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권 사건..② (1979년~1981년)
[鄧麗君등려군 傳記 (7)/ (1953년 1월29일~1995년 5월8일) 쁘리비엣 飜驛]
일본의 강제 출국을 당한 등은 미국행을 선택했다.
14살부터 음악계에 진출한 관계로 학업을 중단한 그는 마침 이번 기회에 다시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켈리포니아대 LA 분교] 야간학교에서 "영어 일어 생물학과 수학" 등 학과를 시작했다.
하얀 T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자유롭게 등'하교할 수 있게 된 누나를 보고
鄧麗君의 남동생은 이것이 바로 '새옹지마'가 아닌가 라고 표현했다.
처음에는 학교 학생들이 鄧을 못 알아봤지만 그의 미모와 우아함은 얼마 후, 바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낮에는 쇼핑, 독서, 데이트 등을 즐기고 때로는 낚시도 다녔다.
밤에는 수업을 하고 휴가 때는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공연을 보러가곤 했다.
등려군의 어머니께서도 여러 해 동안 거의 鄧'의 메니저 역할을 해왔기에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없었는데,
간만에 여유로운 여행도 할 수 있고 취미로 부동산 투자도 하셨다.
鄧의 어머니는 [재'테크]에 남다른 관심과 재능을 갖고 계신 분이시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참으로 평화롭고 자유로 왔지만 혼자서 하염없이 눈물 흘릴 때도 많았다.
마침 홍콩 연예인 성룡도 그때 LA에서 촬영중이었다. 그때 성룡은 아직 무명 시절이다.
그 시절 두 사람은 이국에서 자주 만남을 가졌다. 중국인이라는 친근감 때문이다.
두 사람은 자주 만나서 드라이브도 하고 "석양"을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같이 했다.
애매모호한 관계로 2년 동안 지내다가 끝내 관계를 정리했다.
서로 성격 차이도 있고 둘 다 연예인이다 보니 이미지 관리도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등려군이 학업에 전념하는 동안 각 지방의 팬(fan) 들은 결코 그를 잊지 않았다.
1979년 8월15일에 [말레이시아 등려군 팬클럽]이 성립되었는데
곤경에 처한 鄧麗君으로서는 '가뭄에 내린 단비'와도 같았다.
이 팬클럽(fan club)은 그 후, 수십 년 동안 정기 모임을 가졌고
모임에서는 팬 들이 서로 鄧'의 소식과 사진 그리고 음반을 나누고 바꿔 가졌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1980년 3월에는 또, [대만 금종상] 최우수 여가수 상의 영예를 안았다.
발빠른 음악계 메니저들은 벌써 鄧의 음악계 복귀를 위한 물밑 작업을 시작했다.
기회를 기다리던 등려군은 그해 7월부터
미국의 뉴욕, LA..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등지의 요청으로 점차 바쁜 공연 생활을 시작했다.
鄧'은 드디어 소원대로 1980년 9월 21일 다시 도쿄 공항에 나타났다.
그는 항상 그랬듯이 온화하고 우아한 목소리로
"여러분께 많은 심려 끼쳐서 죄송합니다." 라고 인사를 올렸다.
만감이 교차한 그 때 한편으로 鄧麗君은
"대만에서 나를 모시지 않은 한 나는 절대로(絶對) 가지 않겠다."라는 다짐을 했다.
그해 10월에 鄧은 4회째 홍콩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마카오 발음으로 음반 [그대를 잊으리..] 라는 제목으로 음반을 냈다.
이번 음반은 홍콩 가요계의 복귀에 촉매작용을 했다.
1980년 전후에 등의 감미로운 사랑 가요는 드디여 중국대륙 국민까지 매료시켰다.
등려군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그 시기 젊은이들의 유행으로 되었으며 가라오케(Karaoke)에서도 애창곡으로 자리매김이 되었다.
등려군의 노래는 [문화 대혁명]이란 고된 시기를 방금 거친 중국인의 매마른 감정에 오아시스가 되었다.
중국 대륙에서 자신의 노래에 열광 한다는 소식을 들은 鄧은 어떤 기자회견에서
"대륙에서 정말 저를 요청한다면 저로서는 마다할 리 없지요." 라고 농담까지 한 적도 있다.
이 기사가 나가자 대만 정부에서 가장 먼저 불안해 했다.
그래서 등려군의 누명을 벗어주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1980년 대만 문화관광장관께서 친히 미국으로 건너가서 정식으로 鄧에게 대만 공연을 요청했다.
출연 스케줄까지 가져갔다. 鄧麗君으로서는 마다할 일이 없었다.
그해 10월에 鄧은 [금문]에서 자선공연을 마치고 다시 [손문 기념관]에서도 자선공연을 했다.
그리고 1981년 초에 [대만방송국]에서는 "특별상"까지 그에게 수여한다.
사실 등려군이 미국에 있는 동안 "여권 사건”은 마무리 짓지 못했다.
