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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고향 청교면의 인물
고. 박 완 서
소설가 박완서 님은 우리의 고향인 청교면 묵송 리 박적동(골)에서 출생하셨으며 우리의 고향 개풍군 청교면의 큰 인물로 한국 문단의 대표적 여류 소설가이시며 청교면민회 고문으로 활동하셨으며 정기 총회 때에는 자주 참석하셔서 고향의 이야기와 도움이 되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박완서 님의 대표적인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통해서 우리의 고향인 개풍군과 청교면 묵송리 박적동(골)을 배경으로 많은 작품을 집필해 주셔서 우리의 고향 청교면을 전 국민에게 많이 홍보 해 주셨습니다.
박완서 님의 고향인 우리 청교면 묵송리 박적동(골)은 박완서 씨의 대표적인 소설『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글 중에서 많은 부분에 사실대로 생생하게 묘사를 해 주셨습니다.
박완서 씨는 70여 년 전(1930년대 말∼40년대)의 박적골 마을의 자연환경을 기술하였는데 그 당시의 우리 고향의 농촌 마을들은 대부분 박적골과 비슷한 자연환경으로 이루어진 마을들이라 볼 수 있다. 지금은 6,25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미수 복 지역임으로 가서 볼 수 없는 고향이지만 그 엣날의 우리 고향을 상상 해 보시기 바랍니다.
박적 골에는 25가구가 거주하였는데 남양홍씨 의 집성촌으로서 남양홍씨가 22가구 번남박씨가 2가구 장씨가 1가구가 거주하였던 농촌 마을로 모두가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 박적골의 마을의 지도
박완서님은
박완서님은 1931년 경기도 개풍군(청교면 묵송리 박적동) 출생으로 19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전쟁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마흔 살이 되던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현상공모에 '나목(裸木)'이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등단해 지난해 등단 40주년을 맞았다.
고인은 6·25전쟁 이후 남성작가가 놓친 민중의 삶을 새롭게 조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현대사회에서도 계속되는 여성 억압 문제와 물질중심주의, 자본주의가 만든 황폐한 인간성을 여성 특유의 섬세한 문장으로 통렬히 비판하기도 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장편 '휘청거리는 오후'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과 소설집 '엄마의 말뚝' '그 남자네 집' '잃어버린 여행가방' '세 가지 소원' 등이 있다.
이중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엄마의 말뚝' '그 남자네 집'은 6·25전쟁으로 인한 공포와 위기감이 잘 묘사돼 있다. 고인은 생전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도 "6·25는 내 기억의 원점이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고통이 도져서 혼자 신음하며 운 적이 있다"고 말할 만큼 6·25는 그에게 문학의 원천이었고 실제로 많이 다뤘다.
산문집으로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여자와 남자가 있는 풍경'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님이여 그 숲을 떠나지 마오' 등이 있으며 지난해 7월에도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펴내는 등 별세 직전까지 고령임에도 활발한 글쓰기를 계속해왔다.
박완서님은 40여 년 동안 이상문학상(1981)을 비롯해 한국문학작가상(1980)과 대한민국문학상(1990) 현대문학상(1993) 동인문학상(1994) 만해문학상(1999) 인촌상(2000) 호암예술상(2006)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장녀 호원숙(작가), 차녀 원순, 삼녀 원경(서울대 의대 교수), 사녀 원균 씨 등 4녀와 사위로 황창윤(신라대 교수), 김광하(도이상사 대표), 권오정(성균관대 의대 학장), 김장섭(대구대 교수)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 서울병원 장례식장 16호. 장지는 용인 천주교 묘지 발인은 25일 오전. 02-3410-6916.
