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8일 84세를 일기로 타계한 이주일(李周一) 전 감사원장은 5.16혁명에 참여했으면서도 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또 중년
이후엔 조용히 장학사업에 전념했으며, 군대에서 반평생을 보내고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으나 국립묘지에 묻히기를 거부했다.
박재헌(朴宰憲.83) 전 감사원 정책자문위원은 "고인은 강직한 성품에
원칙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긴 분이었다"며 애도했다.
*** 朴대통령 정치권유 거부
고인은 1961년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주도한 5.16혁명에 참여했으나 혁명 주체들과는 거리를 두고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국가재건 최고회의 부의장을 지낸 뒤 대한체육회장(62년)과 감사원장(64~71년)을 역임했다. 朴 전 대통령은 72년 유신(維新)직후 고인에게
국회의원에 출마하라고 여러 차례 권했다고 한다. 생사를 함께 한 오랜 친구로서의 배려였다. 하지만 李전원장은 "군인이 정치를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며 끝내 사양했다.
함북 경성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육사를 졸업했다. 朴전대통령과의 인연도 여기서 시작됐다. 고인은 해방이 되자 육사(특별 7기)를 나온 뒤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 한국전쟁 때는 백마부대 28연대장으로 백마고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 철원 일대를 우리 땅으로 편입시키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육군 12사단장, 2사령부 참모장 등을 거쳐 63년 대장으로 예편했다.
"내가 국가 위해 뭘 했나"
고인은 국립묘지에 묻히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전사(戰死)하지 않는 한 절대로 국립묘지에 묻히지 않겠다. 내가 국가를 위해 한 것이 뭐가 있길래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나. 더 훌륭한 일을 한 분들을 위해 자리를 비워놓아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유족들은 이런 뜻을 받들어 경기도 안성의 한 공원묘지에 고인을 모셨다.
그는 강직한 감사원장이었다. 고인을 모셨던 박재헌씨의 회고다.
"원장은 병풍을 들고 찾아온 한 정부투자 은행장에게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이 어찌 이럴 수 있느냐`며 호통을 쳤습니다. 부하 직원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참 강직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로 그친
게 아니었습니다. 李원장은 그 은행장을 문책까지 했습니다."
고인은 71년 감사원장에서 물러난 뒤 장학사업에 전념했다. 퇴직금과
지인들이 지원해 준 돈으로 함북 장학회를 만들었다. 다른 공식적인
직책을 모두 사양했으나 장학회장직은 건강이 나빠진 98년까지 갖고
있었다.
*** 30년간 장학사업만
李전원장은 5.16혁명에 대해 철저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5.16혁명에
관해 단 한번도 언론과 인터뷰하지 않았다.
아들 창걸(昌傑.52.무역업)씨는 "선친은 집안에서도 5.16혁명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며 "아마 혁명 당시 가졌던 사명감이 군인들의 정치
참여로 퇴색된 것을 안타까워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고인은
독서를 좋아했으며, 『고희산(古稀山)』 등 시집 일곱권을 펴내기도
했다.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
대전 법조 비리와 관련한 항명 파동을 일으켜 면직됐다가 지난해 8월
대법원의 면직 처분 취소 확정 판결로 검찰에 복귀했던 심재륜(沈在淪.58.사시 7회)부산고검장이 18일 자진 사퇴하면서 검찰은 물론 대통령의 검찰 관련 발언까지 강하게 비판해 파문이 일고 있다.
이날 오후 3시 부산고검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이제 떠날 때가 됐다"며
말문을 연 그는 "인사적 특혜와 신분의 상승을 위해 권력 주변에서 무리를 지어 줄을 섰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들의 입맛에 맞게 앞장서
충실한 시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며 "국민의 신뢰와 사랑은 검찰을 떠난 지 이미 오래 됐고 오히려 국가.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집단인 것처럼 혹평하는 사람도 많다"고 검찰을 비판했다.
沈고검장은 또 "정권의 전환기에 일부 정치성 검사들이 비열한
행태를 보인 결과 정의의 편에서 묵묵히 일하는 대다수 검찰 조직원마저 자괴감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떨어졌다"며 "이런 위기
상황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왔던 업보라는 점을 각성할 때 어느 누구도 탓할 수 없다"고 했다.
沈고검장은 그러나 "심지어 검찰의 잘못 때문에 정부가 피해를 보고
있다는 대통령의 발언이 있다"며 최근 신광옥 전 법무부 차관에 이은
신승남 전 검찰총장의 퇴진 등 일련의 검찰 관련 사태를 `검란(檢亂)`이라고 표현한 뒤 "이른바 `검란`의 원인과 배경은 거듭된 검찰 인사의
잘못과 검찰권에 대한 간섭에서 비롯된 만큼 인사권자인 정부 최고 책임자의 책임 문제가 가장 크다고 보아야 한다"며 대통령에게도 직격탄을 날렸다.
沈고검장은 "검찰이 초심으로 돌아가 정의를 향한 정열을 불사르고 공정한 칼날을 휘두르면 검찰은 바로 서게 될 것"이라며 "후배들이 새 총장과 함께 힘을 모아 검찰의 신뢰를 회복해 달라"고 당부한 뒤 자리를
떴다.
친애하는 검찰가족 여러분!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로서 검찰을 떠납니다.
지난 99년 2월 대구고등검찰청에서 "항명아닌 항명"이라는 대통령의
면직결정으로 "부끄럽지도 아니한데 부끄럽게" 검찰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과는 달리 이제 마침내 후배들로부터 영예의 꽃다발을 받으면서 마음의 고향을 떠납니다.
저는 복직하면서 검사 신분보장의 상징적 의미를 위해서라도 일정기간 복무하고 적절한 시기가 오면 미련없이 검찰을 떠나겠다고 약속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떠나면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과연 지금이 적절한 시기인가 의문이고 아쉽기도 합니다. 최근 검찰에 불어닥친 일련의 사태 때문에 그 어느때 나가는 것이 옳은가를 그동안 정말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지금 우리 검찰은 또다시 사상 초유의 위기 속에 진통과 갈등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신뢰와 사랑은 우리를 떠난지 이미 오래 되었고, 오히려 국가 ·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집단인 것처럼 혹평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이러한 위기상황은 그동안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왔던 "업보" 라는 점을 각성할 때 어느 누구도 탓할 수 없고,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뼈에 사무치도록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인사적 특혜와 권력의 공유 내지 신분적 상승을 위해 권력의 주변에서
무리를 지어 줄을 섰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들의 입맛에 맞게 앞장서 충실한 "시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왜 역사는 끝없이 반복되는 것입니까? 왜 사람들은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는 것입니까?
저는 지난 정권 말기에 있었던 한보 및 대통령 아들의 비리사건 당시의 위기상황을 기억합니다. 검찰조직 전체가 혼연일체가 되어 온갖 권력의 외압으로부터 검찰 본연의 위상을 지켜내지 않았습니까?
그때의 위상을 유지·발전시켰더라면 다시 지금과 같은 오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권의 전환기에 일부 정치성 검사들이 비열한 행태를 보인 결과 정의의 편에 서서 묵묵히 일하는 대다수 검찰 조직원들마저 자괴감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떨어졌고, 검찰은 국민들로부터 사랑은
커녕 철저한 외면을 받고 있어 사면초가에 빠진 비참한 상황이 된 것
아닙니까?
최근 작금의 사태와 관련하여 검찰의 잘못 때문에 정부가 피해를 보고
있다는 대통령의 발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검란"의 원인과 배경은 거듭된 검찰인사의 잘못과 검찰권에 대한 간섭에서 비롯된 만큼 인사권자인 정부 최고책임자의 책임문제가 가장 크다고 보아야 합니다.
