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발문) 김복진 시인의 시집 <구절초 편지>의 발문

* 교편을 잡고 있는 아는 선생님이 시집을 낸다고 시집 뒤에 발문을 청탁하기에 오랜만에 끙끙대며 쓴 글입니다. 너무 길어서 읽기에 부담되지나 않을지, 읽어보시고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발문) 들꽃의 그림자, 그 눈물과 희망의 노래 박원식 1 그게 1995년 9월이었으니 벌써 8년 전이다. 군위군 학생 야영장에서 김 복진 선생과 함께 지낸 일이 말이다. 김 선생은 그 이전부터 알고 지냈 지만 김 선생에 대한 나의 기억은 항상 그 일로부터 비롯된다. 당시 나 는 부계중학교 2학년 학생 30여명을 데리고, 김 선생은 부계중학교 학생 보다 결코 많지 않았을 소보중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관내의 여러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함께 학생 야영장에서 2박 3일의 일정을 같이 했던 것이 다. 야영 이틀째 날은 국토 순례의 과정으로 청화산 인근을 산행했다. 산행 을 하기에는 더없이 맑고 좋은 날씨였다. 인솔 교사로서 나는 맨앞에 서 고, 김 선생은 행렬의 후미에 따라왔다. 산행을 할 때는 행렬의 선두와 길게 늘어진 후미와의 원활한 의사 소통과 비상시의 안전 관리를 위해 지도 교사는 야영장의 무전기를 들고 나간다. 그러나 학생 야영장의 산 행은 다급하게 무전기를 사용해야 할만큼의 일들이 잘 벌어지지 않는 다. 그래서 무전기는 별 쓰임이 없다. 야영장 마당을 빠져 나와 산으로 접어 들어 행렬이 산모롱이에 가려 보 이지 않을 때쯤 나는 손에 든 무전기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별일이 없는 데도 무전을 날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는 선두, 후미 나오라. 오버!"로 무전 교신은 시작되었다. "하늘의 구름이 너무 좋습니다." "여기 노오란 마타리꽃이 피었습니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도 마 타리꽃이 나오지요? 조금 있다 여기를 통과할 때쯤 후미도 보게 될 겁니 다. 빠뜨리지 말고 잘 보십시오." "저어기, 물봉선도 보입니다." "지금 방금 시 구절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산 첩첩, 구름 둥둥'입니 다." 무전기는 또 옆에 같이 걷는 우리의 학생들에게도 건네져서, "부계중학교 2학년 ***입니다. 오버!" 학생들은 끝말잇기를 했던가, 아니 했던가? 김 선생은 내가 벌이는 무전 교신을 아주 잘 받아주었다. 받아 주지 않 았다면 어찌 그것이 계속 이어졌겠는가? 무전기로 한 마디씩 주고받는 게 대구(對句)를 주고받는 것처럼 즐겁고 신이 났다. 나는 그때 도시를 떠나 처음으로 시골 생활을 하면서 야생초에 관심을 두고 있던 터라, 이 름 아는 풀들이 나오면 무전기에다 대고 소리치기에 바빴다. 내 눈앞에 펼쳐지는 꽃과 하늘과 산의 경치를 무전기로 중계방송을 해 대었던 것이 다. 급기야 계곡을 지날 때, 나는 무전기로 물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계 곡으로 내려가 물줄기 옆에다 잠시 동안 무전기를 갖다 대고 나서, 나 는 물었다. "김 선생님, 물 흘러가는 소리가 들립니까?" 그러자 나의 무전기에 다음과 같은 답이 날아 왔다. "박 선생님 마음 흘러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때, 김 선생의 무전기에 물소리가 들렸는지 안 들렸는지 아직도 나 는 모른다. 그러나 나의 마음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는 김 선생의 대답 은 폭포의 메아리가 되어서 오래도록 내 귀에 맴돌았다. 텁텁하고 걸걸 한, 그래서 천상 시골 학교 선생의 인상 그대로인 김 선생으로부터 나 는 한 순간 시(詩)를 느꼈던 것이다. 