동아일보 1월22일자 기사 박재명기자 jmpark@donga.com
이명박 대통령 박완서씨에 금관 문화 훈장 추서
이명박 대통령은 24일 소설가 고(故) 박완서 씨의 문학적 업적을 기려 금관 문화 훈장을 추서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 장관, 진동섭 교육 문화수석, 함영준 문화체육비서관 등을 보내 영전에 금관 문화훈장을 전달했다. "문단과 문화계의 거목 이셨던 박완서 선생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빌며 유가족들에게 깊은 위로의 뜻을 전한다"고 말했다. 이어진 우리 현대사의 삶의 조건을 따뜻하게 보듬어 우리 문학사에 독보적 경지를 구축했다"고 평가했다. 감동을 안겨줬고 문학적 치유와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며 "선생의 문학 혼과 작품들이 영원히 살아남을 것을 믿으며 국민과 함께 거듭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 디지털 뉴스팀/1월22일자
작가 고 박완서 연보
다음은 작가의 주요 연 보. 1991년 3편 발표), 장편 ’살아있는 날의 시작’ 발표, ’그 가을의 사흘 동안’으로 제7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미망’으로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 공연윤리위원회 회원 ’박완서 단편 소설 전집’ 출간 장편 ’아주 오래된 농담’ 출간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 장편 ’잃어버린 여행가방’ 발표, 문학상 5편 엮은 ’환각의 나비’ 출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인 옴니버스 영화 ’텐 텐’의 변영주 감독 다큐멘터리 ’20세기를 기억하는 슬기롭고 지혜로운 방법’ 출연 ’나 어릴 적에’, ’문학동네’ 가을호에 단편 ’빨갱이 바이러스’ 발표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참여,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출간. 가을 담낭암 진단, 10월 수술 ▲2011년 = 1월22일 담낭암으로 타계
2011.01.22 16:10 조선일보에서 발취
※ 박완서 님의 친필 원고
박완서 씨의 대표적인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중에서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은 바위라고는 하나도 없이 능선이 부드럽고 밋밋한 동산이 두 팔을 벌려 얼싸안은 듯 한 동네는 탁 트이고 벌이 넓었다. 마을은 벌 한가운데를 개울이 흐르고, 정지용의 시 말마따나 '옛 이야기 지줄대는실개천'은 아무 데나 있었다. 우리 집에서 뒷간에 가려도 실개천을 건너야 했다. 실개천은 흐르다가 논을 만나면 곧잘 웅덩이를 만들곤 했는데 우리는 그걸 군 우물이라고 해서 먹는우물과 구별했다. 지금 생각하니 소규모의 저수지가 아니었던가 싶다. 거의흉년이 들지 않는 넓은 농지는 다 우리 마을 사람들 소유였다. 땅을 독차지한 집도 땅을 못 가진 집도 없었다. 다들 일 년 먹을 양식 걱정은안 해도 될 자작농들이었고 부지런했다. 그런 고장에서 여덟 살까지 자라는 동안 이 세상에 부자와 가난뱅이가 따로 있다는 걸 알 기회가 없었다. 동무들과 손잡고 딴 동네를 가 볼기회도 그리 많지 않았다. 넓은 앞벌로는 아무리 멀리 나가도 딴 마을이나 오지 않았다. 뒷동산을 넘어야만 이웃마을이 나왔고, 이웃마을의 풍경도별로 신기할게 없었다. 옆구리에 텃밭을 낀 집들이 산기슭에 안겨 있었고, 넓은 벌을 풍성한 치맛자락처럼 거느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사는 줄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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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에 내려오는 뒷간 얘기는 다 도깨비 얘기였지만 무서운 도깨비는 아니고 조금은 못나고 유쾌한 도깨비였다. 코가 막혀 냄새를 못 맡는 도깨비가 뒷간에서 밤새도록 똥으로 조찰떡을 빚는다고 했다. 재를 콩고물이나 팥고물인 줄 알고 맵시 있게 빚은 조찰떡을 재에다 굴리기를 되풀이하면서도 아까워서 한 입도 맛을 안 보다가 새벽녘에 다 빚고 나서 비로소 맛을 보고는 퉤퉤, 욕지기 하면서 홧김에 원상대로 휘젓고 간다는 것이다. 만일 한창 그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기침을 안 하고 뒷간 문을 열면 도깨비는 들킨 게 무안해서 얼른 "조찰떡 한 개만 잡수." 하면서 그중에서 제일 큰 걸 내놓는데 안 먹으면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도깨비 얘기 말고 이런 것도 있었다. 