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부의 아름다운 동행’
<전신마비 아내 23년째 돌보는 정성균 할아버지>
얼마 전 전신마비의 아내를 23년 동안 한결같이 돌보고 있다는 한 할아버지에 대한 제보를 받았다.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정성스러운 간병으로 할아버지는 이미 동네에서는 유명인사라고 했다.
짤막하게 전해들은 사연이었지만 왠지 꼭 한 번 찾아뵙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봄기운이 완연했던 지난 4월 5일, 마침내 경기도 양주군에 있는 정성균(69) 할아버지 , 손난심(66) 할머니 댁을 찾았다.
문이 열리자 할아버지께서 반갑게 맞아주신다.
아담하고도 잘 정돈된 집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어주시자 마자 할아버지가 다시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가신다.
마침 할머니를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기고 계시는 중이었는지 힘겹게 휠체어에 앉아있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점퍼를 입히고 , 두꺼운 덧버선을 몇 겹씩 신겨드렸다.
춥지 않도록 목에도 정성스럽게 스카프를 둘러주시고 몸에 연결된 소변팩도 휠체어 옆으로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팔과 어깨, 다리를 연신 주물러주신 후에야 힘겨운 한숨을 후-뱉으신다.
“이제 됐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차라도 한 잔 대접해드려야지...”
할아버지께서 커피를 준비하고 계신 동안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안 추우세요?”
다소 더운 듯한 날씨라 반소매 차림으로 실내에 들어선 기자를 보고 할머니께서 희미한 목소리로 처음 꺼내신 말이다.
“오늘 밖의 날씨 엄청 따뜻한걸요^^”
“난 너무 추운데....항상 추워서...집안에서도 이렇게 두껍게 입고 있어야 해....”
곧, 깔끔한 컵에 커피 두 잔을 내어 오신 할아버지는 인터뷰 중에도 할머니에게 내내 신경이 쓰이시는지 좀처럼 할머니께 시선을 떼지 못하며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1984년 10월 22일, 내가 날짜까지도 정확하게 기억해요. 아내에게 사고가 났던 날 말이에요”
당시 40대 중년이었던 할머니는 김장을 담글 재료를 구하기 위해 친구 분들과 춘천으로 가던 길에 사고를 당했다.
청평댐을 건너던 중 차가 마주오던 트럭과의 충돌을 피한다는 것이 그만 강물로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동승했던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고 마침 지나가던 고기잡이배에 할머니만이 유일하게 구조됐다.
그야말로 ‘구사일생’인 셈이었다.
“새벽 2시에야 연락을 받았어요.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글쎄 머리는 빡빡 다 깎여있고...눈은 토끼 눈처럼 빨갛게 충혈 돼서...몸은 물을 먹어 엄청나게 부어있고 말야....”
애써 담담한 말투로 당시를 회상하는 할아버지는 목이 메는 듯 잠시 말씀을 잇지 못하셨다.
그때부터 부부의 인생은 180도로 달라졌다.
할머니는 중환자실에서 8개월, 일반 병동에서 1년 2개월의 길고긴 투병 생활을 해야 했고 할아버지는 하던 사업도 접고 아내의 간병에 매진했다.
그러나 결국 돌아온 것은 절망적인 전신마비 판정이었다.
“그때까지는 전신마비라니..상상도 못했지. 그저 치료 잘 받으면 나아질 줄만 알았어요....얼굴과 목을 제외하고는 그 밑으로는 전혀 움직이지도 못하고 감각도 없다고 하는데....정말 앞이 깜깜하더라고요”
한 동안 끔찍한 고통과 절망의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다.
한 번은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열흘 동안 홀로 사라져버린 적도 있었다.
“그 때는 내가 내가 아니었어요...정말 내 생을 포기하려는 그런 심정이었죠.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갈등을 하고...아마 그 때가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할아버지를 붙잡아 준 것은 ‘부부의 연’이라는 단단한 줄이었다.