지난 4월, 학교로 전화를 걸어와서 시집의 평문을 부탁했을 때, 머뭇거 림 없이 그러겠다고 응한 것도 그 날 그 한 마디의 힘이 나를 그렇게 끈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이전까지 김 선생이 책갈피에 꽃잎을 끼워 두듯 그의 노트에 시 를 끼워 두는 줄은 몰랐다. 메일로 보내 온 그의 시를 받아 보고서, 그 날의 그 한 마디가 우연히 나온 게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2 70여 편의 시를 통독하고서 나는 그의 시에서 '그림자'에 대한 인식을 추출해 낼 수 있었다. 해 그림자 ---< 방학일기2 > 느티나무 그림자 ---< 5월이 오면 > 정년 앞 둔 교장 선생님의 긴 그림자 ---< 5월의 단상 > 달 그림자 ---< 지난 날의 동화 >, <통도사 산문에 기대어> 내 하루의 그림자 ---< 만추에 쓰는 일기 > 지난 겨울의 그림자 ---< 겨울 그리고 그림자 > 구절초와 봉선화의 키 작은 그림자 ---< 이사 > 야속한 사랑의 그림자 ---< 감빛 사랑 > 석탑의 그림자 ---< 봉길리 가는 길 > 숲길 그림자 ---< 내소사에서 > 나목들의 그림자 ---< 구주령에서 > 으스름 그림자 ---< 욕지도에서 > 양지꽃 그림자 ---< 양지꽃 > 그림자는 도대체 무엇인가? 표면적으로 보면 빛과 열의 차단, 어둠과 그늘이다. 이분법의 사고 방식으로는 부정적인 것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분법을 아우르는 존재론의 입장에서 보면 실체의 증명이요, 동전의 양 면과 같이 실체의 이면으로서 존재의 한 양식이다.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 윗도리에 달린 화려한 훈장보다도 가슴 속에 박혀 있을 상처에 더 유념해야 한다는 것을 안 이후로, 예술 작품을 볼 때도 그 속에 들어 있 을 그늘과 아픔을 측정해 보는 습관을 나는 가지게 되었다. 김복진 시인의 시적 원동력을 나는 바로 이 그림자에 대한 인식에서 찾 고자 한다. 그림자를 인식하게 되는 것은 언제일까? 조용한 시간과 한갓 진 공간이 교차하는 지점일 것이다. 책갈피에 끼우고자 낙엽을 줍는 것 도 뒷울타리의 그늘에서이고, 교사나 학생이나 남모르는 눈물을 떨어뜨 리는 곳도 학교 화장실 뒷켠이다. 양지바른 언덕에서 할미꽃이나 양지꽃 을 보고서 그 그림자를 느끼는 것도 눈꼬리 발그스름히 적신 애잔한 눈 길이 아니고서야. 그와 같은 그림자의 시공간에서 부끄러움과 그리움의 정서를 그는 펼 쳐 낸다. 그의 시집 표제작이 되는 <구절초 편지>에서 그는 부끄러움의 정서를 거칠다고 느껴질 정도로 직설적으로 표출한다. 구절초와 쑥부쟁 이를 구분 못해서, 물푸레나무의 잎새 모양도 몰랐기 때문에, 상수리나 무와 갈참나무를 구분하지 못한 채로 시골 선생 십오 년을 지냈기 때문 에 도무지 부끄럽다고 토로한다. 여기서 시인이 한낱 지식의 문제로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닐 것이 다. "구부정하게 휘어 가는 시간의 행간"( <분필 조각>) 사이에 드리워 진 세월의 그림자, 그 그림자에 쌓이는 "무너져 내린 내 시간의 파편 조 각"( <분필 조각>)을 인식하는 데서 오는 부끄러움일 것이다. 거친 호흡 과 생경한 고백체의 내용에다 시인은 '구절초 편지'라는 상당히 함축적 인 제목을 갖다 붙임으로써 시 전체의 균형을 가까스로 잡아낸다. 승화 도가 다소 떨어지는 듯한 이 시를 굳이 표제시로 삼은 것은 부끄러움에 대한 각성으로부터 그의 시를 기초짓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로 읽힌다. 그래서 이 시는 그의 시우(詩友)들에게 근황을 알리는 편지라기보다 시 인 자신에게 보내는 반성의 고백이요, 맑고 고운 영혼의 환생으로 느껴 지는 가을의 구절초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보아야 한다. 꽃들과의 대화 를 언어로 옮겨 주는 자, 바로 시인이 아니고 무엇이랴? 3 그늘이 짙어져서 빛에 대한 기억마저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 때, 그 때 그늘은 절망이 되고 만다. 