동짓날 팥죽을 맛있게 쑨 며느리가한 그릇 먹는 것만으로는 감질이 나서 식구 몰래 한 그릇을 더 퍼가지고 뒷간으로 갔더란다. 며느리보다 앞서서 팥죽을 몰래 먹으려고 뒷간에 와있던 시아버지가 며느리가 들이닥치자 놀라서 팥죽 그릇을 얼른 머리에 다 썼다고 한다. 며느리 또한 임기응변으로 "아버님 팥죽 잡수세요." 하면서 가져온 팥죽 대접을 앞으로 내밀자 시아버지 왈 "얘야, 난 팥죽을 안 먹어도 이렇게 팥죽 같은 땀이 흐르는구나." 했다는 것이다. 두 이야기는 다 뒷간에 갈 때는 반드시 문 앞에서 인기척을 내라는 걸 훈계하기 위해어른들이 흔히 해 주던 얘기였다. 시골 뒷간에 대해 공포감부터 갖고 있는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구역질이 날 소리지만 실제로 우리 고장 뒷간은 팥죽을 먹어도 좋을 만큼 청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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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려서부터 삼시 밥 외의 군것질거리와 소일거리를 스스로 산과 들에서 구했다. 삘기, 찔레 순, 산딸기, 칡뿌리, 메뿌리, 싱아, 밤 도토리가 지천이었고, 궁금한 입맛뿐 아니라 어른을 기쁘게 하는 일거리도많았다. 산나물이나 벗이 그러했다. 특히 항아리버섯이나 싸리버섯은 어찌나 빨리 돋아나는지 우리가 돌아서면 땅 밑에서 누가 손가락으로 쏘옥 밀어 올리는 것 같았다. 마을 도처에 흐르는 실개천에서 물장구치며 놀 때도 누가 해진 체 하나만 가지고 나오면 오도 방정떨기 선수인 보리새우를 얼마든지 건져 올려 저녁의 된장국을 구수하게 만들어 줄 수가 있었다.가지고 놀 것도 다 살아 있는 것들이었다. 왕개미의 새큼한 똥구멍을 핥아 보다가 불개미 떼들한테 종아리를 뜯어 먹히기도 했고, 잠자리를 잡아서 날씬한 꽁지를 자르고 대신 더 긴 밀짚 고갱이를 꽂아서날려 보내기도 했다. 풀로 각시를 만들어 쪽찌어 시집보낼 때, 게딱지로 솥을 걸로 솔잎으로 국수 말고 새금풀로 김치를 담갔다. 마지막으로 쇠비름 뿌리를 뽑아 열심히 "신랑 방에 불 켜라. 각시방에 불 켜라." 주문을 외면서 손가락으로 비벼서 새빨갛게 만들어서 등불을 밝혀 주었다. 가지고 놀 것은 무궁무진했고 우리는 한 번도 어제 놀던 걸 오늘 또 가지고 놀 필요가 없었다. 뙤약볕에 내리쬐는 한여름에는 실개천이 합쳐져서 냇물이 된 동구 밖 까지원정을 나갈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만나는 소나기는 실로장관이었다. 서울 아이들은 소나기가 하늘에서 오는 줄 알겠지만 우리는 저만치 앞벌에서 소나기가 군대처럼 쳐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노는 곳을 햇빛이 쨍쨍하건만 앞벌에 짙은 그림자가 짐과 동시에 소나기의 장막이 우리를 행해 쳐들어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기성을 지르며 마을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하나. 그 장막이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자꾸나. 뛴다. 불안인지 환희인지 모를 것으로 터질 듯한 마음을 부채질하듯이 벌판의모든 곡식과 푸성귀와 풀들도 축 늘어졌던 잠에서 깨어나 일제히 웅성대며 소요를 일으킨다. 그러나 소나기의 장막은 언제나 우리가 마을 추녀 끝에 몸을 가리기 전에 우리를 덮치고 만다. 채찍처럼 세차고 폭포수처럼 시원한 빗줄기가 복더위와 달음박질로 불화로처럼 단 몸뚱이를 사정없이 후려치면 우리는 드디어 폭발하고 만다 아아, 그건 실로 폭발적인 환희였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미친 듯한 환성을 지르며 비를 흠뻑 맞았고, 웅성대던들판도 덩달아 환희의 춤을 추었다. 그럴 때 우리는 너울대는 옥수수나무나 피마자 나무와 자신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환희 뿐 아니라 비애도 자연으로부터 왔다. 내가 최초로 맛본 비애의 기억은 앞뒤에 아무런 사건도 없이 외따로 인 채 다만 풍경만 있다. 엄마 등에 업혀 있었다. 막내라 커서도 어른들에게 잘 업혔으니 다섯 살 때쯤이 아니었을까. 저녁노을이 유난히 새빨갰다. 하늘이 낭자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을의 풍경도 어둡지도 밝지도 않고 그냥 딴 동네 같았다. 정답던 사람도 모닥불을 통해서 보면 낯설 듯이.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내 갑작스러운 울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 또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건 순전한 비애였다. 그와 유사한 체험은 그 후에도 또 있었다. 