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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로당 제주도당 인민유격대(폭도)인물 사진으로 이들은 보병 제2연대(연대장 함병선) 국군장병에 의해 한라산에서 붙잡힌 포로들이다.
**사진소개 : 뒤에 서 있는 군인들은 2연대(연대장 함병선)군인들이고 앞에 사람들은 남로당 제주도지부 무장유격대 '폭도'들이다. 중앙당 서울에서 파견온 3지구책 이두옥, 전라남도파견지도원 이창희 즉 조직지도책(올구) 명단이 이채롭다. -제2연대 앨범에서 발췌-
** 4.3사건은 UN의 결의에 의해 UN 감사하에 제헌 국회의원을 선거하기 위한 5.10총선거를 실시하려는데 이를 거부하여 1948년 4월 3일에 남조선노동당 제주도위원회(남로당제주도당)에서 일으켜 진압과정에서 선량한 제주도민 다수가 무고하게 희생된 사건이다. 우리마을 귀덕리에도 4.3은 어떻하였는가 살펴보자.
“억울한 총살” 친척에게 혼붙어 호소(歸德里)
제민일보 98.09.18 제426회
歸德里(귀덕리)
북제주군 한림면 북쪽 끝에 위치한 귀덕리는 한림리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마을인데다 땅도 넓어 1∼4구로 나뉘었다. 이중 귀덕2구는 남쪽 바닷가에 외따로 떨어져 있었고, 1·3·4구는 바닷가부터 중산간까지 쭉 이어가며 형성됐다.
귀덕리도 여느 마을들처럼 1948년 11월 중순부터 시작된 초토화작전 때 가장 큰 희생을 당했으나, 굳이 이런 시기구분을 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주민들은 4·3발발 초기부터 내내 곤욕을 치렀다.
첫 희생의 계기는 '5·10선거 보이콧'이었다. 선거 날 중산간 마을인 3·4구는 물론, 해변마을 1·2구의 주민들까지 대거 산으로 오르는 바람에 마을에서 '유권자'를 찾기란 어려웠다. 주민들은 산에서 온 사람들의 인솔로 상대리 지경 속칭 '달개기'까지 올라갔다가 선거가 끝난 후에야 돌아왔다.
1948년 5월 11일 토벌대는 선거가 치러지지 못한 귀덕리를 포위, 마을 입구에서부터 기관총을 난사했다. 대부분의 청년들은 부리나케 도망쳤지만 4명이 붙잡혀 속칭 '소주외궤'에서 총살됐다. 이때 현주순(玄周順, 37) 김원석(金元錫, 31) 조상옥(趙祥玉, 27)이 숨지고 10대 소년 한 명은 구사일생해 육지로 피신했다.
토벌대는 이후에도 수시로 마을을 덮쳤고 주민들의 하루 일과는 숨을 곳을 찾아 도망치는 데서부터 시작됐다. 1948년 12월 초 '제주경찰 10기생'이 된 김재진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조상옥 씨가 '소주에궤'에서 죽던 날, 나는 밭으로 뛰어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서청에게 붙잡혔어요. 그날 서청이 마을을 포위하며 총질을 해대자 다른 청년들은 급히 도망쳤는데 나는 머뭇거리다 붙잡혔습니다. 귀덕국민학교로 끌려가 보니 청년은 나 혼자이고 모두 노인과 여자들뿐이었습니다. 그때 마을의 청년단장인 조(趙) 아무개와 구장 김 아무개 등이 서청과 한곳에 모여 수군대고 있더군요. 날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를 놓고 논의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땐 그냥 돌려보내 줬으나 날 쳐다보는 서청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어요. 돌아오자마자 아내에게 말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서청이 우리 집을 향해 오고 있더군요. 다른 길로 빠져 급히 제주읍내로 도망쳤습니다. 후에 제주읍내로 찾아온 청년단장 조아무개의 권유로 경찰 시험을 보았습니다.
