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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위치 : 아시아 동부
경위도 : 동경 105° 00", 북위 35° 00"
면적(㎢) : 9596960
해안선(㎞) : 14500
시간대 : UTC+8
수도 : 베이징
종족구성 : 한족 (92%)과 55개 소수민족
공용어 : 중국어
종교 : 도교, 불교, 그리스도교 (3%), 이슬람교 (1%-2%)
독립일 : 1949년 10월 1일
국제전화 : +86
통화 : 위안(Y)
인터넷도메인 : .cn
홈페이지 : www.china.org.cn
인구(명) : 1,330,044,605 (2008)
* 중국 행정 지도
* 중국 주요 도시지도
정식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이다.
세계 최대의 인구와 광대한 국토를 가진 나라로,
국토는 남북 5500km, 동서로 우수리강(江)과 헤이룽강의 합류점에서부터 파미르 고원까지 5200km에 달한다.
북동쪽으로 한국·러시아연방,
서쪽으로는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남서쪽으로는 인도·파키스탄·네팔·부탄,
남쪽으로는 미얀마·베트남·라오스,
북쪽으로는 몽골·러시아연방과 각각 국경을 이룬다.
행정구역은 22개성(省), 5개 자치구(自治區), 4개 직할시(直轄市), 2개 특별행정구로 되어 있다.
중국은 국가면적이 거대한 만큼 유역면적이 100㎢가 넘는 하천이 5만 개 이상 있다.
중국의 대하천은 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며,
중국 전역을 관류(貫流)하면서 동쪽으로 흐르는 중국 역사에서도 중요한 세 하천은 황허강·양쯔강·시장강[西江]이다.
이 가운데 양쯔강은 길이와 유역면적, 그리고 하구에서의 유출량(流出量)에서 다른 강을 압도한다.
황허강은 길이와 유역면적이 두번째이지만, 황허강은 중국문명의 발상에서 그 역할과 입지로 인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황허강은 뢰스 토양을 관류(貫流)하면서 많은 양의 토사(土砂)를 하류로 운반한다.
이 토사들이 넓은 화베이평야를 적시면서 농업용수와 영양분을 공급한다.
황하는 광대한 화베이평야일대를 사행(蛇行)하면서 역사시대에 무려 9번에 걸친 대규모의 물길이 이동을 보였다.
중국 서부와 황토고원에서 여름에만 집중하는 강수량과
문명 발생 이후 계속된 황허강 주위의 인간 거주는 홍수가 빈발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양쯔강은 세계에서 4번째로 큰 강이고 유출량이 9번째로 많은 강으로, 유역면적도 200만㎢로 중국에서 가장 넓다.
즉 길이도 5,980km로 가장 길며 상하이[上海] 근처에 있는 하구에서의 유출량도 32,190㎥/sec로 가장 많다.
양쯔강은 티베트고원에서 발원하여 중국 중심부를 흐르면서 관개를 위한 물을 제공하며
중심부로 접근하기 위한 수상 운송수단 역할을 하고, 황허강에 비해 홍수가 적다.
또한 양쯔강 주위에 있는 둥팅(洞庭)호를 비롯한 많은 호소(湖沼)들은 홍수를 자연적으로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세 강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시장강은 윈구이고원에서 발원하여 남중국해로 흘러들어가는데,
황허강에 비해 길이는 짧고 유역면적도 적으나 유출량은 더 많다.
내륙으로의 수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양쯔강과 유사하지만 유역면적이 좁아 농경지가 적고 거주하는 사람들도 적다.
그러나 그 지류가 흐르는 유역은 접근성이 양호하고 수량이 풍부해 약 1억 명이 이 부근에서 다양한 경작 활동을 하고 있다.
기후는 최남단의 열대에서 서부의 건조기후, 동북삼성의 냉대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의 다양한 기후가 대부분 나타나고,
지형고도면에서도 동부의 저지에서 서부의 8000m급 고산지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크게 나타난다.
이로인해 중국의 식생도 열대우림에서 냉대의 타이가에 이르기까지 매우 종류가 많고 다양하며, 토양 또한 그러하다.
중국의 기후와 식생의 측면을 종합하여 성격이 다른 자연지역으로 나누어 보면 크게 4개의 지역으로 구분된다.
첫째, 습윤기후지역으로 강수량이 풍부하여 삼림으로 덮힌 지역으로 중국의 약 1/3은 습윤기후지역이다.
습윤기후지역은 열대습윤에서 냉대습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습윤지역이 나타난다.
즉 남부와 남동부 최말단의 열대우림과 해안 도서의 몬순 삼림,
그리고 황허강 동쪽의 아열대 광엽 활엽수림에서부터 보하이만[渤海灣]에 이르는 상록(혼합)림까지의 북동부,
그리고 북동부 말단인 하얼빈[哈爾濱] 동부의 한랭한 기온의 타이가가 이에 해당한다.
둘째, 삼림과 건조 초원이 결합된 곳으로 습윤기후와 건조기후가 섞여 있는 곳이다.
이곳은 중국 전체 면적의 약 14%를 차지한다.
이에 해당하는 곳으로는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북동부 평야의 삼림 스텝과
산시성[山西省]·산시성[陝西省]·간쑤성의 황투고원이 있다.
셋째, 반건조 지역으로 분류되는 전체 면적의 20%를 차지하는 곳으로,
이곳은 초원과 강수량 250mm이하의 스텝과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환경 점이지대이다.
이곳에 해당하는 곳은 산시성[陝西省]과 닝샤후이족 자치구의 북부인 오르도스[鄂爾多斯]와
네이멍구 자치구 일부의 스텝 지역이다.
넷째, 전체 면적의 30%를 차지하는 건조지대이다.
서반부의 광대한 지역은 자갈사막, 암석사막, 모래사막의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며, 독특한 건조사막 식생들의 결합으로 되어 있다.
오르도스 북단의 사막과 치롄[祁連]산맥 북부의 알라샨, 중가리아분지, 타림분지의 온대 사막,
그리고 차이다무분지와 쿤룬산맥 북사면의 한랭한 사막,
쿤룬산맥 서부의 고산사막과 스텝사막, 티베트고원의 건조 고산 초원 등이 있다.
중국의 기온 분포는 여름에는 남동쪽에서의 영향과
겨울에는 북동쪽에서의 영향이 강한 몬순 주기와 서쪽으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는 산악,
그리고 동부에 위치한 대륙적 위치에 따라서 크게 좌우된다.
1월 평균기온은 전체의 약 60%가 0℃ 이하이며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 서부와 중가리아분지 같은 곳은 대륙성기후를 보여 겨울에-20℃까지 내려간다.
여름에 남동부는 기온과 습도가 모두 높아서 7월 평균 기온이 우한[武漢]·창사[長沙]·충칭[重慶]·
난징[南京] 같은 곳은 25℃ 이상 올라가며, 이 네 도시는 모두 40℃ 이상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와 유사하게 서부의 건조한 분지에도 7월 평균기온은 높게 나타나는데 투루판[吐魯蕃]은 47.6℃까지 올라간 경우도 있다.
이는 해면하 155m에 위치하는 분지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차이다무분지와 같은 한랭한 고도가 높은 사막은 7월 평균기온이 5℃에 불과하다.
여름 강수량은 지역에 따라 상이한 영향을 끼친다.
고산지의 산맥에서의 강설(降雪)은 차고 건조한 겨울보다 여름에 많이 발생하며
주요 하천의 유입량을 늘리게 하여 덥고 습윤한 남동부에 홍수를 일으키기도 한다.
* 베이징 (北京(북경), Beijing)
정식 명칭은 베이징직할시[北京直轄市]이며, 약칭하여 '징[京]'이라고도 부른다.
화베이평야[華北平野] 북쪽 끝에 있으며, 동남쪽으로 보하이해[渤海]와 150㎞ 거리에 있다.
전국시대에는 연(燕) 나라의 수도였으며, 초기에는 '지[蓟]'라고도 불렸다.
후에 요(遼)·금(金)·원(元)·명(明)·청(淸) 나라 등을 거쳐 중화민국 초기의 수도로서 800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1928년 시(市)로 정하고 이름을 '베이핑[北平]'으로 개칭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과 함께 명칭도 다시 베이징으로 고치고 수도로 정해졌다.
면적은 16,410.54㎢이다. 행정구역은 둥청구[東城區]·시청구[西城區]·충원구[崇文區]·쉬안우구[宣武區]·하이뎬구[海淀區]·
차오양구[朝陽區]·펑타이구[豊台區]·스징산구[石景山區]·팡산구[房山區]·먼터우거우구[門頭溝區]·퉁저우구[通州區]·
순이구[順義區]·창핑구[昌平區]·다싱구[大興區]·화이러우구[懷柔區]·핑구구[平谷區]등
16개 구와 옌칭[延慶]·미윈[密雲] 등 2개의 현(縣)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화와 대외 교류의 중심지이며 국제화된 대도시다.
1929년 교외의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 발견된 60만~23만 년 전의 베이징원인[北京原人] 화석을 통하여
불을 사용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이후 북방을 포함한 전국의 정치·문화·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으며,
인재가 흥성하여 숱한 역사적 인물을 배출하였다.
대표적 인물로는 원나라 희곡의 4대 작가 중 마치원(馬致遠)·관한경(關漢卿)·왕실보(王實甫) 등 3명이 이곳 출신이며,
낙타샹쯔[駱駝祥子]로 유명한 현대 소설가 라오서[老舍] 등이 있다.
톈안먼광장
중국 베이징[北京]에 있는 청(淸)나라 황성의 남면 정문 앞의 광장으로 베이징의 중심이며 현대 중국의 상징이기도 하다.
