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금실이 말하는 강금실
(3) 초등학교 졸업식의 엉덩방아
저는 국민학교를 네 군데 다녔어요. 집이 자주 이사를 하였기 때문인데, 그때야 그냥 버스타고 다녔지, 집안사정이야 어찌 알았겠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참 가난하였던 것인데, 우리집이 부자인지, 가난한지도 잘 몰랐지요. 막내라서 부모님은 생활이 어려워도 저 하나만큼은 좋은 옷 입히고 맛있는 것 먹이고 애지중지 키워주셨어요. 5학년 때 점심 무렵이면 따뜻한 도시락을 학교까지 날라주던 기억이 나요. 아현동 굴레방다리에 있던 북성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어머니께서 사주신 아주 예쁘고 고급스런 치마를 남자아이들이 짓궂게 놀리며 찟어놓았던 일, 1학년 학교 들어가서 너무 수줍어서 청소시간에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도 선생님한테 못하고 그냥 교실에서 쉬하였던 기억도 나고요.(참 주책이지만)
노래 콩쿨에 나갔는데 2절을 준비 안 하였다가 급히 외웠으나 결국 무대에서 우물우물하고 노래를 못 불렀던 일도 기억나요.
2학년 때 사립학교들이 생기면서 공부 잘하던 아이들, 좀 부자였던 아이들이 전부 전학을 갔어요. 저는 공부는 잘하였어요. 학교에서는요. 저는 3학년 때 원효로로 이사 가면서 남정국민학교로 갔다가, 다시 4학년 때 서대문구 천연동 금화국민학교로 전학을 하였어요. 당시 서대문교도소가 있던 부근이었고, 교도관 딸들이 많았는데, 그 당시에는 학교에서 제일 부자이고 당당하던 아이들이었던 기억이 나요. 집에 가면 돼지 키우고, 닭 키웠고요.
서대문 뒷길로 해서 시장으로 해서 교도소 앞까지 많이도 놀러다녔는데요. 라일락 향기가 기억나요. 아카시아 향기도. 꽃 따 먹던 기억도. 친구들은 다 소식이 끊어졌지요.
이 천연동 시절이 정말로 가난하였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날마다 아프셨고요. 매일 콩비지 끓여먹던 시절이었고요. 이 무렵에 삼양라면이 처음 나왔지요. 좌석버스도 처음 나왔어요. 저는 처음에는 ‘자석버스’라서 ‘자석’으로 움직이는 것인 줄 알았지요. 그리고 그 무렵에는 남의 집 앞에 아이를 버리는 일이 잦아서 주워다 키운 아이인 ‘업동이’도 많았고요.
4학년 때 또 이사를 해서 아현동 아현국민학교에서 졸업을 하였어요. 반장도 하고, 졸업식 때 1등상을 받았는데, 당시 운동장 구령대 앞에 책상을 포개서 종이를 씌어놓은 단상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책상이 무너져서 전교생 앞에서 완전 엉덩방아를 찧었지요. 모두 웃었는데, 저로서는 그때 상처를 받았는지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에 상당히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 오래갔어요. 그런 내가 지금은 선거에 나오다니, 참 인생은 알 수 없어요.
첫댓글 닌네임부터 바꾸어서 부드럽게 합시다. 여러분이 보는곳인데 "경호실장 호랑이"는 권위시대 깡패같은분위기이며 누가 따르고 싶어집니까 ? 부드럽고 지성적으로 대처함이 좋겠어요. 강셈을 위해서....
님은 제가 지금까지 썼던 글 읽어 보셨습니까?왜 닉넴 가지고 트집을 잡으시나요?..저는 강사랑공간에서 권위를 내세운 적도 없고. 깡패같은 분위기도 조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저두 강사랑의 회원으로서 닉넴 선택 정도를 제 생각대로 할수 있다고 봅니다 제발 이런 자질구레한 시빗거리좀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