊은 여자가 짐을 싸면서 운다. 그녀 역시 주제를 잘 몰랐거나 지나치게 몰입했던 거다. 여기서는 누구도 주인공이나 주인공인 마음에게 왜 그랬냐고 묻지 않는다.
단순하고 속없는 게 의심이다. 뒤로 감출수록 물에 뜬 기름 같아 울긋불긋 표정이 많은데,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내뱉었으니 제대로 한방 먹은 듯싶은데
무설설(無說說)! 저 보따리는 작고 낡아 가져온 짐조차 울룩불룩 삐져나왔으니 입만 여럿 달린 전거와 주석들까지 다 싸매지는 못하겠다. 질질 흘리겠다.
메고 가면 어떻고 패대기치면 또 어떠랴. 눈 질끈 감고 의심만 잘라낼 걸 눈물 끝에 리플을 달았으니 오늘, 나도 줄을 잘못 당겼다, 무심코 겁도 없이.
신덕룡
경기도 용문에서 출생해 경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했다. 1985년 현대문학에 평론으로, 2002년 시와시학에 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소리의 감옥, 저서로 환경위기와 생태학적 상상력 생명시학의 전제 등이 있다. 1998년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광주대 문창과 교수로 있다.
e-mail : sdry56@hanmail.net
<집중 조명 대담>
맹문재 : 잘 지내시지요. 선배님과 1년에 한두 번은 뵙는 것 같은데, 이런 대담을 가질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네요. 그렇지만 우연 같은 일들도 모두 필연의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므로 이 대담도 큰 의의가 있겠지요. 먼저 건강에 대해 여쭙지 않을 수 없네요. 이명 때문에 고생이 많다고 들었는데, 요즘은 어떤지요?
신덕룡 : 참 여러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네요. 벌써 한 10년 되는데 이제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깨복쟁이 친구처럼 받아들이기까지 한 7년 정도 걸렸네요. 친구가 되면 아무리 미워도 떼버릴 수 없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으니 성가시고 귀찮아도 같이 살자고 생각하니까 이젠 좀 견딜만 합니다. 한편으로는 욕심 좀 버리라고 끊임없이 귀에 대고 잔소리를 해대니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맹문재 : 선배님의 문학세계에서 가장 궁금한 점은 장르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배님께서는 1985년 현대문학에 평론으로 등단한 후 활발하게 활동해 1998년에는 김달진문학상도 수상했습니다. 그러던 선배님께서 2002년 시와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셨고, 『소리의 감옥』(천년의 시작, 2006)이라는 시집을 간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두 번째 시집이 ‘서정시학’에서 간행될 예정에 있습니다. 어떤 계기나 동기로 평론에서 시작 활동으로 전환했는지 궁금하네요.
신덕룡 : 언젠가 「조명희론」을 쓰면서 장르 전환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조명희의 경우 시를 쓰다가 소설로, 러시아로 간 뒤에는 시와 소설을 썼습니다. 이런 장르 전환의 계기는 사상의 변화에 있었지요. 세계관의 변화에 따라 현실을 인식하고 드러내는데 가장 적합한 형식을 찾았던 셈입니다. 드러내고자 하는 내용에 따라 형식이 바뀐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의 경우, 세계관의 변화와 같은 거창한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있다면 삶의 조건 변화에 따른 적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10여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귀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는데, 예삿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어지럼증과 함께 밤낮으로 계속되면서 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에서 낮 생활이 제대로 될 리 없었지요. 장시간의 집중력을 요하는 평론을 쓴다는 것은 물론 일상적인 생활도 어려웠지요. 내 몸과 영혼이 온통 소리에 시달리면서, ‘나’라는 사람의 존재 이유가 없어진 듯한 외로움과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내 삶 전체를 되돌아볼 수 있었고, 소리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시 쓰기가 시작된 것이지요.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맹문재 : 그렇군요. 온몸을 괴롭히는 소리에서 벗어나려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가슴이 뭉클합니다. 그렇게 시를 써서 첫 시집을 간행했을 때의 기분은 어떠했나요. 누구나 첫 시집을 낼 때는 설레는데, 선배님께서는 남달랐을 것 같네요.
