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생각하는 '귀 가려움,'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어떨까? '새로운 뉴스나 진기로운 (news or novelty)'에 대한 강력한 갈망을 느낄 때 귀가 가렵다고 한다.
우리는 비밀을 말하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에게 입이 근질거려서 견딜 수 없다고 하는데, 서양인들은 남의 gossip 를 듣고 싶어 귀가 근질거려서 못 살겠다는 표현을 쓴다.
성경에서도 '가려운 귀'에 대해 이렇게 경고한다.For the time will come when men will not put up with sound doctrine. Instead, to suit their own desires, they will gather around them a great number of teachers to say what their itching ears want to hear.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디모데후서 / 2 Timothy 4:3)
'귀 가려움,' 왠지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데 더 잘 쓰여지는 듯 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 지금 내 귀가 가려운데.. " 이 글을 읽고 누군가가 좋은 평을 하는 걸까, 아니면 안 좋은 쪽인 평을 하는 것일까...
|
******************************************************************
열광적인 fan, 종교화 같다
운동경기나 연예인들의 연주 모임에는
빠짐 없이 열광하는 '팬들'이 있어 그 맛을 더하는 모양이다.
아무리 음악성이 있는 성악가 (또는 가수)나 연주가라 해도,
연주장이 썰렁하면 신명이 나지 않는다.
제아무리 세게적인 운동선수가 경기를 해도
응원하는 관람객이 없으면 '만두속 없는 만두'와 같을 것이다.
가수나 배우 또는 운동선수들이 조금만 인기가 있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팬클럽'이 조성되어 함께 응원하고 열광한다.
지금부터 3~40년 전만 해도,
너무 점잖은(?) 관객들이 박수를 안 쳐서 문제였던 때도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그 자녀들 또래의 열광팬들의 광기에 가까운 응원에
눈쌀을 찌푸리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여기서 '팬'이라는 말의 어원을 캐보는 것도 재미있다.
(펜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고 영어의 F 자를 살려서 fan 이라 해야함)
고대 라틴어의 fanaticus 의 본래의 뜻은,
'신전과 관계있는'이라는 형용사 (fanum / 신전)에서 파생되었다.
그 후에 신에 의해 감명받는 사람의 신앙심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신 (종교에 따라 다르겠지만)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놀라운 열심이 생긴다.
산 속에서 오랜 동안 도를 닦는 수도사,
크리스쳔 가운데 예수를 닮아 40일을 금식하는 신자들,
그들 모두 다른 사람들이 갖지 않는 어떤 힘이 있다고 본다.
물론 fanatic 이란 말의 앞부분만을 따서 fan 이라고 하지만,
우리 낱말에 F 발음이 없어서 그냥 팬이라고만 하는 것이 안타깝다.
무엇에다 열심을 내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너무 지나쳐서 자신의 본분을 잃지 않는 한도 내에서 말이다.
*******************************************************
결단은 위기에 잘 내려야 하는 것
결단과 위기 (CRISIS)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 학교 선택이나 직장 그리고 앞날에 대한 계획을 할 때
결단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회적 결단이 요구될 때가 있으며 국가적 결단 또한 중요하다.
사회의 지도층이 잘못 결단을 내려 애꿎은 국민들과 국가가
위기를 맞는 일이 있음을 우리는 보아왔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결단을 어리석게 해서
전세계적인 어려움을 만나는 일도 허댜하다.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적으로 단 한 번의 잘못된 결단이
일생 또는 오랜 기간을 거쳐 불편을 주는 경우가 있으므로
옳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했다.
"잘못된 결단이 위기(危機)로 이어진다"고.
그 사람이 영어의 어원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위기라는 말인 crisis의 뿌리가 곧 결단 또는 결심이란 말이니까,
잘못된 결단이 위기로 이어진다는 말은 대단한 진리다.
crisis란 영어 낱말은 그리스어의 크리네인 (Xrienein)인데,
그 뜻은 결심한다 (decide) 또는 결정한다 (determine)이다.
또 판단할 수 있는 능력 (ability to judge)이라는 명사도 된다.
그러다 보니 위기는 곧 결정이나 판단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 된다.
우리가 참 삶을 엮어가기 위해서는
겪어야 할 일이 많고 결단을 내려야할 일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어떤 결단을 내리고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혜가 필요하다.
흔히들 많이 배워서 지식을 우리 뇌(腦)에 저장하면
지혜가 나온다고 하지만 그렇지만 않다.