더구나 문제가 된 일부 검사의 책임문제는 차치하고 이와 무관한 전체
검사가 잘못한 것처럼 호도하면서 마치 정부는 무관한 것처럼 책임을
전가하는 발상과 주장에는 전혀 공감할 수 없으며, 국민으로 하여금
검찰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키는 것으로서 결코 검찰을 살리는 길이 못됩니다.
검찰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곧 국가와 정부를 살리는 일임에도 마치 별개의 일인 것처럼 검찰을 두드리면 되겠습니까?
친애하는 검찰가족 여러분!
정치적 중립성을 잃은 검찰은 이미 본연의 검찰이 아닐 뿐만 아니라,
두목의 눈치나 보며 서민의 가슴에 못을 박는 폭력조직과 다를 바 없다고 한 어느 현직 검사장의 말을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검찰의 중립과 독립을 이루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가 바라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검찰의 중립과 독립은 그 본질을 외면한 채 특별수사검찰청 같은 일부 조직의 명칭이나 바꾸고 물을 타는 식의 제도변경이라든가 지방색의 부분적 안배와 같은 인적교체를 통해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검찰의 중립과 독립은 검사들을 비롯한 검찰조직원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과거의 정치검사 같은 사람들이 품고 있던 마음속의 잔재를 없애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검사 임관시에 "사회정의","파사현정" 과 같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덕목을 구현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다지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러한 초심으로 돌아가 정의를 향한 정열을 불사르며 불의에 대한 척결의지를 굳게 다지면서 어떠한 외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공정한 칼날을 휘두른다면 검찰은 바로 서게 될 것입니다.
칼에는 눈이 없습니다. 칼은 상대방을 죽일 수도 있지만 어떤 때는 칼을 쥔 사람이 찔릴 수도 있습니다.
권력과 금력을 배경으로 힘없고 소외된 계층을 괴롭히는 거악을 향해
추상같은 칼날을 휘둘러 이들로 하여금 이 사회에서 발붙일 수 없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검찰 본연의 자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오히려 칼은 우리를 향해 돌아오게 될 것이므로 우리는 그 칼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정의의 칼" 을 잘 써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와같이 정의를 바로 세우는 과정에는 반드시 희생이 뒤따를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 라는 사실을 역사가 증언하듯이 검찰의 독립을 위해서도 불가피한 희생이 수반될 것입니다.
검찰의 독립을 위해 필수적인 이러한 고통은 이제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제가 이러한 십자가를 스스로 지지 못하고 여러분들에게 짐을 지운채 검찰을 떠나게 되어 매우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검찰의 장래에 대해 비관만을 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이 끝을 향해서 나아가고 또 끝에 도달하면 새로 시작하는 법입니다. 지금 우리가 처하여 있는 위기상황 역시 이 체제가 그러한 것처럼 진정한 검찰로서 거듭 태어나기 위한 과도기적 역경일 뿐입니다.
신은 우리에게 극복하지 못할 시련을 주지는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한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고 봄을 맞은 꽃이 눈부시게 아름답듯이 현재의
시련과 고통을 딛고 다시 태어날 우리 검찰의 앞날은 찬란한 영광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저는 밖에 나가더라도 여러분들의 피나는 노력에 뜨거운 성원을 보내며, 여러분들이 받을 고통 역시 함께 나누겠습니다.
친애하는 검찰가족 여러분!
지난날 우리들의 잘못된 관행은 철저히 타파하고 이제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하여 우리 조직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선배들은 검찰권 수호의 바람막이가 되겠다는 각오로 몸을 바쳐 후배들의 디딤돌이 되고, 후배들 역시 선배들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며
나라사랑으로 똘똘뭉친 조직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후배들로부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이른바 요직에 등용되는 인사시스템이 반드시 정착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좋은 선배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채 하찮은 지위로 밀렸기 때문에 조직을 떠나야 한다거나 후배를 위해 길을 터준다는 억지춘향의 이름아래 검찰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작금의 사태도 없어져야
하겠습니다.
선배는 후배의 싹을 자르지 말아야 하고, 후배는 선배가 물러나기를
바라는 조직이 되면 안됩니다.
"검찰은 선비가 있을 곳이 못된다"고 자조적인 말을 하고 퇴직한 어느
검사장과 같은 사람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자기 소신껏 일할 수 있는 평생검사제의 풍토를 지켜내야 검찰의 영속성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연부역강(年富力强) 한 후배 인재들을 의기소침하지 않게 하고,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하며, 정치권의 눈치만
살피며 줄대기를 좋아하는 요령좋은 인사들을 과감히 퇴출시키는데
앞장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검찰이 자세와 능력을 겸비한 정예조직원들로 구성되고 "법률기술자"가 아닌 진정한 검찰인으로서 다시 태어나 상경하애하는 분위기 속에서 신명나게 일할 때 우리는 국민의 신뢰와 사랑속에서
검찰의 부활을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검찰가족 여러분!
정말 우리 검찰조직은 국가의 기간입니다. 검찰이 부패하거나 무능하면 나라의 존립이 흔들리고, 또한 국가가 흔들리면 자유민주주의도 설
땅을 잃고 맙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이 자리를 빌어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무너뜨리려고 암약하는 세력이 상존하고 있음을 경고하면서 이들을 척결하고 국가를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검찰 본연의 막중한
임무임을 잊지 말아달라고 여러분께 당부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며 정들었던 우리 검찰가족 여러분!
우리 모두 국가와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슴 깊이 묻고, 검찰의
독립을 향해 끝없는 희생과 노력을 통해 거듭나도록 하십시다.
저는 이제 검찰을 마지막으로 떠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제
마음은 항상 검찰에 있을 것을 다시 한번 약속합니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지는 것처럼 저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좋은 추억으로 남아 기억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 게 재 일 : 2002년 01월 19일 중앙일보
[심재륜 전 부산고검장 누군가…]
18일 검찰 복직 5개월 만에 야인으로 돌아간 심재륜(58)전 부산고검장은 검찰 안에 `심재륜 사단`이 형성돼 있을 정도로 후배들의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다. 그의 `핵폭탄성` 퇴임사가 주목을 끄는 것도 이같은 영향력 때문이다.
충북 옥천 출신인 그는 서울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와 1967년 사시(7회)에 차석으로 합격, 서울지검 검사 직무대리로 임용된 뒤 30여년간
검찰에 몸담았다.
키 1m60㎝, 몸무게 50㎏밖에 안되는 그는 주로 특수부에서 일했으며
정.관계 등 권력층의 청탁과 압력을 헤쳐나가는 `재치와 뚝심`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대검 중수부장이던 97년 한보사건을 재수사하면서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를 구속하는 등 5공비리.부산 초원복집사건.오대양 집단 변사사건.김태촌씨 구속 등 각종 대형 사건을 강단있게 처리,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덕있는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다)`이란 경구를 좌우명으로 새기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98년 말 대전 법조비리 사건이 터져 검찰 수뇌부로부터 사퇴 압력을 받자 "검찰의 위기는 정치지향적인 검찰 수뇌부에서 비롯됐다"며 수뇌부 동반퇴진을 요구했으나 `항명파동`으로 이어져 이듬해 2월 면직되는 불운을 겪었다.