신덕룡 : 첫 시집 이야기가 나오니 부끄러워집니다. 한마디로 두려움이었습니다. 제가 시비평을 해왔지만 내 시에 대해서는 도저히 판단이 되지 않더군요. 몇 번을 망설이다가 그래도 내 삶의 솔직한 기록이니 시집으로 엮자고 결심했습니다. 또 주위에서 많이 격려를 해주었구요. 언감생심, 독자들의 반응은 기대할 수도 없었고, 나를 잘 아는 시인이나 평론가들에게 무시만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시집을 내고는 어디로 도망가고 싶었지요. 다행히 소리의 감옥이 문화예술위에 우수도서로 선정되면서,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당시 심사위원들께 두고두고 감사할 일이지요.
맹문재 : 잘 들었습니다. 그러면 작품 세계로 이야기의 방향을 돌려보지요. 첫 시집에서 내세우고자 한 주제 혹은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면이 있는지요. 이 질문은 범위가 큰 것이어서 대답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여겨지기도 하는데, 독자들에게 선배님의 중심적인 시세계를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신덕룡 : 시세계라 할 것은 없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 당시, 제가 관심을 가진 것은 소리의 성격이었습니다. 제가 소리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시작된 관심이기도 한데, 반복적으로 몸에서 나는 소리는 몸과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지요. 그러나 소리의 진경은 침묵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내면에서 아우성으로 들끓어도, 입을 꾹 닫고 있는 침묵이야 말로 진정한 소리의 모습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가만히 살펴보니 어떤 것은 가시가 돋혀 있고,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팽팽해져 있고, 화살촉처럼 눈빛을 번뜩이고, 칼날처럼 날카로워 제 가슴을 베고 있고 …… 참 다양합디다. 이건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존재의 외로움과 같은 것입니다. 첫 시집의 대부분은 소리의 다양한 모습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맹문재 : 잘 들었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시집에서는 첫 시집과는 달리 어떤 면에 관심을 혹은 중점을 두고 있는지요.
신덕룡 : 남의 시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하는 게 나의 일이었는데, 제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니 쑥스럽습니다. 소박하게 말씀드리면, 생에 대한 연민이라고 할까요. 잘 아시겠지만 연민은 끌어안으려는 노력이지요. 생명을 지닌 것들끼리의 동류의식이니 여기엔 위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만 있지요. 또한 삶과 죽음을 하나의 리듬으로 본다면, 삶은 꼭 틀어쥐고 매달릴 것도, 대단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는 동안은 고통과 기쁨을 짊어지고 나가는 것이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의 운명이지요. 또 그 자체의 율동이기도 하고…… 나 역시 예외일 수는 없지요. 한 생애란 잠깐의 시간이지만, 비록 비루해 보일지라도 너나 할 것 없이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실현해 가는 모습이야말로 생명의 가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소중한 생명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만, 제대로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맹문재 : 「만월」에서는 달빛을 차지고 질긴 면발로 비유하면서 가난한 가족의 상황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돌리는 재봉틀 소리가 들려오기도 하지만 환한 달빛 같은 결로 보이기도 합니다. 작품을 읽고 있자니 선배님의 가족이 궁금해지네요. 분가하기 전의 가족 상황을 소개해주실 수 있는지요.
신덕룡 : 시를 쓰면서 저 자신이나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될 수 있으면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게 쉽게 되지는 않는군요. 맹 선생 이야기를 들으니 서너 편이 떠오르는데, 「동해반점」도 그렇지만 이 시에서는 추억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기억과 추억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추억에는 더 직접적인 체험이 결부되어 있다는 생각이지요.
