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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2019년 12월 15일 주일 오후 예배)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디모데후서 4:7~8)
기도/저의 마음과 입술을, 듣는 이들의 마음과 귀를 주장하여 합력하여 은혜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옵소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진실과 성실이오니 과장하거나 꾸미지 않게 하시고, 장점보다 부족했던 부분을 더 많이 말하게 하옵소서
군대생활을 할 때 새 부대에 가면 신고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먼저 지휘관에게 ‘계급 뭐, 이름 뭐, 며칠 부로 이 부대로 전입을 명 받았습니다!’ 정식 신고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내무반(지금은 생활관이라고 하나요?)를 돌며 인사를 하고, 고참들이 묻는 말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어디에 살다가 입대했고, 사회에서는 무엇을 했고, 그 다음에는 시키는 대로 노래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합니다.
오늘 설교는 그런 성격의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오늘 설교는 신고성 간증형 설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설교는 두 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는 길어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3시 이전에 끝내겠습니다.
하나는 자랑이 많이 들어가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힘쓰겠습니다.
제 이름은 유관지, 이렇게 말하면 ‘유관순 열사와 어떤 관계입니까?’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답은, ‘관계 없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버들 류(柳)씨이고, 저는 묘금도 유(劉)씨,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劉備)의 그 유씨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나이는 우리 나이로 76세, 만으로 75세, 1944년 생입니다.
고향은, 바로 여기입니다.
태어난 곳은 황해도 사리원인데 생후 두 달만에 서울로 왔습니다.
교회 주소가 지번으로는 한강로 1가 183번지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에서 7∼8분 거리의 골목 안에 있는 한강로 1가 224번지가 제 본적지(지금은 등록기준지라고 하지요)입니다.
거기에 살면서 8.15를 맞았고, 6,25를 겪었습니다.
8.15는 두 살 때 일이니까 하나도 기억이 없고, 6.25는 초등학교 1학년 때 겪었으니까 많이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아, 여기는 그때 내무서가 있던 자리였지’ ‘여기는 소년단 본부 자리였지’ ‘여기는 인민재판하던 곳이었지’ 할 때가 있습니다.
내무서 하던 곳은 찬양대의 이문옥 권사님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6.25때 아버지가 거기에 갇혀 있다가 북으로 끌려가셨다고 들었습니다.
6.25는 참 비극 가운데 비극입니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 용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용산중학교, 용산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용산교회에 나오게 된 것은 1957년,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입니다.
바로 앞집에 윤 속장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너 우리 교회 나가자’ 해서, 따라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윤 속장님이란 분이 아주 열심이어서, 때로는 새벽기도회 가자고 새벽에 저희 집 문을 두드리기도 했습니다.
아주 추운 날 새벽에 그 분의 오바에 폭 싸여서 교회에 온 기억도 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올 때 어이 없는 일을 종종 겪었습니다.
이 위에, 아파트 자리에, 백련사라는 일본 절이 있었는데 그 절의 주지 스님이 당시 최고위층의 조카인 여자분이었습니다.
이 스님이 가끔 저 축대 위에서 서서, 새벽기도회에 오는 교인들을 향해 욕설을 했습니다.
이 분의 목소리가 하이 소프라노였는데 욕하는 소리가 동네에 쨍쨍 울렸습니다.
이 스님이교회를 말할 수 없이 괴롭혔습니다.
용산교회의 1950년대 후반은 이 스님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이 분에 대해서는 엄재호 장로님이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니까 재미가 있어서, 열심히 나오게 되었습니다.
학생회 회장도 여러 번 하고 그러니까 권사님들이 ‘너 목사 되라’ 또는 ‘너 목사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에 그런 경우가 많지요.
그 권사님들 이름,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렇게 말만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기도도 많이 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학생 시절에 이른바 ‘문학소년’이었습니다.
감리교에 「기독교세계」라는 월간지가 있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여명”이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거기 보냈습니다.
감리교 본부에서는 쓴 사람이 학생이었다는 것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크게 실렸습니다.
교인들이 자랑스러워 하고, 칭찬을 하고, 목사되어야 한다는 소리를 더 많이 했습니다.
제가 ‘네’ 그랬습니다.
이것도 서원이라면 서원이었습니다.
‘겉멋 서원’이었고 ‘풋서원’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때문에 제가 우여곡절을 거쳐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특히 젊은이들에게 ‘서원을 함부로 하지 말고, 서원을 했으면 꼭 지켜야 한다’ 고 자주 말합니다.