이후 명예회복을 위해 법정투쟁에 나선 그는 2년7개월여 만인 지난해
8월 복직판결을 받아낸 뒤 "후배들에게 검사 신분보장의 상징으로 남겠다"며 검찰에 복귀,`복직 1호 검사`란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고대훈 기자 <cochon@joongang.co.kr>
----------------------------------------------------------------------
▶ 게 재 일 : 2002년 01월 22일 중앙일보
[인물 오디세이] 심재륜 전 고검장
당대 최고의 특수수사 검사로 꼽히던 심재륜(沈在淪.58)전 부산고검장. 그는 지난 18일 퇴임식에서 '최고 인사권자'까지 거명하며 거침없이 검찰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물러났다. |
|
=============================================================
▶ 게 재 일 : 2002년 01월 10일 중앙일보
미국 최다선 하원의원의 당당한 처신 `화제`
미국 하원의 최다선 의원이 공항에서 속옷 차림으로 보안검색을 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검색이 끝날 때까지 일절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지난 5일 워싱턴 레이건공항에서 23선의 존 딩얼(75.민주.미시간)의원이 디트로이트행 노스웨스트 항공 1417편을 타기 위해 금속탐지기를
통과하자 신호음이 울렸다. 20년 전 말에서 떨어져 부상했을 때 몸에
이식한 강철 고관절(股關節)이 탐지기에 걸린 것이다.
매년 1백번 이상 이 노선을 이용하는 딩얼 의원이 사정을 설명했지만
항공사의 민간 보안요원들은 이를 무시했다. 딩얼 의원은 외투와 양복
상의.신발, 그리고 양말까지 벗은 후 다시 탐지기를 지나가야 했다. 또
소리가 났다.
보안요원들은 딩얼 의원을 안쪽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바지까지 벗게
했다. 요원들은 수술자국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그의 해명을 받아들였다. 그때까지 딩얼 의원은 모든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모든 절차가
다 끝난 다음 그는 노먼 미네타 교통장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딩얼 의원은 AP통신에 "나는 미네타 장관에게 요원들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나를 조사한 것인지 알아봐달라고 요청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중에 가족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으며
화가 났지만 당시에는 존엄을 유지하려 애썼다"고 말했다.
그의 공보비서인 마이클 해커는 "딩얼 의원은 신분을 밝히지 않았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면서 "딩얼 의원은 수없이 비행기를 탔지만 내의 차림으로 조사받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워싱턴=김진 특파원 <jinjin@joongang.co.kr>
========================================================================
========================================================================
[본 받을 만한 처신]
▶ 게 재 일 : 2002년 01월 15일 중앙일보
[삶과 추억] 고 이형근 초대 합참의장
"분단의 비극을 겪고 있는 이 땅에 참 군인의 길을 밝혀준 창군
원로이셨습니다."
13일 밤 82세를 일기로 타계한 이형근(李亨根.예비역 대장)장군에 대한 백선엽(白善燁)예비역 대장의 회고다.
고인은 한평생을 `진정한 군인의 자세`를 지키려고 한 군의 사표(師表)로 추앙받고 있다.
1920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한 李장군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해방을
맞자 46년 국방경비대 대위로 임관했다.
대한민국 군번 1번(10001)이자 창군의 주역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2사단.8사단장을 맡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부산에 피란 중이던 부인이 50년 9월 산고를 겪다가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나고, 수도사단 참모장으로 참전했던 동생(이상근 예비역
준장)마저 청송전투에서 전사하는 비극을 맞기도 했다.
한국전 기간 중 李장군은 당시 미국 일각에서 원자폭탄 사용론을 제기하자 "민족이 공멸한다"는 논리로 반대의사를 강력히 개진했다.
전쟁이 끝나자 李장군은 54년 초대 합참의장을 거쳐 56년 9대 육군참모총장에 부임했다. 그때 그는 고질적인 군인사 및 군납비리를 척결하려다 중상모략에 시달렸다. 그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총장직을 그만두라는 압력을 받아 58년 예편했다.
그 후 李장군은 6.25 전쟁에 대한 공로로 군인으로서의 최고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상했으며, 주영대사와 주필리핀 대사를 역임했다. 참
군인으로서의 李장군의 모습은 예편 후에 더욱 빛이 난다.
지난 58년 전역 직후 당시 장면(張勉) 정권이 입각을 권유했으나 거절한 것이다.
李장군은 후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거절 사유를 이렇게 밝혔다.
"그 당시는 내각책임제라 장관이 되려면 당적을 가져야 했는데 나는 `군인이 정치에 간여해서는 안된다`는 신조로 당적 갖기를 거부했다.
난 아직도 군인은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군인이 정치에 간여해서는 안된다는 李장군의 철학은 타계할 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둘째아들 이헌(李憲.52.기산통신대표)씨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역대 정권이 부친에게 입각을 권유했지만, 전역을 했더라도 군인은 군인으로서의 길을 가야 한다며 끝내 거부했다"고 말했다.
고인은 80년대 신군부의 요청으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참여해 눈총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안돼 갈등을 느껴 입법위원직을 사직했다.
李장군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이 국영기업체 사장 자리를 권유했지만 고인은 "나라 지키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다"며 거절한 일화는 지금도 회자(膾炙)되고 있다.
특히 李장군은 군이 제대로 서려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해 군사정권 때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다.
"나는 투표 때 전두환.노태우 둘 다 찍지 않았다. 오늘날 군이 이렇게
된 것은 군이 두번의 쿠데타로 정치에 개입했기 때문으로 군인이 자기영달에 급급하면 파렴치해진다"는 말을 공.사석에서 서슴지 않고 했다고 아들 李씨는 기억했다.
"군인은 죽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며 영원히 살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있는 한 군인은 같이 있을 것입니다."
李장군이 `군번 1번 외길 인생`이란 제목의 회고록에 남긴 글이다.
합동참모본부는 이처럼 평생을 군인의 자세로 살아온 李장군의 업적을 기려 최초로 `합동참모본부장`으로 영결식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빈소는 국군수도병원(031-725-6134)에 마련됐고 영결식은 17일 오전
10시 국립현충원에서 거행된다.
이철희 기자<chlee@joongang.co.kr>
==============================================================
▶ 게 재 일 : 2001년 12월 22일 중앙일보
[삶과 추억] 언행일치 신념 지킨 `영원한 언론인`
`영원한 언론인`이기를 갈망했던 청암(靑巖)송건호(宋建鎬)선생.
파킨슨 병으로 8년전부터 거동이 불편했던 고인은 폐렴 합병증으로 4년여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지는 등 힘겹게 투병했다. 많은 동료.지인.후배들은 날카롭고 반짝거리던 눈빛의 그가 벌떡 일어나기를 고대했으나 그는 끝내 병을 이기지 못했다.
김태진(金泰振.63.전 동아투위 위원장)도서출판 다섯수레 대표는 "선생님은 한시도 언론인임을 잊으신 적이 없었으며 언론을 떠나서는 그
분을 생각할 수 없다"며 애도했다.
고인이 1975년 3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에서 스스로 물러나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강사로 있을 때였다. 그는 동아사태와 관련해 기자 1백50여명을 해직하라는 회사의 지시에 반발해 "먼훗날 후회하게 될 겁니다"는 말을 남기고 사표를 던졌다.
박정희 정권은 그에게 여러 차례 입각을 권유했다. 그 때마다 그는 "나는 언론인이지 행정가가 아니다"며 한마디로 일축했다. 상당수 언론인이 정.관계로 진출하던 때라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고인은 남에게는 관대했지만 자신에게는 엄했다. `인내와 노력 두가지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 인내야말로 환희에 이르는 길이다`가 그의
좌우명이다. 이는 안중근(安重根)의사의 유훈이다.
그는 술.담배를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 쾌락을 알게 되면 건전한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생활은 소박하고 검소했다. 역촌동 집에서 30년 살았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맏딸 희진(熙珍.49)씨는 대학에
합격하고도 학업을 포기하고 취업해야만 했다.