1959년 건국 10주년 기념으로 정비 확정되었는데, 40만㎢의 광장에서는 50만 명이 집회를 할 수 있다.
1989년 민주화 요구시위·1919년 5·4운동 등 시위장소로 많이 활용되었으며 국경일의 식전도 여기서 많이 행한다.
톈안먼 광장 남쪽에 우뚝 서 있는 인민영웅기념비는 높이 38m로
1958년 5월 1일에 새로운 중국 수립을 위해 희생된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정면에는 마오쩌둥이 쓴 人民英雄垂不朽(인민의 영웅은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저우인라이[周恩來] 총리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마오쩌둥기념관은 중국공산당의 주석이었던 마오쩌둥[宅澤東]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톈안먼 광장[天安門廣場] 남쪽에 서 있으며, 내부는 북쪽의 방과 예배의 방, 남쪽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다.
북쪽에는 마오쩌둥의 좌상이 안치되어 있고, 예배의 방에는 마오쩌둥의 시신이 수정의 관에 들어가 있다.
고궁박물원
흔히 자금성(紫禁城)으로 더 잘 알려진 고궁박물원은 명·청대 500여 년에 걸쳐 24명의 황제가 살았던 중국 최대의 궁전이다.
명의 영락제(永樂帝)가 1406년부터 1420년까지 백만 명이 넘는 인부를 동원하여 지었다.
이 궁에는 72만㎡의 면적(동서 753m, 남북 961m)에 9,999간의 방(현재는 8,000여 간만이 남아 있다.)이 있기로 유명한데,
이는 갓 태어난 아기가 매일 다른 방에서 잠을 자면서 모든 방을 돌면 27세가 된다는 엄청난 규모이다.
성의 둘레를 따라 외부의 침략을 막기 위해 폭 52m의 해자 통자하(筒子河)가 둘러싸고 있으며,
해자의 안쪽에는 또다시 높이 9m의 담이 가로막고 있어서 외부에서의 침입이 매우 어려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천안문에서 북쪽으로 가다 보면 고궁의 남문인 오문(午門)이 나오는데,
대개의 관광은 이곳으로 들어가서 약 1km 북쪽에 있는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에서 끝나게 된다.
궁성 내부는 크게 남쪽 부분의 외조(外朝)와 북쪽 부분의 내정(內廷)으로 나뉘는데,
외조는 주로 국가적인 의식이나 행사 등에 쓰였고 내정은 황제의 집무실과 황후·궁녀 등의 일상생활의 터전이었다.
오문으로 들어가서 내금수하(內金水河) 위로 놓인 5개의 흰대리석 다리인 금수교(金水橋)를 건너서 태화문(太和門)을 지나면
중국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인 높이 35m, 폭 64m의 태화전(太和殿)을 비롯해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의 삼대전이 자리잡고 있다.
삼대전의 뒤로는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寧宮) 등을 비롯한 내정의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이 밖에도 드넓은 고궁박물원 곳곳에는 수많은 건물들과 조각·미술품 등의 소장품이 있어서
자세히 관람하려면 하루 종일 봐도 다 못 볼 정도이다.
만리장성
총연장은 약 2,700km로, 중국의 거리 단위 리(里=0.5km)로 환산하면 1만리가 넘기 때문에 '만리장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진시황이 흉노족의 침입에 대비해 10여 년 간 쌓았으며, 현재의 모습은 명나라 때 완성되었다.
10여 년 전부터 케이블카가 운행되고 있다. 개방하는 곳 중에 많이 찾는 곳은 팔달령(八達嶺)·모전욕·사마대(司馬臺) 장성 등이다.
팔달령은 베이징에서 서북쪽으로 70km 지점에 있다.
이름 그대로 사통팔달하는 곳이므로 가장 많을 힘을 들여 구축한 성벽이라 할 수 있다.
팔달령에는 마오쩌둥의 친필로 장성에 오르지 않고서는 호인이 될 수 없다(不到長城非好漢)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주차장 입구에는 박물관과 영상관이 나란히 지어져 있다. 성벽 위에 용도(勇道)라는 통로가 있고, 약 110m마다 돈대(墩臺)가 있다.
이 위에서 조망을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관광용 말과 낙타도 있다.
천단공원
베이징에는 고궁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천단, 북쪽에는 지단, 동쪽에는 일단, 서쪽에는 월단이 있다.
이들은 명·청대의 황제가 각각 하늘, 땅, 해, 달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베이징시 중심부에서 약간 남쪽에 있는 천단공원은
명나라의 영락제가 1420년 오곡풍양을 하늘에 빌기 위하여 고궁과 동시에 세운 곳이며,
1998년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높이 38m로 우뚝 솟아 있는 기년전(祈年殿, 치니엔디엔)은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제사 건조물로서,
푸른색의 3층 지붕이 인상적인 이 공원의 중심 건물이다.
기년전은 들보, 마룻대, 못 따위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독특한 공법으로 지었으며,
청나라 이전에는 지붕의 색깔이 위로부터 푸른색, 황색, 자주색이었다고 한다.
기년전에서 남쪽으로 걸어 내려가면 역대 황제의 신위를 모신 황궁우(皇穹宇, 황치옹위)가 있다.
높이 19.5m, 지름 15.5m인 이 건물의 내부에 있는 회음벽(回音壁)이라고 불리는 재색 벽은
한쪽 벽 가까이에서 말한 소리를 반향 시켜 반대쪽 벽에서도 들리게 해 준다.
안뜰에도 삼음석(三音石)이라는 신비한 돌이 있는데,
이 돌 위에서 손뼉을 한번 치면 첫 번째 돌에서는 한번, 두 번째 돌에서는 두 번, 세 번째 돌에서는 세 번 소리가 반향 된다.
황궁우의 남쪽에 있는 원구단(圓丘壇)은 황제가 하늘에 기도를 드리던 3층으로 된 대리석의 단이다.
이곳에서는 동지 때마다 황제가 몸을 청결히 하고 중앙의 천심석에서 그해에 있었던 일들을 하늘에 보고하였다고 한다.
류리창
가장 중국적인 느낌의 거리이다.
원과 명나라 때 수도를 건설하였고 계속해서 이곳에 유리가마 공장이 설치되어 지금의 지명으로 불린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청나라 때 베이징으로 시험을 보러 왔다가 낙방한 사람들이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물건들을 팔던 곳이 되었고,
점차 번성하여 고서적, 골동품, 탁본한 글자와 그림, 문방사우 등을 중개판매하는 특색 있는 상점거리가 되었다.
상인·관리·학자·서생 등이 끊이지 않는 문화의 거리로 명성이 자자했던 곳이다.
지금도 750m의 거리에 늘어선 골동품과 고서적들을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허핑문[和平門] 남쪽과 후팡교[虎坊橋] 북쪽에 위치한다.
베이징식물원
4,500여 종의 식물을 전시하고 있는 중국 최대의 식물원인 이곳은 베이징 중심에서 북서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베이징 교외에 있다.
녹지 면적이 약 2,000㎢이며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되기도 해서
주말이면 원내 곳곳에서 가족이나 연인끼리 거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대온실'은 1999년에 55㎢의 면적으로 지어져 3,000여 종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다.
하루 평균 방문객이 1만 명이 넘는 곳으로 이 식물원 안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곳이다.
식물원에 있는 꿀벌연구소에서는 일반인이 벌꿀을 직접 구매할 수도 있다.
또 식물원 내부에는 홍루몽의 작가인 조설근(曹雪芹)의 기념관과 몸길이 5m가 넘는 와불(누워 있는 불상)이 있는 와불사도 있으니,
식물원과 함께 이곳들을 방문하는 것도 좋다.
와불사
누워 있는 불상이 있는 사찰이란 의미의 와불사는 베이징 시내에서 북서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베이징식물원 안에 있다.
당나라 시절에 창건되어 13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와불사는 과거에 영안사, 홍경사라고 불렸던 때도 있었으며
청나라 때인 1734년에 이 사찰에 대한 개수를 하고 나서 붙인 십방보각사(十方普覺寺)라는 명칭도 있었으나,
시민들은 여전히 누워있는 불상을 떠올리며 와불사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원나라 지치(至治) 원년인 1321년에 연인원 7,000명을 투입하여 만들었다는 이 누워 있는 열반불은
길이가 5m가 넘으며 무게가 무려 54톤이나 나가는 거대한 규모의 청동 불상이다.
한편 좌우 진열장에 위치한 노란색 비단으로 만든 열한 켤레의 거대한 신발은
청나라 열명의 황제와 원세개가 부처에게 진상한 예술품이라고 한다.
또한 경내에는 인도에서부터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오래된 나무가 있는데,
석가모니가 바로 이 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든 일을 기념하여 심었다고 전해진다.
원명원
베이징 시내에서 북서쪽으로 대략 15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원명원은 청나라 황제의 별궁이었던 곳이다.
원명원이라는 명칭은 본래 원명원, 만춘원(万春園, 완춘위안)과 장춘원(長春園, 창춘위안)을 통틀어 일컫는 이름이다.
이 정원은 청나라 강희제 때인 1709년부터 무려 150년에 걸쳐 전국의 명공들을 불러모아
각종 유명한 산천과 명승 고적들을 본떠서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 별천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정원 중의 정원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곳은 완성된 지 그리 오래지 않아서 제2차 아편전쟁 때인
1860년에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공격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었고 미술품들은 많이 소실되었다.
지금도 복원공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당시의 화려했던 모습을 현재에는 미니어처로나마 감상할 수 있다.
이화원
중국 최대의 황실 정원으로 일컬어지는 이 공원은
베이징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약 16km 거리에 있으며 총면적이 290헥타르에 이르는 광대한 공원이다.