제 유년 체험의 특징은 천국과 지옥을 한꺼번에 맛본 것이었지요. 집안 사정이 급전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배고픔에 시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지요. 어린 나이에 이렇게 굶주릴 바에는 아예 죽어버리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앞으로 살면서 지금보다 더한 고통은 없을 것이다. 어떤 상황도 이보다 나쁠 수는 없다는 오기가 뻗치기도 했습니다. 물론 나름대로 극복했습니다만, 이런 것이 제가 지닌 인격의 한 부분을 형성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여하튼 이런 지옥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한결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히, 또 묵묵히 가족의 삶을 일구시는 모습이 은연중 큰 힘으로 다가왔던 것이지요. 지금은 제가 모시지는 못하지만, 부모님 두 분 다 고향인 양평에서 친지들과 더불어 즐겁게 보내시고 있습니다. 돌아보니, 고통은 사라지고 아름답게 채색된 추억들이 펼쳐지는군요. 이런 게 그리움이 아닌가 싶습니다. 꼼꼼히 들여다보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맹문재 : 잘 들었습니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신 어머니께 저도 감사드립니다. 다음으로는 학창 시절의 얘기를 들어볼까요. 문학을 하는데 영향 받은 스승이나 작품이 있는지요. 학창 시절도 중고등학교와 대학 때가 다를 텐데, 작품을 쓰는데 보다 토대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시기를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신덕룡 : 제가 문학을 하게 된 동기는 중학교 다닐 때였습니다. 그 당시 국어 선생님이 시를 낭송해주셨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엘리엇의 「황무지」였습니다. 시의 내용에 자극받은 것은 아니고, 시낭송하는 모습에 반했습니다. 이후로 시에 대한 관심이 싹텄고, 대학에 진학한 것도 시인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대학생활을 하다보니 나와 같은 생각을 지녔던 친구나 선후배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꿈이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으로의 꿈을 접는 시기이도 했습니다. 혼자 다방을 빌려 개인시전을 열었던 1970년대 후반으로 기억하는데, 많은 이들이 찾아 왔고 선생님들에게 격려도 받아 한껏 고무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은 후배기 있었지요. 내 작품에서 김수영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는 말이었습니다. 말을 듣는 순간, “그래?” 하면서 대범한 척 했지만 너무나 혼란스러웠지요. 혼자가 되었을 때, 내 작품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과연 그런 것 같아 얼굴이 확 달아올랐습니다. 그리고는 남의 뒤나 졸졸 따라다녔다는 자괴감에 시달렸지요. 개성이 없는 작품을 남에게 보였다는 것도 그렇고, 열심히 해 왔는데 결국 아류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도저히 시를 쓸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시를 쓰고 싶은데, 시와 더불어 살고는 싶은데 자질이 없다는 절망감에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었지요. 그러다가 우연히 시에 대한 정밀하고 체계적인 분석이 가능하다는 것과 재미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쓰기만큼 의미 있는 일이란 생각에 평론 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지요. 그 후 20년이 더 지나서 다시 시를 쓰게 되었으니, 시로 돌아오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린 셈이지요.
맹문재 : 「졸정원기」를 읽으니 중국 여행을 다녀온 것으로 보입니다. 2001년 선배님과 저는 최동호 선생님 등을 모시고 네팔 여행을 한 적이 있지요. 비도 많이 맞았지만, 히말라야에 오르기도 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지요. 되돌아보니 다시 가고 싶을 정도로 그리워지네요. 외국 여행을 한 곳 중에 시인으로서 가볼 만한 데가 있다면 소개를 부탁드릴까요. 그리고 시를 쓰는 데 여행이 어떤 점에서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는지요.
신덕룡 : 편안한 쪽으로 말길을 터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때, 많은 대화를 나누고 참 좋았지요.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고 올라가, 푼힐 전망대에서 보던 일출 광경은 지금도 선합니다. 여행이란 추억을 만들어서 좋은가 싶습니다. 이런 풍광과 관련해서는 유럽에서 차를 빌려 알프스 산맥을 넘으며 본 풍광 역시 제 기억에 새롭습니다만, 풍경이 제게 주는 것은 스쳐간 인상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길을 물어보던 오토바이족들, 나란히 서서 햇빛을 받아 번쩍이던 오토바이들, 잔디밭에 누워 나를 바라보던 호기심어린 그러나 친절한 눈빛과 털북숭이 얼굴들, 시큼한 땀냄새 같은 것들이 더 생생합니다. 풍경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더 뚜렷하게 떠오르지요.
여행지를 말씀하셨는데, 많이 다녀보지 않아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면 다 가볼만한 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살이의 기쁨과 슬픔, 울고 짜고 시시덕거리는 모습들이 어우러진 곳입니다. 낯선 곳에서 아주 친숙한 나의 얼굴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여행의 참맛이 아닐까 하고요. 이것들이 여행에 관한 전체적인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맹문재 : 「김씨 이야기」 「리플을 달다」는 ‘원당일기’의 연작으로 쓴 작품입니다. 첫 시집에서도 ‘소리의 감옥’으로 연작시를 썼습니다. 특별히 연작시를 쓰는 의도가 있는지요.