고인은 생전에 인생의 자세가 바르지 못하면 결코 역사의 진실을 깨닫지 못한다고 역설했다.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개인의 욕심때문에 자신의 입장을 바꾸고 합리화하는
것을 경계했다.
최민희(崔敏姬.41)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사무총장은 "말과 행동을 같이 하신 분이다. 책이 출판돼 인세(印稅)를 받으시면 후배들에게 돌솥밥을 사주셨다. 지갑에 5만원 이상 들어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고인은 동아일보를 떠난 뒤에는 해방 직후의 현대사 연구에 몰두해 『한국민족주의 탐구』(78년).『한국현대사론』(79년).『한국현대인물사론』(83년)등의 저서를 냈다. 이 무렵 시간이 나면 김구 선생의 묘소를 혼자 찾아 상념에 잠기곤 했다.
하지만 그의 고향은 역시 언론이었다. 84년 해직 언론인을 중심으로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해 월간지 『말』을 창간했다.
이어 한겨레 창간(88년)을 주도해 초대 사장과 회장을 지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역에서 물러난 93년 이후부터 그는 병마에 시달렸다.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과 관련해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은 것에 대해 서울고등법원이 지난 4일 재심청구를 받아들였으나 무죄판결을 받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장남 준용(準容.41)씨는 "아버님의 삶은 힘들었지만 그 분은 언론계의
표상이셨고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리고 역사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금관문화훈장(99년).한국언론상(92년).호암상(94년).정일형자유민주상(2000년)등을 받았다. 정부는 언론문화 창달에 기여한 공적
등을 기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키로 했다.
김상우 기자
|
==============================================================
▶ 게 재 일 : 2001년 10월 26일 중앙일보
[사람 사람] 또순이로 산 60평생
"기댈 곳이 전혀 없어 단 한순간도 한눈 팔지 못하고 그저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올해 정읍사 부도상(婦道賞) 수상자로 뽑힌 임신빈(任信彬.66.서울 서초구 반포동)씨. 올해로 47년째 직장에 다니는 任씨는 주부.엄마.며느리는 물론 은행원.학생.교사.세무사 등 1인다역의 숨가쁜 인생을 살아온 `또순이`다.
부도상은 전북 정읍시가 백제가요 정읍사(井邑詞)에 나오는 여인의 정절과 부덕을 기리기 위해 만든 상으로 시상은 11월 1일에 한다. 任씨는
1935년 서울에서 지주의 딸로 태어나 한국전쟁으로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껌.사탕을 파는 노점상 등을 하며 중.고교를 나왔다. 40대1의
경쟁률을 뚫고 한국은행에 취업했지만 배움에 대한 갈증으로 야간대학에 진학, 교사 자격증을 땄다. 서른살부터 교단에 서 상업.사회과목
등을 가르쳤고 야간 대학원에 다니며 학구열을 불태웠다.
그는 또 1970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세무사 자격증을 땄다. 은행원이던 남편(68)이 80년대 중반 부당대출 압력에 맞서 사표를 낸 뒤엔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했다. 식구 열세명을 뒷바라지하면서도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파출부도 없이 7년간 극진히 모셨다.
=============================================================
▶ 게 재 일 : 2001년 10월 10일 중앙일보
[사람 사람] 농사지어 장학금 지급한 노인들
70~80대 노인들이 휴경지에 감자.콩을 키워 번 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있다.
포항시 기북면 탑정2리 탑정노인회 회원들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제5회 노인의 날(10월 2일) 국무총리 표창장을 받았다.
이들은 9일 정장식 포항시장에게서 표창장을 전달받고 겸연쩍어 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탑정노인회 회원은 할아버지 18명, 할머니 14명 등 모두 32명.
이들이 어려운 학생돕기에 나선 것은 1998년. 95년 노인회를 만든 뒤
경로당에 모여 별로 하는 일 없이 하루 하루를 보내던 이들은 "뭔가 보람있는 일을 해보자"며 머리를 맞댔다.
진창하(84)노인회장은 "늙은 우리도 땀을 흘리면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며 "회원들 모두 `일하자`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노인들은 회의를 거듭한 끝에 농사로 돈을 벌어 이웃을 돕기로 했다.
"평생 농사꾼으로 살아온 우리가 농사 외에 할 게 뭐 있노."
노인들은 노는 밭 1천2백여㎡에 감자와 콩을 심었다. 비지땀을 흘렸지만 수확은 시원찮았다. 책임지고 밭을 돌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陳회장은 그러나 모임의 뜻을 살리기 위해 노인정 운영경비 중 일부에
자신의 돈을 합해 마련한 60만원을 마을의 부모가 없는 고교생 2명에게 장학금으로 나눠줬다.
이듬해에는 포항시에서 2백만원을 지원받고 논 8천여㎡와 밭 3천5백㎡를 빌려 벼농사와 감자.콩 농사를 지었다. 이 해의 매출액은 3백80만원.
이 가운데 1백만원을 기북면 내 소년소녀가장 다섯명에게 장학금으로
전달했고 나머지는 이웃돕기에 썼다.
지난해엔 중학생 4명에게, 올 3월엔 중.고생 5명에게 모두 2백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회원 황명구(76)씨는 "힘을 합해 일하고 다른 사람도 도울 수 있어 하루 하루가 즐겁다"며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할 작정"이라며 의욕을 보였다.
포항=홍권삼 기자 <honggs@joongang.co.kr>
==============================================================
▶ 게 재 일 : 2001년 09월 27일, 중앙일보
[사람 사람] 파란 눈 처녀 할머니의 38년 아이 사랑
"세계 여자 프로복싱 챔피언인 미국의 킴 메서(한국명 백기순)가
얼마 전 찾아왔습니다.
제가 키워 미국인 가정에 입양시킨 그 아이가 링에서 싸워 번 돈을 아낀 것이라며 2천달러(약 2백60만원)을 울먹이며 내놓았지요.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
39년 전 선교사로 한국에 건너와 버림받은 아이들을 돌봐온 미국인 처녀 할머니 제인 화이트(65).
그가 다음달 13일 제15회 제천 시민대상을 받게 됐다. 향토축제인 의병제 개막식장에서 권희필(權熙弼.66)시장에게서 상패와 상금 1백만원을 받는다.
충북 제천시 고암동 제천영육아원 원장으로 있는 그의 한국 이름은 `백(白)제인` . 미국 이름의 발음을 본떠 지은 것이지만 우연의 일치로
백제인(百濟人)과 발음이 같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오빠에게서 이 땅에 고아가 많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 캐나다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삶의 방향을 틀었지요. "
미국 위스콘신주 매디슨시에서 태어난 白원장은 1962년 한국에 와 이듬해 제천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지금까지 길러낸 아이들은 1천2백여명.
지금도 갓난아이부터 초등학교 4학년까지의 어린이들이 그의 품에서
자라고 있다. 이들 중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영아들의 경우 白원장의
성을 따라 호적에 올라 있다.
白원장은 해외입양을 추진해 7백33명에게 양부모를 찾아줬다. 또 1백93명은 수소문 끝에 친부모의 품에 안겨줬다.
코흘리개들과 함께 흘려보낸 청춘. 여기에 감동받아 작은 정성을 보태는 이들이 적지 않다. 김영수(金榮秀)전 문화체육부 장관도 그 중 한명이다. 20년 전 청주지검 제천지청장으로 근무하던 중 白원장을 알게
된 金전장관은 매년 말 제천영육아원에 찾아와 성금을 내고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白원장은 "버려진 아이들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 며 "그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 지역사회와 나라에 쓸모있는 사람이 되길 바랄 뿐" 이라고 말했다.