1764년에 청나라의 건륭제가 청조의 별궁으로 처음 지었고 1860년에 제2차 아편전쟁으로 황폐화되었다.
그 뒤 1888년에 서태후가 다시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으며,
1998년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공원은 전체의 3/4 가량이 호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호수를 곤명호(昆明湖, 쿤밍)라고 부른다.
땅을 파서 만든 거대한 인공호수인데 직접 보면 마치 바다와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곤명호라는 이름은 한나라 무장이 장안의 쿤밍 연못에서 군대를 훈련시켰던 고사에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곤명호를 세우려고 파낸 흙을 쌓아 올린 것이 공원의 북쪽에 있는 만수산(萬壽山, 완서우)이다.
이 만수산 자락에 이곳 건축물의 대부분이 들어서 있부분의 건축물은 남으로 곤명호를 바라보며 만수산 자락에 있다.
공원 안의 건축물들은 이곳을 처음 조성한 청나라 건륭제와 관련이 있거나,
후에 공원을 크게 고쳐서 자신의 은거장소로 삼았던 서태후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건물 곳곳에는 당시의 화려했던 생활과 권력자의 위상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글귀와 물건들이 많다.
댜오위타이
약칭하여 ‘진[(津]’이라고도 부른다.
화베이[華北] 지구의 보하이만[渤海灣]에 인접하며, 해안선 길이는 130여㎞에 이른다.
금(金)나라와 원(元)나라 때는 즈구[直沽]라고 불렸으며, 수상 운송의 요지이다.
1928년에 시로 건설되었다.
면적은 1만 1632㎢로 허핑[和平], 허둥[河東], 허시[河西], 허베이[河北], 훙차오[紅橋], 난카이[南開], 한구[漢沽], 탕구[塘沽],
다강[大港], 둥리[東麗], 진난[津南], 시칭[西淸], 베이천[北辰], 우칭[武淸], 바오디[寶坻] 등
15개 구와 지현[蓟縣], 닝허현[寧河縣], 징하이현[靜海縣] 등 3개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직할시로서 연해 지역에 중점적으로 개발된 항구도시이다.
원나라 때부터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건국 이후 대규모 개조와 건설을 통하여 도시화가 이루어졌으며, 길이 73㎞에 이르는 전국 최대의 녹화지대가 도시를 감싸안고 있다.
3환(環) 도로와 14개의 환도로가 교차하는 분사 모양의 주요 도로가 건설되었으며,
지하철과 주택단지, 교육문화시설, 상업시설 등의 공공시설들이 있다.
교외에 진(鎭:우리나라의 면에 해당하는 행정구역) 단위의 위성 농촌도 개발되었다.
건국 이후 상공업 발전과 더불어 인구가 늘어나자 1955년 5만 9000명을 칭하이[靑海]로 이주시켰다.
1958~1960년 변경 건설사업에 7만 명의 주민을 동원하였다.
회족(回族), 몽골족, 조선족 등 42개 소수민족이 거주하는데, 시 전체 인구의 3%에 못 미친다.
수상공원
톈진희극박물관
약칭하여 ‘후[沪]’ 또는 ‘선[申]’이라고도 부른다.
중국 동부 해안의 중간 부분에 양쯔강(揚子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으며, 해안선 길이는 220㎞이다.
전국시대 초(楚) 나라 춘신군(春申君)의 봉읍이었으며, 송(宋) 나라 때 진(镇)을 설치하여 상하이(上海)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1927년 시(市)가 설치되었고, 현재는 중국의 4대 직할시 가운데 하나로 중요한 공업기지이며,
항구와 무역, 과학기술, 정보, 금융의 중심지이다.
면적은 약 6000㎢이며, 행정구역은
황푸[黄浦]·푸둥신[浦东新]·자베이[闸北]·창닝[长宁]·양푸[杨浦]·푸퉈[普陀]·루완[卢湾]·징안[静安]·바오산[宝山]·쉬후이[徐汇]·
홍커우[虹口]·자딩[嘉定]·민항[闵行]·쑹장[松江]·진산[金山]·칭푸[青浦]·난후이[南汇]·펑셴[奉贤] 등
18개 구와 충밍[崇明]의 1개 현(县)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제화와 현대화가 이루어진 대도시이자 중국의 대외개방 창구이며, 주요 수출입 국경출입구이다.
일본·미국·오스트리아·프랑스·영국·이태리·독일·러시아 등 12개 국가의 총영사관이 주재하고 있다.
육지의 역사가 비교적 늦은 편으로, 인류문화의 발달이 시작된 것은 송(宋) 나라와 원(元) 나라 무렵이었다.
대표적인 역사적 인물로는 원나라 때의 여성 방직 발명가인 황도파(黄道婆)가 둥완[东湾] 출신이며,
명(明) 나라 때 《농정전서(农政全书)》를 지은 서광계(徐光启)는 쉬자후이[徐家汇] 출신이다.
공업과 항구무역이 발달하면서 점차 전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로 성장하였다.
남송(南宋) 시대에 진이 설치되고, 명(明) 나라 중기에 왜란(倭乱)을 방비하기 위하여
성을 건설한 이래 오늘날까지 400~500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구(舊) 시가인 펑후[棚户) 지역은 건축물이 심하게 난립하여
건국 이후 대대적인 시가지 개조를 추진하여 공입과 인구가 도심으로 과도하게 집중되는 현상을 개선하였다.
시내에 지하철과 고가도로를 건설하고, 외곽 지역에 새로운 주택가를 많이 조성하는 한편, 근교에 위성도시들도 형성되었다.
푸둥신구를 신속하게 개발하여 현대화와 국제화를 겸비한 대도시로서 완벽한 기능을 갖춘 상하이를 건설해나가고 있다.
양푸대교[杨浦大橋]와 둥팡밍주타[东方明珠塔],
상하이의 박물관과 도서관 그리고 대극장 등 대형 현대화 건축물이 도시의 멋을 더한다.
* 푸둥(浦東)
'황푸강[黃浦江] 동쪽'을 뜻하는 푸둥은 10여 년 전만 해도 농촌지역에 불과했으나, 1991년 경제특구로 지정되면서 급속도로 성장하여 중국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무역과 금융, 하이테크 산업에서 중국의 첨단기지를 지향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금융·무역구, 수출가공구, 보세구, 하이테크구 등 4개의 소구역으로 나누어 개발하고 있다. 면적은 522㎢로 서울의 약 86% 규모이며, 150만 명이 살고 있다.
상하이 시내에서 푸둥에 가려면 난푸대교[南浦大橋]를 건너야 하는데, 1993년에 세워진 이 다리의 길이는 약 7,658m이다.
푸둥의 도심 지역에는 증권거래소와 인민은행 상하이지점 등 각종 국내외 금융기관이 있으며
중국에서 가장 많은 초고층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이 지역의 상징은 동방명주타워와 하얏트호텔인데,
1995년 완공한 둥팡밍주타워[東方明珠Tower, 동방명주타워]는 높이 468m의 텔레비전탑으로 서울타워의 2배 높이이다.
상하이박물관
1952년 상하이 경마장터에 세웠다. 1996년 상하이 인민광장으로 이전하여 규모가 큰 현대적인 박물관으로 다시 개관했다.
면적은 3만 8000㎡이고, 그 안에는 청동기, 도자기, 불상, 옥기 따위의 12만 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이 가운데서 청동기와 도자기가 특히 유명하다.
중국의 다른 장소는 모두 붐비지만 이 박물관만은 언제나 조용하다.
ㅁ자형으로 지어져 있고, 유물은 청동기·도자기·회화·조각으로 진열되어 차례로 둘러보면 전시물을 빠짐없이 감상할 수 있다.
상하이동물원
상하이 서남쪽인 홍챠오루(虹橋路)에 있다. 상하이에서 가장 생태환경이 우수한 조경림 가운데 하나인데,
예전에는 시쟈오 공원으로 불렸으며 중국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기 전에는 골프장으로도 사용되었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이 동물원은 350여 종의 6000여 마리 동물을 사육하고 있다.
중국의 진귀한 동물인 팬더, 참대곰, 화남호랑이, 동북호랑이, 두루미, 양쯔강악어,
코뿔소 등 중국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 동물이 많다.
국내외 진귀한 동물들을 양육하고, 번식시키며 질병 방지 등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도 함께 하고 있다.
상하이 시민들이 애용하는 휴식 장소로,
이른 아침에는 태극권을 하는 사람들과 밤에는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남녀를 많이 볼 수 있다.
물론 외국인 관광객도 많다.
구석구석 둘러보려면 넉넉히 하루를 잡아야 한다.
루쉰공원(魯迅公園)
진마오타워
1993년 현상설계에 들어가 1998년 완공된 88층의 초고층 복합빌딩으로, 상하이 푸둥[浦東]지구에 있다. 높이 421m이다.
건물주는 중화(中華) 상하이 외국무역공사이며,
설계는 시카고에 본사를 둔 국제적인 설계회사 SOM(Skidmore, Owings and Merrill)이 맡았고,
2개의 중국 설계회사가 공동으로 참여하였다. 시공은 상하이건설단과 프랑스·일본의 건설회사가 맡았다.
건물은 내풍압과 내진 성능을 위해 복합 철골구조를 채택하였고, 높이와 너비의 비는 8대 1이다.
초고층 건물에 상주하는 사람들이 쾌적함을 느낄 수 있도록 초속 55m의 태풍에 견딜 수 있으며,
건물 모양은 사람이 팔을 내뻗어 몸을 안정시키기 위해 양손으로 깍지를 끼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또 중국 최고의 인텔리전트빌딩으로서 빌딩자동화시스템,
방재시스템, 통신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는 등 중국 개방정책의 상징적인 건물로 꼽힌다.
