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 조 림
- 김 경 주
통조림 속 복숭아는 4알이다. 황도는 과육이 보숭보숭한 노란색이다. 노란색 복숭아 조각이 통 속에 덜렁덜렁 담겨 있다. 말캉 씹힌다. 입 안에서 윤기를 한번 굴리고 나면 혀만으로도 반을 가를 수 있다. 이빨에 조금 힘을 주고 살짝 엉덩이를 깨물듯 뭉개면 속살이 부드럽게 입 안에 젖는다. 달콤국물은 숟가락으로 떠먹어도 좋고 두 손으로 통을 들고 들이마셔도 어른들에게 혼나지 않는다. 평생 한 번씩은 통조림 국물이 아깝다고 생각하니까. 복숭아 통조림 중 최고는 알쿠니아 황도 통조림, 알루미늄 원통이 다른 것보다 조금 더 길고 오목하다.
백도 통조림은 요즘 잘 안 판다. 백도 2절, 흰색의 복숭아를 두 조각내서 만든 통조림. 시골 구멍가게에나 가면 또 볼 수 있을지도 몰라. 명절날 가던 큰아버지 집 근처 식료품 가게 선반 위에서 갑옷을 입은 고독한 중세 기사처럼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통조림.
아프고 나면 꼭 사 주시던 황도 통조림. 아버지는 이불 속에 누운 꽁치에게 통조림을 까서 밥그릇에 국물을 전부 부으신 후 계란 후라이처럼 황도를 둥둥 띄워 주셨다. 이담에 나는 정말 많이 아플 거야. 누렁이가 죽어 갈 때도 꽁치는 매일 개밥그릇에 황도 통조림을 까서 부어 주었다. 바닥에 엎드려 눈을 감고 혀를 내밀어 국물만 쪽쪽 핥아먹던 누렁이, 두 눈 속에 커다란 황달이 녹고 있는, 우리 집 복숭이.
통조림 속에서 꽁치들이 떠다닌다. 꽁치의 머리, 꽁치의 꼬리, 꽁치의 뱃살, 이 출렁출렁한 것들이 물속에서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한다. 꽁치 통조림 심부름 참 많이 갔다. 뼈도 와작와작 먹을 수 있는 꽁치 통조림. "다랑어가 무슨 고기인 줄 모르겠지만 왜 그놈만 통조림이 돼야 하지?", "참치 통조림은 부르주아라고." 꽁치 통조림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참치, 그래 봐야 오래 못 갈 걸.
예상은 빗나갔다. 참치 통조림은 통조림의 혁명을 낳았다. 대중은 참치 통조림을 편하게 찾을 수 있고 이제 꽁치 통조림은 자취생 냉장고에 틀어박혀 있거나 바다낚시 동호회 엠티 때에나 어부들의 술상에 오른다. 대신 성충보다는 번데기가 비싸고 귀하게 대접받는 시대가 왔고 꽁치라면(80년대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한 꽁치 통조림으로 끓인 라면)은 추억의 프롤레타리아가 되어 간다.
며칠 전 김정환 선생님 집 근처 수퍼마켓 <내외식품>에서 맥주에 꽁치 통조림, 많이 주워 먹었다. 우리는 입을 오물거리며 골뱅이처럼 먹었고 검은 국물이 흘러내리는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통조림에서 '아웃 백(out back)'이 시작된다. 통조림이라는 말을 처음 발음했을 때 꽁치는 저학년이었다. 꽁치는 하루 종일 통. 조. 림을 발음했다. '통조림'이라는 발음이 주는 기묘한 느낌이 좋았다. 칠판의 <떠든 사람>에도 통조림을 써 보았다. 알루미늄이라는 단어의 뉘앙스처럼 물고기 신경학 이론에 등장하는 학명 같기도 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딱딱한 슈즈의 이름 같기도 했다.
