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생의 과업-자주국방
전 근대적인 요소, 다시 말하면 반봉건적이요 반식민지적인 잔재로부터 해방시키는 근대화작업이 당면과제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빈곤으로부터 국민을 해방시켜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터전을 마련 조국통일이라는 민족적 숙원을 달성하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이라는 저서에서 조국근대화를 신앙으로 한 그의 경륜의 기조를 밝히면서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을 토대로 한 통치이념을 구체화시켰다.
5·16혁명 후 펼쳐온 박대통령의 60년대의 치세가 자립경제를 목표로 한 끈질긴 사명감과 집념을 나타낸 것이라면 70년대는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주국방을 위한 터전 마련에 부심 한 기간이었다.
그는 경제발전의 성과와 이를 바탕으로 한 국방분야에서의 일관된 집념으로 국력안보체제 를 구축하고 국가의 안위를 위해 사심 없이 노력했다는 점에서 부국강국의 지도자로 재평가 되고 있다.
병기생산은 엄두조차 못 내고 수입에만 의존하던 시대에 한국군 현대화를 부르짖고, 방위 세를 신설하고 향토예비군과 민방위대를 창설 전력증강을 도모했고, 병기개발위윈회를 조직 하녀 국산무기개발위윈회를 조직하여 국산무기개발을 위한 방위산업의 기초를 닦는 등 실로 박대통령 재임기간 중위 자주국방에 대한 집념은 오늘의 막강한 국군의 군사력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미국의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갈팡질팡한 미군철수문제로 고심하던 박대통령은 미국 군사 정책의 분기점이 된 닉슨 독트린 선언 이후 78년 한·미 연합사령부체재를 구축함으로 한국 군과 주한미군의 작전지휘를 두나라간의 긴밀한 협력하에 통합 운영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를 마련, 한국의 자주적인 입장을 강화시키고 작전통제권의 한국군으로의 이양을 위한 기반 을 조성하기도 했다.
자주국방에 대한 박대통령의 집념과 의지는 연두교서와 국군의 날 치사 등에서도 중심개념 으로 자주 등장하지만 그 자신의 일기 속에서도 상당한 부분이 자주국방에 대해 할애되고 있음을 보게된다.
자주국방태세 확립을 위한 기술의 요람인 국방과학연구소는 72년말 발족하여 국내외 과학 자와 기술진을 동원하여 일진월보,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경이적 발전을 하였다. 1·21 사건 직후 국산무기 개발을 촉진해야 한다는 절실한 요구에 따라 국산 소화기 (칼 빈,M.소총 등)를 하부 민간업체에서 제작 시험해본 당시의 상황에 비하여 참으로 격세지감 을 금치 못한다. 금일 보고에 가면 현 계획이 예정대로만 추진된다면 78년(약 3년 10개월 뒤) 최신형 전투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이 국산화될 수 있을 것으로 확신을 얻었다. 약 5백Km를 비행할 유도탄, 전차, 장갑차, 각종 화포, 통신장비, 각종 포탄 등이 우리의 기 술로써 생산이 되고, 우리의 군인들에게 보급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뿌듯하기만 하다.
이 기간에 헬리콥터가 국내 생산될 것이고, F-16이라는 최신형 전투기가 우리나라에서 조 립생산 될 것이며, 79년 이후에는 점차 국산화가 시도될 전망이다.(76년 3월 8일 박대통령 일기에서)
박대통령의 자주국방 의지는 핵무기개발 집념으로 절정을 이루었는데 70년대 후반 한·미 관계를 최악의 위기상태로 몰고 간 것은 서로 드러내 놓고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자주국방 에 관한 박정희 대통령의 집념에 의한 독자적인 핵무기개발화로 요약된다. 박대통령 시절 전국 방방곡곡에 게시돼 있던 자주국방이라는 슬로건이 10·26이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박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미군철수와 호전적인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라는 위기상황에서 국 가의 안위와 생존을 위해 국가안보를 정책의 최상위 목표로 설정하고 이에 따라 자주국방을 국방정책의 기본방향으로 설정, 노심초사하였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교차하는 전략적 요충으로서 그 지정학적 중 요성 때문에 항상 외세에 시달려 왔고, 현실적으로는 미·소·중·일 4대 강국의 이해가 엇 갈리는 곳이다. 북한의 막대한 군사력 증강으로 군사적 상호대립이 국제적 긴장을 불러일으 키는 매우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주변 정세속에 처해 있다. 이같은 국내외 환경에서 자립은 국가생존전략으로서 자주국방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박대통령의 안보관과 자주 국방 의지
박대통령 집권 후 60년대 전반기는 남·북간에 서로 긴장을 유지하는 가운데 월남파병문제가 국방문제와 관련되어 심각한 정치적 현안이었다. 월남파병은 또 단순한 국내차원의 문제가 아니고 국제적으로 얽혀 있는 사안이었고, 특히 한·미간에 심대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60년대 초에 클로즈업된 한국군의 월남파병문제는 겉으로는 월남정부가 한국을 상대로 파 병을 요청하고 이를 근거로 두 나라가 교섭하는 형태를 취했지만 월남파병의 실질적 상대는 미국이었다.