대학 입학시험을 칠 때는 신학교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다른 학교를 지망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5.16 다음 해였는데 군사정권이 만든 입시제도가 좀 특별했습니다.
여기, 저와 같은 해, 1962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분이 계신 것으로 아는데, 국어, 영어, 수학 같은 과목들은 40점 만점이었는데 체능이 50점이었습니다.
제가 체능은 ‘꽝“입니다.
최저점을 받았고, 당연히 불합격이었습니다.
얼마나 화가 납니까?
집을 나와서 막 돌아다녔습니다.
어느 날 밤에 저기 양평과 여주 사이 한강변, 이포라는 곳에 왔는데, 그 때는 그 강변에 군인들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천막을 치고 경계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도 가도 못하고, 하는 수 없이 군인들 천막에서 자게 되었는데 그 밤이 저에게는 회심의 밤이었습니다.
30여 년 뒤에 그 일을 가지고 수필을 한 편 썼는데 제목이 “이포의 밤안개”였습니다.;
거기에 그 때의 일을 이렇게 썼습니다.
초소장의 호의로 천막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잠이 올 리 없었다. 일어나 강가로 나갔다. 남한강 위로 안개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 건너가 이포였다.
그곳 언덕에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찬송가 소리가 들리고 때로는 웃음소리가 강을 건너왔다. 성가대가 연습을 하는 것 같았다. 2월의 강가이니 꽤 쌀쌀했을 것이나 추웠다는 기억은 지금도 없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움직이지 않고 강 건너를 바라보며 오래동안 서 있었던 모습은 또렷하게 인각되어 있다.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 목사가 되겠노라고 강대상 부근에서 교회 어른들에게 말하던 일이 떠올랐다. 교회 어른들이 자꾸 칭찬을 하나까 칭찬을 더 받기 위해 겉멋으로 이런 말을 한 것 같았다. 막상 진로를 정할 때는 그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안개가 강위에 점점 넓게 퍼져 나가듯 그 일이 머리를 가득 채워나갔다.
머릿속에는 그 생각, 눈앞에는 강 건너 언덕에 있는 교회의 불빛, 귀에는 찬송가와 웃음소리-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평안을 오래 누리고 싶었다. 걱정이 되었던지 M1 소총을 든 초소장이 나를 찾으러 강가로 나왔다.
그래서 신학교에 원서를 내게 되었는데 그때 저를 도와준 분이 두 분 계십니다.
모두 용산교회와 관련된 분들입니다.
한분은 1958년,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중등부 지도교사였던 박우승이란 분입니다.
이 분은 그 뒤 장로가 되어 감리교 평신도 운동을 크게 했고, 80대 중반인 지금도 온양에서 교육사업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사람들에게 ‘유관지는 내 3대 제자 가운데 하나’라고 말합니다.
한분은 1960년에 이 교회 10대 담임자였던 김창희 목사님입니다.
김창희 목사님은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다른 교회에 가 계셨는데 옛 교인인 저의 신학교 입학을 구체적으로 도와주셨습니다.
김창희 목사님은 1970년대에 감리교 감독을 지내셨는데, 30년 전에 심장마비로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제 결혼주례도 해 주시고, 목사 안수도 해 주셨는데 목사 안수를 하고 나서 하신 말씀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네 머리에 손을 얹을 때 피가 통하는 것 같았다.’
박우승 장로님이나 김창희 목사님, 두 분 다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한 분이어서 저도 그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용산교회 때문에 내가 목사가 되었다’, 제가 용산교회를 마음에 담고 있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신학교에 입학을 하고, 중간에 공군에 가서 3년 복무를 하고 1970년에 졸업을 했습니다.
1970년에 졸업을 했으면 3년 전도사 생활을 하고, 1973년쯤 목사 안수를 받았어야 하는데, 십 년 뒤인 1984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늦어진 이유가 있습니다.
졸업을 하고 인천에 있는 한 교회를 담임하기로 이야기가 다 되었는데, 막상 부임하려고 하니까 그 때 그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전도사님이 “여기 감리사님이 처음에는 당신을 환영한다고 하다가 웬일인지 절대로 안 된다고 하더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나중에 신학교 교수가 되었는데 이 분도 용산교회를 거쳐 간 분입니다.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간신히 진정을 하고 이번에는 남한산성 밑에 있는 교회로 정식 파송을 받았는데 부임예배릎 드리는 날,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지역에 세력을 가진 목사님이 계셨는데, 이 분이 감리교 본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 교회는 내가 보내는 사람이 담임해야 한다’ 하고서 전도사 한 분은 보냈습니다.