제천=안남영 기자<annyoung@joongang.co.kr>
==============================================================
▶ 게 재 일 : 1998년 08월 05일 중앙일보
[조무제 대법관 임명제청자]청빈한 '향토법관'
사법부내 '청빈' 의 대명사로 통해온 향토 법관이 대법관 자리에 올랐다.
4일 신임 대법관으로 임명제청된 조무제 (趙武濟) 부산지법원장은 93년 재산공개때 고위 법관 중에서 가장 적은 6천4백여만원 (현재 7천2백여만원) 을 신고, 지금까지 '꼴찌' 자리를 지키고 있다.
28년째 법관생활을 통해 모은 재산은 부산시동래구에 있는 26평짜리
아파트 한 채가 전부. 그의 청렴성을 말해주는 일화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94년 부산지법 수석부장에서 창원지법원장으로 승진했을 때 관행대로
직원들이 모아 건넨 전별금 5백여만원을 도서구입비로 기증했다.
게다가 그는 매달 4백여만원씩 나오는 판공비와 재판연구활동비마저
모두 총무과장에게 관리를 맡겨 직원들의 경조사비 등으로 쓴다.
창원지법원장 시절부터 비서실에는 법원내규로 배정된 5급 비서관 없이 여직원 한 명만 두고 있다.
국가예산을 아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법원장 시절 부장판사들이 함께 식사를 한 뒤 돈을 냈다가 후에 식사비가 담긴 봉투를 돌려받았을 정도로 계산이 철저하다.
趙법원장은 또 임관 이후 법관생활 대부분을 부산.대구 등 영남지역에서 보낸 대표적인 향토 법관. 법원 행정처와 서울지법의 화려한 주요보직을 거치지 않았다.
그는 고시 15, 16회는 물론 사시 1, 2, 3회를 제치고 파격적으로 대법관
자리에 올라 법원에 '세대교체' 바람을 예고하고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청렴성이 돋보이는 趙법원장을 지명한 것은 의정부
사건 이후 땅에 떨어진 법원의 권위를 다시 찾자는 의지가 담긴 것" 이라고 말했다.
부인 김연미 (金淵美.50) 씨와 2남. ^경남진주 (57) ^진주사범.동아대^진주지원장.부산지법부장^대구.부산고법 부장^창원.부산지법원장
정철근 기자 <jcomm@joongang.co.kr>
#############################################
▶ 게 재 일 : 2001년 08월 22일 중앙일보
[사람 사람] 7년째 장애인 도와온 안기영 경장
"힘과 비용이 들긴 하지만 내가 좀더 아껴쓰고 노력하면 더 많은
장애인의 손과 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
대구 서부경찰서 평현파출소 안기영(安基永.34)경장. 7년째 움직이기
힘든 장애인들을 돕는 차량운행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올해로 경찰 생활 11년째인 그가 봉사활동에 눈을 뜬 것은 1992년 10월. 서구 내당1동 파출소 근무 때 검문을 하다 오토바이에 받혀 다리를
크게 다친 게 계기가 됐다.
"2년 가까이 병원 신세를 지면서 어머니가 저의 대소변을 받아내시는
걸 보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깨달았습니다. "
복직하기 한달 전인 1995년 6월 퇴원하면서 그는 장애인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기로 마음먹고 관내 서부복지관의 문을 두드렸다. 복지관에서 연결해준 사람은 팔다리를 못쓰는 뇌성마비 1급 장애인 金모(32.대구시 서구 평리동)씨. 휠체어를 사용하는 金씨는 병원이나 모임 등에
가려면 반드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는 金씨가 장애인 모임.컴퓨터 교육 등에 참석하거나 병원에 갈 때
승용차로 태워주기 시작했다. 아직도 사고 후유증으로 다리에 통증을
느끼지만 金씨를 승용차에 태우기 위해 金씨를 업고 5층까지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한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金씨에게 매달 휴대폰 요금을 대신 내주고 있다. 3년 전부터는 지체장애 1급 金모(40)씨와 척추장애 1급 金모(28.여)씨에게도 차량운행 봉사를 해오고 있다. 또 한 달에 두 번 복지시설을 찾아 목욕봉사를 하고 있다.
安경장은 "이들을 도우면서 우리 사회에 도움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며 "아내의 내조가 큰 힘이 되고 있다" 고
말했다.
대구=황선윤 기자 <suyohwa@joongang.co.kr>
###############################################
▶ 게 재 일 : 2001년 08월 14일 중앙일보
[사람 사람] 무료서당 연 서울대 민병수 교수
다음달 1일 정년 퇴임하는 서울대 국문학과 민병수(閔丙秀.64)교수가 자비로 무료서당을 열어 `훈장 선생님` 으로 나섰다.
한시(漢詩)를 전공한 閔교수는 생활 속의 고사성어와 고전의 명언, 그리고 한시에 나오는 선인들의 지혜를 보다 많은 사람과 나누기 위해
올 초 사당역 근처에 자신의 호를 딴 `청파(靑坡)서실` 을 개원했다. 그는 지난 3월부터 대학생 1개반과 성인 4개반의 수강생 1백32명에게 무료로 강의해 왔다.
1970년대 말부터 한시강독회.한시학회 등을 꾸려 활발한 학문적 활동을 해온 閔교수는 한국 한문학 1세대의 대표주자로 꼽힌다. 96년에는
회갑의 나이에도 『한국 한시사』 등 연구서적 네 권을 잇따라 펴내
화제가 됐다.
1백여만원의 월세를 내야 하기 때문에 부담은 되지만 지방에서 올라오는 유학생이나 70세의 노제자 등을 생각해 당분간 무료 강의를 할
생각이다. 2학기 수업에는 매월당 김시습과 황진이의 한시 등을 추가해 `한시강독` 부분을 강화할 계획이다.
閔교수는 "정년 퇴임한 뒤에도 서당을 운영하면서 그동안 미뤄왔던 한문학 자료수집과 한시의 영어번역을 계속하고 싶다" 고 말했다.
홍주연 기자 <jdream@joongang.co.kr>
################################################################
▶ 게 재 일 : 2001년 07월 28일 중앙일보
[사람 사람] 47년째 울려퍼지는 "하늘천 따지~"
"학문이란 본래 각자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양심을 바라볼 수 있도록 깨우쳐 주는 것이지, 없는 것을 스승이 새로 만들어주는 게
아닙니다. "
전북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 `학성(學聖)강당` 의 훈장인 김수연(金洙連.76)옹은 "배우고 가르치는 데 학채(수업료)가 있어서는 안된다" 고
강조했다.
최근 문을 연 학성강당(부지 8백50여평, 건평 1백여평)은 국내에서 가장 큰 개인 서당이다. 안채와 사랑채.행랑채 등 전통 한옥 다섯채에 크고 작은 방 스물여섯개가 있다. 수강생 1백여명이 한꺼번에 묵을 수 있는 공간이다.
이 서당은 정부.지자체에서 단 한푼도 지원받지 않고 金옹과 그의 자녀(5남2녀)들이 힘을 모아 지었다.
金옹은 스물아홉살에 마을 서당의 훈장이 된 이래 줄곧 한학을 가르쳐
오면서 늘 넓은 집을 갖고 싶었다. 더 많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50여년간 김제.정읍 등에서 수십여 차례 이사를 다니면서도 반드시 한쪽에 서당을 마련해 한학을 지도했다.
셋집에 살 때도 항상 집 한켠에 서당과 함께 부엌을 만들어 숙식을 원하는 사람들을 배려했다. 그가 지금까지 배출한 제자는 줄잡아 5천여명.