주한미군의 철수문제와도 밀접하게 관련된 월남파병문제는 그 뒤 잇따른 국군의 현대화계획과 무기생산문제 등과도 맞물려 있었다.
한국군의 월남파병은 65년 10월에 시작, 73년 3월까지 계속되었다. 67년부터 72년의 기간에 약 5만 명의 부대가 주둔하면서 한국군은 월남전 수행과정에서 1천 1백 70건에 이르는 작전을 수행하고, 4만 1천명의 적을 소탕하고, 베트남 동해안의 7천 4백 38개의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러한 숫자로 미루어 한국군의 월남파병은 미국의 베트남전쟁 수행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었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실제 한·미 동맹의 강화는 참전의 5개년간(61년~65년)에 대한군사원조 총액이 8억 1천5백 만 달러로 증가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군사적 의미 외에도 한국군이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해외 파병한 사실의 역사 적 의미 또한 크다고 보겠다.
박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 야심적으로 전개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기간(67년 ~71년) 동안 한국은 대외원조를 통하여 급속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기간(67년~71년) 동안 한 국은 대외원조를 통하여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다. 청구전 및 경제협력협정에 의해 일본으로부터 유입한 자금은 71년 말까지 무상원조 1억 7천 2백만달러, 유상원조 1억 4백 29만달러, 민간 신용대여 5억 5천 1백만 달러에 이르고 있다.
이미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기간에 성장하기 시작한 한국경제의 자입도입과 월남특수 가 기여한 바 컸다. 이같은 월남파병과 경제 성장에 힘입어 한국은 하면 된다 는 자신감으 로 충만, 경제적 자립의 기틀을 다지고 있었다. 그러나 69년 미국 존슨 대통령의 사임과 신 임 닉슨 대통령의 등장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에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닉슨의 등장은 미국의 대 아시아 정책의 전면적 수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핵무기, 미사일, 탱크 개발과 방위산업
한국의 핵무기개발은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포함하는 미국의 대한정책의 변화에 대한 박대통령의 마지막 카드였다. 69년 7월 닉슨이 닉슨 독트린을 선언하고 71년 주한 미7사단 병력을 휴전선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빼냈을 때 한국정부는 좋든 싫든 자주국방문제를 심각하게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6·25동란이후 미국의 핵우산 그늘 아래서 무사태평으로 안주해 온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1·21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 등을 경험하며 박대통령은 미국이 전통적인 고립주의로 후퇴 해 가는 흐름을 주시하고 있었고 닉슨, 애그뉴 등 미국정부지도자들과의 회담을 통해 이를 확인했다. 특히 60년대와 70년대 두 차례에 걸쳐 추진되었던 '한국군현대화계획'에 대한 마 국의 지원이 얼마나 소극적이었던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박대통령은 부국강병이란 자 신의 집념을 자주국방과 조국근대화로 타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던 것이다.
미국의 약속이나 한국정부에 대한 태도에 대해 신뢰보다는 불안과 의혹을 느끼고 있던 박 대통령에게 이틀 간격을 두고 발생한 68년의 북한 무장특공대 청와대 습격기도사건과 정보 함 '푸에블로호 피납사건'의 처리를 둘러싼 미국의 태도는 이런 확신을 심화시켰다.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해서는 74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 김일성의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지만, 사건당시 박대통령은 몹시 분개하여 북진보복을 생각할 정도였다. 박대 통령은 사건이 발생하던 날 밤 늦게 당시의 주한 미대사 포터를 불러 미국의 즉각적인 보복 책을 강경하게 요구했었다고 전한다. 또한 박대통령은 미국이 북한의 도발에 효과적으로 대 응 안하고 질질 끌려가다가는 계속해서 한국과 미국은 북한에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 다.
미국은 박대통령의 기대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응하는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박대통령의 단독보복책을 경계하고 나섰다. 당시 미국은 월남전의 수렁에 빠져 있어서 북한에 대한 보복조처를 감행함으로써 발생할지도 모를 또 하 나의 군사위기를 한반도에서 겪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정부 당국이 미국의 미온적인 대북 정책을 여러 채널을 통해 항의하자 사이런스 밴스 특사를 '한·미간의 공동방위문제 및 이견을 조정하기 위해' 급파, 박대통령에게 1억 달러의 추가군사원조와 M16공장은 한국 측이 1년에 걸쳐 집요하게 요구했으나 미국은 시간만 끌 뿐 좀처럼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같은 미국의 태도변화는 한국이 당시 월남에 파병한 5만 명 규모의 병력을 철수시키겠다 는 시사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그러나 한국정부의 항의와 불만에 대한 미국의 태도변화는 형식적 제스처에 불과했다.
독자적 자위권행사도 불사하겠다는 한국측에 대해 작전지휘권을 쥐고 있는 주한유엔군사령 관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한국군의 단독 행동을 막기 위해 유류공급을 중단하는 등 사전 견제조치를 취하기까지 했다.
