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바이올렛의 예술탐방 2
“그들은 여전히 혼불로 살고있다. - 故정관훈의 풍부한 감성읽기”
<글:박정수(갤러리바이올렛 관장. 미술평론>
정관훈(1965-2005)
경북예천출생,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계명대학교 미술 대학원 졸업, 서울과 대구에서 9차례 개인전을 비롯 국내외 많은 화랑에서 인정받은 화가였다. 미국으로 가기 일주일 전쯤 만났습니다. 그와 저는 동갑임에도 그가 고등학교를 늦게 졸업해 ‘‘형’이 되는 사이였습니다.
“형요! 힘들지만 미국 갈라니더. 미국 가서 공부 좀 더해보고 내 스타일 그림을 찾아볼라니더~”
2001년 1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그리고 2002년에는 '코너티켓주' 공모전 대상을 수상하고, 2003년 2월에는 대구 동원화랑에서 도미 이후 처음으로 초대전을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2005년 11월 19일 미국 뉴욕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예술의 혼을 불사르다 간 사람들>이라는 타이틀로 전시를 준비하면서 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꿈에 나타나더군요. 대학 때부터 타계하기 전까지 천 여 점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예술의 정념으로, 예술가의 꿈으로 살다간 그들의 모습을 다시 한번 찾아봅니다. 그들의 육신은 없지만 그들의 영혼은 예술작품에 그대로 녹아들어 현재도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가난하였지만 부자였습니다. 경제와 마음은 너무나 풍부한 가난뱅이였습니다.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생명이 있는 모든 사람을 이야기 합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인생은 살아지느냐와 살아가는 것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인생에 있어서 편리하고 안전한 길이란 없는 것 같습니다. 살아지는 사람들도 고난의 연속이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고난의 연속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만나든지 서로의 가슴을 보듬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벽녘 어둠을 찢으면서 찾아드는 고달픈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밝은 하루를 보내기 너무 힘겨워 밤을 새다가 빛이 조금 스며들 즈음 잠을 청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들에게 더 나은 이들에게 더 좋은 희망의 길을 찾아주어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경제도 가난합니다. 경제가 가난한 사람 역시 마음 또한 가난합니다. 그의 지인중의 한분은 그의 추모전시에 즈음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사나이가 뭐 있습니꺼
-한창현-
원시림의 화가를 처음 만났을 때
산골에서 도시로 가출한 촌닭으로
성기고 헝클어진 머리카락하며
큰 눈알로 순한 눈치를 훔치며
울퉁불퉁한 화술로 칼날을 세우고
원색물감을 수려한 붓대로 자른다
석사학위 부여 받고 비행기 타고 떠난 화가
미친 듯이 그림 그리고 보상심리로 마신 소주잔
고독의 성을 스스로 높게 길게 쌓으며
허기진 세상을 똥구멍 찢어지게 살았다지만
말로 그림을 그린 내게는 그것도 부럽기만 했었다
좁은 땅에서 살기 싫어
넓은 세상 찾아 떠난 그대는
찬바람뿐인 빈 지갑을 열고도 호탕한 이 사람이
투명한 유영으로 원 없이 인연을 나눈 내게는
낚시꾼으로 어 복이 많은 이상형의 화가이었다
이국 땅 낯선 아스팔트 위에서도
노란 머리카락 백색 피부 파란 눈동자 속에서
황소고집에 버럭버럭 소리까지 지른다
새벽에도 화가들과 현관문 걷어차며
간 큰 남자가 불규칙한 언어로 말을 한다
사나이가 뭐 있습니꺼...
주흘산 촌놈이 들어도 촌스러운 말씨의 그대
사나이가 뭐 있습니꺼...
쓸쓸한 추억의 빈 지갑 속에서도 호탕하다
정관훈 作
텅빈 공간속에 기물이 묻혀져 있다. 동양화에서 말하는 여백이라는 곳에 과일이 슬며시 숨어든다. 숨어드는 것인지 밖으로 나오는 것인지 조차 불분명하다. 고색있는 빛바랜 도자기도 굽이 묻혀져 있다. 실날같은 희망으로 이름이 명확하지 않은 열매 하나만이 공간에 묻히지 않은채 온전한 자기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공간속으로 서서히 사라짐인가...아니면 공간에서 현실로 드러냄을 의미하는가..명확하지 않다. 다만, 그곳에는 삶의 공간이 있고 사유의 시간이 있고,여백의 풍부함이 있다.