학성강당을 짓는다고 하자 제자 수백여명이 건립 비용을 대겠다고 했다. 그러나 金옹은 "뜻은 잘 알겠지만 그럴 경우 가르침과 배움의 순수한 의미가 왜곡된다" 며 끝내 거절했다.
강당이 문을 열었다는 소문이 나자 한학을 배우기 위해 전주.서울 등
전국 곳곳에서 방학을 맞은 학생들과 한의사.교사.교수 등이 이곳을
찾고 있다.
金옹은 "한학은 단순히 글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인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깨우쳐 주는 것" 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한학의 참뜻을 전하고
싶다" 고 말했다.
전주=장대석 기자 <dsjang@joongang.co.kr>
###############################################
▶ 게 재 일 : 2001년 07월 13일 중앙일보
[사람사람] 조선대 교수 ,제자 3백명 `아나실` 결성
"도움을 받는 분들의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해요. "
지난 10, 11일 홀로사는 노인을 위해 사랑의 캠프를 연 `아름다운 나눔의 실천회(아나실)` 회장 서재홍(徐在烘.52)조선대 의대 교수는 봉사의 자세를 강조했다.
徐교수는 "학생들이 스승의 봉사정신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애써 큰 힘이 되고 있다" 며 "자매결연을 한 노인들에게 가장 해보고 싶은 게 무엇이냐고 물어 이번 행사의 프로그램을 노인 위주로 짰다" 고 말했다.
교수 회원 20명과 학생 40명이 노인 22명을 모시고 1박2일 일정으로
장성 백양사와 고창읍성 일대를 여행하고 온천욕 등을 함께 했다.
아나실이 결성된 것은 지난해 7월. 학창 시절 농촌봉사를 하면서 느꼈던 뿌듯함을 잊지 못하던 徐교수가 봉사모임의 필요성을 제안하자 교수 20여명이 선뜻 나섰다.
조선대 의대를 졸업하고 1983년부터 조선대 의대 교수로 재직해온 그는 95~97년 의과대학장, 98년 교수협의회장 등을 지내며 동료 교수들의 신뢰를 얻었다. 그 덕분에 회원이 3백명 정도로 늘어났다. 조선대
교수 2백10명과 교직원 30여명이 매월 월급에서 5천원씩을 떼어 기금으로 내놓고 있다. 徐교수의 제자 등 의사 50여명도 뜻을 함께 하고 있다.
이들은 매월 소년소녀가장 10여명에게 생활비를 지원하고, 홀로사는
노인 50여명을 꾸준히 찾아가 말벗이 되는 등 봉사활동을 편다. 아나실은 지난 2월 사단법인으로 바꾼 뒤 대안학교와 외국인 쉼터 등의 후원에도 앞장서 왔다. 교수들의 자원봉사에 자극받아 최근엔 별도의 `학생 아나실` 도 생겼다.
徐교수는 "회원 가입에 별다른 제한이 없다" 며 "사회가 급변하면서 다양한 계층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만큼 많은 참여를 바란다" 고 말했다.
광주=천창환 기자 <chuncw@joongang.co.kr>
###############################################
▶ 게 재 일 : 2001년 06월 20일 중앙일보
[사람 사람] 캐나다 영주권 포기하고 서른에 군입대
캐나다 이민자가 영주권을 포기하고 서른살의 나이에 한국군에
자원 입대, 10년 아래 동료들과 함께 신병교육을 받고 있다.
지난달 29일 입대한 육군 36사단 신병교육대 소속 장재혁(張宰赫.30)훈련병.
1991년 영동고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張훈련병은 94년
4월 가족들이 캐나다로 투자이민을 하면서 영주권을 얻었다.
張훈련병은 96년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를 졸업하고 97년 귀국, 학업과
군복무를 병행할 생각에 방위산업체 복무를 모색했으나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시절이라 취업이 되지 않아 캐나다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평소 한국 남자로서 병역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싶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그는 부모에게 자원입대를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강원도에서 군생활을 한 아버지 장기양(64.張基陽)씨가 아들의 뜻을
흔쾌히 받아들여 張훈련병은 지난해 12월 영주권 포기절차를 밟고 지난 2월 입대를 신청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국내에서 신학을 공부할 계획인 그는 "떳떳이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원 입대했다" 며 "군생활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제대하면 모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신앙인이 되겠다" 고 말했다.
신병교육대장 허준환(47.許俊煥)중령은 "張훈련병은 적지 않은 나이에 힘든 훈련을 받으면서도 항상 당당함과 자부심을 잃지 않고 있다"
고 말했다.
원주=이찬호 기자<kabear@joongang.co.kr>
##############################################################
▶ 게 재 일 : 2001년 06월 19일 중앙일보
[사람 사람] 44년째 고아 돌봐온 임온전 박애원장
부산시 해운대구 우2동 박애원 원장 임온전(72.여)씨는 직접 낳은 자식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를 `어머니` 라고 부르는 아들딸이 1천5백여명이나 된다. 모두 그가 기른 사람들이다.
임원장은 1957년 박애원을 세운 이후 44년간 전쟁고아.가정고아.미감아(未感兒.나병환자의 자녀이나 감염되지는 않은 어린이) 등을 친자식처럼 키워 왔다. 지금도 박애원에는 4~18세 어린이 81명이 그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고 있다.
박애원에는 고마움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아들.딸이 줄을 잇는다. 명절 때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다. 지난 15일에도 김천.김해 등에서 48세의 박애원 동기 4명이 "친정에 왔다" 며 들렀다.
안귀선(48)씨는 "옛날이 그립고, 함께 생활했던 친구들이 보고 싶을 때가 많다" 며 "어머니는 잘 먹이고 입히려고 갖은 고생을 했다" 고 말했다.
그러자 임원장은 "그 때는 아이들도 밭을 매고 닭장을 돌봐야 살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며 "아이들에게 일을 너무 많이 시켜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며 눈시울을 적셨다.
임원장은 57년 미감아 8명을 데려와 키우면서 `영원한 고아의 어머니`
가 됐다. 미감아 보호소에 우연히 들렀다가 "우리 엄마가 돼달라" 고
막무가내로 조르는 아이들을 뿌리칠 수 없었다.
막상 시작했지만 젊은 여성에겐 벅찬 일이었다. 다행히 남편(93년 작고)이 기증한 땅 9천평에 닭 5천마리와 젖소 열다섯마리를 키울 수 있었다. 무.배추.고구마.감자 등을 손수 재배해 식탁에 올렸다. 그는 초창기에 중학교 시험에 합격한 열 한명에게 등록금을 대주지 못했던 일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학교에 찾아가 애원했지만 서무과장은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그것은
당신 사정이니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 고 했지요. 그 때 왜 그리 눈물이 나오던지…. "
임원장은 64년 한독직업보도학원을 세워 양장.타자.수예.꽃꽂이 등을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학원은 후에 해운대공고가 됐다. 박애원
출신 중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없지만 모두들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빗나간 사람은 없다.
박애원에서 자란 사람들은 매달 또는 석달에 한 번씩 기별로 모여 우의를 다진다. 내년 봄에는 전원이 모이는 자리를 마련할 계획이다. 부산시는 희생과 봉사정신으로 살아온 임원장을 `제3회 부산여성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시상식은 7월 2일 오후 2시 부산시청에서 열린다.
글=정용백, 사진=송봉근 기자 <chungyb@joongang.co.kr>
###############################################
▶ 게 재 일 : 2000년 12월 23일 중앙일보
[사람 사람] 10년간 노인정 이발 봉사한 박채군씨
"이발은 제 특기이자 남을 위해 베풀 수 있는 조그마한 봉사일
뿐입니다."
10년간 의왕시 산본1동 노인정에서 이발 봉사를 해온 박채군(朴彩軍.45)씨.