어떤 민간인이 법원에 기소까지 했고 검찰 수사 때 鄧麗君은 또 미국에 있었기에 2년 동안 방치되었었다.
이번에 등려군이 귀국하자 경찰청에서는 자진해서 鄧의 서류를 꾸며서 "여권 사건"을 마무리 해 줬다.
대만과 중국 대륙사이의 팽팽한 이 시기에 대만 정부에서는
연예계의 큰 별인 등려군의 위력을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鄧麗君의 日記] 1981년---
다음은 鄧이 대만에 머무는 동안 착잡한 마음이 적힌 몇 편의 일기다.
첫날, 붐비는 거리를 거닐면서 대만의 특유 한 냄새가 느껴진다.
가슴이 짜릿했다.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의 얼굴도 더 젊어 보였다.
어머님도 고향이 그리웠던 것이다.
겨울이지만 타이베이는 여전히 봄날과 같았다.
몇 해 동안 외국에서 공연 하느라 갖은 어려움을 다 겪었다.
특히 국경을 넘을 때 크고 작은 짐꾸러미를 나르는 일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갑자기 집에서 우리를 손꼽아 기다리는 아버님이 생각난다.
어머님은 아버지를 혼자 내버려 둔 채,
나의 공연에 따라다니시기 때문에 아버지는 혼자 계시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항상 아버지에게 미안하다.
이번에 힘들게 휴가를 내서 집에 왔지만
3일 후에는 또다시 말레이시아 공연을 위해 떠나야 한다.
인기를 계속 유지하려면 반드시 그 만한 댓가를 치러야 한다.
'청춘까지도 바쳐야 하나..'
둘째 날, 온 집안 식구들이 함께 모였다.
우리는 즐겁게 식탁 앞에 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버님은 모임 내내 싱글벙글하셨다.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셋째 날, 오늘 많은 옛 친구를 만났다.
참 즐거운 만남의 시간이었다.
식구들과 같이 거리 구경도 갔는데 거리의 젊은이들은 많이 세련된 느낌이다.
그런데 점점 일본 젊은이를 닮아가는 것 같다.
가수 [欧阳菲菲]는
일본에서 남편을 만났다는데 많은 사람들은 나도 그의 전차(前次)를 밟을 거라고 예상한다.
사실 나는 일본 남자들의 외모는 그럴듯하지만 말투는 영 저속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인연이란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서 장담은 못하겠다.
넷째 날, [대만 방송국]의 스튜디오에 다시 돌아온 나는 감회가 참 깊다.
10년 전 처음 여기서 벌벌 떨며 노래 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이곳은 나의 고향과도 같다.
그 시절에 나는 대만 국민이 나의 노래를 받아 주기만을 매일 기도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끝도 없다.
나는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싶었고 더 많은 갈채를 받고 싶었다.
일본에 4년 동안 있으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워왔다.
나는 진정한 가수가 되려면 예쁜 얼굴만 가져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모든 분들이 반갑게 맞아 줘서 옛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화교 방송국]에서는 나한테 아주 좋은 조건을 제시 했지만 마다했다.
[대만방송국]과의 계약 시간이 끝나지 않는 한 나는 다른 선택을 하지 않겠다.
연예계에서도 도덕과 정의가 필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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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 財-Tech, 재무 테크놀로지 財務-Technology
[손문 기념관] 손문은 대만인의 어버이로 불려진다.
[欧阳菲菲] 歐陽(ōu yáng)_성(姓) 대만 가수,
[菲菲] (화초가) 무성하고 아름답다. 울창하고 아름답다.(書面語)
[발췌]☜쁘리비엣님 글번 784 787 805 815 961 957/ 487 494 495 496
[등려군노래검색목록표'1250곡]☜
첫댓글 인생이라는게 항상 오르막만 있는것은 아니지요 문제는 슬럼프시절 자포자기하지 않고 노력을 해야 다시 오르막으로 향하는게 아닐까요...........결국 인생과 고스톱은 새벽녁 문지방 넘어갈때 봐야 아는거 아니겠어요 ^&^
그리고 좋은 일에는 魔마가 낀다는 말이 있듯이 가장 왕성하게 유명세를 떨치던 시기에 이런 불상사가 생겼네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한 사람의 생애를 더듬어 보면서 정리해 보니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군요..
어릴 때엔 위인 전기를 읽고 독후감을 써오란 숙제는 왜 그렇게도 하기 싫던지요..ㅎㅎ
정말 고생많으 셧어요 ***향운.합장***
[Daum뮤직] 게시판에 2010-4-29자에 등록,
이틀만에 조회수가 1745건이면 등려군에 대한 관심이 아직도 여전하단 의미인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기문 번역을 제공해 주신 쁘리비엣님께 감사히 생각하며
본문 상단에 번역명을 명시하였으니 영광을 돌려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1편부터 12편까지 올리는 중임..)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등려군의 깊은 마음이 느껴집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