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리3리(풍림, 깨밭골)
<위치 및 환경>
<위치 및 환경>
면소재지에서 동쪽 탑리 방면으로 약 6.7km 지점에서 일산 새마을 금고 옆좌측으로 4km 소로를 따라 가면, 산자락에 옹기종기 30여 호가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 풍리 3리인 속칭 '풍림'이와 '깨밭골' 이다. 1970년도 풍리1리에서 분동되었으며, 당시 동장 신수만의 공이 크다. 북으로는 의성읍과 동으로는 금성면을 경계로 인접하고 있으며, 면관내에서 가장 오지 산간마을로 발전이 늦어졌지만 지금은 진입로 및 마을 안길 포장과 주택개량으로 현대식 양옥에서 문화 생활을 누리고 있다. 1827년경 현주민인 이재봉의 고조 진성이씨 20대조가 청송화목에서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로서, 나무가 울창하여 풍림이라고 부른다는 설이 있다. 그후 아주신씨, 의성김씨, 파평윤씨, 경주김씨, 전주이씨, 밀양박씨, 경주이씨 등이 차례로 정착하였다. 현재 30여가구가 서로 도우며 정답게 살아가고 있다.
<주요지명>
① 풍림지(1945년도 완공):마을의 서북풍을 막아주며, 마을 뒤를 감고 있는 계곡안에 풍림지가 있어 마을 앞 토지의 젖줄이기도 하다.
② 긴 밭골:동·서로 길게 뻗은 골짜기에 형성된 경작지이다.
③ 진밭골지:긴밭골(진밭골)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④ 큰독골
⑤ 적은 독골
⑥ 사(寺)골:골짜마다 토질이 비옥하여 농작물이 풍성하며, 특히 마늘의 주산지이기도 하다.
⑦ 느티나무(1930년 김수로가 10년생을 심음):수령70년, 높이 6m, 둘레 3m, 마을입구에 위치한 정자목은 여름철의 마을 노인들의 휴식처로 이용한다.
♠깨밭골 마을 면소재지에서 탑리방면으로 6~7km 지점 일산 새마을금고 옆 좌측으로 약 2.2km쯤 소로길을 따라 가서 우측으로 0.7KM쯤 가 산모퉁이를 돌아서면 아홉가구의 한가로운 마을이 보인다. 참깨가 잘 자란다하여 깨밭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며, 성주도씨, 풍천임씨, 평해박씨, 경주김씨, 함안조시, 남양홍씨, 달성서끼 등 각성촌을 이루고 있다. 동쪽으로 계속 깊숙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깨밭골 저수지가 있어 마을의 풍년농사를 만들어 준다. 저수지를 뒤로 하고 계속 올라가면 금성면과 봉양면의 인근 주민들이 내왕하는 유일한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해방 후 1955년경 이곳의 토지는 모두가 박하 재배지였다고 할 만큼 토질이 비옥하여 고추, 참깨, 마늘 등이 주소득원이 되는 작물이며, 최근에는 과수재배쪽으로 작목이 전환되고 있다. 또한 오래된 토담집을 헐고 말쑥한 양옥으로 단장하여 한집, 두집 서로가 시샘이나 하듯이 문화주택 마을로 변모해 가고 있다.
<마을이름(지명)유래>
♠ 깨밭골 : 봉양의 구천마을이라 할 만큼 외진 마을이다. 풍림이와는 약 1㎞ 떨어져 위치한 골짜기에 아홉가구가 모여 사는 한가로운 마을이다. 참깨가 잘 자란다하여 깨밭골이라 이름지어진 이곳은 1970년까지만 해도 독가촌을 면치못하였다. 처음 이곳에 정착한 사람은 신익환(아주신씨)가 일정때부터 행해진 단발령과 세속의 퇴폐함을 개탄하고, 이곳에 정착하여 두문불출하며 오직 유학만을 벗하고 유유자적하였다. 특히 옹의 유별난 모습에 인근마을 주민들에게 상투영감이란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머리끝에서부터 신발까지 옛날 유생들의 의상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지금도 옹의 훈도에 힘입은 후학들은 장성하여 간혹 지난날의 옹에 대한 이야기들이 화제가 되곤 한다. 또한 당시 서당이 있었던 곳을 서당골이라 부른다. 그 밖에도 샘찬골, 호박골, 밀찬골 등이 있고, 마을 뒤를 병풍처럼 막아주는 산은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하여 와우등이라 하고, 특히 마을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올 것 같은 묘하게 생긴 형상의 산을 구기등이라 하며 옛날 주막집 주모가 사용하는 술구기와 흡사하다해서 붙혀진 이름이라 한다. 또한 이곳에 금맥이 있다고 여겨 채광 흔적도 남아 있다.
