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겨울을 보내는 비가 아침부터 내리고 있었다.
진도 땅을 처음 밟게 될 친구들은 날씨야 어떻던 데 여섯 시간 후에 펼쳐질 미지의 섬에 대한 기대로 들뜬 모습들이었지만 나는 이번 여정에 신경이 많이 쓰였다. 뒤늦게 애향심이 생긴 것일까? 영남출신이 대부분이고, 나름대로 자기 영역을 가지고 있는 이 친구들에게 진도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은 진도를 위해서도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었다. 나부터도 여덟 살에 진도를 떠나와 자주 고향을 다녀오긴 했지만 진도라는 원형의 섬에 대하여 최근 이삼년에야 그 깊은 정취를 알게 된 터였다. 진도는 땅이 기름지고 해양성 기후라서 일년 내내 논농사 밭농사를 지을 수 있으며, 크고 작은 섬들로 둘러싸인 바다도 경작지나 다를 것이 없어 그야말로 풍요의 땅이었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수많은 인물들이 이곳으로 유배되어와 시, 서, 화에 몰두함으로서 오늘날 예향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지금까지 그 맥이 이어져 내려와서 우리의 민속 전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원형의 섬이 된 것이었다.
시원하게 뚫린 서해안고속도로는 목포 도착 시각을 제법 앞당겨 주었다. 세발낙지를 마다하고 내가 인도했던 식당은 뜻밖에도 주인이 바뀌어있어서 낭패스러웠다. 호남 여행은 첫째가 먹꺼리다. 주인이 달라서인지 점심상이 신통치 않게 나와 이 식당에 대한 선전을 한바탕 해 논 입장에서 무안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가 진도에 진입한 시간은 오후 세시 반. 하늘을 가렸던 구름이 조금 벗겨지는 듯 했다. 향토문화회관에서 가이드를 맡아 줄 이 지방 모 시민단체장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는 무분별한 개발로 우려되는 환경 파괴를 앞장 서 막아내고 있는 환경지킴이였다.
진도개 시험 연구소를 둘러보는 동안에 주춤했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이번 여정에서 날씨는 철저히 우리일행을 외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철새 도래지에서는 2주 전에도 보았던 노랑부리저어새를 찾을 수 없었으며, 백 여 마리가 노닐던 백조들도 열 마리 안팎, 떼를 지어 비상하던 오리들도 먹이 찾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내심 이태리의 소렌토를 능가한다는 세방 낙조의 장관을 보여주면 체면이 설 양으로 잔뜩 벼르고 있었는데 먹구름은 나의 기대를 모르는지 태양의 안면을 감춰버렸다. 제 각각의 모습으로 서해의 물살을 이겨내고 있는 수많은 섬들만이 붉으스레 신비로운 수줍음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나 낙조를 보지 못한 우리는 씁쓸히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돌아서야 했다. 일행들은 나름대로 차창에 펼쳐지는 봄 같은 겨울의 진도 들녘을 즐기고 있을지 모르나 이번 여정을 준비한 사람으로서 보여줄 것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조바심이 일었다. 하지만 저녁이야말로 이번 여정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이었다. 흑 돼지를 잡은 농원과는 자주 연락을 했었기 때문에 차질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 우리가 어렵사리 찾아간 농원은 저녁 만찬을 위한 장소로서는 너무 여건이 좋지 않아서 어디론가 장소를 옮겨야 할 판이었다. 뿐 만 아니라 돼지는 내가 도착해서야 잡기 시작했는지 이제 막 털을 깎고 있었다. 하기야 전화만으로 돼지를 잡아놓았다가 손님들이 펑크라도 낸다면 어쩔 것인가 이해는 갔다. 조바심하는 나를 지켜보던 가이드 조 의장은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바닷가에 있는 지인의 집에서 일행을 받아들인다 하여 고비는 넘겼지만 이번에는 고기 도착이 너무 늦어졌다. 하지만 돼지고기는 무척 맛있었고, 밤바다에서 올라오는 해풍을 맞으며 우리들은 섬 밤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다. 게다가 우리가 찾아든 이 집은 진도가 좋아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내려와서 공부를 하고 있는 서울토박이 대학원생의 집이었다. 나이 사십에 이른 그녀는 진도 살풀이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 일행처럼 많은 손님을 치르게 될 줄은 꿈도 못 꾸었다며 정성을 다해 우리를 맞았는데, 벌써 진도여인이 다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이튿날, 밖에 나서니 하늘이 새는 것인지 비는 그때까지도 추적거리고 있었다. 유적지 관광마저 어려울 것 같아 다시 조바심이 일었다. 일행들도 자꾸만 어긋나는 스케줄 때문에 짜증들이 나는 눈치였다. 뜻밖에 아침식사를 준비해 준 향기쌀 강사장 댁에서 진수성찬이 나와 일행들이 먹는 즐거움을 만끽함으로서 분위기를 반전시켜주었다.
우린 남도석성을 들러본 후 곧바로 임회면 십일시라는 부락으로 들어섰다. 궂은 날씨 때문에 저녁 일정을 오전 열 한시로 앞당겼던 것이다. 백여 가구가 되는 제법 큰 마을 뒤켠에 민속놀이전수회관이라는 간판이 걸린 크지 않은 건물이 있었다. 징소리, 북소리가 주민들에게 소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한갓진 곳에 위치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콘테이너 두개를 이어서 만든 길쭉한 방이 있고, 거울이 벽면을 채운 한 쪽으로 장고, 북 등이 정돈되어있었다.