대학 가서 미술대학 일일호프 때 앤디 워홀의 통조림 그림을 보고 와우! 하던 기억도 난다. 통조림통 디자이너(앤디 워홀)가 대단한 성공을 거두자 통조림 안에 있는 것들 말고 통조림 바깥에 있는 것들에게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껍딱! 같은 것. 통조림에선 무엇이 나오든 신기하다. 가끔은 이런 것들도 나왔으면 좋겠다.
빼빠, 구슬, 《아이큐 점프》, 국민은행, 호치커스 알, 귀마개, 눈사람, 이끼, 물지렁이, 변비약, 달팽이, 볼링공, A4지, 타자기, 선인장, 마론 인형 머리, 발목, 어항, 모자, 필름, 속눈썹, 각설탕, 지느러미, 개똥, 피임약, 밀링머신, 형광펜, 폐를 촬영한 엑스레이 사진, 리모컨, 이구아나, 갈비뼈, 솜사탕, 신주머니, 공룡, 라면 수프, 가죽 다이어리, 애드벌룬, 전구알, 『난중일기』, 교우록, 줄넘기, 마우스, 두통약, 캐러멜, 콘돔, 승차권, 물 먹는 하마, 악어, 도쿄타워, 기중기, 옷걸이, 국화꽃, 오리털 파카, 《만화왕국》, 고무공, 재떨이, 매표소, 마돈나, 이오네스코, 아르토, 뺑끼, 매독 등등.
통조림은 부패를 막는다. 통조림은 신선도를 보장하지는 않지만 썩지 않게 하는 효력이 있다. 통조림은 신문보다 덜 싱싱하지만 신문보다 더 상상력을 자극한다. "원통!" 하면 슈퍼마켓 점원은 손가락으로 통조림을 가리킨다. 시식이 불가능한 원통이다. 어떤 것도 유통기한이 없지는 않다.
미래 영화에서 수천 개씩 복제되어 생산라인 구멍으로 빠져 나오는 커다란 통조림들을 본 적이 있다. 통조림엔 피가 담겨 있었고 다른 라인에선 오토바이가 담긴 커다란 통조림이 나왔다. 밤이 되면 흡혈귀들은 통조림을 따서 피를 마시고 대량으로 주문한 오토바이를 몰고 다녔다. 옵션으로 통 속에서 복제된 벗은 여자들이 기어 나왔다. 사람들은 이제 옥션을 통조림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죽은 누렁이가 통조림에서 컹컹 짖어대면 정말로 웃길 것 같다. 통조림에 관해서 말하고 싶은 건 처음부터 끝까지 상상력에 관한 이야기다.
청포도 통조림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 건 청포도맛 사탕이 훨씬 맛있기 때문이다.
-『펄프 키드 -김경주의 思物놀이』(뜨인돌, 2008)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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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형의 산문집이 나왔다. 형은 『펄프 키드』에서 자기를 표상하는 '꽁치'란 화자를 내세워 유년 시절을 함께 했던 사물들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책을 펼치면 타자기, 봉봉에서부터 목폴라, 모빌에 이르기까지, 1970년대와 1980년대산 키드들의 감성을 건드리는 물건들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개인적인 감상 대신, 서문에서 또 다시 몇 줄 옮겨 적어본다.
나는 펄프 키드였다. 나는 잡종이었고 다량의 잡놈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잡스러운 것이 좋다. 가진 게 별로 없어 남의 것이 다 내 것이다 생각하고 살았던 탓도 있었거니와 지금은 많이 사라져 버린 공동체적 감수성이 펄프적인 요소엔 많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시절에게 상당 부분, 감수성을 빚졌다.
(……)
이 책을 나의 첫 조카, 내 누이의 첫 아이인 재이에게 바친다. 먼 훗날 잡종 삼촌의 이야기가 녀석에게 어떻게 읽힐지, 그즈음이면 여기 등장하는 물건들은 정말 구린내가 풀풀 날 텐데…….
재이야, 삼촌은 언제나 '도덕 교과서'보다 '사회과 부도'를 펴는 일이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