고합 의왕공장 안전환경 유니트 폐수처리장에 근무하는 그는 3주에
한 번씩 야간근무가 끝나는 아침이면 이발도구를 챙겨 노인정을 찾는다.
그렇잖아도 가벼운 주머니 사정에 어려움을 겪는 노인들에게 그의 이발 봉사는 고맙기 그지없는 일. 하지만 노인들에게는 이발보다도 10년을 한결같이 노인정을 찾아 안부를 묻는 그의 마음이 더 반갑다.
"노인정에 계신 어른들은 모두 부모님이라는 심정을 갖고 있다" 는 그는 몸이 아파 노인정을 찾지 못하는 분들에게는 직접 집을 찾아가 머리도 깎아 드리고 문안인사를 한다.
사실 그의 첫 직업은 이발사였다. 1978년 고합 안양공장 구내 이발소에서 일하다 회사 사정으로 이발소가 없어지면서 다른 부서로 옮겼다.
그가 이발 봉사에 나선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친구 아버지의 머리를 손질해 달라는 부탁에 다시 가위를 잡게된
것.
"저에게는 그다지 큰 일이 아니었는데 어르신께서 무척 좋아하시더라구요. 그래서 '다른 노인분들에게도 해드려야겠다' 고 결심했습니다."
오전 9시에 이발을 시작하면 오후 2시를 넘기기 예사지만 "나를 반기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보면 피로가 싹 가신다" 고 그는 말했다.
"연세가 많으셔서 3주만에 찾아뵐 때면 안보이는 분들이 계세요. 돌아가시기도 하고 거동이 불편하셔서 나오지 못하는 분들도 계시고…. 어르신들이 모두 건강하게 지내셨으면 하는게 제 바람입니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
▶ 게 재 일 : 2000년 12월 20일 중앙일보
[사람 사람] '선행왕' 공군본부 오흔석 상사
"새천년 크리스마스에는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의 빛이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
충남 계룡대 장병들 사이에 '선행왕' 으로 통하는 공군본부 주임 원사실 소속 오흔석(吳欣錫.40.오른쪽에서 둘째)상사의 연말 소망이다.
그는 1997년초부터 매주 수요일 저녁과 토요일 오후 대전시 구봉마을
소재 '성애 노인요양원' 을 찾아간다. 70여명의 무의탁 노인들에게 '아들' 노릇을 하기 위해서다.
준비해 간 떡.과일.빵.음료수 등을 할아버지.할머니 입에 넣어 드리는
것, 팔 다리를 주무르며 말벗이 되어드리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주변에서 남몰래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이 일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는 吳상사는 위문품 마련을 위해 98년부터는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새벽 5시부터 1시간 20분 동안 계룡대 관사 지역 1백여 가구에 신문을
돌리고 매달 받는 15만원은 물론 봉급까지 쪼개 음식을 장만했다.
吳상사의 선행은 그의 가족들도 감동시켰다. 부인 문혜숙(文惠淑.36)씨는 보험모집인을 자청해 위문비를 보태고 있다.
두 아들 택곤(13).택수(11)군도 토요일이면 부모를 따라 요양원으로
향한다. 택곤군은 "이제는 주말이 기다려진다" 며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손길을 펴는 아버지가 존경스럽다" 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가 위암으로 투병 중인 상황인데도 "병상에 계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요양원의 아버지.어머니에게
더 잘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매일 아침 기도를 드린다" 고 말했다.
김정욱 기자 <jwkim@joongang.co.kr>
###############################################
▶ 게 재 일 : 1998년 08월 21일 중앙일보
20평전세 못구해 '청빈대법관' 혼자 자취
재산신고 때 7천2백여만원을 신고, '청빈 법관' 으로 알려진 조무제
(趙武濟.57) 신임 대법관이 서울에서 전셋집을 구하지 못하는 바람에
임시로 오피스텔에서 혼자 자취하고 있어 또 한번 화제다.
부산지법원장에서 대법관으로 발탁된 趙대법관은 대법원 청사와 가까운 서울 강남이나 분당 등에 20평형대 아파트를 전세로 얻으려 했으나
부산시 낙민동 26평형 아파트 (시가 6천여만원)가 팔리지 않자 서울서초동 12평짜리 오피스텔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趙대법관은 지난 18일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은 뒤 함께 상경했던 부인 김연미 (金淵美.50) 씨를 부산으로 내려보내고 혼자 식사와 빨래를
해결하고 있다고 대법원 관계자들이 전했다.
부하 직원들을 번거롭게 한다며 부산지법원장 이임식도 사양했던 趙대법관은 또 예산절약을 위해 비서관 (5급) 도 두지 않기로 결정, 의전을 중시하는 대법원 관계자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정철근 기자 <jcomm@joongang.co.kr>
---------------------------------------------------------------------
▶ 게 재 일 : 1998년 08월 22일 23面
“청빈대법관에 집 빌려주겠다”전화 쇄도
'청빈 법관' 으로 이름 높은 조무제 (趙武濟.57) 대법관이 서울에서 전셋집을 못 구해 임시로 오피스텔 신세를 지고 있다는 보도 (본지 8월
21일자 19면 참조)가 나가자 21일 서울 B택시회사 사장 鄭모 (55) 씨가
빌라를 빌려주겠다고 본사에 알려왔다.
鄭사장은 "趙대법관이 오피스텔에 기거하고 있다는 보도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 며 "서울에서 전세를 구할 때까지 역삼동에 있는 20평형대
빌라를 빌려주고 싶은데 趙대법관에게 연락해 달라" 고 말했다.
鄭사장은 "의정부 사건 이후 법관사회까지 부패한 것 같아 실망을 많이 했는데 趙대법관의 청빈한 삶을 보면 아직 우리 사회에 희망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 덧붙였다.
또 한 익명의 주부는 "趙대법관에게 성금을 보내고 싶은데 계좌번호를
알 수 없느냐" 는 전화를 본사에 걸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법원 행정처 관계자들은 "관심을 보여준 분들의 뜻은 고맙지만
趙대법관을 포함한 어느 법관도 호의성이나 특혜성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 고 잘라 말하고 있다.
趙대법관은 법원 행정처 관계자에게 "비록 재산이 많지는 않지만 대법관 봉급으로 충분히 생활할 수 있다" 며 "법관으로서 누구로부터도 집을 제공받을 수 없으며 본인의 재산과 집 문제가 더 이상 언론 등에 보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철근 기자 <jcomm@joongang.co.kr>
---------------------------------------------------------------------
▶ 게 재 일 : 1998년 09월 04일 중앙일보 06面
[유승삼 칼럼] 두 '딸깍발이'
실직자라는 한 독자로부터 최근 이런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요즘 저는 생면부지의 두 사람이 안겨준 감동에 힘입어 다시 용기를
내고 있습니다.
IMF한파에 수해까지 겹쳐 나라꼴은 말이 아닌데도 그저 싸움질만 해대는 정치권에 분노하고 절망하던 차여서 그들의 사연이 더욱 더 가슴에 와 닿았는지 모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자신의 삶의 목표를 향해 꿋꿋이 걸어가고 있는
모습에서 저는 경제적 도움 이상의 힘을 얻었습니다.
이 땅의 가치나 권위는 모두 무너진 듯한 이때 이런 사람들을 부각해
사회의 등불이 되게 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가 지적한 두 사람은 신임 대법관 조무제 (趙武濟) 씨와 양심의 자유에 반 (反) 한다며 준법서약서 제출을 거부해 아직도 복역중인 최연소 장기수 강용주 (36) 씨였다.