<주요 사견 및 자랑>
● 자랑 마을이 형성되어 세간에 알려지기는 불과 20여 년에 불과하나, 1976년경에 안동댐이 완공되고 수몰 지역민들이 각처로 이주할 당시 안동지방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온 다섯 가구가 정착하여 기존 주민과 함께 마을이 형성되었다. 토질이 좋아서 많은 소득은 거둘 수 있으나 교통이 문제였다. 의성, 도리원, 탑리 어느쪽도 보행이 아니고는 시장을 가기가 어려웠다. 농산물 수집상들은 이같은 약점을 이용, 폭리를 취하여 주민들은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젊은이들이 합심하여 진입로 개설에 착수하여 부지확보를 비롯한 재정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늘같은 길이 트이게 되었다. 특히 안동지방에서 이주해 온 젊은 청년들의 모범적인 발전은 괄목할 만큼 혁신을 가져 왔으며, 특용작물 재배를 남달리 연구하여 소득증대에 힘쓴 결과, 인근 주민들에게 부러움을 사게 하고, 근면성 또한 칭찬이 자자하였다. 한정된 토지에 많은 소득을 낳게 한 결과 지금은 집집마다 낡은 집을 헐고 깨끗한 양옥으로 변모하였고, 또한 마을 진입로가 포장될 것으로 기대에 차 있다.
♠ 효부상 받은 난쟁이 주부 여성의 몸으로 천부적 기형의 왜소한 자신을 비관하여 살아가던 군위군 소보면의 노처녀 김순애씨와, 봉양면 풍리 3리에 언어장애로 노총각이 된 이강무가 주의 사람들의 주선으로 어렵게 혼인을 이루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의 혐오적 냉대와 멸시적 눈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우둔한 남편과 함께 농사일에 조력하고, 구십세에 가까운 시조모와 당뇨병으로 몸져누운 시아버지를 정성껏 보살폈다. 정상인들도 하기 힘든 극진한 효성과 힘겨운 농사일을 사척단신의 왜소한 몸으로 열심히 가정을 꾸려가는 모습에 이웃 주민들은 감동하고 한편 안스러워 했다. 이같은 효행사례를 전해 들은 군당국에서는 1996년 5월 8일 어버이날 행사때 의성군수가 시상하는 효부상을 수상하였다. 건강을 지니고도 많은 욕망을 이루지 못해 세상을 비관하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사례라고 여겨진다.
♠ 보훈처장 표창받은 황선녀 할머니 열입곱 살에 시집와서, 아들낳고 살다가 남편이 일본으로 돈벌려 간다고 떠난 후로 소식이 없어, 남편 떠난 남쪽하늘만 바라보며 한숨과 눈물로 보내며, 남편 오기만을 기다리는 이십 년 세월을 모진 가난과 고된 품팔이로 젊은 시댁의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남편 없는 시부모님을 깍듯이 섬기는 갸륵한 새댁의 효성이 이웃 사람들의 의하여 널리 알려져서, 당국에 효부상의 시상을 상신하였으나 본인이 완강히 거절하고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칭찬을 사양했다.
길고 고된 하루일을 마치고 총총한 별빛을 거울삼아 바쁜 걸음으로 돌아오는 새댁의 손에 든 보자기 속에는 부자집에서 얻어온 찬밥덩이가 어김없이 들려져 있다. 종일토록 집을 보고 엄마를 기다리는 착한 아들의 저녁밥이였고 기쁜 선물이기도 했다. 품팔이 나간 엄마를 말없이 집을 보며 기다리는 아들을 보고 측은하게 여긴 이웃 할머니들이 붙혀 준 아들의 별명은 부잣집 찬밥덩이였다. 그토록 불쌍하게 자라난 아들이 6.25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하게 되자,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절망은 극도에 달했다.
실성한 사람이 되어 매일같이 아들을 부르며 방황 하다가 호국영령들이 잠든 의성읍 구봉산 충혼탑을 찾아 명복을 비는 것이 일과였다. 또한 충혼탑 아래 자리잡은 수도사에 머무르며 아들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자청하여 공양주가 되었다. 비통한 절망감을 부처님께 의지하고 푼푼이 모은 돈으로 위문품을 마련하여 보훈병원에 누워있는 전상자들을 찾아 위로하는 것을 또한 낙으로 삼았다. 자식에게 못다한 사랑을 참을 길 없어 통한이 되어 전상으로 고생하는 남의 자식에게라도 내자식같이 여김으로 다소의 위안을 찾고자 하는 심정일 것이다.