교회에서는 입장이 곤란하니까 자기네가 한 분을 모셔왔습니다.
부임예배 드리는 날, 몹시 추웠는데, 교인은 열두 명인데 전도사가 셋이 왔습니다.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용산교회에서 교인들의 사랑 가운데 지내왔는데, 교회에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나 목사 안 해!’하고서 경남 거창에 있는 거창고의 국어교사로 내려갔습니다.
참 힘든 일을 겼었지요,
그런데 제가 살아오면서 몸으로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불행해 보이는 일 가운데 행복이 숨어 있고, 이해가 안 되는 일 속에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에서 세 가지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하나는 교회 정치와는 아예 담을 쌓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예배 드리고, 은혜 받고, 사랑 나누는 곳이지 정치하는 곳 아니야!’
하나는 ‘젊은이들에게, 특히 교역의 길에 들어서려는 젊은이들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되!’
20년 전 쯤에 제가 용인서지방 초대 감리사가 되었습니다.
용인서지방은 용인의 수지를 중심으로 한 곳인데, 교회를 개척하겠다고 찾아오는 젊은 교역자들을 예전에 내가 받은 상처를 생각하며 따뜻하게 맞아주고 힘써 도왔습니다.
제가 감리사를 하는 2년 동안 용인서지방에 개척교회가 일곱 개가 세워졌습니다.
수지가 그때 개발지역이었던 것이 그렇게 여러 교회가 세워진 가장 큰 이유였지만, ‘거기 가면 감리사가 잘 도와준다’는 소문이 퍼진 것도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금도 그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감리교회에서는 한 지방에 1년에 개척교회가 세 개 이상 세워지면 감리사를 표창합니다.
제가 2년 연속 표창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이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30년 전에 저에게 어려움을 준, 인천의 그 감리사님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소명이 얼마나 엄숙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때는 제가 왜 그런 일을 겪었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너 그 때 준비가 덜 되었어! 아니 전혀 되지 않았어! 너 그 때 겉멋으로 그런 거야!’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전혀 연고가 없는 거창고에 가서 국어교사 생활을 했는데, 그것도 제게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이 거창고가 좀 특별한 학교이지요.
지금도 전국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지만, 1970년대에도 뜻 있는 분들이 자기 자녀를 그 산골에 있는 학교로 보내는 일이 있었습니다.
감리교의 감독회장을 지낸 목사님 한 분도 아드님을 거창고로 보냈습니다.
‘목사님 아까 목사가 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서 목사가 되었습니까?’ 하실 것입니다.
거창고와 또 한 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1974년에 극동방송에 PD로 입사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부터 방송활동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서였습니다.
석 주일 전에 목사님이 저를 소개하면서 ‘극동방송에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했는데 외람되지만 사실입니다.
특히 두 가지 일을 열심히 했는데, 하나는 방송의 전문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제가 방송에 대해 아주 엄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영향으로, 직원들에게 ‘방송인은 방송혼을 지녀야 해!’ 자주 말했습니다.
하나는 공산권선교를 열심히 한 것입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극동방송은 공산권선교를 목적으로, 거기에 적합한 설비를 갖추고 세워진 방송입니다.
그 일을 제가 담당했습니다.
1970년대 후반까지는 ‘이 방송을 공산권에서 듣나?’, 잘 몰랐습니다.
그때는 소련을 ‘철의 장막’이라고 했고, 중국(중공)을 ‘죽의 장막’이라고 했습니다.
1978년부터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1978년에 중국의 등소평이 개방정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작년에 중국에서 개혁개방 40년 대회를 크게 헸습니다.
거기에 따라 중국 사람들이 외부로 편지를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크리스천들이 극동방송으로 편지를 보내는데 일 년에 몇만 통씩 왔습니다.
중국 동북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도 편지를 많이 보내왔습니다.
‘우리는 박해를 받으며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방송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내 주세요’
그 편지들을 읽으며 눈물을 참 많이 흘렸습니다.
‘아, 신앙이란 것이 이렇게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구나!’
