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다도09.03- 솔바람 이는 소리
< 그린 빈의 보랏빛 땅, 테라로사 >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간다 / 물 맑은 봄바다에 배 떠나간다
이 배는 달 맞으러 강릉 가는 배 / 어기야 디어라 노를 저어라
사공의 노래만 철썩이는 물결 따라 주인 없는 조각배 머리에 부서지고 있었다. 솔숲 너머 경포바닷가에 불던 바람이 바다인 듯 호수인 듯 너른 경포호까지 내처 달려와 짙푸른 기운을 흩어놓는 길목. 호숫가의 능수벚나무 꽃망울은 아직 틔우지 않은 분홍빛 설렘으로 빙 돌아 늘어섰고, 길 위 낮은 언덕에는 신라 화랑들이 차 마시며 호연지기를 쌓던 경포대가 우뚝했다. 젊은 화랑은 관동팔경의 으뜸인 경포대에 올라 차 한 잔에 달을 띄우고, 바람을 얹으며 사람 사는 일을 내다보았다. 고려 때 이색의 아버지 이곡이 동해안을 유람하며 남긴 ‘동유기(東遊記)’에 나오는 경포대에 관한 글 하나.
‘날이 아직 기울기 전에 경포대에 올랐다. 옛날에는 대에 집이 없었는데 요즈음 호사자가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옛날 선인의 석조(石竈)가 있으니 대개 차를 달이는 도구이다.’ 경포호를 마주한 경포대에 오르니 작은 차 한 잔으로도 너른 호수 같은 도량을 키우던 신라 화랑의 숨결이 경포대 정자 옆 돌화덕에 피어올랐다. 화랑의 흔적이라는 안내가 없으니 무심코 지나는 이들이 더듬는 댓돌로 휑뎅그렁할 뿐이었다. 옛 것에 대한 기록이 없고, 기록이 보관되지 않은 것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강릉은 송릉이었다. 바닷길 따라 무성한 솔숲은 세찬 동해바람을 막아주었다. 나들목부터 변두리까지 시목(市木)인 소나무가 길손을 따르고, 중심가 가로수로 두 팔 벌린 향나무가 장승처럼 종대를 지으니 사방을 휘두르는 시선에 푸른 기운이 스며드는 솔마을 강릉이었다.
차든 커피든 마실 거리를 찾아 떠나는 길은 즐겁다. 최고의 음료 물에 색, 향, 미까지 곁들인 기호음료에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그 숨은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길은 보물찾기의 설렘으로 부푼다.
해가 바뀌고 길을 따라 나서니, 땅에 난 길이 아니다. 시간의 길을 따르고 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도로 주변은 옛 것에 머문 데가 별로 없다. 마실 거리를 찾아 떠나는 양이 흐르는 물과 같다. 시간을 따르고 물을 따라 찾아 가는 강릉의 커피 하우스 테라로사.
오래전 테레사와 로사 두 성녀의 삶을 선망해 세례명을 테레로사로 지었다. 흔치않은 나의 세례명과 한 자 다른 이름이 인터넷 검색어에서 유명 커피하우스로 찾아 낸 뒤, 보따리 속에 밀어두었던 테라로사 카페의 이야기를 이제야 찾아 나선 강릉길이었다.
시내 골목길은 오래전 꿈길에서 걷던 양 서두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옛것이 온전했다. 일본강점기 때의 낮은 일본식 건물이 군데군데 눈에 띄는 중심가는 요밀조밀 가까운 거리라 테라로사 카페를 찾는 일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강릉 사람 허균의 ‘홍길동’이 쓰던 패랭이 같은 동그란 간판 아래로 걸으면 창 안의 노란 조명이 손을 이끄는 카페 테라로사를 만나게 된다.
뉴요커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스타벅스를 찾듯이, 카페 테라로사는 보랏빛 조각의 샹들리에 아래 요모조모 구색 갖춘 소품과 커피 잔, 실용적이고 편안한 의자와 테이블, 구석의 앤티크 찻장과 가구 그리고 그윽한 커피 향내는 유럽의 어느 카페로 이끌었다. 그러나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은 공장을 갖춘 커피하우스 테라로사였다. 갓 구운 원두로 내린 카푸치노 한 잔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어나 학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설이 함박눈으로 쌓이는 학산마을 소나무 군락지는 금방이라도 두루미가 날아들 듯 수려했다. 강릉시 문화관광의 자랑거리에도 오른 테라로사에는 멀리서 찾아드는 마니아들로 조용한 소요가 일었다.
흰 눈이 어울리는 하얀 수피의 자작나무가 길손을 맞이하는 테라로사의 전경. 비닐로 된 온실이 양쪽에 없었다면 전관의 운치가 쏠쏠했으련만, 추운 날에 커피나무 묘목 기르는 일이 우선이리라 여기며 초록나무문을 밀고 들어섰다. 오래된 나무 방앗간에서 중세의 이야기가 막이 오른 듯, 곳곳에 노란 조명과 들창으로 들어오는 빛에 의지하며 찻잔을 두고 얘기 중이거나 여기저기 서성이며 사진을 담는 일에 몰두한 사람들이 출연하는 색다른 공연장 같았다. 커피주문을 위해 의자를 난로 가까이 끌어당기는 일보다 공장 뒤편에서 돌아가는 로스터기계나 쌓인 원두 포대의 정체 그리고 구석구석에 놓인 계량기나 기구들에 시선을 앗겨 나도 그들처럼 서성였다. 우리나라 반대쪽 대륙의 나라 코스타리카, 과테말라, 브라질 등지에서 실려 온 원두가 발아한 후 묘목으로 자라는 온실에 들어서니 ‘테라로사’의 의미가 새삼 다가왔다.