바람이 유난히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저녁나절 동무들과 헤어져 홀로 집으로 돌아올때, 홍시빛깔의 잔광이 남아 있는 능선을 배경으로 텃밭머리에서 너울대는 수수이삭을 바라볼 때의 비애를 무엇에 비길까. 그때만 해도 엄마 등에 업혔을 때하고는 달리 서러움을 적당히 고조시키고싶어 꾀까지 썼다. 어떡하면 저 수수이삭을 건들댐이 더 슬프고 쓸쓸하게 보일까, 그 적당한 시점을 잡느라 키를 낮춰보기도 하고 고개를 요리조리 돌려 보기도 하다가 풀숲에 아예 누워 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가슴에 고인 슬픔이 눈물이 되어 흐르길 가만히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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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사랑이 서당이 되었다. 숙부들이 사 년제 소학교를 나온 걸 인근에서는 신학문을 한 걸로 쳐 줄 만큼 개화가 더딘 고장이었기 때문에 한문을 진서라고 믿고 숭상하는 풍조가 남아 있었다. 한글은 언문이라고 해서 낮게 쳤는데 배우기가 쉽다는 것도 업신여기는 까닭 중의 하나였다. 할아버지의 서당은 잘 되었다. 박적골 사람들 뿐 아니라 고개 너머마을에서도 아들들을 우리 서당으로 보냈다. 사랑에선 온종일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할아버지가 괜히 잘난 척 할 때 보다 마을 사람들이우리 식구를 대하는 태도도 훨씬 달라졌다
박완서 씨의 대표적인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중에서
개성사람 이야기
내 고향은 개성이 아니라 개성시내에서 남쪽으로 8km 가량 떨어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의 한 작은 마을이다. 그래도 서울 와서 살면서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개성이라고 대답했다.우리 식구들이 다들 그렇게 하니까 나도 따라서 그렇게 한 것도 있고, 아마도 서울사람들에 대한 시골뜨기의 열등감 때문에 개성사람이라고 하면 조금은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저의도 있었을 것이다.
(...중략...) 우리마을 여자들은 도시여자들이 핸드백 들고 다니듯 필수품처럼 허리에 '종댕이'를 차고 다녔다. 종댕이에는 호미나 머릿수건 같은 게 들어 있었다. 종댕이를 차고 다니면 어디서나 씨 뿌리고 거두는 데 편했다. 논두렁이고 밭두렁이고 노는 땅만 보면 후비적후비적 파고 씨 뿌리고, 영근 콩꼬투리나 팥꼬투리가 있으면 제때제때 거두기도 하고, 풋고추나 오이,호박을 따담기도 하는 데 호미와 종댕이는 필수품이었다. 이렇게 거둔 것들을 다음날 새벽에 송도로 이고 나가 돈이나 필수품으로 바꿔가지고 왔다. 어릴 적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 바깥마당에 나가면 그때 벌써 송도에 갔던 여자들이 명랑하게 떠들면서 마을 어귀에 들어서고 있었다.
(...중략...) 마지막으로 면면히 이어져와 개성사람들의 특질을 만들어낸 저항정신을 빼놓으면 안될 것 같다. 개성에서 일본상인들이 발을 못 붙인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건 상권을 지켜낸 일이 될 뿐아니라 주변 농촌을 피폐하지 않도록 지켜준 마지막 보루가 되지 않았나 싶다. 1전을 10등분하기 위해 성냥을 한통 사서 나누는 지독한 개성여자들도 일본상인들에 대해서는 기꺼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저항했다. 자식한테 5전짜리 비누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분명히 비누 한개에 5전인 줄 알았는데 두 개를 가져왔다. 까닭을 물으니 새로 낸 일인 상점에서 신장개업 기념으로 선심을 쓴 거였다. 어미는 아이에게 그 물건을 돌려주고 조선사람이 파는 가게에 가서 하나만 받아오라고 이른다. 1전에 치를 떠는 어미가 기꺼이 5전에 손해를 본 것이다. 나는 일제말기에 고향으로 내려가 학교 때문에 개성시내에서 살다가 해방을 맞았다. 먹을 갈아 급하게 일장기를 태극기로 변조했다. 일본국기가 쉽게 태극기가 되는 걸 천만다행으로 여기면서. 집집이 급조한 태극기가 펄럭이는 골목을 지나다가 가끔가끔 오랫동안 장속에 숨겨뒀음직한 태극기를 보고 발기을 멈춘 적이 있다. 그중에는 흰색 공단 바탕에다 같은 공단 천으로 사괘와 태극무늬를 박음질한 태극기도 있었다. 흰바탕이 노랗게 변색하고 접었던 자리의 변색이 더 심한 태극기를 우러르며 먹을 갈아 급조한 태극기가 부끄럽고 그 집 전체가 우러러 보였다. 공단처럼 고급천은 아니더라도 해방된 날 고이 간직했던 태극기를 내다건 집이 적지 않았던 개성이 내 고향이라는게 자랑스럽다.
박완서 산문집 "두부" 중 '개성사람 이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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