총 5억 달러(한화 약 7000억 원)의 비용이 들었는데, 50층까지는 업무시설이며, 51층부터 88층까지는 호텔이다.
타워 이름인 ‘진마오’는 중국어로 ‘많은 돈’을 뜻한다. 중국의 시장개방과 자본주의의 영향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또 건물의 설계에서부터 시공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숫자 8과 관련되어 있는데,
층수 88층, 높이와 너비의 비 8대 1, 전단벽 코어(core) 8면체, 외곽 복합기둥 8개, 완공일 1998년 8월 8일 등이 그것이다.
이는 중국인들이 숫자 가운데 8을 선호하기 때문으로, 건축주가 중국 문화의 상징이자 중화사상의 표상이 되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위위안
명나라 때인 1559~77년에 조성된 정원으로, 쓰촨성의 관리였던 반윤단(潘允端)이 부모를 위하여 12년 간에 걸쳐 만들었다.
2만㎡나 되는 드넓은 부지에는 잉어떼가 노니는 연못이 있고,
삼혜당과 양산당(仰山堂)을 지나면 다자산[大假山]이 보이는데, 이 인공 동산에는 기암괴석과 동굴이 있다.
더 나아가면 점춘당(点春堂)이 있다.
이곳은 1853년에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을 지지하며 봉기한 소도회(小刀會)의 본부가 있었던 장소로 더 알려졌다.
약 400년 동안에 걸쳐 몇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가 1956년에 개수되었으며, 지금은 외국인 휴게소도 설치 되어 있다.
위포사
상하이역에서 서남쪽 1.5km 지점에 있는 절이다.
1882년 청나라 광서제 때 세워진 사찰로서 이곳에는 미얀마로부터 들여온 화려한 좌불상과 와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대웅보전 뒤에 있는 옥불루(玉佛樓)에는 195cm 높이의 옥불상을 모시고 있다.
이 옥불상은 비취로 만든 불상으로는 큰 것으로 매우 보기 드문것이다.
옥불루 근처에 있는 와불당(臥佛堂)도 높이 96cm의 와불상이 안치되어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신비감을 느끼게 한다.
신천지
홍콩 루이안(瑞安) 그룹이 1999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2001년에 마무리한 신천지(新天地)는
옛 프랑스 조계지였던 타이창루[太倉路]와 싱예루[興業路]에 있다.
한때 정치적 망명객들의 안식처이기도 했던 신천지는 이제 상하이 최고의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현재 신천지 주변지역은 상하이뿐만 아니라 중국 전체에서도 땅값이 가장 비싼 곳이다.
중국의 로데오 거리라고도 불리는데,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곳이다.
아름다운 야경, 식민지 시대의 고풍스러운 건물, 중국의 전통정원까지 여러 가지 볼거리가 몰려 있다.
특히 유럽식 건물을 리노베이션한 상점들이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거리에 넘쳐나는 외국인들과 자유로운 분위기, 신나는 음악과 재즈.
중국의 그 어떤 지역보다 시끌벅적하고 활기가 넘쳐 많은 관광객들이 꼭 찾는 곳이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과 한껏 멋을 낸 중국 젊은이들이 새벽까지 불야성을 이루는 신천지는
차가 다니지 않기 때문에 야외에서 맥주나 와인을 마시면서 멋진 밤을 보낼 수 있다.
와이탄
상하이를 동서로 가르는 황푸강[黃浦江]을 따라 서편에 자리하고 있다.
와이탄은 상하이에서 가장 특색 있는 곳인데, 녹지와 아름다운 빌딩 숲이 한데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독특한 지리적 때문에 이곳은 100여 년 동안 상하이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와이탄을 상하이 역사의 축소판이라 말하기도 한다.
와이탄에는 잘 조화된 석조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여러 나라의 다양한 건축 양식이 모여 있어서 세계 건축 박물관'이라고 불릴 정도다.
와이탄을 천천히 거닐면서 보면 각기 다른 느낌을 주는 수십여 채의 높고 큰 건물들을 볼 수 있으며
이곳에서 한 세기의 건축 예술을 살펴볼 수 있다.
밤이 되면 와이탄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야간조명으로 더욱 웅장하게 보이는 석조 건물들과 세계적인 브랜드의 광고판이 와이탄의 밤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그래서 와이탄은 밤에 더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인민광장에서 시작되는 난징루를 따라 와이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파들로 항상 붐빈다.
상하이의 많은 연인들도 이곳에서 데이트를 즐긴다.
둥팡밍주
상하이 황푸강 동쪽에 있는 푸둥에 솟아 있는 텔레비전탑이다.
1995년에 세워졌는데, 상하이의 랜드마크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높이는 468m이다.
이 탑에는 빨갛고 동그란 공 같은 구조물이 3개로 나눠져 각기 층을 이루고 있는데,
맨 위에는 회전식 레스토랑, 가운데는 전망대, 지면에 가까운 곳은 박물관과 로비이다.
이곳은 낭만적인 전망을 즐기기에 좋은 장소로 젊은 연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특히 상하이의 야경을 보려면 반드시 이곳을 찾아야 한다.
룽화사
오나라의 손권(孫權)이 삼국시대인 242년에 지었다고 한다.
상하이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한다.
경내로 들어가면 미륵전, 천왕전, 대웅보전, 삼성보전, 방장루 등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이 건물들은 청나라의 광서제 때 다시 지었다.
이 사찰에서 관광객의 눈길을 끄는 것은 심하게 구부러진 건물의 지붕 모양이다.
이외에 용화만종(龍華晩鍾), 수령 100년이 넘는 모란를 만날 수 있는 목단원,
송나라 때 세웠다는 40m 높이의 용화탑 따위도 볼 만하다.
* 취푸(曲阜)
산둥성[山東省] 지닝[濟寧] 북동부에 위치한다.
주(周) 초기에 주공(周公)의 아들 백금(伯禽)이 다스렸는 노(魯)의 옛 도시로,
또 속한서, 군현지(續漢書郡縣志)에 실려 있는 曲阜在魯城中 委曲七八里라는 기록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다.
취푸라는 명칭은 수(隋) 때부터 쓰이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진푸[津浦] 철도 취푸역(驛)의 동쪽 10km 쯤에 있는 작은 도시에 지나지 않으나 예로부터 공자의 탄생지로서 유명하다.
징후철도[베이징~상하이]가 시 서쪽에서 지나간다.
북쪽 1km 지점에 공자의 무덤인 공림(孔林)이 있다. 현재의 시가지는 한(漢)나라 때 성벽의 남서쪽 일부분에 해당한다.
공자 옛집 유적에는 대규모의 문묘(文廟)가 세워져 있고(주 때 창건), 예로부터 중국 예교(禮敎)의 중심으로서 존경 받아왔다.
1986년에 시(市)로 승격되었다. 공업으로는 석탄, 기계, 면방직, 화학, 제주 등을 산출하며,
부근 농촌에는 밀, 수수, 땅콩 등을 위주로 산출한다.
교육기관에 6개의 직업학교와 48개의 중학교가 있으며,
문화재에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 및 안묘(顔廟), 주공묘(周公廟), 소호능(少昊陵:中國金字塔) 등이 있다.
취푸공자유적
중국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의 유적.
취푸는 유교를 창시한 공자(BC 551∼BC 479년)의 고향이다.
둘레 약 5.5km인 현성(縣城) 성벽 안에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큰 사당인 공자묘(孔子廟)를 중심으로
공자부[衍聖公府]와 공자 일가 역대 자손들의 무덤인 공자림(孔子林)이 있다.
공자묘는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공자묘의 총본산이다.
묘 전체의 정전인 다청뎬[大成殿]은 동서 너비 54m, 남북 안길이 34m, 높이 31.89m, 건축 면적 1,836㎡로서
청나라 때인 1730년 개축되었다.
흰 돌로 된 2중 기단 위에 노란 유리기와를 이은 2중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다청뎬 맨 뒤에는 침전(寢殿)과 성적전(聖迹殿)이 있다.
침전은 공자의 부인인 올관씨(兀官氏)를 모신 건물로서 북송 때 지은 것을 청나라 때 개축하였다.
성적전은 1592년 건설한 대전으로서, 공자의 일생에 관한 고사를 그린 총 120폭의 돌조각인 성적도(聖迹圖)가 보존되어 있다.
공자림은 공자와 그 후손들의 묘지인데, 취푸 현성 북문에서 북쪽으로 1km 떨어진 곳에 있다.
면적 2,000㎢에 이르는 경내는 나무가 울창하고 제76대에 이르는 후손들의 무덤 10만여 기와 비석들이 흩어져 있다.
공자묘 동쪽에 있는 공자부는 공자 후손들의 주거와 관서를 겸한 곳이다.
정무를 보는 관청인 다탕[大堂], 손님을 맞거나 가족의 사무를 처리하는 얼탕[二堂]·산탕[三堂]이 있다.
주거로는 첸상팡[前上房]·첸탕러우[前堂樓]·호우탕러우[後堂樓] 등이 있다.
1994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타이산(泰山)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곳으로,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이런 상징성 때문에 역대 제왕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제왕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이곳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난 7,412개나 되는 돌계단은 발길에 닳고 닳아 반질반질하다.
이처럼 신성시되다 보니 타이산에는 일찍부터 각종 종교 사원과 사당,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타이산대묘
타이샨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지은 묘. 진·한 시대의 건축물로서
베이징의 고궁, 취푸의 공자묘와 함께 중국의 3대 건축의 하나로 꼽힌다.
정전인 티엔쾅디엔은 송나라 때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이곳은 가로 62m, 세로 3.3m의 거대한 벽화가 있다.