마을 청년들이 모두 도망 다닐 때 서청과 어울리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1948년 6월경 육지로 피신했다는 귀덕1구의 김종수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해방 직후 열기는 내 일생 중 가장 뜨거웠던 시절이었습니다. 곧 마을의 지도자가 나타났고 이들에 대한 주민들의 신망은 두터웠습니다. 이들의 지도로 신탁통치 관련 데모를 했지요. 난 어리고 배우지 못해 신탁통치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지도자가 옳다고 하니 따랐습니다. 5·10선거 반대도 마찬가집니다. 강제로 산에 간 것이 아니고 주민 모두가 자연스레 따른 겁니다. 그런데 청년단장 조 아무개, 구장 김 아무개 등 5∼6명은 전체 대중과는 달리 서청과 경찰 편에 섰습니다. 그들 중에는 일제 때 경찰이었던 사람도 있었지요. 그들은 소수였지만 토벌이 강화되면서 막강한 힘을 갖게 됐지요. 그들의 지목으로 청년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숙부 집에 숨어 있던 중 들킬 뻔했는데 여동생의 기지로 위기를 모면했지요. 그러나 그날 김윤호 씨(20대 중반)는 붙잡혀 대낮에 신작로에서 총살당했습니다. 이러니 경찰 편에 섰던 몇 명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마을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독자인데다 7살 때 아버지를 여읜 나는 어머니만 두고 떠날 형편이 못됐으나, 어머니는 얼른 피하라고 내 등을 떠밀었지요. 내가 피한 탓에 어머니는 고문을 받아 팔이 부러졌습니다. 아무튼 청년들은 산으로 가거나, 나처럼 육지로 피신하거나, 아니면 계속 꼭꼭 숨어 있어야 했습니다. 5촌 김지석(金知錫)은 마루 밑에 오랫동안 숨어살다가 거기서 병들어 죽었어요. 그의 가족들이 시신을 뒷마당에 가매장하려다 토벌대에게 들켰는데 산에 오르지 않고 숨어 산 것이 확인돼 무사하긴 했습니다.
특별히 주목받지 않은 청년들이 기회를 보며 하나 둘씩 밖으로 나왔을 때 세상은 크게 변해 있었다. 청년들은 우익청년단장 조 아무개의 명령에 복종하며 꼼짝없이 지냈지만 말 한마디에 목숨이 좌우될 정도로 험악한 상황이었다.
귀덕2구는 바닷가에 외따로 위치한 덕분에 '무장대와 연계할 가능성이 적다' 하여 비교적 무사했으나, 귀덕1구는 같은 해변마을이면서도 중산간마을까지 쭉 집들이 이어져 있는 탓에 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중산간마을에 속하는 귀덕3·4구는 집중적인 토벌 대상 지역이 됐다.
1948년 10월 말경 토벌대가 귀덕4구에 들이닥치자 청년들은 이리저리 도망쳤으나 밭에서 조 수확 작업을 하던 장순백(張淳伯, 22)이 붙잡혀 총살됐다. 1948년 5월경 해변마을인 귀덕1·2구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중산간마을로까지 확대된 것이었다.
토벌대는 그동안 중산간마을을 몇 차례 덮쳤으나 주민들이 가까운 산간으로 급히 피하는 바람에 번번이 허탕을 쳤다. 토벌대는 또한 무장대가 중산간마을을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해 섣불리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1948년 11월을 전후해 중산간에 대한 강경토벌 작전이 벌어진 것이었다. 11월 9일에는 한림국교로 끌려갔던 양기봉(梁琪奉, 32)이 총살됐다. 양기봉의 아내는 "밤에 잠자던 중 갑자기 토벌대가 들이닥쳐 미처 피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편 무장대는 수시로 귀덕4구에 나타나 식량을 가져갔고, 또는 일부 청년들을 이끌고 산으로 올랐다. 이런 일들은 토벌대를 더욱 자극시켰다. 11월 16일에는 귀덕리 출신으로 한림중학교 학생이던 김계준(金桂俊, 17)이 교정에서 군인들에게 총살됐다. 중산간에 대한 초토화작전이 막 벌어지던 시점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초토화작전 때 토벌대는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에 소개령을 내렸고, 모든 가옥을 불태웠다. 그러나 귀덕리는 소개 대상 지역에서 제외됐다. 토벌대가 무장대를 막기 위한 장성(長城)을 귀덕리 위쪽에 쌓기로 결정한 덕분이었다. 중산간마을인 귀덕4구 주민 중 사태를 피해 자발적으로 해변마을로 내려간 사람들도 일부 있었으나 토벌대에 의해 강제로 소개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귀덕4구는 비록 소개와 방화를 면했으나, 장성이 마을 바로 위쪽을 지남에 따라 늘 위험에 처하게 됐다. 주민들은 "귀덕4구는 소개를 안해 '최일선 전방'이 됐다."고 표현했다. 주민들은 토벌대의 명령에 따라 남녀노소 모두 동원돼 장성을 쌓았고, 마을 보초를 섰다. 그러나 토벌대는 중산간마을인 귀덕4구에 대해 늘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산쪽과 가까운 탓에 무장대에게 협조할지도 모른다는 의혹 때문이었다.
