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여름, 친지에게서 엉뚱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것이었다. 나는 별 생각없이 '나무'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왜 하필이면 나무냐?"하며 채근해 왔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멍청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 죽은 뒤의 내 삶 따위는 아예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 때 내 입에서는 왜 '나무'가 불쑥 튀어나온 것일까? 말이란 그것이 아무리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튀어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내면에 잠재된 의식이 표출된 것이라는데, 그렇다면 내 의식의 어느 층(層)에 어떤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이전에도 정원에 서 있는 향나무, 측백나무, 태산목의 의젓함을 좋아했고, 라일락, 장미, 매화, 철쭉의 여릿한 자태와 향기도 즐기는 편이었다. 도로 양편에 줄지어 서 노랗게 물든 잎을 흩뿌리고 있는 은행나무와 그 너머 산자락 사이에 숨어 빨간 열매를 달고 있는 감나무에서 정감을 느끼기도 해왔다. 강직해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거칠고 산만한 바람소리를 단단한 가지와 섬세한 잎으로 조율하여 천상의 음악으로 승화시켜내는 소나무에 매료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 일상의 외양을 잠시 동안 적시는 부슬비일 뿐, 내 마음의 심층(深層)까지 적셔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올 봄이었다. 모처럼 기차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심히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내 시선을 붙잡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제법 높직한 산봉우리가 준마(駿馬)의 갈기 같은 산자락을 이끌고 힘차게 뻗어 내려오다가 골짜기 입구에서 허리를 낮추고 멈추어 선 곳. 그 곳에 편안히 자리잡은 작은 마을. 그 마을 바로 앞에 큼직한 반원(半圓)으로 푸르러가는 둥구나무였다. 그 둥구나무에 시선을 빼앗기는 순간, 나는 가슴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심한 일렁임을 느꼈다. 그것은 이전의 어떤 나무에서도 느껴보지 못하던 새로운 경험이었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 바로 앞에는 커다란 둥구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수령(樹齡)이 몇 백 년은 되었음직한 거목(巨木)이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당산나무라 부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정자나무라고도 하고, 그냥 팽나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둥구나무의 형상과 그늘이 조성해 놓은 색다른 공간은 평상시에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아니면 허리 굽은 늙은이들이 살아온 세월을 담소하는 쉼터 노릇을 했지만, 타작 철에는 깻단이나 수숫단을 터는 작업장이 되었고, 단오, 유두, 백중 같은 세시풍속일(歲時風俗日)에는 동네 사람이 모여 음식을 나누며 즐기는 잔치마당이 되기도 했다. 또 일 년에 몇 번씩은 어른들이 모여 동네의 대소사(大小事)를 의논하는 회의장 노릇도 했다. 그리고 정월 대보름 동제(洞祭) 때에는 마을의 안녕과 풍작을 기원하는 제의소(祭儀所) 구실을 했다. 동제는 엄격한 격식에 맞추어 진행되는 엄숙한 의식은 아니었다. 제상(祭床) 위에는 해해 웃고 있는 돼지머리처럼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도 익살이 묻어 있었다. 그것은 세련된 익살이 아닌 투박한 말투와 꾸밈없는 동작이 발산해 내는 웃음이었다.
생각해 보면 둥구나무가 조성해 낸 그 공간은 동네 사람들의 바로 곁에 있으면서도 결코 일상 속에 묻혀 버리지 않는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일상에서 빚어진 저마다의 기쁨과 슬픔과 아픔을 저마다의 크기와 무게에 알맞게 갈무리하여 이 둥그런 그늘 속에 풀어놓았다. 그러면 그 환희와 고통은 새로운 활력을 얻어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그것은 둥구나무가 일상의 바로 곁에 펼쳐진 색다른 일상의 공간임을 예사롭게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만이 감지(感知) 할 수 있는 신령스러운 힘이었다.
그리고 허공에 떠올라 하늘의 영상으로 서 있는 둥구나무에는 항상 순연(純然)한 자연의 숨결이 살아 있었다. 줄기와 가지와 잎이 아무렇게나 얽혀 있는 듯하면서도,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았다. 어느 쪽 어디에도 사람이 손을 댈 수 없는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나의 나무에 대한 탐색이 둥구나무 밑에 머물러 맴도는 동안, 그때 내 입에서는 불쑥 튀어나온 '나무'가 어쩌면 이 나무일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둥구나무는 나의 삶과 뿌리를 같이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 문학이 내 삶과 뿌리를 맞대고 있다면, 내가 쓰는 글들은 이 둥구나무에 대한 사색을 형상화하는 꾸준한 작업으로 채우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