* 쑤저우(蘇州)
역사적인 도시로, 일찍이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오(吳)나라의 국도(國都)로 발전하였고,
그 뒤 역대에 걸쳐 주변 지역의 행정 중심지로 중시되어 왔다.
수(隋)나라 때 대운하가 개통되자 강남쌀(江南米)의 수송지로 활기를 띠면서
항저우[杭州]와 더불어 '천상천당 지하소항(天上天堂 地下蘇杭)'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하였다.
상하이[上海]가 개항하기 전까지는 우쑹강[吳淞江]의 수운을 이용한 외국무역도 활발하였다.
전통적인 견직물·자수제품이 유명하였고, 명(明)나라 이후부터 면포의 생산도 많아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방적·기계·제강·화학·시멘트 등 근대공업도 발달하였다.
주변지역의 풍부한 농업생산과 대운하·우쑹강·후닝 철도[?寧鐵道:上海∼南京] 등 편리한 수륙교통에 힙입어
전통적인 상업활동도 활발하다.
시가지는 둘레 23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옛 성 안쪽과 그 바깥의 신시가지로 나뉘는데 시내에 운하망(運河網)이 발달되어
물의 도시'로 불린다. 옛 관료·지주들이 꾸민 정원들이 많아 '정원의 도시'라고도 부르는데,
4대 명원(名園)으로 꼽히는 창랑정[滄浪亭]·쓰쯔림[獅子林]·줘정원[拙政園]·류위안원[留園] 외에 한산사[寒山寺] 등
명승고적이 많다.
류위안[留園]
명나라 대인 1593년에 처음 세웠는데, 서시태(徐時泰)라는 사람이 개인 정원으로 지었다.
그러나 서시내가 죽은 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다가 청안 건륭제 때 유서(劉恕)라는 확장하고 새로 정비했다.
그 당시에는 '유서의 정원'으로 불리다가 '류위안'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곳은 모두 4개의 정원으로 나누는데, 700m에 이르는 복도식 통로가 특히 인상적이다.
시내에서 5·10루 버스를 타고 류위안에서 내린다.
창랑정
쑤저우에는 4곳의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창랑정으로 면적은 약 1ha이다.
송대에 시인 소순흠(蘇舜欽)의 소유가 되어 오늘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경내에는 청향관(淸香館)을 비롯한 아름다운 건물이 많다.
스쯔린[獅子林]
원나라 지정(至政) 2년(1342)에 만들어진 원대의 대표적인 정원.
원말의 고승 천여 선사(天如禪師)가 은사 중봉화상(中峰和尙)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정원이다.
줘정위안[拙正園]
시가의 동북쪽에 있고 면적은 약 4ha. 명나라의 대표적인 정원으로 원내는 동원, 중원, 서원으로 크게 3분되어 있다.
정원의 5분의 3이 연못으로 되어 있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대부분 물가에 있다.
한산쓰[寒山寺]
정원은 아니지만 쑤저우 풍광에서 빠질 수 없는 절이다.
당대의 승려시인 한산(寒山)이 절에 기거한 후부터 한산사라고 불리고 있다.
당나라 후기의 시인 장계의 절창 〈풍교야박楓橋夜泊〉은 쑤저우 풍광을 눈에 선하게 읊조리고 있다.
산문(山門)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풍교야박〉을 새긴 비문을 볼 수 있다.
판먼[北門]
주나라 경왕 6년인 기원전 514년에 최초 설립되었으며 1986년에 다시 지었다.
운하와 다리 그리고 옛 성벽과 성문이 잘 어우러진 판먼은 물과 육지를 잇는 커다란 성루(城樓)이다.
판먼은 이끼 낀 성벽과 운하의 조화가 매우 독특한데,
판먼 앞의 운하에 놓인 오문교, 북쪽에 우뚝 솟아 있는 서광사와 함께 '반문삼경'이라고 하여 쑤저우에서 유명한 명승지이다.
철령관이 쑤저우의 서쪽 관문이라면 판먼은 남쪽 관문이다.
운하가 남쪽으로 흘러들어와 아치형의 오문교 밑을 지나게 만들어져 있는데,
지금도 다리 위에는 자전거가 지나다니고, 다리 밑으로는 물자를 운반하는 배가 지나다닌다.
운하는 아치형의 오문교(吳門橋) 밑을 지나면서 가늘어져 쑤저우 시내로 들어간다.
예로부터 중국 사람들은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쑤저어와 항저우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라는 말로 운하의 도시,
쑤저우의 아름다움을 노래해 왔는데 쑤저우의 명승지인 판먼도, 그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배경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후추[虎丘]
수쩌우 북서쪽 5km 거리에 있다.
송나라 때 시인인 소동파(蘇東坡)가
쑤저우에 와서 후추를 구경하지 않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을 만큼 경치가 아름답다.
원래는 춘추시대 오나라의 왕 합려의 묘지였는데,
호추라는 이름은 장례를 지낸 지 3일째 되던 날 백호 한 마리가 나타나 능을 지켰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호추의 모습이 호랑이를 닮아서 붙여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높이 40m의 언덕인 호추 정상에는 쑤저우의 상징인 호추탑이 있다.
이 탑은 높이 47.5m로 쑤저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축물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둘로 갈라진 시검석(試劍石)이 보이는데,
오나라 왕 합려가 천하의 명검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잘랐다는 전설이 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천인석(千人石)이라는 평평한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서 1,000명이 앉아 승려의 설법을 들었다고 한다.
호추에서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꽃축제와 단풍 축제가 열린다.
그러므로 호추를 가고자 한다면 봄이나 가을에 방문하는 것이 더욱 좋다.
호구의 주위는 아름다운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데이트 장소로도 좋다.
산을 넘어 호추탑까지 관광을 한 후 다시 돌아와야 하지만 산을 넘어가 마차를 타고 돌아오면 색다른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쉬엔마오관
쉬엔마오관은 중국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도교사원이다.
276년에 처음 지었는데, 당시에는 '진경도관'으로 불렸다.
그 뒤 남송(南宋) 소흥(紹興) 16년(1146)에서 순희(淳熙) 6년(1179) 사이에 여러 건물이 중수되었다.
그리고 쉬엔마오관은 원나라 때인 1295년에 다시 지었다.
지을 당시에는 베이징의 백운관, 지난의 장청관, 시안의 팔선암과 함께 중국의 도교 4대 명관에 속했다.
하지만 지금의 쉬엔마오관은 1997년에 독산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6면으로 된 30개의 푸른 돌기둥으로 건축되었으며, 외진주는 모두 팔각 석주이다.
남방에서는 보기 드문 큰 통와(筒瓦)로 지붕을 덮었다.
사원 내의 본당으로 남아 있는 삼청전(三淸殿) 역시 중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도관으로 그 크기가 가로 45m, 세로 25m에 달한다.
쉬엔마오관에서는 매년 1월 9일의 옥황대제 탄신일과 2월 15일 노자 탄신일에 성대한 의식이 치른다.
겉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현묘관 안으로 들어가면 악기나 장식품, 토산물 등이 진열되어 있으며 쇼핑도 가능하다.
구이린(桂林)
주장[珠江] 수계의 구이장[桂江]에 임한 하항(河港)으로, 일찍이 진(秦)나라 때부터 발달한 화난[華南] 최고(最古)의 도시이며,
한때 광시성[廣西省]의 성도(省都)가 된 적도 있다.
계림의 명칭은 이곳이 예로부터 계수나무가 많은 지역으로 ‘계수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곳’이라는 뜻이다.
빼어난 풍치로 예로부터 시인과 화가들의 글과 그림의 소재가 되어왔다.
계림의 산수는 천하 제일이다(桂林山水甲天下)라는 명성을 들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 중의 하나이다.
특히 독특한 모양의 기암괴석으로 유명한데,
이 기암괴석은 카르스트지형인 이곳에서 지각변동으로 인해 해저가 지형적으로 돌출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기묘한 형태의 지형은 각종 영화의 배경장소로도 이용되었으며, 중국 영화 《소림사(少林寺)》도 이곳을 무대로 한 것이다.
연평균 기온은 18.8℃이다. 아열대 기후로 4계절 내내 따뜻하여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다.
예로부터 하천교통의 요충지였고,
오늘날에는 샹구이[湘桂]철도가 개통되어 전통적인 상업 외에 면방직을 중심으로 화학·정비·농기구·제사·제지공업이 활발하다.
구시가는 당(唐)나라 때 구축한 석회암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대안(對岸)에는 시가지가 자리잡고 있다.
리강
중국 관광의 하이라이트 중의 하나가 리강 유람이다.
이 뱃길 유람은 봄·여름·가을에는 구이린에서 83km 남쪽에 있는 양수어까지 약 8시간을 여행하게 되며,
갈수기인 겨울에는 구이린에서 양디까지 버스로 가서 양수어까지 20km 거리를 약 4시간에 걸쳐 유람하게 된다.
배를 타면 차, 과자 따위를 서비스한다.
배가 나아감에 따라 여행자는 마침내 자신이 한 폭의 산수화 속에 빠져드는 느낌을 갖게 된다.
구절양장, 굽이굽이 돌아가는 리강 양안에 솟아 있는 수많은 기봉들,
옛날처럼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는 어부, 이 모든 것이 남화 속의 화재들과 같다.
수많은 암벽, 봉우리에 얽힌 전설을 안내원이 중국어로 설명해 준다.
싱핑이라는 마을을 지날 무렵 점심식사가 시작되고 대개 식사가 끝날 무렵에 종착지 양수어에 도착한다.
양수어에서는 1시간의 자유시간이 있다.