1948년 12월에 접어들자 전전긍긍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주민들에게 본격적으로 위험이 닥쳤다. 무장대가 해변마을을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이에 대한 보복이 벌어진 것이다. 12월 5일 토벌대는 귀덕4구 주민들을 향사에 집결시켜 청년들을 끌어내 한림국교로 끌고갔다가 12월 9일 총살했다. 이때 이창봉(李昌奉, 26) 강정송(姜丁松, 25) 강창오(姜昌五, 25) 김일수(金一洙, 25) 강천부(姜千富, 17) 등이 희생됐다. 이에 앞서 12월 7일에는 김백근(金百斤, 38)이 총살됐다. 귀덕4구 주민들에 대한 학살극은 연일 이어졌다. 12월 11일에는 양재수(梁才洙, 37) 고덕봉(高德奉, 23)이 한림국교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12월 14일에는 귀덕1구 주민인 김재평(金才平, 33, 이명 金才方)이 역시 서북청년단 특별중대가 주둔해 있던 한림국교로 끌려갔다가 다시 귀덕1구에 소재한 절간고구마 창고로 끌려가 금악리 주민 등과 함께 총살당했다. 12월 18일에는 김여옥(金汝玉, 29) 이연보(李年寶, 22) 이원석(李原錫, 22) 등이 한림리에서 총살당했다.
한편 귀덕리 출신으로 한림우편국장에 재직 중이던 홍성도(洪性道), 대정국교 교장이던 홍완표(洪完杓) 등 마을의 인재들도 과거 전력에 꼬투리를 잡혀 각각 부임지에서 총살당했다. 그런데 이들의 '과거 전력'이란 것은 결코 총살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홍성도는 1947년 3월 3·1절 시위 때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주민 6명이 총살당한데 대한 항의로 전도적으로 벌어진 총파업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내내 곤욕을 치르다 1948년 12월 23일 한림리에서 벌어진 집단학살 때 희생당했다.
홍완표는 해방 후 인민위원회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역시 곤욕을 치르다 한국전쟁 직후 벌어진 예비검속에 걸려 희생당했다. 한 증언자는 "해방 후 결성된 인민위원회에는 유지들이 마을 대표로 자연스레 추대됐고, 인민위원장 선거 때는 한림지서 순경들이 입회할 정도였다."면서 "그러나 사태가 악화되자 학살극의 빌미가 됐다"고 말했다.
귀덕국교에 군인들이 주둔하면서부터 타지에서 끌려온 사람들에 대한 총살극도 빈번하게 벌어졌다. 그때마다 군인들은 주민들에게 총살시킬 사람들을 묻을 구덩이를 파도록 시키기도 했다. 한 증언자는 "총살극 직후 군인들과 우연히 맞닥뜨렸는데, 그들의 눈빛이 유난히 붉어서 섬뜩했다."고 말했다.
1949년 초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될 무렵 토벌대는 지서가 없는 지역에 경찰관출장소를 세워 마무리 토벌에 나섰는데, 귀덕1구에는 현재 우체국이 있는 자리에 세워졌다. 출장소의 주임과 차석 등은 대부분 이북 출신들이었다. 주민들은 이들의 뒷바라지에 곤욕을 치렀을 뿐만 아니라, 특히 걸핏하면 야수로 돌변한 경찰들이 여성들을 겁탈하려 드는 바람에 늘 전전긍긍했다. 출장소 주임 태(太) 아무개는 과거 인민위원회에 가담했다 하여 총살당한 이 아무개의 딸을 협박해 강제 결혼하기도 했다. 당시 19살이던 이 아무개의 딸은 귀덕리에서 소문난 미인이었다.
태 아무개 주임은 경찰관출장소 앞에 탑을 세우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증언에 따르면, 탑은 마치 방사탑처럼 쌓았는데 둥근 모양이 아니라 사각뿔 형태였다고 한다. 밑부분 한 면이 약 5미터, 높이 약 10여 미터의 이 거대한 탑을 쌓느라 주민들은 남녀노소 노역에 동원됐다. 한 주민은 "사태가 끝나자 주민들이 이 탑을 해체시켰는데, 역사의 유물로서 보존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무장대의 습격을 감시하는 망루로서 탑을 쌓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주민들은 이미 사태가 거의 마무리된 시점에 탑을 쌓은 점, 그리고 출장소 주임의 성씨를 따서 탑에다 태평정(太平亭)이란 비석을 붙인 점 등을 들어 출장소 주임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해석했다.
