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시 하성면에 있는 한재 이목선생 사당)
우리차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차 문화가 대중화 해가는 추세에 따라, 차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또 최근에는 추석과 설 명절에 조상님께 올리는 차례에 차를 써야한다는 인식이 높아지고 있어 우리 고유의 차에 대한 관심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이에 차의 대부로 알려진 조선 전기의 학자, 한재(寒齋) 이목(李穆)선생에 대한 관심이 자연 높아져 선생의 기록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불교아카데미의 열린선원 원장이신 법현스님으로부터 받은 숙제인, 한재선생의 사당에서의 헌다 행사 일정을 알아 보기위하여 선생의 사당을 둘러보기로 하고, 지난 주말의 한가로운 낮 시간에 집을 나섰다. 1.한재 이목선생(1471 ~1498)에 대하여 (이하à 소설가 정찬주님이 쓴글을 소개함) 다인들은 한재(寒齋) 이목(李穆)을 차의 아버지(茶父) 혹은 다선(茶仙)이라고 부른다. 그가 남긴
‘다부(茶賦)’는 1321자의 짧은 차 노래지만
이목의 선비사상과 도학정신, 차에 대한 안목의 깊이를 헤아려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글이다.
김종직 문하에서 도학을 공부한
이목이 차 살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24세에 중국 연경을 다녀온 뒤부터였다. 특히 이목은 중국 다성(茶聖)
육우의 ‘다경(茶經)’과 마단림의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을 구해 보고는 중국차 산지와 유적지를
돌아보며 차 맛에 매료됐던 것으로 추측된다. 차에 관한 논문 같은 ‘다부’를 보면 차와의 인연을 얘기한 서문에 이어 본론에는 중국차 품종과
산지 및 풍광, 차 달이기(煎茶)와 마시기(七修), 그리고 차의 공과 덕에 대해, 결말에는 차를 예찬함과 동시에
‘내 마음의 차’라며 다심일여(茶心一如)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목의
성품은 강직함 그 자체였다. 성종 때 정승 윤필상의 작태를 보다 못한 이목이
‘윤필상을 삶아야 비가 내릴
것이다’ 고
말한 적이 있는데,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만난 윤필상이
“네가 정말 나의 늙은 고기 먹기를
원하느냐” 고
힐난하자 이목은 대꾸도 않고 지나쳐버렸다고 한다.
이러한
악연으로 이목은 윤필상의 참소(讒訴)를 받아 28세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이목은 14세에 김종직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고 19세 때 진사에 합격한 뒤 성균관 학생이 되어 유생들과 어울렸으며, 24세 때
연경에 가 육우의 ‘다경’을 읽고는 차와 인연을 맺는다.
귀국 후 25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 문명을 떨치기도 하지만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던 윤필상을 탄핵하려다가 오히려 공주로 유배를 간다. 윤필상이
대비의 뜻을 받들어 성종에게 숭불(崇佛)을 권유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이목은 왕 앞에 나아가 윤필상에게 벌주기를 청했다. 하지만 성종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이목에게 “네가 감히 정승을 간귀(奸鬼)라
하느냐” 고
역정을 냈다. 그러나 이목은
“필상의 소행이 저러한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귀신임이
분명합니다” 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이목은 연산군 1년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전적(典籍)과 종학사회(宗學司誨), 영안도평사
등을 역임하다 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윤필상의 모함으로 사형에 처해진다. 또한 임금의 생모 폐비 윤씨 복위 문제로 일어난 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되는 비극을 맞지만, 훗날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된다 나그네가 다인으로서 이목을
주목하는 까닭은 고상하고 의미심장한 ‘다부’의 마지막 문장 때문이다.
‘다신(茶神)이 기운을 움직여
묘경(妙境)에 이르면 저절로 무한히 즐거우리. 이 또한 내 마음의 차이거늘 굳이 밖에서
구하겠는가 神動氣而入妙 樂不圖而自至 是亦吾心之茶 又何必求乎彼也
이목이
‘차의 아버지’이자 ‘차의 신선’으로 불리는 까닭은 ‘다부’를 화룡점정 하는 이 한 구절 때문이다. 이목에게 차 한 잔은 단순한 기호식품이나 약이 아니라, ‘내 마음의 차(吾心之茶)’라는 마음과 차가 둘이 아닌 하나로 승화되는 다인이 지향해야 할
구경(究竟)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그네도 도학사상을 차 한 잔에 녹여낸 이목을 진정한 다인으로 부르고
싶어지는 것이다.
