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berty leading the People
여러분 이 그림을 많이 보셨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학생들이나
직장여러분등 이작품에 대해 설명 하라고 하면 아마 대답을 잘
못하실 겁니다. 그래서 미술관등을 가지 못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역사와 미술을 함께 소개 하고자 합니다.-so
제목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14년경의 빈 회의는 전 유럽을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이전의
상태로 환원시키려는 목적을 띠고 있었다. 이런 유럽권력들간의 협조가
시작되었다는 점은 패전국 프랑스에게 큰 타격이었다.
교회와 귀족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이 누려왔던 대시민계급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부르봉 왕조의 샤를10세의 통치하에서 바뀌게 되었다. 그는 예전의 권력 통치를 다시 부활시켰고 검열 제도를 다시
도입하였으며, 프랑스 혁명 당시에 결성되었던 민병대를 해산시켰으며 망명했던
귀족들의 복귀를 대부분 승인했다. 이것은 국가의 위기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계속하여 시민권을 제한하려는 정부에 대항하려고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가 1830년 7월26일에 발표된 '7월명령'으로 인해 드디어 파리 시민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기 시작했고, 샤를 10세는 강제로 해임되어 영국으로 추방되었다.
들라크루아의 <바리케이드 전투>-:회화에서 통용되는 명칭이다.
의 시점과 장소는 아주는 아주 정확하게 알수 있다. 1831년의 살롱의 전시목록을
보면 이그림이 <7월28일: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날은 바로 폭동진압을 위해 전권을 위임받았던 마샬이,
"이제 이것은 더 이상 하나의 폭동이 아니라,혁명,이다"라고 깨달았던 날이다.
노트르담의 탑 위에는 아침부터 삼색기가 펄럭였다.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들라크루이는 자신의 그림 속에서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노트르담 성탑을
보여주기 위해 화약 연기에 휩싸인 전체 배경 중 한구석을 열어 두었다.
노트르담은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을 하고 있다. 바리케이드는 센 강의 왼쪽 편에
있는 중앙 광장에 설치되어야 한다.그러나 들라크루이는 자신의 거대한 유화 작품을
위해 1830 7월 28일의 실제 상황을 화폭에 담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그 상황에 대한 사실적인 포착이 아니라.자신의 그림에서 그 사건을 확대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하나의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었다.
<외젠 들라크루아>
(기타 그의 작품들...)
출처:클라이시커50 (회화)
글쓰기,편집,조사:대진국 황제
시험기간이 끝나고 다시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올리지 못한
넬슨이야기와 미국 독립이야기,그리고 고려.조선의 무기등
다양한 활동을 할예정 입니다. 내용이 부족하거나 잘못된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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