‘초대교회 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이기며 지하공동묘지, 카타곰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 때 로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지금도 ‘북한에 참된 기독교인들이 남아 있을까요?’ 묻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중국 성도들의 예를 들며,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아졌을 것이라고 확실히 믿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국선교에 대해 알고 싶은 분이 있으면 간단하고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인터넷이나 핸드폰에 ‘중국을 주께로’ 라고 치시면 됩니다.
그러면 월간잡지 하나가 화면에 뜹니다.
그 잡지의 이름이 「중국을 주께로」입니다.
제가 발행인인데요, 잡지를 보면 제일 앞에 “발행인 통신”이라고 해서 제 글이 나오고, 중국교회, 중국선교에 대한 유익한 글들이 가득 실려 있습니다.
오랫동안 종이책으로 내다가 몇 해 전에 인터넷 잡지, 웹진으로 바꿨습니다.
바꾼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인쇄비를 절약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때 ‘인쇄비가 이유의 하나가 되어서 종이 잡지를 내지 못하다니 이게 뭐야!’ 했는데 바꿔놓고 보니까 아닙니다.
독자들에게 접근하기가 더 쉬워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못마땅하게 여기는 일을 통해서 더 크게 일하시는 분입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다시 목사가 되어야 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아주 힘든 과정을 밟아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때 저도 고생을 많이 했고 제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계속해서 극동방송에서 일하다가 1997년에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교회 목회의 현장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차서 4년 전에 은퇴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제가 걸어온 길입니다.
몇 가지 말씀을 더 드립니다.
‘목사님의 신앙관이 궁금합니다’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아주 보수적입니다.
제가 23년 동안 몸 담아온 극동방송은 근본주의 신앙노선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근본주의는 ‘근본적인 교리는 목숨을 걸고 지킨다’는 주의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육신적인 부활, 재림, 심판, 이런 것들을 확실히 믿습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라고 복음주의 운동을 하는 중진 목사님들의 모임이 있는데 거기에 오랫동안 동참해 오고 있습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김명혁이라는 장로교 목사님이 오랫동안 회장을 하셨고, 지금은 이정익이라는 성결교 목사님이 회장이신데, 다음 달에 종교감리교회 최이우 목사님이 회장에 취임하게 됩니다.
저는 천국과 지옥을 확실히 믿습니다.
다섯 달 전에 제 아내가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폐암으로 여러 해 고생을 했는데 끝에 참 힘이 들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 있는데 마지막에 혼수상태가 되었습니다.
혼수상태에 들어가면 햇살방이라고 임종대기실로 가는데, 그러면 하루나 이틀만에 숨을 거두는데 이십여 일을 그런 상태로 있었습니다.
가족들도 지쳤고, 병원에서도 당황했습니다.
그때 따라 설교, 강연 약속이 많았는데 다 취소했습니다.
그땨 아내의 머리맡에 찬송가를 늘 틀어 주었습니다.
사위에게 ‘녹음기와 찬송가 테이프를 가져 오라고 했더니 요즘은 그렇게 안하고 스마트폰에 찬송가 앱을 깐답니다.
그런 끝에 숨을 거두었는데 얼굴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얼른 사진을 여러 장 찍어 지금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천국 갔다, 지옥 갔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속하는 일이어서 그것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평안한 얼굴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은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에 지금도 그 모습을 생각하며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또 묻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북한 관계 일을 오래 하고 계신데, 북한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진보입니까? 보수입니까? 우입니까? 좌입니까?’
분명히 대답해야 하겠는데, 저는 보수입니다.
보수도 그냥 보수가 아니라 ‘극보수(極報守)’입니다.
광화문에 나간 일은 거의 없지만, 그렇습니다.
저는 한 가지 분명히 믿고 있는 것이 있는데 ‘북한에 대해 알면 알수록 보수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북한에 대해서는 좀 아는 편이지요.
오랫동안 북한 관련 일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고, 박사학위 논문도 북한교회사를 주제로 썼고, 북한도 여러 번 다녀왔고, 북한에 대한 책도 여러 권 썼고, 탈북민들을 많이 만나고, 그밖에 북한에 대해 남들이 하지 않은 여러 가지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에 갔다가 유서를 쓴 일도 있습니다.
인터넷에 제 이름과 고려호텔, 유서, 이렇게 입력해 보면 그때 제가 왜 유서를 썼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극보수가 되더군요.