반드시 안내원에게 양수어를 다시 출발하는 시간을 확인하고 양수어를 둘러보는 것이 좋다.
예로부터 양수어의 산수가 구이린보다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루티암(蘆笛岩)
카르스트 지형의 정수(精髓)를 맛볼 수 있는 아름다운 동굴로 1959년에 한 농민이 발견한 뒤, 1962년부터 일반에 개방하였다.
총길이 약 2km이나 그 중 500m까지만 관광할 수 있으며, 관람시간은 약 1시간 30분이다.
굴 안은 적·청·황색으로 조명이 설치되어 있고 종유석마다 수정궁, 전원 풍경 등과 같은 이름이 붙어 있다.
뤄양(洛陽)
황허강[黃河]의 지류인 중국 허난성 서부 뤄허강[洛河] 유역에 위치한다.
중국의 7대 고도(古都)로 꼽히며, 성도(省都)인 정저우[鄭州]와의 거리는 140km이다.
연평균기온 14℃, 연평균강수량 703.9mm이다.
부근 일대는 뤄허강 연안의 소분지로, 예로부터 화베이평원[華北平原]과 웨이수이[渭水]분지를 잇는 교통요지를 이루었다.
장안(長安:지금의 西安)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자주 국도(國都)가 된 곳으로 유명하다.
BC 11세기에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동방경영의 기지로 축성한 데서 비롯되며, 당시에는 낙읍(洛邑)이라고 하였다.
그뒤 BC 770년에 주왕조가 현재의 산시성[陝西省]의 호경(鎬京)으로부터 낙읍으로 천도한 뒤 동주(東周)의 국도로 번영하였고,
후에 후한(後漢), 삼국(三國)의 위(魏)·서진(西晉)도 이곳에 도읍하였는데,
후한 때부터 도성의 규모가 남북 9화리(華里:1화리=0.5km), 동서 6화리였기 때문에 구륙성(九六城)이라고 하였다.
한편 정식명칭은 전한(前漢) 때에 낙읍(洛邑)으로 불리다가, 후한이 AD 25년에 국도로 정하면서 현재 명칭인 뤄양으로 고쳤다.
후에 북위(北魏)가 화북을 평정하자, 493년에 효문제(孝文帝)가 산시[山西]의 다퉁[大同]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여,
구륙성을 중심으로 시역(市域)을 동서 20화리, 남북 15화리로 확장하였다.
호수(戶數) 약 11만, 불사(佛寺) 1,378을 헤아렸던 당시의 모습이 양현지(楊衒之)의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기술되어 있다.
수(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605년에 병란으로 황폐한 북위의 뤄양성 서쪽 15km 지점에 거의 같은 규모(주위 69화리)의 새로운 성을 건설하고,
장안의 부도(副都)로 삼아 동도(東都)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뤄양의 전신이다.
당(唐)나라도 부도로서의 뤄양의 지위를 이어받아 동도하남부(東都河南府)라고 불렀으나,
수·당시대에는 서쪽의 장안이 정치도시인데 대하여 뤄양은 경제도시로 대운하를 따라 수송되는 강남의 물자 집산지로 번영하였다.
그러나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난 뒤 쇠퇴하여 오대(五代) 때에 후당(後唐)의 국도가 되고,
북송(北宋) 때까지 서경(西京)이라고 불렀으나 원(元)·명(明)·청(淸)나라 때에는 지방도시로 일관하였다.
중화민국 시대에는 한때 성도가 되었고, 1933년에는 난징[南京] 정부가 이전해 왔던 적도 있다.
1948년에 시(市)로 승격하였다.
오늘날 뤄양은 다시 발전하여, 정저우와 더불어 허난성의 2대 공업도시가 되었다.
중국 최대의 트랙터공장을 비롯하여, 베어링·유리·화학비료 등의 공장이 입지하고, 대규모의 면방직 콤비나트가 형성되어 있다.
한편 부근에는 석탄 및 기타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또 대도시 중에서는 싼먼샤[三門峽]댐의 수력전기를 가장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한편, 미사일·항공기지 등이 있어서 군사적으로도 크게 중요시된다.
부근 농촌에서는 밀·옥수수·콩·목화 등의 농산물을 산출하며, 특히 무단화[牡丹花]가 유명하다.
룽하이철도[連雲港~蘭州]와 쟈오즈철도[焦枝鐵道:焦作∼枝城]의 교차점이며,
310·207국도와 고속도로가 지나고, 민항(民航)도 통한다.
교육기관으로는 뤄양대학·뤄양의학원·뤄양중의학원[洛陽中醫學院]·뤄양공학원 등 3,551개의 고·중·소학교가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인 바이마사[白馬寺]·중국 미술사상 중요한 문화재로 꼽히는 룽먼석굴[龍門石窟],
이밖에 톈진교[天津橋]·관린[關林]·뤄양구무[洛陽古墓]박물관·무단[牡丹]공원·백거이묘(白居易墓) 등 명승지가 많다.
룽먼석굴
중국 허난성[河南省]에 있는 윈강석굴[雲崗石窟]과 쌍벽을 이루는 중국의 대표적 석굴사원.
뤄양[洛陽] 남쪽 약 14km 지점에 있다.
석굴이 있는 이췌산[伊闕山]은 이허[伊河]를 사이에 두고 서산(西山)과 동산(東山)으로 갈라지며,
석회암의 암벽에 다수의 크고 작은 동굴을 뚫어놓았는데, 동굴 안에는 저마다 엄청난 수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그 수는 동굴 1,352, 감(龕:불상을 모시는 장) 750, 석탑 39, 불상 9만 7306체라고 기록(룽먼寺保管所)되어 있다.
석굴은 북위(北魏) 때 만들기 시작하여 수(隋)·당(唐)으로 이어지고 송(宋)나라에서 끝났으나,
그 주요 부분은 5세기 말에서 7세기 후반에 이르는 불교미술의 전성기에 조영(造營)되었다.
북위굴(北魏窟)이 있는 서산의 석굴군(石窟群)은 고양동(古陽洞)을 비롯하여,
빈양동(賓陽洞)·연화동(蓮華洞) 등이 유명하며, 우수한 북위 불상이 많다.
또, 서산의 중앙에 있는 봉선사동(奉先寺洞)의 대로사나불(大盧舍那佛)은 높이 13m의 거대한 석불로서,
협시(脇侍)인 보살상·나한상·신왕상(神王像)·인왕상 등과 함께 당(唐)나라 조각의 최고봉을 이룬 수작으로서,
그 조상기술(造像技術)의 뛰어남과 높은 품격은 특기할 만하다.
당나라의 고종(高宗)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만들기 시작하여 675년에 준공되었다.
동산의 간경사동(看經寺洞) 등은 모두 당대에 조영한 것이다. 동산의 북쪽에는 백낙천(白樂天)의 묘가 있다.
룽먼의 북위불은 윈강의 불상에 비해 조상기법이 매우 섬세하고,
작풍에도 날카로움을 안에 숨긴 우려전아(優麗典雅)한 멋을 풍긴다.
불상이 가지는 유암(幽暗)한 표정, 당당한 체구, 정돈된 착의(着衣)와 상현좌(裳縣座),
힘차게 흐르는 구름을 타고 나는 신선과도 같은 천인(天人) 등 모두 남조(南朝) 불상 작풍의 영향을 받았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다퉁(大同)
중국 산시성 북쪽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와 접하며, 외장성(外長城) 안쪽에 위치한다.
타이위안[太原]과의 거리는 350km이다. 연평균기온 6.3℃, 연평균강수량 400mm이다.
예로부터 유목민족에 대한 방위거점이 되었으며, 398∼494년에 걸친 약 100년 동안 북위(北魏)의 국도가 되었다.
다퉁의 지명은 요(遼)·금(金)나라 때 서경대동부(西京大同府)가 된 데서 유래하며,
북위·요·금나라 때는 중국 베이팡지구[北方地區]의 소수민족인 한족(漢族)과의 정치·경제·문화교류의 중심지였다.
명(明)나라 때에는 구변진(九邊鎭)의 하나로 북변(北邊) 굴지의 군사도시가 되었는데,
시가지를 둘러싼 주위 7km의 성벽은 명나라 초에 구축된 것이다.
청(淸)나라 때는 네이멍구와 서역(西域)의 무역집산지로 알려졌으며, 1949년에 시(市)로 승격하였다.
징바오[京包]철도와 퉁푸[同蒲]철도의 교차지로서, 허베이[河北]·산시 2성(省)과 네이멍구자치구를 잇는 교통의 요지를 이룬다.
내외(內外) 2장성(長城)의 중간에 자리하며, 부근 일대는 밀·조·수수 등의 농경 및 목양(牧羊) 지대를 이룬다.
평균 해발고도 1,000∼1,500m인 산에는 석탄 매장량이 풍부하여 예로부터 ‘석탄바다(煤海)’라는 별칭이 있었다.
남서부의 커우취안[口泉]에는 대탄전이 있어 시멘트·비료·제분·착유(搾油), 농기구 제조 등 공업이 성하다.
특히 1956년 건설된 커우취안의 시멘트 공장은 중국 제1의 규모를 자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퉁광무국[大同鑛務局]·다퉁제2발전소·다퉁시멘트공장 등 정부가 운영하는 대기업들이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윈강석굴[雲岡石窟]·화옌사[華嚴寺]·샨화사[善化寺]·주룽비[九龍壁]가 있으며, 시 동쪽에는 화산군(火山群)이 있다.
시내에는 샤화옌사[下華嚴寺]·푸언사[普恩寺] 등의 고찰이 있고,
시 서쪽 약 17km 지점에 있는 윈강석굴은 북위시대 불교예술의 보고(寶庫)이다.