나이가 오십에서 육십에 이르는 아짐씨(아주머니)들, 고수를 하는 리더 한 분, 이곳 진도가 좋아 정년퇴임해서 내려와 진도의 민속을 익히고 있는 전직 고위 경찰출신 등, 십 여 명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한 시간 정도 공연을 본 후 장터에 나가 점심도 겸해서 몇몇 진도의 지인들과 함께 일정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약속이 되어있었다. 주말마다 향토문화회관에서 민속공연이 있었으나 3월이 되어서야 공연장 문을 연다고 하여 이런 공연을 보기로 했던 것이다.
궁색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더 짙은 향토의 맛을 보여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을 맞은 진도 아짐씨들은 우리가 자리를 쉽게 뜨지 못하도록 분위기를 잡아가고 있었다. 과일상이 나오는가 싶더니 간재미회가 곁들인 술상이 나오고, 떡과 함께 나중에는 점심상이 나오면서 중간 중간에 공연을 어서 시작해 달라는 나의 보챔을 못들은 척 귀한 손님들을 소홀하게 대접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도시인들답게 시간을 보챘으나 진도사람들은 넉넉한 인심만큼이나 여유 있게 우리를 접대하고 있었다. 떠야 할 시간, 열두시가 다 되어서야 공연이 시작되었다.
“참 정이 많으신 분들이다. 약속한 사람들 이리로 오시라고 하고 여기서 일정을 끝내는 걸로 합시다.”
친구들은 어느새 이 분위기에 동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고수의 부인되는 여인이 남편의 박자에 맞추어 흥보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크진 않았지만 허스키한 탁음이 절절한 한으로 호소력 있게 귀청을 파고들었다. 이어 나이 칠순을 넘어선 아짐이 심청가를 기운차게 불렀다. 그리고 진도아리랑......
‘청천 하늘에 잔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흥흥흥 아라리가 났네.’
‘서방님 볼라고 깨 벗고 잤더니, 문풍지 바람에 설사병만 났구나.’
‘십오야 밝은 달은 구름 속에서 놀고, 이십 안짝 새 큰아기는 내 품 안에서 논다’
구절구절에 풍자와 한이 서려서 구성진 목소리와 함께 진도의 맛이 우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들은 프로였다. 판소리로 목청이 트였고, 감각적으로 어깨가 들썩이며 제 흥에 겨워 소리를 했다. 일행들 중 동부인한 부인들은 애절하게 끊길 듯 이어지는 구슬픈 가락에서 눈가에 이슬이 서리기도 했다. 멀게만 느껴져 관심 밖이었던 판소린데 가까이서 들으니 이렇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 일행은 이미 너나없이 진도의 가락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신바람이 난 것은 북춤이 시연되면서부터였다. 들판에서 진도 대파를 뽑다가 온 평범한 얼굴을 가진 아짐씨들 어디에 이런 기량이 숨겨져 있었는지! 그녀들은 흥겨운 리듬에 맞추어 멋들어진 북춤을 선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공연자 열명, 관객 열명.... 이 십 명이 좁은 방안에서 함께 어울려 신명나는 한판을 벌렸다. 경상도, 충청도, 서울사람들이 진도의 북춤가락에 흥을 못 이겨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급기야는 북을 메고 장단을 따라 두드리기까지 했다. 공연자들도, 관객들도 이마에서 땀이 흘렀고, 이 흥이야말로 호남 영남 할 것 없는 우리 모두의 것임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다.
텔레비전으로 보는 것 보다는 공연장에 가서 관람하는 것이 훨씬 감동적이다. 하물며 우리는 무대에 올라가서 공연자들과 함께했던 것이다. 어께를 맞부딪치며 숨소리와 땀 냄새를 공유했고, 그녀들과 하나가되어 어울림의 한판을 벌이게 된 것이었다. 물론 우리 일행이 두드리는 박자는 어긋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긋남으로 보이지 않는 격식과 질서의 벽이 허물어졌고, 프로와 아마의 간극을 좁혀주었으며, 분위기를 더 상승시키고 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일정이 매번 어긋나서 순조롭지 못했던 어제의 기억은 모두 사라졌다.
이분들의 리더인 함선생은 엇박자란 말을 했었다. 엇박자는 박자를 벗어나 변화를 가하는 것이니 틀린 박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엇박자는 바로 멋이었다. 박자가 어긋났을 때 관객들은 호홉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일행들의 가슴속에는 진도 아짐씨들의 끈끈한 정과 화끈한 기량이 하나의 문화적 충격으로 자리 잡았다. 공연이 끝나갈 즈음 약속장소에서 대기하던 사람들까지 찾아와 같이 한 바탕 굿판을 벌렸다.
“진도는 특이한 섬이야. 사람들 정도 많고!”
“어제 저녁 돼지고기는 정말 맛있더라!”
“정도 많고, 흥도 많고.... 한도 많은 곳인 것 같아!”
“일정을 잡아 다시 한번 방문해야겠어.”
친구들의 입에서 저절로 나온 말들이다.
우리가 진도를 떠날 때 의신면 농협조합장이 막걸리 한 말과 향기쌀 샘플 10봉지를 차에 실어주었다. 귀경 길에 휴게소 마다 들려 막걸리를 즐겼고, 귀경 후 이튿날 진도 여정에 빠졌던 친구들을 모아 진도 막걸리 잔치를 벌였다. 날씨만 좋았더라도 잘 알려지지 않은 진도의 보석 같은 풍광을 볼 수 있었을 것을, 아쉬움을 덮어준 것은 진도 아낙네들의 인정과 예상보다 높은 민속놀이 기량이었다. 처음에는 일정이 어긋나 조바심을 가졌으나 다음날 떠나야 하는 아쉬움이 남았던 것은 바로 엇박자가 끼어든 때문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