우리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 치고
머리가 명석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나
얼마전의 통계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지식인(엘리트)들이
그들 보다 무식한 사람들 보다 더 편파적이고 지역 감정을 유발하며
남녀 차별 역시 더 심하게 한다는 무서운 결론을 내렸습니다.
엘리트들이 잘못 결심하고(decide), 바른 결정(determine)을 하지 못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judge)이 부족하므로
대한민국이 혼란에 빠져 있는 것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수는 그를 배반했던 제자 유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을 뻔했다."
예수의 말을 빌리면 많이 배우고 일류대학을 나온 엘리트 출신으로
말썽을 피우는 사람에게는
"차라리 배우지 않은 것이 나을 뻔했다,"는 말을 붙일 수 있겠다.
그래서 한 때 '신지식인'이란 말을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일 것이다.
모두 매스컴을 타기 전에는 평범한 시민으로
최선을 다하는 시민이지만 신지식인이건 사회적으로 알려지고
지명도(知名度)가 높아지면 그렇고 그런 사람이 되고 마는 법이니까.
지혜롭게 결정하고 판단하는 사람에게는 위기가 닥치지 않는다.
우리는 지식보다는 지혜를 알리며,
위기에 빠지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위기를 당해 위기를 결단의 순간으로 삼는 사람이 지식인이며,
그런 사람이 바람직한 신사요, 이상적인 숙녀다.
************************************
마지작은 없다
겨울이 한 해의 마지막에 있다는 것은 새로운 뜻이 있다.
원래 마지막은 죽음과 연관해서 생각하게 되므로
봄이나 여름보다는 겨울이라는 계절이
성장하지 않는 때라는 뜻에서
마지막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은 거의 죽은 상태에서
새봄까지 활동을 멈춘다.
농사하는 것도 자연의 법칙을 따른다면
(온실 재배와 같은 장치가 없는)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겨울과 연말이
함께 있는 것은 그럴 듯 하다.
영어에서 마지막이란 낱말은 last다.
(정확하게 말하면 the last 이지만)
그리고 다른 어원에서 비롯되기는 했으나
last란 단어가 ‘계속된다“는 뜻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두 낱말을 연결시키면서
이런 궤변 (詭辯)을 만들었다.
"마지막은 없다.
다음의 일을 계속하기 위한
임시 정지 상태인 것뿐이다.
영어의 last가 마지막이라고 하지만
다음의 일을 계속한다는 뜻에서
'last'가 기다리고 있다고 보면 된다.
쉬운 예로 이 세상에서 제일 부잘 것 없는
‘굼벵이’를 보라.
그의 마지막은 굼벵이로서는 끝이라고 하겠지만
‘매미’라는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새 생 활을 계속하지 않는가.
2004년을 보내는 우리의 마음이
산뜻한 사람은 별로 없다.
뭔가 이루지 못한 일 때문일까!
아니면 전 세계적으로 시끄러운 일로 인해
(이락 전쟁, 동남아 지진, 우리 경제의 어려움...)
마음이 불안한 것일까.
아마 끝이 왔는데(어쩌면 종점까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께름직한 마음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럴 때 마음을 바꿔보자.
이제 모든 것이 마지막이라는 'last'가 아니라,
다음 해에 계속된다는 뜻의 'last' 에 더 의미를 부여하자고...
***********************************************
억울한 영어 이름 Jack
A HIGHJCKER is a term of American origin denting a bandit
who preys on BOOTLEGGERS and other criminals;
now applied more generally to one who steals goods in transist
particularly lorries loaded with valuable merchandise.
하이재커는 '밀주조자들'과 다른 범죄자들을 먹이로 삼는
악당 (약자를 등쳐먹는)이라는 어원은 가진 아메리카에서 만들어진 낱말이다.
지금은 운송 중인 상품들 특히 값비싼 상품을 싫은 lorry (트럭)을
강탈하는 사람들을 일컫고 있는 편이다.
여기서 '얼굴한 Jack' 얘기를 해야겠다.
왜 하필 그 많고 많은 사나이 가운데
Jack 이 들어간 낱말이 그토록 나쁜 뜻으로 쓰였을까?
학자들은 이런 주장을 한다.
트럭을 강탈하던 범인이 운전자에게 이런 말을 할 것이다.
"Stick 'em up, high, Jack !"