언어로 쏟아내지 못하는 부끄러움과 그리 움은 결국 시인에게는 절망으로 남는다. 그런 날/ 갓바위에 오르면 / 길섶에 아직도 다 뱉어 내지 못한 언어 가 / 절망 속에 쌓여 있다. ---< 갓바위 오르는 길 > 그러나 때로 그런 날이 있다 한들 그 아득한 절망마저도 결코 시인의 희망을 꺾지는 못한다. "희망은 절망 속에서 싹 튼다고 / 돌아서 부는 바람은 솔가지 타고 내려 오"( <갓바위 오르는 길>)는 줄 시인은 알기 때문이다. 방학 중 보충수업 시간, 문제집 위에 엎드려 조는 학생이 흘린 침 자국 을 '숨어 있는 낮달'이라고 여기고, 졸면서도 수업 시간을 버티어 내는 학생들을 대견스레 여기면서 한층 목소리를 높여서 수업하는 시인의 행 동은 결코 절망에 찌든 교사의 몸짓이 아니다. 시인의 눈이 아니고서야 어찌 수업 시간에 졸다가 흘린 학생의 침 자국을 낮달로 봐 내겠는 가? 그의 시는 그와 같은 시적 변용의 힘을 진솔하고도 어눌한 어투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전 인구의 8%대로 낮아지는 농업 인구, 점차 노령화되어 가는 면 단위 의 농촌, 해마다 학생들은 대처로 전학을 가고, 유령처럼 폐교 이야기 가 떠도는 시골 학교, 그러나 평균 점수가 60점에서 왔다갔다하는 학생 들도 사회에 나가서는 자신의 삶을 당당히 꾸려나갈 것이라는 것을 그 는 믿는다. ( <희망에 대하여1> ) 그 믿음은 스스로 자라나는 생명의 원 리에 대한 이해와 따사로운 햇살 아래 노오란 민들레를 바라보는 것만으 로도 설레는( <희망에 대하여2> ) 그의 가슴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기 에 내일의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시인에게는 분명하다. 그래서 그 는 서시(序詩)격으로 시집의 제일 첫장에 실은 <자화상>에서 그가 지도 하는 한 부진아의 가슴 속에 꽃을 피우는 물이 되고, 햇빛이 되고자 하 는 오롯한 교사의 소망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원고를 메일로 보내온 날, 나는 오후의 수업에 들어가서 <희망에 대하여4> 전문(全文)을 칠판에다 적고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 '나누어 가지는 것은 아름답다. / 각자의 희망을 나누어 가지자. / 그 러면 각자의 희망은 아름다울 것이다.' 그의 시를 나누어 가진 그 날의 내 수업도 과연 희망을 나누어 가진 것 이었을까? 나는 그의 시 원고를 다시 뒤적이면서 낚시꾼이 비늘 고운 고기를 낚 아 올리듯 눈부신 사진 한 장을 건져 올렸다. 스승의 날 오후에 학교 근 처의 강에서 남녀 학생들과 고기를 잡고 찌짐을 붙여 먹는 광경을 학생 들의 대화를 섞어가면서 사실대로 서술한 시인데, ( <스승의 날에> ) 부 끄럼의 고백보다도 그리움의 토로보다도 신념의 확인보다도 나에게는 더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천진과 달관이 함께 어우러진 이런 장면은 많 은 필름을 소비하고서도 몇 컷 얻기가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십오 년 간 몸담아 살았던 소보면, 아직도 그가 근무하는 소보중 학교, 그 곳을 가자면 굽이지면서 유유히 흘러가는 달천을 만나게 된 다. 자연은 품고 사는 사람의 심성도 자기를 닮게 만드는 것일까? '흐르는 물처럼 살고 싶다'는 구절로 시작하는 시, <흐르는 물처럼>을 보면, 까탈스럽고 트집 잘 잡는 그래서 거의 편벽에 가까운 나의 비평 적 인지망(認知網)에는 음률 상의 사소한 불협화음이 감지됨에도 불구하 고, 그의 소망은 '싶다'라는 언표(言表)에 앞서서 그것이 이미 이루어 진 듯한 느낌을 나는 받게 된다. 물의 정령이 그의 시혼에 스며 있기에 이제 그의 시가 어느 만큼 나무 를 키우고 꽃을 피우는가는 오직 시간의 문제일 따름이다. 2003. 5. 15 구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