필자도 두 사람과는 생면부지이고 그들의 사연도 신문 지면을 통해 스쳐 지나가듯 접하고 말았던 터라 독자의 지적에 따라 새롭게 이곳저곳을 뒤적여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보도내용을 확인해 보기도 했다.
그 결과 보도내용이 정확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보도된 것처럼 趙대법관의 재산은 부산시 동래구에 있는 25평짜리 아파트 (시가 6천여만원) 한채와 예금 1천75만원이 전부였다.
그의 말대로 재산이 적은 것 그 자체가 자랑은 아닐는지도 모른다.
"비록 재산이 많지는 않지만 대법관 봉급으로 충분히 생활할 수 있다"
며 칭찬이나 호의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의도한 건 아니나 바로 그런 자세가 그를 더욱 더 돋보이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딸깍발이' 란 지칭 그대로 청렴과 원칙주의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창원지법원장 시절 부산에서 출퇴근하게 되자 그는 관용차는 창원 관내에서만 타고 부산에서 창원까지는 버스 이용을 고집했다.
"그분은 마치 도를 닦는 사람같이 느껴진다" 는 주위 법관들의 말도 과장이 아닌 것 같다.
보도기사에서 찾아본 강용주씨의 사연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그의 용기도 용기지만 그 어머니 조순선 (72) 씨의 꿋꿋함이 아들 못지않게 감동적이었다.
12년 전 처음 면회갔을 때 전향하면 3년만 살면 된다는 교도관의 말을
듣고 어머니는 기뻐서 아들에게 전향을 권유했다.
그때 아들은 "그런 말 하시려면 다신 오지 마세요" 라고 잘랐다.
그 말을 들은 뒤로는 조씨는 이제껏 전향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다.
정부가 준법서약서 제도를 발표한 며칠 뒤 비로소 어머니는 12년 만에
말을 꺼냈다.
"너는 준법서약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주세요. " 형기는 2006년에나 끝난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내가 2006년이 되기 전에 죽으면 어떻게 할래?" "우리 어머니는 절대
안돌아가실 거예요. " 다시 모자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래, 저승사자가 오라고 해도 절대 안갈란다.
힘내고 건강하게 있어라. " "어머니, 감사합니다. "
우리 사회에는 강씨와 생각을 달리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강씨의 신념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다른 견해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위해 헌신하는 그 자세만은 평가해야 할
것이다.
강씨도 또 다른 의미의 '딸깍발이' 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원칙과 신념을 고집스레 지키는 사람이 너무나도 적다.
대부분이 현실주의자다.
여당에도 야당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얼굴들이 합류하는데도 정치의
모습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은 그 새 얼굴들마저도 기존의 구조와
환경에 적응해 현실적 이득을 얻기에 급급했지 현실적 손해를 감수하면서 자신의 소신과 포부를 지켜나가는 용기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치권에 인물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신념과 용기가 부족한 것이다.
작금의 고액과외사건도 마찬가지다.
사연 하나하나를 들어보면 다 이유가 있고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다.
좋게 말하면 그들은 현실적 이득이나 필요 앞에 도덕적 책무를 잠시
잊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사회에 기여하는 건 없다.
우리들의 사회는 결국은 상황에 뛰어난 적응력을 보이는 현실주의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실적 고통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이상과 신념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에 의해 변화되고 발전하는 법이다.조씨와 강씨의 사연이 다시 한번 읽혀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유승삼(중앙M&B대표)
======================================================================
=======================================================================
=======================================================================
[본 받을 만한 처신]
▶ 게 재 일 : 1991년 08월 02일 중앙일보
<화제의 인물> 시부모,친정부모까지 모시는 김동희씨
충남태안에는 시부모 모시기도 꺼려하는 요즘 세상에 시부모는 물론
친정부모까지 봉양해온 효부가 있어 모두의 귀감이 되도있다 태안군원북면번계리에서 별정우체국을 운영하고 있는 원북우체국장김동희여사(50).
그는 남편 안상훈씨와 81년사별한뒤 혼자 살면서 3년전에 작고하신
시아버님과 현재 81세로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님을 극진히 모셔왔다.
더욱이 84년부터는 어촌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친정집에서 친정부모님까지 모셔왔고 3년전 친정아버님을 여의었지만 지금까지 대,소변마저 못가리는 92세의 친정어머님을 봉양하고있다.
"자식된 도리로 당연한 일인데...부끄럽습니다. 그저 살아계신 두분 어머님들이나마 강건하셨으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는 아침저녁 세끼니를 한번도 거르지않고 직접 밥상을 차려드리고 때때마다 방안을 드나들며 청소를 하고 대소변도 받아낸다고했다. 퀴퀴한 냄새때문에 젊은이들은 아예 나서기조차 꺼리고 있고 딱히 간병할 사람을 구할 수
있는 형편도 못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돌아가신 남편이 별정우체국을 남겨주셔서 근근히 생활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시시때때로 집에 드나들어야하기 때문에 집을 우체국 바로 뒤켠에 마련했어요. 다행히 주변에서 잘 이해해주셔서 바쁜중에도 일처리에는 무리가 없답니다." 10년전 남편이 간암으로 쓸어졌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듯 아득하기만했다는 그는 현재 우체국에서 나오는 60만여원의 봉급과한달에 1만여통에 달하는 우표할인요금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귀뜸했다. 충남서산여중을 나온 그는 자신의 처지보다는 맞벌이해서 겨우 살아가는 친정 이복동생 내외를 더 걱정했다.
이같은 효도와 미덕이 주위에 널리 알러져 그는 올봄 원북면장을 비롯한 많은 지역주민들의 추천으로 제1회 태안군민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갈수록 인심이 각박해져 가는 사회를 보고 안타깝기만 합니다예전엔
체신의 날이되면 집배원들에게도 메리야스나 양말등 선물이답지했었지요. 요즘에는 그나마도 사라졌습니다. 이는 사회가 발전될수록 정과
사랑이 말라간다는 징조로 생각됩니다." 이와함께 그는 "부모와 조상을 섬기는 일이 미덕이 되고 귀감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
▶ 게 재 일 : 2002년 01월 22일 중앙일보
20년간 남편 산불변상금 갚은 할머니 사장님 됐다
남편이 실수로 산불을 내 부과받은 변상금 1백30만원을 20년간
허드렛일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모두 납부했던 용간난(龍干蘭.65.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희망리)할머니가 칼국수집 사장이 됐다.
龍할머니는 자신의 집을 개조, 지난 19일 10평 짜리 `용할머니 칼국수`란 옥호의 음식점을 열었다. 주요 메뉴는 칼국수와 만두국이다.
할머니가 소원이었던 칼국수집을 개업하는 데는 산림청 직원들이 변상금 1백30만원을 모아 다시 돌려주는 등 전국에서 보내온 6백여만원의 성금이 밑거름이 됐다.
개업 첫날에는 북부지방산림관리청 홍천국유림관리소 직원과 이웃들이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뤄 40만원의 매상을 올렸다.
또 신순우(申洵雨)산림청장을 비롯, 각계 인사들이 화환을 보내 개업을 축하했다.
龍할머니는 "남의 식당을 전전하며 허드렛일을 하다 보니 식당 하나
차리는 게 평생 소원이었다"며 "전국에서 성금을 보내준 분들께 감사드리며 돈을 벌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겠다"고 말했다.
龍할머니는 1979년 9월 무심코 버린 담뱃불로 국유림 3.5㏊를 태운 남편 이두봉씨가 80년 사망한 뒤 3남1녀를 어렵게 키우면서도 81년부터
매년 5만~20만원씩 변상금을 갚기 시작, 20년만인 지난해 11월 9일 모두 납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