테라로사(terarosa). 커피가 잘 자랄 수 있는 화산재의 성분을 가진 붉은 빛의 토양을 가리키는 포르투갈어 'terrarossa'로 희망의 땅, 보랏빛 땅이란 고유명사다. 희망의 땅인 검은 흙에서 작은 키를 세우는 묘목들이 바닥에서부터 온실 천장에 까지 층층이 자라고 있다. 밖은 흰 눈이 자작나무에 쌓이고 하우스 안의 커피나무는 싱싱한 초록의 열대를 뿜어내고 있었다.
테라로사의 독특한 메뉴는 커피 테스팅. 스탠드에 앉아 바리스타의 손맛을 구경하고 세 가지 커피를 테스팅 할 수 있으니 마니아들에겐 안성맞춤 메뉴였다. 커피의 노마니아이지만 호기심에 바리스타가 내어준 에스프레소 탄자니아, 하우스 블렌딩, 카페라떼 마까다미아를 차례로 테스팅했다. 공장 한 켠에서 로스팅하고 바리스타가 즉석에서 갈아 드립핑 한 커피는 바깥에 쌓이는 눈조차 잊게 하는 매혹적인 향과 맛이었다. 커피에 대해 아는바 없지만 혀의 숨은 미각을 골고루 부활시키는 묘한 맛이었다.
라떼에 그려진 나뭇잎, 하트 등의 라떼아트에 작은 환호가 퍼졌고, 바리스타의 예술에 제빵사의 솜씨 좋은 빵도 맛을 더하니 멀리 온 걸음이 아깝지 않았다.
팔 년 전 강릉 변두리 학산에 테라로사를 열정으로 세웠단다. 처음부터 배부른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블로거들의 입김이 인터넷을 장악하고 있는 지금은 그들의 행적이 담긴 사진과 글이 테라로사의 유명세를 부르지 않았을까. 테라로사는 들어서는 길목, 학산 마을의 호젓함, 나무집과 자작나무의 조화, 너른 주차장, 무엇보다 공장식 커피하우스로 현장에서 커피를 볶고 갈고 우려내 눈으로 직접 체험해 마시는 생동감, 그리고 커피 씨앗을 발아해 묘목으로 키우고, 나무의 성장을 지켜보는 온실, 빈틈없는 볼거리로 채워진 테라로사는 멀리서도 많은 사람을 그렇게 불렀다. 음악, 문학 등의 한여름 밤이나 늦가을 운치를 살리는 공연장을 겸하면서 학산 마을의 운치를 살린 아이디어도 돋보였다.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는 찻집의 주인장은 테라로사의 전략을 엿볼 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람이 즐기는 커피에도 차가 가진 유일한 맛은 없었다. 혀 위로 자르르한 차의 맛, 그 감칠맛 말이다.
첫댓글 눈 위에 찍힌 발자국에서 묵향이 남은 글쓴이의 그윽한 글향 때문입니다. 글과 커피와 사진 한 장, 한 장,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에스프레소! 그 향이 문득 그리워집니다.
처음 테라로사를 찾았을 때의 기분이 어떠했을까. 잔잔한 글과 따끈한 커피에 취하고 갑니다.
글과 사진이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강릉 나들이 하고 싶어지네요. 커피향이 실린 이 바람을 잠재우려면 언제라도 길을 떠나야 할텐데...
저는 여행을 다닐 때 자가용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라고 권하는데, 여기 '테라로사'의 학산 마을에는 마을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 와서 가게되면 차를 가지고 가야 할 것 같아요. 이 집 커피맛 정말 쥑~ 여~ 줘요.
저는 기차를 타고 갔으면 했어요. 학산마을은 기차역에서 먼가요 택시를 탔으면 해서요. 그 집 커피 마시고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요 쥑여준다니 말입니다.
고문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커피맛 저도 한번 마셔보고 싶네요. 겨울에는 뭐니뭐니해도 따근한 커피 한잔이 최고지요!
복희님, 기차를 타고 갈 때는 '강릉역'에서 내리셔서 시내로 조금만 걸어들어가시면 '학산'으로 들어가는 버스가 한 시간에 한대씩 온다니까 만약 가실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테라로사 전화번호를 가르쳐드리지요. 강릉 시내와 골목 골목 두루 걸어다니시면 정취있는 여행이 될 것 입니다. 그리고 의순씨, 따끈한 커피 한 잔 제가 사드리지요. 다시 만날 때^^
으악, 강릉 가고 싶당~~ 오늘같이 봄빛 물드는 날 나무가 보이는 테레로사 테라스에 나른히 앉아 향기 진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어요. 류고문님, 최고문은 은근 부럽소.
부러워서 말도 안나옵니더, 우짜몬 그리도 복이 많소? 볼거리 생각거리 잔뜩 가슴에 쟁여놓고 풀어내고 또 쌓아가는 그대가 부럽소이다.
테라로사 이름이 아름다워서 언젠가는 한번 가보고 싶어지네요 그 집의 커피를 마시면 기분이 어떨까 궁금도 하구요.
강릉가면 차 마실수 있나요? 진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