“아내와 결혼하던 순간을 생각해봤어요. 그런데 부부 서약에 이런 구절이 있잖아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한결같이 사랑하겠노라고...그 서약을 떠올려보니 나 혼자 잘살아봤자 절대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한 번 맺은 부부의 연인데...끝까지 내가 짊어지고 갈 운명이라고 받아들였죠. 그렇게 아내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며 하루하루 지내다보니 어느 새 2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네요”
<사고 전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
<사고가 난 지 약 10여 년 후에 부부가 함께찍은 사진. 이도 벌써 10년이 넘은 사진이 되었다 >
매일 아침 아내를 관장해주는 일부터 시작하여 씻기고, 식사를 준비해서 먹여주고,
근육이완제와 변비약을 시간 맞춰 먹이고, 산책을 시키고,
근육 경직 때문에 수시로 온 몸을 주물러주고,
욕창을 방지하기 위해 두 시간마다 몸의 위치를 바꿔줘야만 하는 일은 이제 할아버지에게는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
때문에 밤에도 단잠을 자는 것은 포기한 지 오래이다.
< 커다란 달력에는 할머니를 위한 간병 일지가 꼼꼼하게 적혀있다>
힘들지 않으시냐는 물음에 오히려 아내에게 고맙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당뇨가 있거든...그래서 운동을 좀 해줘야 좋다는데 아내 덕분에 나도 열심히 몸 움직이고 운동해서 건강해진다고 생각해요. 짜증내면 한도 끝도 없는 건데...내 건강을 위해서 움직이게 해준다고 바꿔서 생각하면 아내에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예요?
<인터뷰 중에도 시종일관 할머니를 챙기시고 경직된 몸을 주물러주는데 여념이 없다>
이런 할아버지이기에 주위에서는 ‘천사’로 불리지만 정작 할아버지 본인은 ‘부담스럽다’고 손사래를 치신다.
“부부간에 한 쪽이 아프면 당연히 간병하는 거지 뭐가 대단하다고...젊어서 고생만 시킨 아내인데 내가 당연히 돌봐야죠. 만일 내가 다쳤다면 아내도 나에게 이렇게 했을 거예요”
이쯤 되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만남과 연애시절이 궁금해졌다.
“어릴 적에 시골 한 동네에서 자랐어요. 당시 난 고등학생이었고 아내는 중학교 3학년이었지. 내 여동생의 선배였는데 집에 자주 놀러오곤 해서 내가 수학도 가르쳐주고 하면서 정이 들었죠.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동생으로만 생각했는데...어느 순간 참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참...그 땐 정말 예뻤지....물론, 지금도 예쁘지만”
당시를 회상하는 할아버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흘렀다.
분위기를 조금 밝게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가장 기뻤던 순간을 여쭤보자 자녀들이 결혼하던 순간을 꼽으셨다.
“아내의 이 불편한 몸으로도 4남매 중 3명을 모두 출가시켰어요. 그 순간이 제일 기뻤던 것 같아요. 아이들도 고생 많이 했거든요. 큰 딸은 다니던 대학까지 그만두어야 했고요..그게 항상 미안했는데 다행히 다들 좋은 배우자 만나 출가하여 자리 잡았으니 기쁘죠. 이제 하나 남은 막내만 장가가면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 불편한 몸으로도 할머니는 4남매 중 3자녀를 모두 출가시켰다 >
자식들 이야기를 하시는 할아버지의 표정이 행복해보였다.
지금 행복하시냐는 물음에도 역시 주저 없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
“주위에 출세한 사람들도 많죠. 그런데 난 이렇게 사는 게 지금 정말 행복해. 명예나 권력이 없어도 우리 부부 함께 있다는 것, 그래서 서로 의지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해요. 더 뭘 바라겠어요. 고통도 다 이겨낼 수 있는 것,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하니까 된 거예요. 사랑 없이 사람이 살 수 있나? 우리 부부 남은 생 실컷 사랑하다가 죽는 날까지 함께 가는 게 저의 작은 소망입니다”
<"두 분 사진 좀 찍을께요"라는 기자의 주문에 할머니의 머리부터 곱게 빗어주시는 할아버지>
<조금만 웃어달라는 주문에 할머니께선 힘드신 와중에도 엷은 미소를 지어주신다>
<두분 산책 나가시기 직전에 한 컷^^>
<매일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산책시키는 일 역시 일과 중 하나>
<바깥에 나오니 조금 기분이 좋아지신 듯 보이죠?^^>
<산책하러 나오면 동네 단골 분식점에서 김밥과 잔치국수 드시는 걸 좋아하신다는 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지금처럼 두분 사랑 변함없이 오래도록 행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