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란 명창을 말할 때 '사울 굿'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 굿을 통해 김혜란이라는 이름이 더욱 알려지게 되었고 서울 굿이후 다른 많은 부분에 도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민요를 하는 김혜란 명창이 서울 굿을 선보이게 된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사실 처음 성루 굿을 배우게 된 것은 김혜란 명창의 생각보다는 스승인 안비취 선생의 권유가 크게 작용했고, 공연 무대에 올리게 된 것은 현재 연극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구히서 선생의 권유가 크게 작용했다. '굿'에는 여러 갈래의 굿이 있고, 굿을 행하는 무당도 굿에 따라 여러 무당으로 나뉜다. 서민들 삶에의 애환이 민요에 담겨 있다면, 그런 애환을 풀어주는 무당의 굿 또한 민요 가락에 배어 있는 것이다. 경기민요는 특히 더 그렇다. 이런 이유 때문에 스승인 안비취 명창은 제자인 김혜란에게 서울 굿의 대가를 소개시켜 주었다. 굿을 배워보라고. 안비취 선생의 권유도 있었지만 본인도 그러한 필요를 느끼고 있었기에 서울 굿을 배우기는 했지만 막상 굿을 무대 위에서 선보일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굿을 정말 열심히 배우면서 진짜 신이 내릴까 겁이 난 이유도 있었고. "구히서 선생님께서 공연 무대에 세워보라고 강력하게 권하셨어요. 전 못한다고 버티고. 며칠을 그것 때문에 싸웠어요. 저는 무대에서 공연을 해도 일부만 할 수 있다고 했고, 구히서 선생은 전체를 하라고 하고. 그렇게 티격태격하고 있는데, 어느 날 신문에 보도가 된 거에요. 지금은 언론매체도 늘고, 종류도 늘어 신문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지만 제가 서울 굿을 처음 선보였을 때만 해도 신문의 파급력이라는 것은 엄청난 것이었거든요. 그렇게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공연 무대에 선보였어요. 당시 구히서 선생님이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한복연구가 '허영'씨를 소개시켜 주시기도 했는데, '허영'씨는 철저한 고증을 통해 한복을 제작해주셨지요." 당시 공연장이었던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첫 선을 보인 김혜란 명창의 서울 굿은 기대이상의 열띤 호응을 불러일으켰고, 구히서 선생은 이후 김혜란 명창에게 수많은 조언과 나아갈 바를 알려주는 등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중략-
다른 사람들에게 '성공한 삶'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을 보면 해당 분야 외의 지식과 경험은 거의 전무한 사람이 많다. 그 분야를 깊이, 오래 파왔기에 성공했다는 소리를 들을 자격이 주어지는 것일 텐데, 김혜란 명창이라고 다르지는 않다. 소리 외에 즐기는 취미가 있냐는 물음에 돌아온 답은 묻는 사람의 기운을 빠지게 하는 대답. "사실 소리에만 빠져있다 보니 별다른 취미가 없어요. 9시 뉴스 외에 드라마를 본 적도 거의 없고. 다른 취미 생활을 가졌다면 소리에 빠질 수 없었을 것 같아요." 소리에 빠져 소리만을 알고 살아왔다면 다른 사람들이 가지는 일상의 행복을 느낄 시간도 없었을 것 같다. "무엇이든지 한 가지밖에 못하는 것 같아요. 젊은 시절엔 정말 재미없게 살았어요. 젊은 시절과 지금을 비교하면, 지금이 오히려 나아요. 오로지 소리에만 미쳐서 소리만 생각했죠. 젊어서는 정말 소리 외에 다른 것을 하지 않았어요. 대부분은 그렇게 못하죠. 저는 오히려 현재가 여유로워요. 현재에 만족하고 있어요. 소리하는 김혜란으로써 어느 정도의 성공은 이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지난 삶에 대해서 후회하지는 않아요." 소리 인생을 살아오며 일상에서 놓아야 하는 부분도 있었다. 김혜란 명창에게 그것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가정. "가정 생활에 소홀한 부분이 벗지 않았어요. 젊었을 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나이가 있다 보니 '내가 조금 이기적이지 않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해요. 남이 볼때에는 '성공했다'라고 얘기할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생각되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