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빈치 코드 ‘예수는 결혼했다’ – ‘신은 죽었다’ 니체의 21세기 버전 (1)
기독교인들은 왜 다빈치코드에 과민반응하는걸까 ?
‘다빈치코드’란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작년 말경 CCF 카페의 한 회원의 글을 읽고부터이다. 어떤 소설일까 궁금했는데 얼마전 ‘mama~Beulah’님의 “다빈치코드(이하 코드)식으로는 코드를 못깬다”라는 글을 다시 읽으면서 호기심은 극에 달했다. 문제는 여기 트리폴리에서 책을 구할 수가 없어 답답했었다. 그런데 3일전에 우연히 한 지인의 사무실에서 ‘코드’를 발견해했다. 얼마나 기쁜지…
첫장을 넘기자마자 코드는 온통 내 머리를 휘어감고 밤새 나를 이리저리로 끌고다니며 새벽미명에서야 놓아주었다. 역시 스릴러 자체였다.
내가 만난 장미회 – 시온수도원
초반부터 나를 흥분시킨 것은 [시온수도원]의 존재, 유럽에서는 [ rose member]라고 칭하는 [장미회]였다. 나는 오래 전에 정확히 말하자면 3년 전에 비엔나에서 지휘자로 활동하는 스위스 친구 P(이름은 밝히지 않겠음)로부터 처음 들었다. 그의 부친은 스위스가 자랑하는 작곡가로서 클래식 음악의 수도인 비엔나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현재 작고한 그의 부친을 기리는 재단이 지휘자인 아들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다.
P는 영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에서 모짜르트가 가입한 비밀단체가 바로 장미회이고 그의 죽음은 장미회를 탈퇴하였기에 독살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아버지도 장미회 멤버”였다고 하였다. 지금도 이 rose member가 존재하며 미테랑 등 다수의 유럽의 저명인사가 장미회원이고 비엔나에서 우리가 만나고 있는 X도 장미회원일 것이다는 말을 하였다. 당시 나는 이 말을 흘러가는 말로 들었다. 왜냐하면 파리, 런던, 비엔나 등 몇몇 주요도시에서는 아직도 특별한 비밀 사교단체들이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기들만의 암호가 있기에 서로가 알아본다는 것이었다.
나는 코드를 통해서 장미회의 실체가 [시온수도회]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그리고 전율을 느꼈다.
코드는 분명히 전통적인 교회와 기독교교리를 정면으로 뒤짚어 엎는 것이라 기독교계의 반발은 심지어 댄 브라운은 악마의 글을 썼다고까지 표현할 만도 하다고본다. 코드를 다 읽고 내가 느낀 점은 코드류가 쉴새 없이 몰아치는 세속화의 거친 파도속에서 기독교인들은 과연 세속 문화-문학, 미술, 영화, 과학 등 –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견지해야만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코드를 그냥 적당히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재미있는 스릴러 허구(소설)라고 치부하고 적당히 엔조이할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 신앙을 파괴하는 댄 브라운과 문학을 이용한 악마의 교묘한 술수로 보는 영적 분별력이 요구되는 것일까가 화두인 것같다. 하지만 나는 이런 극단의 두 대립적 시야에 대한 가치평가를 유보하고 싶다.
‘예수는 결혼했다’ ‘신은 죽었다’ -기독교 세속화의 정형
‘예수는 막달레나 마리아와 결혼한 인간이다’라는 주장은 ‘신은 죽었다’라고 외친 니체의 21 세기 버전으로 들린다. 니체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같다.
19세기 니체는 눈부신 근대과학과 물질번영을 안겨주는 무한정 진보하는 이성의 위력앞에맹목적으로 부정하는 교회의 권위를 조소하면서 [짜라투스트라]를 통해서 ‘신의 죽음’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는 무한한 ‘힘의 근원’인 ‘불(태양)’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배화교)로 귀의하면서 스스로 ‘초인’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매독과 환시, 환청에 평생을 시달리다 결국 돌아가지 못하고 –신으로- 생을 마쳤다.
니체는 당시 유럽 사교계의 ‘장미’였던 ‘루 살로메’를 친구이자 연적인 당대 최고의 시인 ‘릴케’와의 삼각관계 속에서 평생을 연모하였다. 그들 셋이 함께 짧게나마 동거한 적이 있었지만 결국 니체는 그녀를 자기만의 연인으로는 차지하지 못했다. 아니 않했다고 하는 것이 더 니체의 의지에 부합되리라.
니체가 평생을 연모한 연인은 어쩌면 ‘루 살로메’가 아니라 그의 여동생이었을 수도 있다. 니체는 기존의 권위와 도덕을 경멸하고 새로운 도덕을 추구하면서 스스로 ‘초인’이 되고자 그토록 열망했건만 기독교의 금기이자 인류의 터부인 ‘근친상간’의 선은 넘지 못한(않은) 채 평생 사모했던 여동생의 품에서 죽었다.