닉슨의 괌 독트린과 7사단 철수에서 비롯된 미국의 탈 아시아정책은 박대통령에게 국가안 보에 관한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게 했다.
주한미군이 완전 철수하고 사실상 미국이 한반도를 포기한 상태에서 북한이 소련이나 중공 혹은 소·중공 공동지원 아래 남침을 감행할 때 한국의 살길은 자주국방뿐이었던 것이다. 이런 극한상황을 고려할 때 한국이 전쟁을 막는 안전보장을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써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억제효과를 갖는 길은 오직 하나 핵무기 소유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고 당 시의 측근들은 말하고 있었다.
한국의 핵무기개발은 미군철수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박대통령의 핵무기개발 구상 도 미군철수에 따른 대응 토치 자주국방 의욕에서 싹텄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도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 유신정권과 미국의 역할을 다룬 미하 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위원장 도날드 M.프레이저 일명 프레이저위원회)는 60 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한국정부는 상황이 요구하는 데 따라 미국정부와 결속하거나 독자적 으로 방위산업의 영역을 광범위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분투하였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주한 미군철수선언이 있던 시기인 70년 말에 두 개의 방위기구를 설립했다. 국방과학연구소 (ADD)와 병기개발위원회(WDC)가 바로 그것이다.
ADD는 공개적으로 군사연구와 무기개발, 무기체제, 장비, 한국의 군사물자의 개발을 실행 하고 방위산업의 영역의 기술개발을 지원했다. WDC는 군수조달과 생산에 대해 청와대와 직접 연결된 비밀 특별위원회였다.
미국의회는 74년 12월 미군철수에 따라 지원하기로 한 군사원조에 제동을 걸었다. 75년 미 의회는 한국에 대한 미행정부의 2억 3천 8백만 달러 군사원조 요구를 1억 4천5백만 달러로 삭감하였다.
미 7사단 철수의 대가라는 무상원조로 진행된 이 한국군장비현대화계획은 71년을 기점으로 실시되었으나 결국 2년이나 지체되었고, 소요비율도 당초 약속과 달리 총액의 3분의 1 이상 을 한국측이 부담해야 했다. 이런 한국측에 불안감을 더욱 고조시킨 월남패망 소식이 전해 진 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75년 봄이었다.
이처럼 동북아의 유동적인 국제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박대통령이 암중모색하던 자주국방 의 길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효과를 거둘 수 있는 핵무기개발로 귀결되었던 것 같다. 박대통령은 미군철수와 미국의 닉슨 독트린 이후 신고립주의의 상황하에서 민족의 독자적 인 생존권을 위하여 자주국방을 시대적 슬로건으로 핵개발을 포함한 급격한 군비경쟁을 가 속화시켰던 것이다.
이같은 과정에서 핵무기개발은 전쟁의 억제와 위기상황에서의 안정을 도출할 수 있는 '공 포의 균형'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박대통령이 채택한 국가안보전략이었던 것 같다.
박대통령은 70년대 들어 핵개발을 위한 인력확보를 위해 미국에 있던 한국인 핵물리학자의 국내유치를 추진하는 한편, 프랑스·벨기에·캐나다를 상대로 핵연료 재처리시설과 관련기 술의 도입을 은밀히 타진했었다. 극비리에 추진한 핵개발계획은 미국에는 일체 알리지 않은 채 진행됐으며, 74년 말까지 프랑스로부터의 핵무기제조와 관련이 있는 핵연료 재처리시설 도입이 거의 실현단계에 이르렀다.
박대통령은 이처럼 은밀히 핵개발을 위한 준비작업을 추진하면서 75년 들어 이런 구상을 공공연히 선언, 세계언론의 주목을 이르렀다.
75년 6월 12일자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에반즈 씨와 노바크 씨의 공동칼럼은 '만일 미국이 그들의 핵우산을 걷어 가면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할 것'이란 박대통령의 말을 인용 보도했 다. 이 칼럼은 박대통령이 "한국이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은 보유하고 있으나 지금은 핵무기 를 개발하지 않고 있으며 핵확산 금지조약(NPT)을 준수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 다. 당시 노바크 씨는 서울을 방문, 박대통령과 청와대에서 2시간 동안 인터뷰를 했었다. 박대통령은 그해 6월 26일 『워싱턴 포스트』지와의 회견에서도 "만약 미국의 핵우산 보호 를 받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핵무기의 개발을 포함한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고 밝혔다.
다음날 한국의 『코리아 타임즈』지는 박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던 최형섭 과학기 술처장관의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적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말을 인용 보 도했다. 박대통령 곁에서 방위산업을 총괄했던 한 측근은 "핵무기개발을 둘러싸고 미국과 결정적으로 불편한 관계로 접어들었다. 박대통령이 국가보위에 노심초사하여 핵개발을 통한 안전보장을 구상하고 완벽한 자주국방체제를 갖추기 위한 전술핵개발의 집념을 불태우게 된 것은 단시 상황으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대통령의 야심적인 핵무기개발계획은 박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 완전히 좌절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