신덕룡 : 첫 번째 시집에서는 ‘소리’에 너무 민감해서 또 그놈의 정체를 파헤쳐보려고 연작을 썼습니다만, 이번에는 특별한 의도는 없습니다. 다만, 지지난해 해인사 원당암이란 곳에서 무슨 특수훈련을 하듯 석 달 정도 참선수련을 했는데, 거기서 씨앗이 된 것들을 모은 것입니다. 그 당시 새벽 3시부터 밤 9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음만 들여다봤습니다. 물론 대책 없이 복잡한 나 외에 본 것이나 깨달은 것이나,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참선 사이사이 산책 중에 여러 가지들이 살갑게 다가오더군요. 그것들이 씨앗이 되었지요. 남들은 참선을 하면서 지니고 있는 것들을 버린다는데 나는 오히려 줍고 건졌으니 공부를 거꾸로 한 셈이지요.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김씨 이야기」에서 보듯 끊임없이 밖으로만 떠돌려는 불목하니 김씨가 저보다 작고 여린 생명에 대한 연민 때문에 주저앉듯, 생에 대한 연민이야말로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는 힘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지요. 자신도 모르게 자기 확대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리플을 달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님이나 우리 같은 세속인이나 똑같은 처지라는 것이지요. 인간의 특성 중 하나가 자기중심적이라는 것 아닙니까. 자기를 덜어내지 않는 한, 그 입에서 나온 말이나 행동 모두 자유로울 수 없지요. 범박하게 말해서 ‘나’ 아닌 상대에 대한 배려와 이해 없이 같은 길을 추구한다는 것은 무망하기 이를 데 없지요. 이것은 의식적인 노력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무설설’로 이야기하듯 이심전심의 마음이 아니면 힘든 일이지요. 여하튼 많은 것들을 거기서 느꼈는데, 이런 것들을 한데 모았을 뿐입니다.
맹문재 : 선배님께서는 평론활동이나 학술활동을 하시면서 환경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앞으로 환경 문제를 담는 시를 창작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요.
신덕룡 : 이 문제는 제가 숙제처럼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환경문제와 관련해서 편저까지 4권의 저서가 있습니다만, 제 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지요. 우선 소재가 그렇고 주제 역시 환경문제와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제 관심의 방향이 ‘나’나 ‘인간’의 존재에 집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평소에 하던 말 중, 평론이 너무 시류를 타지 않느냐는 것인데, 이즈음 환경이나 생태문제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글이 많지 않습니다. 더불어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그러나 서서히 바뀌어야 할 삶의 모습들 역시 눈에 띄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평론을 쓸 때와 달리, 시를 쓸 때 왜 이런 생각들을 형상화하지 못하는가? 몇 번이고 제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주제를 중심으로 한 시편들을 따로 모아두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이와 함께, ‘의도의 오류’란 말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쓰다보면 시 자체의 논리가 형성되고 그것이 시를 만들게 하는 듯싶습니다. 이건 아무래도 ‘나’ 자신의 문제가 더 크기 때문이지요. 나를 떠나 외부의 것들까지 눈길을 주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한 게 아닌가. 그러나 내 시 쓰기가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관심이고, 이런 관심과 태도를 전체론적 사유 속에 구체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점차 생명을 중심으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어느 한 방향으로 이어질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맹문재 : 선배님께서는 창작자이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쳐온 교육자이기도 합니다. 창작을 꿈꾸고 있는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들려주시지요.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들을 계획하고 있는지요.
신덕룡 : 제가 학생들에게 하는 말 중 하나는 즐겁지 않으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정 수준에 오른 학생들 중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못하겠다는 말을 하고, 실제로 문학과 전혀 무관한 방향으로 나가는 학생이 있습니다. 물론 게으른 학생도 있지요. 그럴 때마다 저는 힘들기만 하냐고 묻습니다. 즐거움이 있는 고통이라면 계속할 것이고, 즐거움이 없다면 빨리 삶의 방향을 틀라고 하지요. 무릇, 창작이란 새로운 진실을 창조하는 일인데 특별한 천재라면 몰라도 힘들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 고통은 폭 삭은 한숨에서 나는 단내 같은 것이지요. 이 맛이 곧 즐거움이란 생각입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면, 즐거움이란 시간을 잊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집중할 때 나는 시간 밖에 있습니다. 내 의식이 ‘의식하는 나’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지요. 즐거움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으셨는데, 앞으로도 이런 즐거움을 더 많이 누리려고 애쓰겠다면 너무 성의 없는 대답이 될까요.
맹문재 : 여러 가지 말씀들 감사합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좋은 작품도 많이 쓰세요. 살아가다 보면 뵙게 될 텐데, 그때 또 인사를 드리지요.
맹문재
시인, 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