니체는 젊었을 때부터 철학자 쇼펜하우어와 음악가 바그너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후에 여자를 혐오한 쇼펜하우어와는 절연이 되었지만 루 살로메와 친분이 깊었던 바그너와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나는 코드를 통해서 바그너가 [시온수도회]의 회원으로서 오페라 <파르시팔>을 막달레나에게 헌정하였다는 글(P 237, 2권)을 보고 다시 듣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바그너가 장미회원이었다면 니체와 릴케, 루 살로메에 대한 이해의 지평은 더 넓어지리라 본다.
댄 브라운처럼 역사적 고증도 없이 단지 ‘신은 죽었다’라고만 니체가 문학적, 철학적 선언을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기독교계들은 반발은 대단하였다. 니체의 인본주의가 실제적으로 근대 지성사 특히 신학-이후 세속신학의 모태로서 평가되기도 함-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세속신학의 발흥에 교회와 정통신학도 치열한 대응으로 맞섰다.
21 세기 벽두에 댄 브라운의 ‘예수는 결혼했다’는 선언은 매스미디어의 발전으로 그 파장은 더 파괴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본다. 예수가 결혼했다는 화두는 분명 2000년 기독교회사에서 가장 위력적인 화두임에 틀림이 없다. 선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런 발상이나 물음자체가 믿음을 흔들기에는 충분하기에 위기감을 느낄 수도 있다. 니케아 공의회조차서도 ‘예수의 결혼여부’는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았었다.
기독교회사는 초기부터 사도 바울의 로마서에서도 나타나듯이 끊임없는 ‘비진리’와 ‘거짓 사상’ 그리고 ‘우상숭배’와의 투쟁에서 어떻게 승리해왔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이다. 2000년 교회사에서 코드류의 화두는 그렇게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비성경적 사조에 대한 정통신학의 발전은 공격에 대한 소극적 대응이 아니라 적극적 반격으로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면서 왔다.
코드에서 언급되었지만 중세에는 기존의 교리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마녀사냥식으로 억압한 어두운 교회사가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이 믿고왔던 것과 다른 신념이나 해설을 무턱내고 이단이요 사탄의 흉계라는 식으로 대응하면 중세의 마녀사냥과 다를바가 없는 우를 범하게된다. 때문에 건전한 기독교문화관이 요구된다.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문화관이란 것은 이미 고정된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나타나는 다양한 세속적, 비성경적 문화의 출현과 도전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대응에서 형성되어지고 있다. 기독교문화관은 완결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쉼없이 신사조가 나오기에.
코드류의 소설은 이미 1955년도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으로 등장하였고 또 1988년에는 마틴 스콘시지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상영되었다. 당시 충격적이었지만 이것이 교회에 미친 영향은 거의 없다고봐야한다. 예술 이상이하도 아니었다.
- 역사소설의 문제점이 아니라 역사소설을 읽는 대중의 이해력이 문제
이번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과 다른 점은 풍부한 역사적 고증, 특히 현대의 실존 인물과 조직의 실체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상상력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기에 대중들은 어디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아닌지를 분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몇년 전부터 한국인의 역사의식과 지식은 TV 드라마 사극으로 교양되고 있다는 점을 부끄럽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정권교체가 사극 드라마나 역사기획물로 좌지우지될 정도로 한국대중의 역사에 대한 시각과 분별력 수준에 우려할만한 수준에 다다르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 기독교인의 믿음과 교회사에 대한 일반교양이 일개 다빈치코드같은 소설에 분개하고 흔들린다는 것은 안방 사극물에 대중의 감정이 휩쓸리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비기독교인이나 아직 믿음이 약한 대중들의 코드에 대한 반응이 신드롬처럼 흥분을 잦아내는 현상을 보고 기독교인이 선교의 입장에서 우려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본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는 신자가 코드를 보고 단도직입적으로 이단적이며 악마의 글이다고까지 판단하면서 흥분하는 것에 나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본다. 대중이 사극 드라마 전체를 사실인양 착각하고 반응하는 것과 다름바없는 것이다.
혹자는 대중들이 코드에 열광하는 원인을 진단하면서 그것이 기존교회에 대한 식상이나 기독교의 물량주의. 세습화, 조계사처럼 조용한 자기 개혁을 하지 않는다는 점, 사회봉사나 사회정의에 대한 소극적 등 현교회의 문제점에서 찾는데는 포인트가 안맞다고본다.
코드의 신드롬은 현교회의 문제점보다 스릴러소설자체로서의 완성도에서 일차적으로 비롯된다고본다. 반지의 제왕이 히트친 것은 내용적으로는 황당무계하지만 영화자체의 탄탄한 구성과 스릴러 그리고 현대인들의 신화에 대한 갈망을 자극시키는 신화적 소재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코드 역시 ‘신화적 소재’에 반전을 거듭하는 헐리우드식 구성력으로 대중을 빨아당기고 있다.