윈강석굴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 서쪽 15km,
우저우강[武州江] 북안에 있는 사암(砂岩)의 낭떠러지에 조영(造營)된 중국에서 가장 큰 석굴사원.
전체길이는 동서로 약 1km에 이르며 석굴의 총수는 42개이다.
동쪽 언덕에 제1∼4동(洞), 중앙 언덕에 제5∼13동, 서쪽 언덕에 제14∼42동이 있다.
북위(北魏)의 역사서 위서(魏書)의 석로지(釋老志)에 따르면,
사문통(沙門統:종교장관) 담요(曇曜)가 당시 문성제(文成帝)에게 석굴 조영을 주청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른바 '담요 오굴(五窟)'이라고 불리는 제16동에서 제20동까지가 이때에 만들어진 석굴로, 460년대 초에 조영된 것이다.
윈강석굴에서 볼 수 있는 불상의 양식은,
제20동의 노좌대불(露座大佛:높이 14m),
제19동의 대불(높이 약 17m)을 중심으로 하는 조상(彫像)에 초기 양식이 표현되어 있는데,
치졸하지만 소박한 면과 선으로 구성된 서방 양식이 풍부한 작풍이다.
담요 이후는 전통과 외래 양식이 혼합되면서 다양해졌다.
이 석굴의 융성기는 486년 전후였는데, 이 무렵의 불상은 중국 고대의 복제(服制)를 모방하였다.
신체보다도 복제 표현에 유의하여 조각하였고, 얼굴은 길며 매우 신비롭다.
북위불(北魏佛) 또는 육조불(六朝佛)이라 하여 후에 하나의 조상 기준이 된 것도 이 무렵의 불상이다.
이 석굴은 북위의 문화사적 유산일 뿐만 아니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서북 인도·중앙 아시아와의 문화적 교류 및
한국과 일본의 고대문화를 만들어낸 아시아 문화 생성의 자취를 입증해 주는 중요한 유구(遺構)라고 할 수 있다.
항저우(杭州)
첸탕강[錢塘江]의 하구에 위치하며, 서쪽 교외에 시후호[西湖]를 끼고 있어 쑤저우[蘇州]와 함께 아름다운 고장으로 알려졌다.
7세기 수(隋)나라가 건설한 강남하(江南河:大運河의 일부)의 종점으로 도시가 열려 남송(南宋)시대에는 수도가 되었으나,
임시수도라는 뜻에서 행재(行在)라고 하다가 임안(臨安)이라고 개칭하였다.
10세기 이후에는 외국선박의 출입도 많았고,
원대(元代)에는 M.폴로, 이븐 바투타 등이 이곳을 방문하여 행재의 와전인 킨자이(Khinzai),
칸자이(Khanzai) 등의 명칭으로 유럽에 소개되었다.
시후호
항저우의 서쪽에 펼쳐진 시후호는 항저우의 상징인 호수로, 중국 10대 명승지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길이 3km, 폭은 3km에 약간 못 미치며 둘레 15km,
면적 5.6㎢인 호수에는 바이디(백제;白堤)와 쑤디(소제)라는 두개의 둑이 호수를 가르고 있으며 여러 개의 섬도 있다.
'시후호[西湖]'라는 이름은 항저우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양귀비 등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미인 중 하나인 서시(西施)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서자호(西子湖)라고도 불린다.
시후호 내부와 근처에 있는 10군데의 명소를 가리켜 시후호10경[西湖10景]이라고 하는데,
전해져 내려오는 각기 얽힌 사연과 함께 하나같이 멋진 풍광을 자랑하고 있는 곳들이다.
시후호는 그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많은 문인들에게 사랑 받았으며,
특히 백낙천(白樂天), 소동파(蘇東坡)가 즐겨 시를 읊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광관객들은 대·소형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유람할 수도 있는데, 시후호를 맛보고 싶다면 한번씩 시도해보도록 하자.
악묘
시후호의 서북단에 위치해 있으며
간신들의 모함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남송의 충신 악비(AD 1103~41)의 공덕과 충심을 기리기 위해 1221년에 세운 사당이다.
악비는 12세기에 송나라가 여진족 국가인 금나라의 침입을 받았을 때 용감히 맞서 싸워 나라를 구한 명장이었지만,
투항파의 간신 진회(秦檜)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힌 뒤 독살당했다고 전해진다.
후에 진회가 죽고 난 후
악비의 누명이 벗겨지자 송의 고종이 악비가 죽은 지 20여 년이 지난 1163년에 그의 시신을 이곳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이 곳의 원명은 충렬묘인데, 충렬사(忠烈祠)안에는 높이 4.5m의 악비 좌상이 있고 위에
還我河山(산과 강을 우리에게 돌려달라)'는 글귀가 써있다.
대전 밖 정원에는 악비 부자의 묘가 있으며,
이 무덤의 앞에는 손이 뒤로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는 4개의 철상(鐵像)이 있는데
이는 진회 부부와 심복들의 동상이어서 이 곳에 침을 뱉고 저주를 하는 중국인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저장성박물관(浙江省博物館)
항저우의 남쪽 첸탕강의 북쪽 연안에 위치한 높이 60m의 팔각 칠층 탑이다.
북송 때이던 970년에 오월국의 왕인 전홍숙이 첸탕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세운 것이라는 이 탑은
그 당시만해도 밀물 때 첸탕강의 만조를 구경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다고 한다.
얼핏 13층으로 보이는 탑은 사실 7층 규모인데, 창건 당시에는 9층으로 지어졌으나
북송 말기에 파괴된 이후 남송때인 1163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고 한다.
나선형으로 되어있는 108계단을 올라 탑의 꼭대기까지 가면
첸탕강과 그 위로 길게 이어지는 길이 1,453m의 첸탕대교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중국 목조 건축 분야에서 걸작의 하나로 평가 받고 있는 이 탑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명소이다.
룽징·후파오취안(龍井·虎砲泉)
영은사
시후호의 서쪽에 위치한 영은사는 항저우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이다.
이 곳의 유래는 AD 326년 동진(東晉)시대에 인도 승려 혜리(慧理)가 항저우를 방문했을 때 이곳 산의 기세가 매우 아름답다 하여
신선의 영혼이 여기에 깃들어 있다(山靈所隱)"고 하며 사찰을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선종 10대 사찰의 하나로 꼽히는 이 절은 전성기인 오나라 때는 9루, 18각, 72전에 3,000여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하며,
현재도 화동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로 손꼽히고 있어 수많은 신자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 불상이라는 20m 높이의 황금빛 석가모니불이 있는 대웅보전은 높이 33.6m의 건물로
그 웅장한 모습을 자랑한다.
인근에 있는 비래봉은 높이 209m의 석회암 봉우리로,
인도에서 온 혜리가 "인도에 있는 산이 날아왔다고 말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비래봉의 암벽들에는 무수한 동굴들과 함께 수세기에 걸쳐서 만들어진 석불들이 있어서 볼거리를 더해주고 있다.
비단박물관
항저우는 인근해 있는 소주와 함께 중국 비단의 최초 발원지중 하나여서,
도시 곳곳에서 이곳의 비단이 유명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항저우의 중국비단박물관은 시후호의 남쪽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비단에 관한 많은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갖가지 다양한 비단의 견본이 훌륭하게 전시되어 있으며, 비단 제작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도 준비되어 있다.
비단의 제작 과정을 직접 볼 수 있으며, 박물관 내에는 이 모든 내용들을 영어로 안내해주는 투어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실크 쇼를 볼 수도 있으며 시중에는 흔하지 않은 100% 실크 원단으로 만들어진 비단을 구입할 수도 있다.
청황거(城隍閣)
사오싱·상위 등 5현을 관할한다. 그 중 시내 면적은 101㎢이다.
항저우만[杭州灣] 남쪽 닝소[寧紹]평원에 위치한다.
춘추전국시대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에 의해 건설된 월국의 도읍지로 역사가 깊은 도시이다.
진(秦)나라 때는 산인현[山陰縣], 수(隋)나라 때에 위에조우[越州]가 설치되었고,
당(唐)나라 때에는 구이지현[會稽縣] 등 2현을 설치하였다.
남송(南宋) 대에 처음으로 사오싱으로 불리다가 다시 사오싱부[紹興府]라 하였다.
이때부터 사오싱이라 불리기 시작하였다. 1912년에 산인현과 구이지현이 합쳐져 사오싱현[紹興縣]이 되었다.
1979년 사오싱시가 되었다.
시내에 작은 다리가 많기에 수향교도(水鄕橋都)라는 별칭도 있다.
부근 일대는 논농사지대로 양질의 쌀이 생산되고, 찹쌀로 빚은 사오싱주(酒)는 특산주로 유명하다.
목화·황마·유채도 널리 재배되고, 이곳 차는 핑수이차[平水茶]로 알려져 있으며, 견직물·도자기 산업도 유명하다.
근래 남서쪽의 리주전[漓 渚鎭]에 화동(華東) 제1로 알려진 철광산이 개발되었다.
또한 경공업·방직·기계·야금(治金)·식품·전자·건재(建材) 등의 공업이 발달하여
항저우[杭州], 닝보[寧波]에 이어 저장성 3위의 공업도시이다.
저둥운하[浙東運河]와 철도의 요지로, 주위를 둘러싸는 현 내에는 수로망이 좌우로 발달하였다.
부근에서 수(隋)·당(唐)시대의 분묘군이 발견되었고,
란팅정[蘭亭]·콰이지산[會稽山]·위에왕대[越王臺] 등 역사적인 고사와 관련 있는 명승지가 많다.
또 많은 문필가와 정치가들을 배출하였는데, 중국 근대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루쉰[魯迅]의 출생지로 루쉰기념관이 있다.