정관훈 作
그림을 보자. 무엇인가 소중히 보관하였을 보자기위에 호박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너무나 이질적이다. 보자기에는 조상들의 흔적이 묻어있는 옷가지가 있을수도 있고, 조상님께 제사지낼때만 꺼내입는 제례복이 곱게 쌓여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보자기 위에 작년 돌담위에서 잘 영근 늙은 호박이 자리한다. 궂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듯 싶다. 오래된 것이 좋기만 한것만은 아닌듯 하다. 회상에 젖고, 감상에 젖어들게 한다.
정관훈 作
지금에야 도토리를 줏어오지 못하지만 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도토리는 시골 밥상에 올려지는 소중한 찬을 위한 원료였다. 들짐승들보다 사람이 먼저 살아야 하는 시기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상들의 음식으로, 간식으로 도토리 묵은 여전히 우리 곁을 머물고 있다.
부러진 나뭇가지, 도토리 한쌍이 붙어 있었던 또다른 나뭇가지, 거기에서 빠져나와 혼자 있는 토토리 한알, 그릇에 담겨진 많은 도토리들, 화가는 어디에 자신을 두었을까. 부러진 나뭇가지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나뭇가지,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유지시킬 그릇속의 도토리, 거기에 외로이 떨어져 있는 도토리 한알. 화가는 어디엔가 자신을 묻었을 것이다. 어디인지는...
정관훈 作
그의 작품에는 길과 관련된 연작이 많다. 언제나 눈앞에 나타나는 곳은 길이며, 지나가야할, 넘어야 할 고개이며, 과정이다. 바르게 나있거나 구불구불하거나 비탈이거나 등성이거나 상관없이 가야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정관훈 作
정관훈 作
시작도 없고 끝도없는 길을 간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예술가의 입장을 표현하고 있다. 가운데서 시작된 붓질은 오른쪽 어디에선가 끝이나고 다시한번 가운데서 시작되는 붓질은 왼쪽 하늘 어디에선가 끝이 난다. 멈춰질 수 없다. 삶의 멈춰짐은 죽음보다 더한 고요의 것에 전착된다. 산이 거기있기에 산에 오른다는 어느 산악인의 말처럼 길이 있기에 그 길을 가야만 하는 예술가의 업보와도 같다. 예술을 하지 않았다면.... 그 기대는 차원이 다른 어느 시점에서의 말일 뿐이다.
정관훈 作
발자국을 남긴다. 누군에 의해 남겨진 발자국은 뒤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새로운 길이된다. 사람이 길에 동화되어 길인지 사람인지 행적을 알 수 없다. 역사는 승리자의 몫이라 하지만, 예술가는 언제나 승리자 였다. 그들의 열정과 혼이 오늘의 세상에 함께하기 때문에 정신과 감성이 살아난다.
정관훈 作
길의 끝에는 집이 있다. 안락하다 믿을 수밖에 없는 집이다. 집에서도 새로운 길을 떠나는 행랑을 꾸려야 한다. 행랑을 꾸리고 집을 나서면 어제나 밤이거나 새벽이다. 안락함과 편안함으로 무장된 집이 아니라 새로운 열정을 잠시 다독거리는 공간일 뿐이다.
배고픔과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또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잠시 머물러 가는 휴식처일 뿐이다.
예술가에게 있어 집은 언제나 휴식의 공간이다.
정관훈 作
차가운 달빛을 받는다. 추석한가위 같이 휘엉청 밝은 달도 어느 순간 외롭고 퀭하다. 밝은만큼, 따뜻한 만큼 차다. 따뜻한 마음으로 달빛을 받아든다. 두 손 모듬은 손아귀만큼 달빛이 실린다. 거기에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다. 포근하다.
즐겁게 길을 떠난다. 흥겹다. 소리가 있다. 그 소리는 사람들의 흥청거림이며, 활기찬 화가의 역동이다. 귓속을 간질이는 따스한 소리도 있고, 관능적으로 유혹하는 진함도 배어 있다. 내일을 향하는 미래의 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