이같은 소식을 접한 보훈당국에서는 보훈처장의 표창장을 시상하고, 일생동안 고난과 절망으로 허덕이는 할머니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열일곱살에 시집와 고난과 절망으로 얼룩진 할머니의 일생은 남편 없는 시부모를 정성껏 섬겨온 효성과, 오직 남편만을 기다려 일생을 마친 열녀이자 남에게 덕을 베푸는 일도 수없이 많았다고 주위 사람들의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 열녀이자 효부의 덕을 쌓은 할머니는 주위 사람들의 입모아 하는 칭찬과 같이 이름이 선녀이니 죽어서 하늘에 선녀가 될 것이라고들 칭찬하며 죽음을 애통해 하였다. 일생동안 짊어지고 온 무거운 고난의 짐을 모두 벗어 버리고 지금은 깨밭골 외진 산 기슭에 편안히 잠들었다.
● 송계산 유공비 소재지 : 봉양면 풍리3리(의성비봉과 접경)풍림이에서 의성가는 방향으로 왼쪽 등성이오래된 길가에 세워져 있으나, 지금은 이용치 않음으로 샛길쪽에 다시 비를 세웠다
● 암행어사 박문수와 송계비 암행어사 박문수의 심판으로, 빼앗긴 송계산을 되찾은 기념으로 송계산 공적비가 풍림이 마을 동쪽 진밭골 저수지 안쪽 골짜기에 세워져 있다. 우리들 기억에는 암행어사의 정의롭고 통쾌한 활약상들이 너무도 익숙하게 기억되고 있다. 임금의 특사로 은밀하게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히는 지방 관속들의 비리와 학정을 발본색원하여 부당함을 징벌하였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영조대왕 시대 사건으로 추측된다. 당시 의성지방 세도가인 김모가 군수를 배경으로 경계 무시하고 타인의 소유인 송계산을 강압적으로 탈취하게 되자, 이에 억울한 고 이기영, 김기진, 최운경, 삼씨가 항쟁하자, 이들을 하옥하고 여러차례 모진 악형을 가하였다. 이같은 소식을 접한 박문수 어사는 군수를 비롯한 일당을 엄벌하고 본래의 소유자에게 환원하였으며, 이같은 쟁송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송계원을 구성하고 경계지에 공적비를 세웠다. 비석의 건립연도는 왜정시대 소화 8년 8월로 되어 있다. 또한 비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봐서 조선조 영조대왕 시대의 사건이며, 서기로는 1725~1776년 사이에 있었던 일로 보여진다. 아무튼 우리들의 기억 속에는 암행어사 하면 박문수를 연상케한다. 암행어사 출도야! 소리에 산천초목이 떨었다는 속설은 차지하고라도 어사의 명령은 곧 어명과 같은 것이고 보면 그 위엄은 짐작할 만하다고 하겠다. 더구나 너무도 유명한 박문수 어사의 행적이고 보니 더욱 관심이 모아진다. 변화무상한 세월의 풍광 속에 잡초와 송림에 쌓여있는 송계산 공적비는 먼 훗날까지도 보는 이로 하여금 권력의 무상함과 사필귀정의 진리를 터득하는 성찰의 계기가 되어 주리라 기대된다. 송계산 유공비에 관한 기록은 풍리 3리 리장이었던 김수암이 답사하고 정리하였다.
● 지보사 금성면의 천방산 동남 골짜기에 있어 의성현 사찰이었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군위군으로 편입되고 산의 이름도 선방산으로 개칭되었다. 봉양면 화전리, 도원리, 일산 지역은 선방산을 안산으로 하고 있어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불교신자들은 대부분 지보사를 신앙대상 사찰로 삼고 있으며, 한때 초등학교나 중학교 학생들의 소풍장소로 많이 견학되기도 하였다.
