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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의 종교 불교-함께행복합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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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제는 부처님 가르침의 뿌리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배광식 국제포교사회장
“내 몸이 다 닳아 없어지고, 피가 마를지라도,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깨달음을 얻지 않고는 이 자리를 뜨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보드가야의 피팔라 나무 아래 동쪽을 향해 좌정한 태자는 샛별이 뜨는 새벽에 깨달음을 얻었다. “수많은 윤회를 겪으며, 집 짓는 자를 찾아 헤맸고, 드디어 윤회고통에 빠뜨린 집 짓는 자 너를 보았다. 서까래와 대들보는 산산이 부서져 이제 너는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한다. 갈애를 멈추었고 마음은 생멸을 벗어났다.” 실로 성을 넘어 출가한지 6년만이다. 이 후 7주간 깊은 선정에서, 무명으로 인하여 생노사에 이르는 고집(苦集)의 유전연기를 순관(順觀)하고, 밝은 지혜로 생노사를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멸도(滅道)의 환멸연기를 역관(逆觀)했다. 부처님은 이렇게 고집멸도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를 투철했다. 부처님 최초설법은 기원 전 528년 사르나트의 녹야원에서 콘다냐 등 5비구에게 행해졌다. 이른바 <초전법륜경>으로, 유익하지 않은 쾌락과 고행의 양극단을 여의고, 여래가 실현한 중도 곧 8정도를 통해 깨달을 수 있음과 사성제를 말씀하셨다. 이보다 앞서, 5비구를 찾아 가는 중 마주친 아지비카(사명외도) ‘우파카’가 부처님의 빛나는 모습을 보고, ‘그대는 무엇을 발견했소?’ 라고 물었고, 부처님은 ‘나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이며 부처요’라고 답했다. 적확한 답변이었지만 번뇌에 가린 아만이 건드려져, ‘정말 깨달았을라고? 아니겠지!’라는 마음이 일어난 그는 씨익 비웃으며 지나가 버렸다. 법문을 이해할 사람이 없을까봐 설법을 망설였던 부처님의 예상이 적중한 셈이다. 젊은 야사 등을 더해 60인의 비구승단이 된 때에 ‘뭇 생명의 안심과 행복을 위해, 처음도 중간도 끝도 좋은 법문’을 하도록 전도선언을 하고, 부처님께서 우루벨라로 향하신 후 45년간 길에서 길을 보이신 경율과, 후대에 혜명을 이은 조사들의 논(論)이 경율론 삼장이고,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이를 담고 있다. 불타는 벌판 성난 코끼리에 쫓기다가 겨우 매달린 낭떠러지의 칡넝쿨을 흰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쏠고 있다. 벌집에서 떨어지는 꿀에 취해, 칡넝쿨이 끊어지면 곧 바닥에 도사린 독사와 독룡의 밥이 될 것을 잊고 사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너무나 다행하다. 인생이 고인지 알고 벗어나고자 하는 이는, 이미 앞서 부처님께서 열어 놓은 길을 쉬이 따라가면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근기와 상황에 따라 많은 법문을 설하셨고, 역대조사께서 또 많은 부연(敷衍)을 하였다. 한 귄의 책에 모든 것이 담길 정도의 단순한 이웃종교와 달리 불교가 어렵다고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나무가 아무리 무성해도 뿌리에서 근원하는 것, 뿌리만 잡고 있으면 모든 갈래가 한줄기로 꿰어진다. 그 뿌리가 사성제이다. 부처님의 한량없는 지혜를 숲에 비유한다면, 초전법륜의 내용인 중도와 사성제는 숲속 한 나무 가지를 훑어 주먹 안에 들어온 나뭇잎 정도의 적은 량이다. 이를 설한 이유는 이익과 성스러운 삶의 향상을 가져오고, 열망(번뇌)을 잠재워 그치게 하며, 고요함(寂靜)과 직접적인 지식(證智)과 깨달음(等覺)과 열반(涅槃)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사성제에 전념하도록 당부하셨다. 사홍서원은 사성제를 전념하는 것이니, 맹세코, 고의 진리를 전념해 고통 중생을 건지고, 집의 진리를 전념해 번뇌를 끊고, 멸의 진리를 전념해 부처 되고, 도의 진리 곧 계정혜를 전념해 법문을 다 배워야 한다. <법화경> 제14 안락행품에 서원안락행이라는 말이 있다. 서원이 크면, 아무리 힘든 일도 즐겁게 하게 된다. 맹세코 부처님의 한량없는 법문을 배우되 그 근본은 사성제로 그 안에 연기와 중도와 삼법인 나아가 팔만대장경이 모두 들어 있다. 한글세대에게 한문경전이 어렵다면 영어경전을 보면 훨씬 명쾌하고 쉽다. |
출처;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08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