부근에 선위안[沈園]·등후[東湖] 등이 있다.
란팅
중국 저장성[浙江省] 샤오싱시[紹興市] 서남쪽에 있는 유명한 정자.
중국 저장성 샤오싱시 서남쪽 휘지산[會稽山] 아래에 있는 유명한 정자이다.
진(晉)나라 때인 353년에 왕희지(王羲之)·사안(謝安)·손작(孫綽) 등
41명이 이곳에서 악신(惡神)을 내쫓는 의식을 치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왕희지는 일찍이 《난정집서(蘭亭集序)》를 저술했는데, 친필로 책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란팅은 톈주산[天柱山] 아래에 있는 젠후호[鑒湖] 입구에 있었다.
왕희지 등이 제사의식을 치른 뒤에 란팅은 젠호 호수의 중앙에 있는 톈주산 정상으로 옮겨졌다.
진나라 이후에 몇 번 더 옮겼으며, 북송(北宋) 말기에 휘지산 톈장사[天章寺]의 북쪽 지역을 택하여 중건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소재지이다. 명(明)나라 때인 1548년(가정제 27)에 수리를 하고,
청(淸)나라 때인 1695년(강희제 34)에 확장 건설하였다.
정자 앞 어지[鵝池] 주변에는 스베이팅[石碑亭]을 세웠고, 정자 앞에 돌비석도 함께 세웠다.
그 비석에는 ‘鵝池’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왕희지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둥후(東湖)
사오싱에서 동쪽으로 6km 지점에 있다. 항저우의 시후호[西湖], 지아징의 난후호[南湖]와 함께 중국 3대 명호(名湖)이다.
원래는 돌로 된 산이었는데 한나라 때부터 채석을 계속하면서 절벽이 되었으며,
청나라 말기에 물을 끌어와 호수로 만들었다고 한다.
기암절벽과 정자, 돌다리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 청두(成都)
쓰촨분지 서부, 청두[成都] 평원 중앙에 있다.
연평균온도는 16.3℃이고, 1월 평균온도는 5.6℃이며, 7월 평균온도는 25.8℃이다.
연강우량은 967mm이다. 약칭은 룽[蓉]이며 서남지대의 중공업기지이다. 쓰촨성의 행정, 경제, 교통, 문화 중심이다.
전국시대부터 있어온 도시로, 춘추전국시대에는 촉(蜀)의 수도였다.
진(秦)·전한(前漢) 때는 촉군(蜀郡)이 관할하는 청두현[成都縣]이 설치되었고,
후한(後漢) 때에는 이저우[益州]의 통치도 겸하게 하였다.
삼국시대 때 유비(劉備)가 촉한을 통일하고 이곳에다 수도를 건립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촉한(蜀漢)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으며 당(唐)의 현종(玄宗)은 안사의 난 때에 이곳으로 피신하였다.
수당(隨唐) 시대 때는 창안[長安], 양저우[揚州], 둔황[敦煌]과 같이 4대 도시였다.
옛날부터 방직업이 발달되었고, 1928년에 성도가 설치되었다.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시되어 청대에는 쓰촨 총독 및 청두 장군을 이곳에 두었고,
중화민국 정부가 들어선 뒤 1930년에 시제를 실시하였다.
부근에는 사적이 풍부한데 그 중에서도 제갈 량(諸葛亮)을 모시는 무후사(武侯祠)를 비롯하여
두보초당(杜甫草堂)·망강루(望江樓) 등이 있다.
항공, 전자, 강관, 제약, 면방직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농산물로는 유채, 참깨, 목화, 사탕수수 등을 산출한다.
바오청철도[寶成鐵道], 청위철도[成兪鐵道], 청쿤철도[成昆鐵道]와 108번, 213번, 317번, 318번, 319번, 321번 도로와
충칭[重慶]으로 가는 고속도로 등이 연결된다.
바오청[寶成]·청위[成渝]의 2개 철도와 민장[岷江]의 수운에 의하여 수륙교통의 요충을 이루며, 기후가 온화하고 물산이 풍부하다. 비단·칠기 등은 예로부터 유명하다. 중국 8대요리 중에 속하는 쓰촨요리가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교육기관에 쓰촨대학, 충칭[重慶]대학, 시난[西南]사범대학, 농업대학, 전문기술학교, 건축공정대학 등이,
관광지에 성립(省立)박물관, 다쭈석각[大足石刻], 남 온천공원, 두보초당(杜甫草堂) 등이 있다
무후사
촉한의 재상 제갈공명을 모신 사당. 명나라 때 촉한 황제 유비의 묘와 합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유비가 주군이기 때문에 정식명칭은 '한소열묘(漢昭烈廟) 이지만,
사람들이 유비보다 공명을 더 경모하기 때문에 공명의 시초 충무후(忠武侯)에서 따서 무후사라고 부른다.
정문을 들어서면 유비를 기린 유비전(劉備殿), 유비의 황금상이 모셔져 있다.
옆의 건물에는 관우·장비 등 28인의 문관·무장들의 상이 있고, 안쪽 건물이 서묘극전이다.
두장옌(都江堰)
중국 지린성[吉林省] 동부에 지정한 자연보호구역이다.
지린성[吉林省] 동부, 안투[安圖], 푸쑹[撫松], 창바이[長白] 3현의 교차점이며 중국·북한 국경의 산악지대가 중심을 이룬다.
천지(天池)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자연환경과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는 종합자연보호구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안투현과 퉁화지구[通化地區]의 푸쑹현·창바이조선족자치현이 서로 맞닿은 지역에 걸쳐 있다.
1960년 중국 정부에 의해 지정되었고, 1980년에 세계생물보호권에 포함되었다.
해발고도 800m 내외이며, 지질시대에 화산활동이 활발하게 행해져 현무암이 넓게 분포한다.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서 강수량이 가장 많은 곳으로 수맥(水脈)이 발달하였고 삼림이 우거져 있다.
구역에는 식물 1,230여 종·곤충 1,000여 종·조류 200여 종·짐승 50여 종이 서식한다.
주요수종에 창바이소나무·자작나무·주목·사시나무·피나무·떡갈나무 등이 있고,
야생짐승에 둥베이호랑이·금전표(金錢豹)·스라소니·꽃사슴·고라니·흑곰·검은단비 등이 있다.
그밖에 조류에 딱따구리·삼보조(三寶鳥)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백두산[白頭山, 중국명 창바이산(長白山)] 북쪽 비탈에 위치하여
백두산 관광의 기점이 되는 마을로 행정구역 상으로는 현 아래 진(鎭)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쑹화강[松花江] 상류의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 강변에 있어 이런 지명이 붙었다.
진정부 소재지는 얼다오(二道)이다.
삼림이 전체 면적의 94%에 달하며 삼림자원이 풍부하다.
특히 장백낙엽송을 비롯한 경제적 가치가 높은 30여종의 수목이 자란다.
광물자원으로는 화산의 용암이 갑자기 식어서 생긴, 구멍이 많고 가벼운 돌인 부석(浮石)이 풍부하다.
건축재료 등으로 쓰이는 부석은 홍콩, 타이완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으로 수출된다.
조선족들이 많이 거주하며 자동차로 약 5분 거리(약 1km)인 바이허[白河] 마을과 함께 백두산 관광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장거리 버스와 열차가 오갈 뿐 아니라 저렴한 가격의 숙소나 식당이 많아 여행자들의 쉼터 역할을 한다.
백두산으로 향하는 지프차를 빌리거나 관광버스를 탈 수도 있어서, 백두산 관광 성수기인 6~9월에는 여행객들로 붐빈다.
마을 곳곳에서 보이는 미인송(美人松)도 얼다오바이허의 명물이다.
미인송은 곁가지가 많지 않고 위로 시원하게 뻗은 소나무다.
천지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정상 부근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칼데라호이다.
천지의 호수 수면은 해발 2194m의 높이에 있으며,
남북으로 5km 동서로 3.5km에 둘레가 14.4km 면적이 9.17㎢이고 평균 수심이 213.3m에 가장 깊은 곳은 384m에 달한다.
장군봉과 백운봉을 비롯한 16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천지를 둘러싸고 있으며,
눈이 시릴 만큼 푸른 수면 위에 반사된 장대한 잿빛 봉우리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누구든 할 말을 잃게 된다.
내륙이면서 고산지대인 천지 주변은 일년 대부분의 기간 동안 매우 춥고 길이 얼어붙기 때문에,
관광할 수 있는 기간은 대략 6~9월 정도이다.
게다가 이 시기에 오른다고 해도 천지 주변의 날씨가 워낙 변화무쌍해서
맑게 개인 천지의 장엄한 모습을 한눈에 바라보는 행운은 항상 찾아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장백폭포
중국 이름으로 장백폭포(長白瀑布, 창바이푸부)인 이 폭포는 중국의 동북 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폭포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북쪽으로 트인 달문을 통해 흘러나온 물은
천문봉(天文峰, 2679m)과 용문봉(龍文峰, 2595m) 사이 골짜기를 따라 1km 정도 흘러가다가
낙차 68m로 떨어지면서 폭포가 되는데, 이 것이 바로 장백 폭포이다.
평균 수량은 초당 2.15톤에 달하며, 눈이 녹는 시기에는 물의 양이 더 많아진다.
인근의 다른 폭포들이 얼어붙는 한겨울에도 이 폭포만은 얼지 않아서 그 멋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힘차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200m 이상의 거리에서도 들을 수 있으며,
사방으로 물보라가 휘날리는 모습이나 잠깐씩 모습을 드러내는 무지개는 여행객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백두산온천지대(白頭山溫泉地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