● 시주골 아미타불 입상 봉양면 풍리2리 시주골에 미륵불인 아미타불 입상이 버려진 채로 풀섭에 뉘어져 있다. 절터인 듯 한 축대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듯한 흔적이 남아있는 산록에 슬래트 크기 한 장만한 투박한 돌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불상의 형식이나 종류 등을 살펴볼 때 통일신라시대 말이나 고려초의 불상으로 유추하여 본다. (1) 불상의 형식 부처가 갖추어야 할 신체상의 특징으로 크게는 32가지, 세부적으로는 80가지 형식으로 나눈다. 즉 부처는 중생들과도 다른 특수한 모습을 지녀야 하기 때문에 그 존엄성을 나타내는 구체적인 표시인 것이다. 시주골 불상은 돌로 만들었으나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이는 양질의 화강암이 아닌 검붉은 색을 띠는 사암으로, 높이는 밑부분이 묻힌 것을 제외한 139cm, 세로 138cm의 한 장의 돌로 몸전체를 감싸고 있다. 형태는 거신광을 이루어 불상이 부처의 초인성을 형상화하여 몸체에서 빛을 발하는 조형으로 화염문이 전체에 잔잔하게 나타내 주었다. 이마부분 윗쪽과 같이 광배도 함께 잃어버려서 지혜의 상징인 머리 부분의 혹과 같은 육계나 눈썹은 날카롭고 길게 그어져 있었다. 눈과 코는 민간 신앙 행위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고, 얼굴은 풍만, 입술은 합죽하게, 이마의 백호공은 지름이 2.5cm로 오랜 세월 속에서 신앙인들의 손자욱이 닿아서 매끈매끈하고, 귀부분의 조각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듯하며, 목이 부러져 머리부분을 몸체에 떨어질 듯 올려 놓았다. 목주위에는 3개의 주름 삼도, 즉 생사를 윤회하는 인과를 나타내는 번뇌도, 업도, 고도를 어렴풋이 그어 놓았다. 목걸이의 조각이 두텁게 처리되었고, 불상이 입은 옷의 조각은 가슴을 덮은 승각기와 허리아래 양다리에 조각한 치마형태인 군의의 표현은 보기에도 선명하였으나, 몸전체를 감싸는 법의나 천의의 표시는 없었다. 불상의 가슴과 양팔! 팔의 굳힘은 유려하게 처리되었고, 하반신의 풍만함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이 넘쳐 흐른다. 이 곳 불산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손의 모양이 특이하였다 수인은 보살상의 공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모양으로, 부처가 선정에 든 것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시주골 불상은 오른손을 엄지를 둘째 손가락에 붙이고 손바닥을 앞으로 편 채, 손등은 단전부위에 가볍게 눌리고 있으며, 왼손은 손바닥을 앞으로 내민 채 아랫가슴에 붙이고, 엄지와 첫째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벌리고 있음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취한 첫손 모양으로, 아미타선정인으로 처리된 것으로 짐작되어 진다.
(2) 불상의 종류 불상의 종류는 일반적으로 손모양에 따라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불 ,비로자나불 등으로 구분한다. 또한 불상의 형식으로 종합검토한 결과 시주골의 불상이 서남방향으로 바라보며, 아미타불은 서남꒷향으로 향한는 관례를 비교하면, 아미타불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은 서방극락 세계에서 살면서 중생을 위해 베푸는 부처로 무량광불이라고도 하며, 그 형상에는 단독상과 삼존상이 있는데 단독상으로 아미타 9품인(九品印)의 선정인의 손과 모양을 취하니 감산사 석조아미타불 입상과 비슷하여, 시주골 석불은 석조아미타불 입상이라고 조심스럽게 이름지어 보았다.
(3) 맺는말 우리의 산하는 민중과 밀착되어 마을마다 석상이나 석불을 만들어, 득남치병 등을 기원하면서, 조성한 신앙대상은 이름조차도 전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대수롭지 않게 외면당하고 있다. 그러나 시주골 풀섶에 묻힌 석조아미타불 입상은 천년의 긴잠에서 이제 깨어났다. 이를 만남은 한 인간의 예술의지가 반영되어 조각가 자신의 대상을 투입시키면서 풍만한 여인상을 종교적인 숭고한 미를 그의 작품인 석불의 조형에서 전달하였다. 그는 사암을 쪼으면서 자연스런 곡선에 한국적인 인간미와 부드러운 조형감각을 오늘의 우리 봉양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다. 한때 향을 피워 부처를 향한 구도의 염불소리, 목탁소리가 시주골 이곳에서 어울어져 많은 신앙인들이 드나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논과 밭으로 일구어져 산자락의 이름이 말해주듯 참드끝 즉 "참뜻끝". 이를 불교적인 의미로 풀이하면 해탈이요, 반야이며, 극락이요, 피안의 세계로서, 거기에는 "거시기"가 있어, 그 산골이름 또한 시주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시주골이란 토속적인 땅이름은 우리들에게 가볍게만 흘러 보낼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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