갑짜기 당한 운전자가 손도 제대로 들리 못하고
우물 쭈물하자, "손 높이 들어!" 라고 하면서 Jack 이란 이름을 붙였다.
왜 Jack 이었을까?
아메리카의 사내 이름 가운데 제일 흔한 것이 James 와 John 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애칭으로 Jack 이라고 할 때도 있다.
그런데 한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 (한국의 정서로 봐서)이 있다.
왜 Jack 이라는 '그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이 잘못 쓰여지는 것에 대해 '아무 소리' 안 하고 있는지..
만약에 한국에서 이런 말이 쓰여진다고 하자.
한국에서 제일 흔한 이름을 '아무개'라고 해보자.
(여기서도 실명을 말하지 못하는 것도 그 이름을 예 들었다가
그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떼거지로 몰려올지도 모르니까 ㅎㅎ)
'아무개 치기'란 낱말이 '소매치기'라는 말로 쓰인다면,
아마 대한민국의 '아무개'라는 이름을 한 사람들이 데모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얼마 전까지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라는 말을 썼었다.
사실 나도 경남 진주로 가다가 정말 잘 가려고 했는데,
삼천포 (지금의 사천시)로 내 차는 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잘 나가다가 삼천포라는 말을 쓰는데,
이제는 그 말을 쓰면 안된다.
그 지역 주민들이 '큰 반대'를 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에는 '억울한 Jack' 이 있지만,
한국에는 '억울한 아무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보, Jack !!
*************************************
monitor 없이 못 사는 세상
The Monitor was from Latin word MONERE meaning
the one who reminds or admonishes/
Sometimes the meaning MONERW was a tutor of a preceptor.
모니터는 생각나게 한다 또는 훈계한다는 뜻을 가진
Latin 어의 MONERE 에서 왔다.
또 MONERE 는 선생 또는 훈계자라는 명사로도 쓰였다.
The Military Monitor was an officer to tell young soldiers
of the faults committed against the services.
또 군대 monitor 는 근무규칙을 범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젊은 졸병들의 위반내용을 말하는 장교도 되었다.
하나 더 흥미로운 monitor 는 house monitor 인데 -
The house monitor a slave to rouse the family in the morning.
house monitor 는 아침에 주인 가족을 깨우는 일을 맡은 노예였다.
그 외에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사도 monitor 라고 한다.
내가 방송국에 PD 로 근무할 때는 동료 PD 의 프로그램을 보거나 듣는 것을
monitor 한다고 했던 기억도 난다.
이렇게 좋합해 보면 monitor 란
어떤 일을 개선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나 사람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요즈음이야 computer monitor 가 가장 보편화 되면서,
(실상은 프로그램을 눈으로 보게 하는 정도지만) 매우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인간의 삶에서 (악의에 찬 비난의 글이나 말이 아닌) 서로 서로의 발전을 위해
바른 지적을 해준다는 뜻에서 monitor 의 역할은 대단하다.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남의 바른 지적을 싫어하는 사람은,
현 상태에서 더 발전하기를 기대하기를 어려운 사람일테고 ...
*************************************
담요가 흰색이 아니라 해도
어떤 사물을 생각하면 연상되는 것이 있다.
코끼리, 거대하고 코가 길다는 것,
곰, 덩치는 큰데 미련하다는 오해를 받는 것,
사과,
원숭이 또 ㅇ 구멍처럼 빨갛다는 생각,
그런데 그 사과의 색이 green 인 것도 많다.
사과 = 빨강이라는 생각은 잘못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 골리앗, 덩치는 크지만
별볼일 없는 존재로 괄세받는 성경속 인물 취급받는다.
영어 어원 공부를 하다 보니,
앞에서 예를 든 것과 것들이 많다.
그 예를 하나 들겠다.
담요, 한자로 모포 (毛布), 영어로 blanket...
A blanket may today be of any color,
though the word comes ultimately from French BLANC 'white.'
"담요는 오늘 날 어느 색이어도 좋다.
비록 그 낱말이 French 의 '하얗다'는 뜻에서 왔지만.."
좀 곁길로 가지만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또는 스페인어 따위는 Latin 의 직접 뿌리여서,
비슷한 표현이 많다.
우리가 잘 아는 영화 Casa Blanca 에서
blanca 는 하얗다는 말인데,
앞서 말한 프랑스어의 BLANC 도 하얗다는 뜻이다.