극보수이더라도 막힌 보수는 아닙니다.
마지막 이야기,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반드시, ‘너는 세상에 가서 이 일을 해라’ 사명을 주어서 보냈습니다.
이 사명을 깨닫는 것을 루소라는 사상가는 ‘제2의 탄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는 어떤 사명을 주셨을까?’
처음에는 기독교문학이라는 사명을 주신 줄로 알았습니다.
문학 공부도 비교적 많이 했고, 문학활동도 했고, 신학교와 기독교 기관에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어느 선교단체에서 2007년에 평양대부흥 100년을 기념해서 각 분야별로 100명씩을 뽑았는데
기독교문인 100명 가운데 하나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1번이 윤동부, 2번이 박두진, 3번이 김현승, 황순원, 강소천, 쭉 나가다가 제일 끝 100번이 유관지 저입니다.
나이 60이 되던 해에 ‘앞으로 10년 뒤에 은퇴를 하게 되는데 은퇴를 한 뒤 무엇을 할까?’
생각하면서 ‘아, 기독교문학연구원’을 세워서 일해야 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가운데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통일선교!’ 이것입니다.
요즘 ‘하나님이 통일선교의 길로 나를 정교하게 인도하셨다’ 라는 말을 종종합니다.
처음에는 ‘나를 정밀하게 인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정밀과 정교가 어떻게 다릅니까?
정밀은 ‘정확하고 치밀함’ 정교는 ‘정밀하고 교묘함’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때로는 교묘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요즘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알려면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그 사람의 이름을 입력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경력, 그 사람의 활동, 쓴 책, 사진, 이런 것들이 모두 나오지요.
이미 제 이름을 입력해 보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매스컴이나 인터넷에 이름이 비교적 자주 오르내리는 편인데, 거기 있는 기사나 내용의 대부분이 통일선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이 길을 걸어왔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변함없이 이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신고성 간증형 설교를 하면서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담임하고 있던 교회가 수지에 있어서 수지와 분당에서 22년을 살았습니다.
이제는 더 거기에서 살 이유가 없어졌고, 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집은 이촌동에 가지고 있던 아주 오래된 아파트를 수리해서 옮겼고, 북녘교회연구원, 영어로는 NKC연구원이라는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데 분당에 있던 그 사무실은 여기 삼각지에 있는 오피스텔로 옮겼습니다.
이 사무실을 마련하게 된 내력이 재미 있는 데요, 1970년대 후반에 첫 원고료를 받았을 때 퍽 감격했습니다.
‘아, 앞으로 원고료는 쓰지 않고 모두 모아 나중에 보람 있는 일에 써야하겠다’ 했습니다.
목사가 된 다음에는 설교 초청을 받는 일이 많지요.
그 사례도 모두 모았습니다.
40년 넘게 모으니까 액수가 꽤 되지 않아요?
그것으로 구입했습니다.
원로목사님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아 일찍 알려주지 그러면 우리도 그렇게 했을 텐데 우리는 지금 갈 곳이 없다’고 합니다.
‘집과 사무실은 이렇게 옮겼는데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촌동에서 분당까지 다닐 수 없고...’
모교회인 용산교회에서 받아 주셔서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석 주일 전에 첫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 안에 기둥이 없나?’ 살펴 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기둥이 있으면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그 기둥 뒤에 숨어서 예배를 드리려고요.
원로목사로 처신하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잘 처신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제가 나이도 있고 건강의 약한 부분도 있습니다.
심장으로 가는 혈관이 좁아지면 거기를 확장하고 둥그런 쇠그물망을 넣습니다.
그것을 스탠드라고 하는데, 우스갯소리로 스탠드롤 하나 넣었으면 원스타, 둘을 넣었으면 투 스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가 투스타였다가 3년 전에 원수가 되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인공심장박동기를 넣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조심하면서, 남과는 다른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 디모데후서는 ‘바울 사도의 유언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여러 가지를 말하며 부탁한 내용이 들어 있는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언장 가운데에서도 정말 유언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제가 달려갈 길, 사명의 길, 통일선교의 길, 믿음의 길을 끝까지 잘 달려갈 수 있도록 여러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사랑하는 모교회, 저를 목사로 만들어준 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며 유익한 존재가 되도록 힘쓸 것을 약속합니다.
오, 주님, 이 약속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부족한 저를 지켜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