대중은 언제나 스캔들과 신드롬에 노출되어 있기에 대중들이 코드에 열광하는 것은 조정래의 역사소설 <태백산맥>에 열광한 것과 별 차이가 없다고본다. 시간이 지나고 그와 비슷하게 또다른 소설이 헐리우드식 구성력과 정통적, 주류적 주장과는 다르게 기존의 일반적 관념을 깨는 주장에 적당한 역사적 고증과 신화적 주인공을 엮는다면 이내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다. <태백산맥> 역시 비주류사를 항변하고 있다.
코드에는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독실한 기독교인이더라도 혼란스럽게하는 것이 분명히남겨있다. 코드에서 볼 수 있는 일부의 역사적 문헌과 존재 자체와 그에 바탕한 탄탄한 논리전개와 구성력은 평신도뿐 아니라 목회자라도 쉽게 반론을 전개시키지 못할만하다. 코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과민과응의 1차적 책임은 일반 목회자들에게 있다고본다. 목회자 자신들의 역사적 교양부족과 신자들에게 교회사와 신학에 대한 일반교양을 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신학교양의 부재 – 비성경적 사상에 현혹
굳건한 믿음은 신학적(교리적) 교양의 뿌리에서 다져진다. 한국기독교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짧은 기간 동안 엄청난 양적 성장을 이룬 것과 동시에 통일교 등 이단들의 득세 또한 심각하다. 이단종파의 신자가 되는 것이 비신자에서 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통교회의 신자들 가운데 특히 열심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 쉽게 현혹된다는 사실을 목격한다. 그 원인은 다름아닌 믿음에 분별력을 주는 신학(교리)적 교양이 없기 때문이다. 신학은 목회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는 당연히 공부해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이성을 갖고 있기에 하나님(신의식)에 대해서 이성적 질문을 하고 이성적으로 답변을 찾고있기 때문이다. [신학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 질문과 대답인 것이다].
바울은 목회자이자 신학자였다. 신자가 왜 신학과 교회사를 공부해야하는 이유는 2000년 기독교회사가 온갖 이단사상과 맞서 견고한 성채로서 맞서 이겨낸 결정적인 무기가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였기 때문이다. 로마서는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법의 요강인 ‘육법전서’처럼 기독교 ‘신학대전’이기 때문이다. 로마서와 사도행전를 제대로 이해할려면 교과서에 참고서가 필요하듯이 인문적 교양이 필수적으로 뒷받침되어져야 한다.
댄 브라운은 풍부한 역사적 고증을 인용하고 있지만 사료의 취사선택에 있어서의 기본적인훈련이 안되어있음을 곳곳에서 노출시키고 있다. 다음편 글에서는 댄 브라운이 언급하는 사료에 오류를 지적하고자한다.
코드을 통해서 나는 한국기독교신자들의 대응형태와 문화적 관점의 경직성을 엿보게되었다.
코드를 하나의 완성도 높은 소설로서 먼저 음미하면서도 역사적 고증의 부분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디까지 수용가능할까라는 질문을 한번쯤은 하는 것이 기독교적 교양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열린 시각 그 자체가 우리의 문화관을 넓게해주는 것이 아닐까한다.
이어지는 다음글에서는 식상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술일반에 대한 기독교적 세계관- 기독교예술론-의 틀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작가 댄 브라운이 ‘티빙’과 ‘랭던’을 통해서 ‘진실 혹은 사실’ 이라고 열거하는 기독교 역사에 대해서 되짚고자 한다.
첫댓글 아~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전 사실 이 책을 읽지 않았거든요. 어떤 센세이션 자체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편이라..그러나 이글은 매우 차분하게 쓴글이라 좋네요. 그런데..'문화적'관점도 아니고, '기독교 교리적'관점도 아니고..겉으로 드러나지 않는'영적인'관점에서..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기를 원하실지가
전 궁금해요....교리로 무장한 율법적인 크리스천도, 문화적 포용력이 있는 지적이고 세련된 크리스천이 되는것도 저의 관심이 아니거든요...예수님을 시험하고자 던졌던 질문에 대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대답하실수 있었던 그 예수님의 지혜를 알아가고 싶어요.
훌륭한 독자가 훌륭한 작가를 만든다는 말이 있지요... 승천하실때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세상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라는 명령이었지 '골방에서 득도하라'라는 말씀은 아니었지요. 눈을 뜬 하루의 시작과 의식은 어떻게하면 치열한 생존투쟁속에서 '영적 도도함'을 잃지않고 '현세적 영성'에 정진하느냐입니다
네^^ CCFer라면 모두가 부딪히게될 현재의 또 앞으로의 과제인것 같아요....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한 그런지혜가 정말 필요한것 같아요..전 아직도 잘 모르겠는게 많거든요..그럴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끊임없이 생각해보게 되는것 같아요.
글이 참 좋네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