담요의 색이 어떤 것이든 관계없지만,
그 낱말의 어원이 '하얗다'라는 것을 머리에 떠올리며
난 이런 생각을 했다.
인간이 가진 편견을 깨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담요라는 뜻이 하얗다고 해서
모든 담요의 색이 하얗지 않아도 되듯....
대한민국의 문제 가운데 하나도 편견을 깨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경상도가 어떻고, 전라도가 저쩧다고 하는 것,
재벌은 교만하고 이기적인 반면,
가난한 사람은 열등의식과 반항적이라는 것 ....
시어머니는 매정하고 장모는 자상하다는 것,
정통 고전음악(classical music )을 즐기는 사람은 고상하지만,
가요 (특히 트로트)를 사랑하는 사람은 좀 질이 떨어진다는 오해...
눈이 큰 사람은 겁이 많고,
흑인은 운동 신경은 발달했지만,
범죄를 저지를 확율이 높다는 그릇된 편견..
대한민국의 아줌마들 '곰국'을 많이 끓이면,
가족을 팽개치고 먼 여행을 간다는 것...
편견이라는 노예에서 벗어날 때,
당신과 내가 속해있는 이 공동체가 활기차고
살만한 세상이 된다.
**************************
전설, 이제 황당한 얘기 아니다
Legend was from Latin word LEGENDA (from LEGERE meaning to read).
It is leterally and originally 'something to be read,'
hence the narrative of saints aand martyrs were so termed
from their being READ, especailly at MATINS, and after dinner
in moastic refectories.
Exaggeration and a love for the wonderful so predomitated in these readings,
that the word came to signify a traditional stroy, a fable, a myth.
전설이라는 낱말은 '읽는다'는 뜻을 가진 LEGERE 에서 온 LEFENDA 러눈 라틴어였다.
그 낱말은 문자적으로나 근복적으로 '읽혀진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자(聖者)와 순교자들의 이야기들이 읽혀진다는 것,
특히 그들이 갖는 아침 기도와 저녁 식사후 수도사의 식당에서 행해지는 것을 일컬었었다.
놀라운 사람들에 대한 과장과 애정이 그들이 읽는 이야기에 너무 뛰어나서
그 언어들이 전통적인 이야기, 우화, 신화 등으로 보이기에 이르렀었다.
그렇게 보면 '희미한 주제' 와 같이 생각 되어왔던 전설은
더 이상 커튼 뒤에 숨겨진 얘기만은 아닌 듯 싶다.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우리 가까이 있었던 radio 프로그램에 '전설 따라 삼천리'가 기억난다.
삼천리를 갔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길이가 그 정도였으므로
한국의 어느 지방에서 과거에 있었던 '가끔 황당한 (현대인의 의식으로는)' 것이 많았다.
좀 곁길로 가는 듯 하지만, 전 세계 어린이들을 열광시키고 있는 월트 디즈니의 만화,
그 주인공은 Mickey Mouse 다,
물론 쥐가 주인공이며 우리의 상식으로는 고양이가 쥐를 골탕먹여야 하는데,
Mickey Mouse 는 거꾸로 고양이를 곤경에 빠뜨리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줄거리를 곰곰히 생각하면 '아주 황당한' 것만은 아니다.
주의깊게 살펴보면 우리 가까이 만날 수 있는 것들을 극화(劇化)한 것 뿐이다.
전설, 어떻게 보면 '신화'와 함께 이뤄지기 거의 불가능한 것들 천지다.
오죽하면 대한민국 축구가 월트컵 경기에서 4 강에 들어가는 것을 '사강신화'라고 했을까.
신화나 전설이 옛날에는 인간의 힘을 초월한 신들의 얘기가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만 않다.
불과 수십년 전만해도,
수도사들이 읽거나 드려지는 기도문이 Latin 어로 되어있었다.
Latin 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 내용이 '전설' 같이 남의 것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각각 자기 민족의 언어로 기도하고
좋은 글들을 (성경을 비롯해서) 읽을 수 있는
우리 가까이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전설의 뿌리가 '읽는 것 (something to read)'과
'읽혀지는 것 (something to be read)'이라면,
우리 가까이 있는 성공담 (피나는 노력 끝에)이 something to read 에 해당되고,
당신과 나처럼 평범한 사람의 성공담 (때로는 실패담)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something to be read (읽혀지는 것) 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전설, 이제는 너무 황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노력하면 우리가 아이디러를 짜내면 우리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일들이다.
something to read 와 something to be read 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