사태가 끝나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슬픔은 쉽게 가시지 않았지만 한을 풀 길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주민들 사이에서는 학살자를 원망하면서 쓰린 가슴을 달래줄 말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쁜 짓 한 놈들치고 제명에 죽는 놈 못 보았다'는 말이 그 중 대표적이다. '나쁜 짓을 했다가 요절한 사람'들이 전체 '대상자' 중 어느 정도의 비율을 차지하는 지는 알 길 없지만, 노인들은 마치 모두가 그런 것인양 이야기했고 이런 말들은 당시를 겪지 않았던 후세에까지 대를 이어가며 회자되고 있었다. 서청과 경찰을 앞세워 주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조 아무개에 대해 한 증언자는 "그가 죽을 무렵, 어디선가 뱀들이 많이 나타나 그의 주변을 둘러쌓았다"고 말했다.
앞서 언급한 1948년 5월 11일 사건 때 희생된 김원석의 모친도 우익청년단장 조 아무개를 자기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 놓은 범인으로 지목했다. 김원석의 모친은 후에 아들의 피묻은 옷을 조 아무개의 지붕에 던지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는 김원석의 혼이 그의 6촌에게 달라붙었다. 이런 빙의(憑依) 현상을 도민들은 예로부터 '죽사니들렸다'고 한다. 주민 이인호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김원석 씨의 혼이 그의 6촌에게 죽사니들렸어요. 그는 6촌의 입을 빌어 똑같은 목소리로 '나는 소 물 먹이러 나갔던 것뿐인데, 조아무개가 서청과 함께 나를 끌고 가 총살했다. 그때 같은 패거리 중 한 명은 죽일 필요까지 있느냐며 만류했지만 조 아무개가 우기는 바람에 총살당했다. 난 억울하다'고 했습니다. 그 때 같이 끌려갔다가 구사일생한 사람에게서 나중에 들어보니 이 상황이 너무도 똑같더군요. 죽사니들렸을 때 너무 말을 많이 하면 몸이 상합니다. 그러나 그의 6촌의 가족들은 모자를 '만나게' 해주기 위해 김원석씨의 모친에게 달려와 이 사실을 알렸지요. 그 모친은 아들과 말 한마디 해 보기 위해 부랴부랴 달려갔지만 안타깝게도 혼이 거의 빠져나갈 무렵이어서 몇 마디 나누지 못했습니다.
제민일보 98.09.18 제426회에서 인용.
4.3자료집 신문 (1955)
∎ 제주신보 1955년 11월 22일
월동에 허덕이는 잔비 / 귀덕리에 4명이 출현 / 식량 2두를 탈취코 도주 / 19일 새벽
【한림】무장 2명, 비무장 2명의 잔비가 지난 19일 상오 2시경 한림면 귀덕리 4구 한교동(속칭) 고정생(高丁生․여․당 67년․농업)씨 댁에 침입, 양곡 2두를 탈취 도주하였다.
본사 한림지국 급보에 의하면 이들 4명의 잔비는 처음 국방색 복장에 전투모를 쓴 약 27세 가량의 청년이 혼자 사는 고(高) 노파의 침실에 들어와 촛불을 켜면서 누가 자기를 쫓아오니 숨겨달라고 하자 이어 또 3명이 침입하여 1명은 문에 입초 서고 3명이 고 노파에게 가정상황을 들어본 후 우리는 산에서 왔는데 식량이 없어 곤란하다고 하면서 고방(庫房)에 들어가 식량 2두를 (2줄 누락) 탈취하자 고 노파가 식량을 남겨달라고 하였으나 40세 가량의 잔비는 치마끈으로 노파의 목을 잘라매고 1명은 총을 가슴에 대고 “꼼짝하면 죽인다”고 하면서 양곡을 탈취한 후 (7줄 누락) 고 노파에게 “밖으로 나오면 죽인다”고 협박하고 도주하였다. 고 노파는 도주 즉시 별거하는 손자 집에 뛰어가서 알리자 손자는 한림지서 귀덕파출소에 연락하였다. 접보한 파출소에서는 즉시 한림지서에 연락, 전직원이 현지에 출동하고 이들을 추격하였다. 한편 한림지서 주임, 신선대장(神選隊長), 모슬포서장 등이 현지조사에 착수하였다. [4.3자료집 신문 (1955)에서 발췌]