ß이상, 소설가 정찬주님의 글
2.한재집(寒齋集) 조선 전기의 학자 이목(李穆 : 1471~98)의
시문집. 2권 1책. 목활자본. 저자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무오사화 때 김일손·권오복 등과 함께 사형당했다. 사후에 아들이 정리해놓은 시문을 1585년 손자인 철(鐵)이 간행했으나, 전쟁으로 판각을 잃어버리고 1631년 증손인 구징(久澄)이 묘표와 보유를 넣어 1책으로 간행했다. 이때 문집의 이름을 '이평사집'이라고 했다. 그뒤 13대손인
응호·존원·존수 등이 원고를 다시 정리하여 2책으로 펴냈다. 송병화가 중간서(重刊序)를 쓴 해가
1914년이므로 그무렵에 중간했을 것으로 보인다. 권상(卷上)은 사부(辭賦)와 시, 권하(卷下)는
송(頌)·책(策)·기(記)·제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저자가 젊은 나이에 죽었으므로 작품의 수가 많지 않다.
앞부분의 사부는 10편으로 다른 문집에 비해 많은 편인데, 〈홍문관부〉의 서(序)는 부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삼도부 三都賦〉·〈다부 茶賦〉·〈여융부 女戎賦〉·〈입춘부 立春賦〉 등에서는 다양한 소재를 읊었다. 〈칠보정상연사 七寶亭賞蓮辭〉는 저자가 양도평사(兩道評事)로 있을 때 함흥에
있는 칠보정에서 창화(唱華)한 것이다. 시는 〈향렴 香 부록에는 저자와 관련된 글을 모았는데, 김일손·김오복 등과 주고받은 시나 자손들이 제사를 지내며 쓴 시가 실려 있다. 대개 억울한 죽음과
갑자사화에서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통분해 하는 내용이다. 남곤이 쓴 〈유자광전〉을 당시 간신배들의 행태를 전하는 좋은 자료라고 하여 실었고
김상헌이 쓴 묘표와 장유가 쓴 묘지명도 실었다. 국립중앙도서관본에는 부록이
없다.
(선생의 유택에서 내려다 본 풍경)
3.
한재당(寒齋堂) 가는
길 도심을 벗어나 가을이 시작되는 계절에 달리는 국도는 어디나 다 정겨운 가을의 흥취가 베어있다. 김포에서 강화로 가는 48번 국도도 가을 정취를 느끼기엔 좋은 길이다. 이 길을 따라 좀 가다보면, 하성면, 애기봉 방면으로 접어드는 하성 삼거리가 있고,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 코스모스가 정겹게 피어있는 지방도로를 곧장 달리면 하성면에 닿는다. 면사무소를 지나 오던 길을 따라 3~4킬로를 계속 가다보면 애기봉으로 들어가는 길을 만나는데, 여기에 반가운 한재당 안내 간판이 조그맣게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꺾으면 애기봉으로 가는 길인데 이 길을 따라 조금 가다보면, 거의 애기봉 위병소를 조금 못미친 곳의, 산 모퉁이를 돌면 오른쪽에 가금3리 마을회관이 나타나고, 길 건너편에 조용히 자리잡은 한재당이 모습을 나타낸다. 한재당(寒齋堂)은 무오사화(戊午士禍)때
28세의 젊은 나이로 화(禍)를 입은 이목(李穆)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서 1848년에 건립된 구사당과 1974년에 건립한 신사당이
있다. 이
신축사당에는 지금은 공사가 한창으로 외정(外庭)의 작은 연못주위의 정자의 수리와 조경을 위해 파헤쳐져 있었으나,
외정의 한켠에는 차나무를 심어 차선(茶仙)의 넋을 달래고 있어 후손들의 훈훈한 마음의 배려가 새삼 느껴졌다.
사당 뒤쪽에 자리한 선생의
유택에는 정부인(貞夫人) 목(睦)씨, 그리고 후손의 묘가 함께 자리하고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이 곳
가는 길은, 호남고속도로에서 유성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동학사 입구를 지나 반포면 면소재지에 이르면, 농협 건물
뒤편에 있는 선생을 배향한 충현서원을 만날 수 있다
한다.
(끝) |
출처: 만취당(晩翠堂) 원문보기 글쓴이: 자운거사
첫댓글 스님께서 내신 숙제를 해 왔습니다. ^-^
고맙습니다. 글이 참 좋습니다. 이거 오마이뉴스나 불교정보센터에 올려도 좋겠습니다.
한잔의 차에 마음을 담아보고 싶어지는 아침입니다. _()_
칭찬 감사합니다. 아직 미숙한 점이 많습니다.
좋은글 잘 봤습니다. 이목 선생님께서 28세에, 억울하게 돌아가시셨다니 정말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